'원자력특구' 유성, 안전조례 발의

원자력시설 밀집됐지만 안전 대책 거의 없어

대전 유성구 주민들이 원자력안전 감시기구 설치를 위한 조례제정을 청구해 심의 절차가 진행 중이다.

대전 유성민간원자력환경안전감시기구 조례제정청구운동본부는 지난 7월 조례안과 제정청구인 명부를 유성구청에 제출했으며, 유성구청은 조례규칙심의위원회를 구성해 오는 8월 6일 심의를 거쳐 조례안 수리 여부를 결정할 예정이다. 수리되면 유성구의회로 넘어간다.

천주교 대전교구 정의평화위원회를 비롯한 대전지역 시민사회 단체, 정당, 유성구 주민 모임 등 25개가 참여한 조례제정운동은 2014년 8월부터 시작됐으며, 지난 7월 9일 9219명이 서명한 청구인명부를 제출했다. 이는 청구인 법적 기준 인원인 6183명(지역유권자 1/40)을 훨씬 넘어선 숫자다.

  유성 봉산동 성당에서 진행된 조례안 발의 서명. [출처: 원자력안전조례제정운동본부]

왜 대전 유성구인가?

대전 유성구는 이른바 '원자력 특구'나 마찬가지다. 유성구 상징에 원자궤도와 핵 조형을 사용할 정도로 원자력은 유성의 자부심이었으며, 원자력산업 관련 인구도 상당하다.

한국원자력안전기술원, 한국원자력연구원, 한전원자력연료, 방사성폐기물을 관리하는 한국원자력환경공단, 한국원자력통제기술원 등 관련 시설이 몰려 있는데다, 전국에서 두 번째로 많은 방사성 핵폐기물을 보관하고 있다. 유성구는 지난 1985년부터 핵폐기물을 보관하고 있으며, 현재 보관량은 중, 저준위 핵폐기물 3만 98드럼이다.

대전의 방사성 폐기물은 경주 방폐장으로 옮겨질 예정이었지만, 경주 방폐장 건설 문제가 해결되지 않고 있는데다, 1드럼 운반비가 1400만 원인 것을 감안하면 현재 보관중인 폐기물을 이송하는 데만, 약 4200억 원이 들어 빠른 시일에 해결하기 어려울 전망이다.

사고 위험도 있다. 한국원자력연구원에 있는 ‘하나로’ 원자로 관련 사고만 2000년 이후 10여 건으로 2011년에는 방사능 누출로 1급 경보인 ‘백색경보’가 발령된 바 있으며, 올해 3월에는 ‘하나로’ 건물 벽체가 내진 기준인 리히터 규모 6.5를 견디지 못한다는 사실이 20여 년 만에 밝혀졌다.

그런데 유성구는 원자력 시설 고밀도 지역임에도 불구하고 비상시 대책이나 감시 활동이 거의 없다. 지자체 차원에서 방사능 측정 등을 하고 있지만, 지자체조차 원자력 관계 기관으로부터 정확한 정보를 받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또 한국원자력연구원에서 900미터 거리 안에는 3개의 초등학교를 비롯해 7개의 초중고교와 대규모 아파트 단지가 있고, 방사성 폐기물 보관지역 3킬로미터 안에도 초등학교와 주거 지역이 있지만, 비상시 연락망 구축, 주민 대피 매뉴얼은 제대로 갖춰져 있지 않다.

실제로 주민들이 2011년 백색경보와 같은 상황이 벌어질 경우 인근 초등학교 학생들의 대피 요령이나 요오드 비치 상황에 대해 대전시 재난대책 책임자에게 질의했지만, “갖춰져 있지 않다”고 답하기도 했다.

주민 안전에 무관심한 중앙 정부, 무책임한 지자체
“국가 법에 의해 안전을 보장받을 수 없다는 사실이 답답하다”


현재 원자력 관련 안전대책과 지원은 핵발전소가 들어선 지역에만 해당된다. 원자력안전법에 따른 지원이지만, 현재 법상으로는 대전 유성구와 같이 원자력 관련 시설 지역에 대한 지원 근거는 없다. 주민들이 원자력안전조례 제정을 청구하게 된 까닭이다.

유성민간원자력안전조례제정운동본부 최우림 대표(안나)는 “방사능 측정을 지자체에서 하고 있지만 형식적인데다, 해당 기관에서 지자체에조차 제대로 된 정보를 공개하지 않고 있다”며, 민간 감시 기구의 필요성을 설명했다. 그는 “정부는 지역 주민 안전 책임을 지자체에 미루고, 지자체는 상당히 부담스러워하는 상황”이라면서, 유성구는 조례와 상위법이 상충될 우려가 있다며, 안전대책과 예산편성을 위한 상위법 제정이 필요하다면 주민들이 나서 요청하라는 실정이라고 지적했다.

주민들이 청원한 조례안은 유성 지역 원자력 시설 주변에 대한 방사능 측정과 사고 감시, 평가 그리고 정보 공개를 통한 측정자료 검토 등을 담고 있다. 하지만 조례에 포함되지 않은 방재, 재난대책과 이에 따른 예산 등은 지자체가 마련해야 한다. 현재 있는 재난대책은 소방대책 수준에 머물러 있다.

최우림 대표는 “이것은 국민 안전의 문제다. 안전을 보장해 달라고 하는데 정부는 법적 근거가 없다고 한다. 국가법에 의해 안전을 보장받을 길이 없다는 것이 정말 답답하다”면서, “지자체조차 주민들에게 공을 넘기고 있는 상황에서 해결할 수 있는 것은 결국 시민이다. 조례가 통과되어도 어떻게 실효성 있게 운영할 것인가를 고민하는 과제가 남았다”고 말했다.

그는 이번 조례 발의가 중앙 정부나 의회가 아니라 주민들이 스스로 필요에 의해 인식하고 권리를 주장하는 시민참여를 이끌어냈고 그 자체로 고무적인 일이라면서, “중앙정부의 의지와 성향에 따라 정책이 좌우되는 상황에서 시민참여밖에 방법이 없다. 더 다양한 방법으로 시민참여를 이끌어 내야 한다”고 말했다.

  조례제정청구운동본부는 지난 7월 9일 조례안과 제정청구인명부를 유성구청에 제출했다. [출처: 원자력안전조례제정운동본부]

조례안 발의 서명에 대전교구 정평위, 지역 본당 참여
이상욱 신부, "신자들 역시 지역 주민으로서 주인의식과 책임감 가질 필요"


이번 조례발의운동에는 대전교구 정의평화위원회가 참여했으며, 유성지역 10개 본당 중 8개 본당이 발의에 참여했다.

정평위 정춘교 사무국장은 “우선은 주민 안전이 먼저였지만, 크게 보면 교회 탈핵운동의 맥락에서 동참하게 된 것”이라면서, “조례 제정이 수용여부가 어떻게 나든 끝까지 함께 할 것이며, 주민들의 의지를 따라갈 것”이라고 말했다.

유성구 원신흥동 성당 이상욱 신부는 조례 발의 서명에 신자들과 참여한 이유에 대해, “같은 지역 주민으로서 지역의 안전을 위한 활동에 주인의식과 책임감을 가질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며, “신앙인으로서도 성당이나 교회 안에만 머무는 것이 아니라, 지역사회와 함께 살아가야 하는 만큼, 다른 지역 현안에 대해서도 적극적이고 분명하게 행동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이 신부는 “신앙은 삶 전체를 복음화하는 것이고, 복음화는 정의롭고 평등한 세상을 만드는 것”이라면서, “그런 면에서 신자들이 지역, 사회의 문제를 자신의 일로 생각하고 참여해야 한다. 결과적으로 세상의 모든 일이 내 일이 되기 때문”이라고 강조했다.

이상욱 신부는 참여 과정에서 제대로 된 정보를 아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깨달았다면서, “시민단체나 뜻을 가진 이들이 더 많은 정보를 공유하고 연대의 필요성을 알릴 필요가 있다. 정확하고 진실된 정보가 더 많이 알려질수록 세상이 깨어나게 될 것”이라고 당부했다.

또 이번 조례 청원을 지원한 녹색당 하승수 변호사는 “대전은 핵발전의 또 다른 핵심지역임에도 핵발전과 무관한 지역이라는 인식이 지배적이었지만, 주민 스스로가 문제의식을 느끼고 조례 발의까지 나선 것은 큰 의미가 있고 바람직한 변화”라고 평가했다.

하 변호사는 특히 상위법인 원자력안전법에 지원 근거가 없다는 정부와 지자체의 입장에 대해서도, “근거가 없으면 만들어야 하는 것이 지자체 고유 업무이자 권한”이라며, “정부가 최소한의 정책을 마련한다면, 지자체가 더 구체적인 정책을 만들어야 하는 것이 당연하다. 조례안에 문제가 있다면 수정하고 필요하면 상위법 개정도 요구해야 할 것”이라고 지적했다.

그는 “원자력발전 문제가 생각보다 우리 주변에 가까이 있다는 것을 인식해야 한다”면서, “원자력 발전 문제는 일부 지역이 아니라 우리나라 전체의 문제다. 이번 조례안 발의가 사회 전반적 인식을 바꾸는 계기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기사제휴=지금여기)
태그

로그인하시면 태그를 입력하실 수 있습니다.
정현진 기자의 다른 기사
관련기사
  • 관련기사가 없습니다.
많이본기사

의견 쓰기

덧글 목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