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리로 나와야만 했던 이들을 위하여

[박병학의 글쓰기 삶쓰기] 장애등급제·부양의무제 폐지 광화문 농성 3년째의 하루

그들은 왜 거리로 나왔는가

8월 21일 밤 9시 반쯤 서울 광화문 세종문화회관 근처를 지나간 사람이라면 광화문 광장과 맞닿은 횡단보도를 가로막은 휠체어들을 보았을 것이다. 휠체어에 앉아 목이 터지도록 뭔가를 부르짖는 장애인들도 보았을 것이고, 현수막을 펼친 채 주먹을 쥐고 구호를 외치는 비장애인들도 보았을 것이다.


좀 더 지켜볼 여유가 있었다면 장애인들을 횡단보도에서 끌어내려 했던 경찰들도 보았을 것이다. 경찰들에 맞서 거친 몸싸움을 벌이던 비장애인들도 보았을 것이고, 길이 막혀 오도가도 할 수 없게 된 운전자들이 차에서 내려 장애인들에게 욕설을 퍼붓는 광경도 보았을 것이다. 어떤 운전자는 경찰을 붙들고 나라꼴이 이게 뭐냐고 하소연하기도 했다.

당신이 그날 그곳에서 그 모든 것들을 보았는지 보지 못했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당신이 그 자리에 없었다고 해도 그 일들은 실제로 일어났고 비슷한 일들이 과거에도 무수히 일어났으며 아마 앞으로도 계속 일어날 것이다. 중요한 것은 장애인들과 비장애인들이 그날 왜 횡단보도를 막아섰는지, 운전자들은 왜 욕설을 퍼부었는지, 그리고 그런 일들이 왜 앞으로도 되풀이될 수밖에 없는지를 아는 것이다.

3년째 이어진 농성


광화문 지하도에는 3년째 자리를 지키고 있는 농성장이 있다. 8월 말이면 농성 1,100일째를 넘기게 된다. 농성장 한쪽에는 ‘장애등급제·부양의무제 폐지 광화문 농성장’이라는 글씨가 적혀 있고, 맞은편에는 검정 보자기가 씌워진 탁자에 영정 사진 열두 개가 나란히 놓여 있다. 영정들 뒤에 걸린 현수막엔 이런 글귀가 있다.

‘2012년 8월 21일, 농성을 시작할 때는 이곳에 누구의 사진도 없었습니다.’


그렇다면 3년 사이에 열둘이나 되는 목숨이 사라져 갔다는 얘기가 된다. 현수막엔 장애인이라는 이유로 세상을 떠날 수밖에 없었던 사연들이 촘촘히 적혀 있다. 놀랍게도 그들 가운데 스스로의 잘못으로 죽은 사람은 단 한 명도 없다. 그들은 정부가 장애인들을 위한다며 만든 장애등급제, 부양의무제, 그리고 열악한 장애인 활동지원제도 때문에 죽었다.

‘사회적 흉기’가 된 장애인 제도

장애등급제는 장애인을 1급부터 6급까지 나누고 복지 혜택을 다르게 제공한다. 국민연금공단 소속 의사들이 내리는 등급 판정에 장애인은 관여할 수 없고 판정에 드는 비용도 모두 장애인이 부담한다. 등급이 내려가면 혜택이 줄어드니 취업이 불가능한 중증장애인들에게 등급 판정은 목숨이 걸린 문제가 된다. 그러나 2년마다 받는 재심사에서 등급이 올라가는 경우보다 내려가는 경우가 훨씬 많다. 또한 장애인들마다 형편이 다르니 필요한 혜택도 다를 수 있지만 어떤 등급을 받느냐에 따라 지원되는 혜택이 일방적으로 정해진다.

물건이나 고깃덩어리가 아닌 인간을 1급부터 6급까지 등급 매겨 줄 세우는 제도가 장애등급제라면, 부양의무제는 국가가 장애인들에게 제공해야 할 복지 혜택을 가족에게 떠넘기는 제도이다. 장애 1급에서 4급까지 기초생활수급자 신청을 할 수 있지만 배우자를 포함한 가족 가운데 한 명이라도 ‘부양 능력’이 있다고 판단되면 정부는 수급 대상에서 제외한다. 오랫동안 연락조차 되지 않은 가족이 한 명이라도 있어도 부양의무제는 복지 혜택을 거둬 간다. 갓 스무 살 넘어 아르바이트를 시작한 자식이 있어도 마찬가지다. 수급을 받지 못하면 죽을 수밖에 없는 장애인들은 부양의무제의 희생양이 되지 않기 위해 일부러 가족과 인연을 끊기도 한다.

  장애등급제·부양의무제 폐지를 위한 국무총리 면담을 촉구하는 기자회견 [출처: 장애등급제·부양의무제 폐지 공동행동 페이스북]

장애인 활동지원 제도는 중증장애인들의 집에 활동보조인이 찾아가 도움을 주는 제도인데 2006년 ‘활동보조 서비스 쟁취’를 위해 장애인들이 거리로 나와 처절하게 싸워 얻어낸 결과물이다. 몸을 움직일 수조차 없는 중증장애인들에게 활동보조는 목숨이 달려 있는 문제일 뿐 아니라 지역사회 속에서의 자립을 좌우하는 조건이기 때문이다. 1급과 2급 장애인들에게만 제공되다가 지난 6월부터 3급 장애인에게까지 확대됐지만 여전히 정부는 장애인들 저마다에게 어떤 활동보조 서비스가 필요한지는 무시한 채 오로지 장애등급에 따라 서비스 신청권을 주거나 빼앗고 있다. 또한 장애인이 활동보조인과 함께할 수 있는 시간은 하루 12시간에 불과하고, 갈수록 인상되는 활동보조 ‘자부담’ 액수조차 고스란히 장애인들이 부담해야 한다.

사고도 자살도 아닌, 타살이었다

시설에 갇혀 사는 것이 아니라 지역사회에서 다른 사람들과 함께 살고 싶은 중증장애인은 우선 장애등급제가 매기는 등급을 주홍글씨처럼 몸에 새겨야 하고, 혹시 가족이 있으면 부양의무제에 걸리니 어떻게든 인연을 끊어야 하며, ‘천만다행’으로 3급 이상이 나오면 활동보조 서비스를 자부담으로 신청해야 한다. 장애인들에게 남는 것은 자신은 몇 등급짜리 인간이라는 수치심과, 경제적 형편 때문에 가족과 인연을 끊었다는 자괴감과 고립감, 그리고 하루에 12시간은 활동보조인 없이 방치돼야 한다는 공포감이다.

농성장 영정 속 장애인들의 사연은 하나같이 이 죽음들이 모두 타살이라 증언하고 있다. 장애등급 심사에서 ‘등급외’ 판정을 받아 수급이 끊어지자 스스로 목숨을 끊은 박진영 씨. 중증장애인이었지만 3급 판정을 받아 활동보조 서비스를 신청할 수 없어 미처 집에 난 화재를 피할 수 없었던 송국현 씨. 서비스를 신청할 순 있었지만 활동보조인이 퇴근한 뒤 집에 불이 나자 마찬가지로 피할 수 없었던 김주영 씨. 그리고 인공호흡기에 이상이 생겼지만 활동보조인은 이미 퇴근한 뒤라 아무것도 할 수 없었던 오지석 씨 등등. 이들은 죽지 않을 수 있었는데도 죽었고 이들을 죽게 만든 것은 장애인들의 현실과는 동떨어진 잘못된 제도와 정책이었다. 연이어 늘어만 가는 영정들의 숫자는 사회적인 타살이 지금 이 순간에도 되풀이되고 있을지 모른다는 사실을 무겁게 증언한다.

  2014년 5월 12일 서울시청 광장에서 있었던 송국현 씨 장례식 [출처: 참세상 자료사진]

잘못된 제도와 정책을 바꿔야 한다는 목소리가 광화문 지하도에 둥지를 튼 것은 3년 전이지만 장애인들은 스스로의 생존권을 그보다 훨씬 전부터 부르짖어 왔다. 그 기나긴 ‘장애인 생존권 투쟁’의 역사를 이 자리에서 다 이야기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3년 전 장애인들은 이번에야말로 끝장을 봐야 한다는 마음을 품고 온종일 경찰들과 대치한 끝에 광화문 지하도에 농성장을 차렸다. 햇수로 농성 3년째에 들어선 올해 5월부터는 전국 곳곳의 거리에서 ‘장애등급제와 부양의무제 폐지’, ‘활동보조 24시간 쟁취’를 외치는 싸움을 벌이기도 했다. 이른바 ‘그린라이트’ 투쟁이었다.

8월 21일 낮, 서울 보신각


광화문 농성 3년째 되는 날을 맞아 전국에서 올라온 장애인들 3백여 명이 서울 보신각 앞에 모여 ‘장애인 활동보조 권리보장 집중결의대회’를 열었다. 그곳에서 나온 목소리들을 들어 보자.

“활동보조 제도 24시간은 박근혜 대통령의 대선 공약이었습니다. 그러나 현실은 어떻습니까. 지자체가 24시간 제공하는 것을 정부가 못하게 막고 있습니다. 감사원에서는 활동보조 예산을 삭감하라 주문하고 기획재정부는 활동보조에 더 쓸 예산이 없다고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10년 전에 외쳤듯이 활동보조는 예산의 문제가 아니라 중증장애인의 생존을 위협할 수 있는 생존권의 문제입니다.” (한국장애인자립생활센터협의회 양영희 회장)

(장애인 활동보조 24시간은 지난 대선 때 박근혜 후보를 비롯한 여러 후보들이 내건 공약이었다. 그러나 대선 뒤 출범한 박근혜 정부는 오히려 장애인 복지 혜택을 줄이고 있다. 대구, 인천, 광주 등 13개 지자체에서 활동보조 24시간 보장을 위한 정책을 세웠지만 정부는 ‘사회보장제도를 수립할 때 보건복지부와 사전 협의를 거쳐야 한다’는 사회보장기본법 26조를 내세우며 지자체의 정책을 전부 없던 것으로 만들었다. 또한 감사원은 지난 7월 지자체들의 활동보조 시간 추가지원 사업을 ‘과도한 복지’라 부르며 지자체에 시정할 것을 통보했다.)


“물가는 뛰고 있고 최저임금도 올라가고 있는데 활동보조 수가 인상률은 그걸 못 쫓아가고 있어요. 얼마 전에 보건복지부 서비스과장과 활동보조 수가 문제로 이야기를 하는데 과장이 그러더군요. ‘저희는 기획재정부에 (인상률) 5% 예산안 올렸으니 이제 저희 손 떠났습니다. 기획재정부랑 싸우세요.’ 그래서 기재부 예산담당자들한테 연락했더니 다 휴가 갔다는 거예요. 활동보조 서비스 시작된 지 10년이 넘었는데 활동보조인 수가가 만 원도 안 됩니다. 그런데도 질 좋은 서비스를 제공하라고 요구해요. 기재부 장관! 감사원장! 펜대 돌리고 있는 공무원들! 활동보조 딱 반나절만 해 보세요!” (전국활동보조인노동조합 구범 부위원장)

(2015년 최저임금 인상률은 7.1%였지만 장애인 활동보조 수가 인상률은 그 절반에도 못 미치는 3%에 지나지 않는다. 올해 최저임금은 시간당 5,580원, 활동보조 수가는 시간당 8,810원이지만 주 40시간을 일하는 노동자가 한 달 임금으로 116만 원 가량을 받을 수 있는 반면 활동보조인은 주휴수당이 적용되지 않아 한 달에 113만 원 가량을 받는다. 즉 활동보조인의 임금 수준은 최저임금에도 못 미치고 있는 것이다. 게다가 수가의 24% 정도를 기관이 수수료로 떼어 가고 연차나 시간외수당도 제대로 지급받지 못하는 실정이다.)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 박경석 공동상임대표

“이 사회는 여러분들이 시설에 가서 살아야 되는 것이 마땅하다, 집구석에 처박혀서 부모들에게 매달려 살아가는 게 맞다고 얘기합니다. 그러나 우린 아니라고 이야기했습니다. 그렇게 싸워서 만든 것이 이 소중한 활동보조 서비스 권리입니다 이것은 우리의 권리인데 이 권리를 침해하는 자들에 대해 우리가 그냥 ‘안녕하십니까’ 이렇게 인사할 수 있겠습니까? 그게 세상의 평화입니까? 우리가 목소리 내지 않고 집구석에만 처박혀 있으면 되죠. 시설이 아름답게 만들어 놓은 그 울타리 속에서 주는 밥 먹고 살면 되는 거 아닙니까? 그래서 이 사회가 평안했습니까? 평안했죠. 여러분들이 거리로 나오기 전까지는 이 사회는 평안했던 거 아닙니까. 그런데 그게 우리의 평화와 무슨 관계가 있습니까? 그게 우리 행복과 무슨 관계가 있었습니까? 지역사회에서 살 수 있는 권리를 국가가 보장하라고 얘기했지만 그놈의 국가는 우리를 시설에 살게 만듭니다. 활동보조 서비스 받고 있다가도 65세 넘으면 장기요양시설로 보내 버려요. 그게 법이에요.”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 박경석 공동상임대표)

(장애인 활동지원 제도는 만 6세 이상 65세 미만의 장애인들을 대상으로 활동보조 서비스를 제공한다. 65세가 되는 순간 더는 서비스를 신청할 수 없다. 활동보조 서비스를 받지 못하는 중증장애인은 어쩔 수 없이 시설로 들어갈 수밖에 없다. 장애인의 자립생활을 지원한다는 활동지원 제도의 취지는 65세 이상의 장애인들에게는 해당되지 않는다.)

거리 행진, 그리고 광화문 광장으로


보신각에서 집회를 마친 장애인들은 횡단보도를 건너 을지로 네거리 쪽으로 행진을 시작했다. 휠체어를 탄 장애인들도, 두 다리로 걷는 비장애인들도 저마다 깃발이나 손자보를 들고 있었다. 느리지만 꾸준히 움직이는 휠체어의 속도에 맞춰 행진 대오는 천천히 전진해 갔다.


마이크를 쥔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 박경석 대표는 보신각과 맞닿은 횡단보도 한가운데에서 거리 행진에 나서는 사람들을 잠시 멈춰 세우고 짤막한 즉석 집회를 열었다. 그러자 멀찍이 서 있던 경찰 차량에서 종로서 경비과장이 경고방송을 내보냈다.

“교통체증이 빚어지니 도로를 점거하지 말고 신고된 대로 행진해 주시기 바랍니다.”

그러나 박경석 대표는 아랑곳없이 경고방송을 집어삼킬 듯 큰 목소리로 이야기했다.

“우린 5시까지 집회신고 내 놨어요. 천천히 행진합시다. 저들의 눈에는 우리가 가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 않겠지만 우린 우리가 그동안 차별 받았던, 배제 받았던 속도만큼 가고 있습니다. 종로서 경비과장! 자꾸 가라고 재촉하지 말고 장애인들의 속도를 인정하세요!”



을지로 네거리에서 시청 쪽으로 꺾은 행진 대오는 국가인권위원회 앞에서 다시 청계천 쪽으로 방향을 돌렸다. 청계천 소라광장이 보이는 곳까지 이르자 대오는 동아일보사 앞을 지나 마침내 오후 4시 반쯤 광화문 광장에 다다랐다. 행진하는 내내 장애인과 비장애인 모두 한 목소리로 구호를 외쳤다.

“장애등급제 부양의무제 폐지하라!”
“활동보조 24시간 보장하라!”
“활동보조 연령제한 폐지하라!”


광화문 광장의 저녁, 그리고 ‘삶삼한 연대’



세종대왕상 앞에는 이미 무대와 천막들이 세워져 있었다. 천막마다 ‘삶삼한 연대’라는 다섯 글자가 큼직하게 써져 있었는데 이날 2시부터 보신각에서 열린 집회가 바로 광화문 농성 3년을 맞이해 준비된 행사 ‘삶삼한 연대’의 첫 일정이었다. 5시부터는 투쟁결의대회가, 저녁 식사 뒤 7시부터는 투쟁문화제가 열리기로 되어 있었다. 투쟁결의대회에서 나온 목소리들을 들어 보자.

“내 몸이 이렇다는 걸 (장애등급) 조사원 남자 앞에서 다 얘기해야 돼요. 목욕도 못한다, 화장실도 못 간다, 또 뭣도 못한다. 정말 하기 싫은 말 아닙니까. 그런데 왜 그 사람들 앞에서 그런 말을 해야 하고 증명을 받아야 합니까. 그들이 내 장애를 말하는 게 아니라 내가 당당히 내 장애를 말할 수 있는 그런 사회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만 아는 우리의 장애를 보건복지부와 청와대가 어떻게 알고 등급을 매깁니까?” (박명애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 공동상임대표)


“제 아이는 중증 발달장애입니다. 그런 아이를 데리고 먼 길을 달려 서울 병원에 온 적이 있습니다. 병원에서 머리가 하얗게 세고 걸음도 잘 걷지 못하는 할아버지가 손목에 장애 아이를 묶고 와서 진료 받는 모습을 봤습니다. 참담하기 그지없었습니다. 그 할아버지는 왜 그 나이가 될 때까지 아이를 데리고 병원에 다녀야 할까요? 이것이 어떻게 대한민국입니까? 그 옛날 연좌제가 지금 이 시대에도 일어나고 있지 않습니까? 장애인 부모가 장애인 자식을 돌보기 힘들어 포기하면 장애인을 돌보는 의무는 다른 가족에게 돌아갑니다. 가족이 무슨 죄가 있어서 연좌제처럼 장애인 형제자매를 돌봐야 합니까? 부양의무제는 장애인의 가족이라면 사돈의 팔촌까지 물고 늘어지는 엄청난 악법입니다.” (전국장애인부모연대 김신애 부회장)


투쟁결의대회가 끝난 뒤 한 시간쯤 밥 먹는 시간이 있었다. 장애인들과 비장애인들은 한데 어우러지며 천막 안에서 함께 밥을 먹었다. 밥은 투쟁 현장이라면 어디에나 나타나 맛있는 밥과 반찬을 내놓는 ‘다른 세상을 꿈꾸는 밥차 <밥통>’이 준비했다. 식사가 웬만큼 끝나 가는 듯해서 천막 주위를 돌아다니며 몇몇 사람과 이야기를 나눠 보았다.

장애인 A씨와 나눈 대화

- 여긴 어떻게 나오시게 됐나요?

“제가 음악을 하다 보니 동네에서 장애인들 대상으로 무료로 노래 교실이나 피아노 레슨 같은 걸 했어요. 이런 데는 처음 나와 봤어요. 저 혼자 그렇게 하고 사는 게 잘 사는 거라 생각하고서 지역 안에서만 개인적인 봉사를 했죠. 그런데 오늘 이런 게 있다고 지인이 알려줘서 나오게 됐어요.”

- 오늘 집회에서 나온 이야기들 중 뭐가 가장 마음에 와 닿으시던가요?

“장애등급제에 대해 아까 말씀하시는 분이 계셨어요. 자기네들이 뭐라고 우리 몸을 자기들 마음대로 등급을 정하겠어요. 저도 그런 건 바뀌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리고 저 같은 경우도 딸이 컸다고 수급을 못 받아요. 요즘은 자녀들이 벌어서 자기네들 먹고살기도 힘들잖아요. 자녀들이 저희에게 주면 얼마를 주겠어요. 걔네들이 벌어서 부모를 먹고살 수 있게 해준다는 건 사실 불가능한 일이거든요. 그렇게 되면 같이 죽는 거예요 자녀들도 죽고 나도 죽고. 부양의무제는 폐지돼야 한다고 생각해요.”

- 자기는 장애인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나 장애인들의 목소리에 관심 없는 사람들은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비장애인들 중엔 장애인들의 현실을 남의 일처럼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또 관심 가져주는 분들도 없진 않아요. 장애인들과 비장애인들 사이엔 항상 벽이 있었죠. 하지만 그 벽의 통로를 우리 장애인들이 우선 헐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비장애인들이라 해서 감정을 나쁘게 갖고 있을 필요는 없으니까요.”


장애인 B씨, 활동보조인 C씨와 나눈 대화

- 어디서 오셨나요?

C씨 : “전라도 광주요. 아침 일찍 출발했어요. 리프트차로 이동했죠. 휠체어를 탄 채로는 일반 좌석으로 오는 게 무척 힘들어요. ”

- 활동보조로 두 분이 인연을 맺게 되신 지는 얼마나 되셨나요?

C씨 : 10개월쯤 됐어요.

- 수급자 자격을 얻는 데 힘들진 않으셨나요?

B씨 : 부모님과 인연을 끊는 방법 말고는 없어요. 통화도 못해요. 같이 사는 건 당연히 안 되고요. 부모님이 지난 2년간 도움을 주지 않았으며 관계도 없다는 걸 기관에 증명해야 해요. 저는 삼사 년 전부터 부모님과 아예 왕래가 없어요.

C씨 : 근데 또 그렇다고 해서 수급을 다 받는 건 아니에요.

- 활동보조로 일하시면서 가장 힘든 점은 무엇인가요?

C씨 : 제기 힘든 것보다는 옆에서 힘들어하는 장애인들을 지켜봐야 하는 게 더 힘들어요. 활동보조 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활동보조 시간이 많이 필요한 장애인들이 있죠. 그런 분들에겐 24시간 활동보조가 당연히 필요한데 정부가 장애인에게 등급을 매기고 심사를 해서 시간을 줘요. 활동보조를 신청하려면 등급 재심사를 받아야 하는데 재심사 받고 등급 떨어질까 봐 신청을 포기하는 장애인들도 많아요. 등급 떨어지면 수급비가 깎이니까요.

- 장애인들의 현실을 바꾸기 위해서 비장애인들이 할 수 있는 일이 있을까요?

B씨 : 장애인들에게 욕은 하지 말았으면 좋겠어요. 도로에서 그린라이트 투쟁할 때 사람들이 욕 엄청 했어요.

C씨 : 저희를 지지해 주시고, 저희 일에 관심 가져 주셨으면 좋겠어요. 그런데 그렇게 되기 위해선 더 많은 사람들의 인식이 개선돼야 할 거예요. 사람이라는 게 내일이라도 당장 장애인이 될 수도 있는 거잖아요. 장애인이든 비장애인이든 똑같은 사람인데. 서로 소통할 수 있었으면 좋겠어요.

“우리는 지금 혁명을 하고 있다”


7시부터는 같은 장소에서 투쟁문화제가 시작되었다. 노래 공연과 영상물 상영이 이어졌고 중간마다 연대발언 시간도 있었다. 그 가운데 사회적파업연대기금(사파기금) 권영숙 대표는 무대 위로 올라와 이렇게 발언했다.

“부양의무제와 장애등급제를 노동과 관련해서 본다면 장애인이 노동자가 될 권리와 노동할 권리를 배제하고 박탈하는 것입니다. 장애인들 스스로 설 수 있도록, 노동할 수 있도록 만드는 것이 장애인 복지의 핵심이어야 합니다. 헌법 32조는 대한민국 국민은 노동할 권리를 지니고 근로조건을 향상시킬 권리를 지니고 있다고 보장하고 있습니다. 헌법에 비춰 봤을 때 장애인의 노동권 확보를 위해 필요한 것은 장애인 복지에 대한 국가의 책임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투쟁문화제는 밤 10시가 넘어서 끝났다. 이후로는 같은 장소에서 ‘삶삼한 심야영화제’가 시작된다고 했다. 그리고 광화문 광장에서 밤을 보낸 뒤 다음날인 22일 아침엔 황교안 국무총리 면담을 촉구하는 기자회견을 열기 위해 모두 함께 청운동 주민센터로 달려간다고 했다. (그러나 다음날 경찰 저지선에 막혀 결국 청운동으로 갈 수는 없었다.)


투쟁문화제가 끝나기 전에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 박경석 대표가 마지막으로 발언을 했다. 발언 가운데 인상적인 부분이 있어 여기 옮긴다.

“문제로 정의된 사람이 다시 그 문제를 정의할 때, 다시 정의할 힘을 가질 때 그것을 혁명이라고 부릅니다. 이 국가와 사회는 그들의 기준에 따라 장애인들을 문제 삼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의 기준으로 문제를 정의하려고 합니다. 우리는 지금 혁명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거리로 나와야만 했던, 나오고 싶었던 이들을 위하여

이 글의 첫머리에서 이야기한 사건은 투쟁문화제가 한창 이어지고 있던 밤 9시 반쯤에 일어났다. 비장애인들과 휠체어를 탄 장애인들 몇몇이 신호등이 초록불로 바뀌자 횡단보도를 건너가려고 했을 뿐이다. 화장실을 가려 했을 수도 있다. 아니면 담배를 사러 갔던 것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길을 왜 건너려고 했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경찰이 무조건 장애인들의 앞을 막아섰다는 것이다. 그리고 분노한 장애인들과 비장애인들이 횡단보도를 점거하고 구호를 외치자 길을 지나갈 수 없게 된 운전자들 역시 분노했다는 것이다. 장애인들은 왜 분노했으며 왜 횡단보도를 막았을까? 비장애인 운전자들이 분노한 이유는 무엇일까? 8월 21일 하루 동안 이어진 장애인들의 싸움을 눈과 귀로 좇아 기록한 이 글은 두 물음의 답을 찾는 작업이기도 했다.

앞선 물음의 답을 찾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그들은 죽지 않으려고 거리로 나왔다. 누군가가 자꾸 자신들을 죽이려 하는 까닭에 분노했다. 분노했기 때문에 거리 행진을 했고 횡단보도를 점거했다. 장애인이라고 해서 삶을 더 모질게 버텨 내는 힘이 있는 것은 아니다. 비장애인과 마찬가지로 그들도 죽음을 두려워하고 어떻게든 살고 싶어 한다. 누군가가 자신을 죽이려고 목에 칼을 들이댄다면 누구든 죽지 않기 위해 목청껏 소리를 지르며 살려달라고 할 것이다. 장애등급제와 부양의무제는 사람의 목숨 줄을 단번에 끊어 놓을 수 있는 무서운 칼날이다. 그들은 살고 싶어서 거리로 나왔다.

그러나 살고 싶다면 장애인 수용 시설에 얌전히 들어앉아 살아도 된다. 굳이 거리로 나와 구호를 외칠 것까지는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8월의 더운 날씨에 전국 곳곳에서 휠체어를 타고 올라와 서울 시내를 누비며 도로를 점거하는 장애인들의 마음을 단순히 ‘살고 싶다’는 욕망으로만 설명할 수는 없게 된다. 살고 싶다. 그런데 ‘어떻게’ 살고 싶을까? 이는 시설 안의 삶과 바깥의 삶이 어떻게 다른지를 생각해 보면 쉽게 알 수 있다.

시설 안에서 장애인들이 스스로 할 수 있는 일은 거의 없다. 자신의 삶이 앞으로 어떻게 펼쳐질지 헤아릴 필요도 없고, 앞에 놓인 시간들 속에서 무엇을 하며 살아야 할지 고민하지 않아도 된다. 그렇다고 시설이 그런 고민을 대신 해 주는 것도 아니다. 시설은 누구도 돌보려 하지 않는 존재들을 그저 업무처럼 떠맡고 있을 뿐이다. 시설을 없어져야 하는 공간이라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다. 장애인이든 아니든 누구도 시설에서 살지 않을 권리가 있다는 말을 하려는 것이다. 사람이라면 어느 누구에게도 스스로의 삶을 스스로 꾸려 나갈 권리가 있기 때문이다.

거리로 나온 장애인들은 시설에서 평생을 보내는 삶이 아니라 지역 사회로 나와 다른 이들과 어울려 살아가는 삶을 택한 사람들이다. 이 세상은 하나부터 열까지 비장애인들 위주로 구성되고 만들어진 공간이니 시설 바깥에서 살아가려는 장애인들에겐 당연히 도움이 필요하고 그런 도움을 책임져야 하는 것이 국가의 역할이다. 그러나 장애등급제와 부양의무제는 국가가 장애인들을 돕기는커녕 어서 삶을 포기하라고 강요하고 있다는 것을 잘 보여 준다.

장애인들이 거리로 나온 것은 나올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고, 나오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들의 목에 칼을 들이대는 갖가지 악법들에서 벗어나기 위해 그들은 거리로 나와야 했다. 그리고 시설이나 골방에만 틀어박히지 않고 비장애인이든 장애인이든 주변의 다른 누군가와 섞여 살고 싶었던 그들은, 거리로 나왔다. 도로를 점거하고 횡단보도를 막아서는 그들의 행동은 왜 우리를 죽이려 하느냐는 분노의 표현이기도 하지만, 이젠 제발 좀 같이 살아 보자고 손을 내미는 것이기도 하다.

그러나 멀쩡한 몸으로 차를 운전하던 비장애인들은 장애인들이 거리로 나와서까지 보내는 그런 신호들을 전혀 알아듣지 못했다. 그러고서 길을 막았다는 이유만으로 장애인들에게 거칠게 분노를 쏟아냈다. 예산이 모자라다는 핑계로 복지 혜택을 싹둑싹둑 줄이는 박근혜 정부의 행보는 오히려 이해하기 쉽다. 그러나 휠체어를 탄 채 경찰들에게 끌려가는 장애인들에게 “시민들에게 피해 주지 말고 열심히 일해 벌어먹고 살아야지”라며 손가락질하는 비장애인들의 분노는 도무지 이해하기 쉽지 않다. 대체 그들은 왜 분노했는가? 길이 막히면 다른 길로 돌아가면 되지 않는가? 비장애인 운전자들이 갈 수 있는 길은 서울 시내에 얼마든지 있지만 거리로 나온 장애인들에겐 어디에도 다른 길이 없다.

열심히 일해 벌어먹으라는 말에 어느 장애인이 잘 안 나오는 목소리를 쥐어짜며 이렇게 절규했고 이 절규는 장애인 한 사람의 입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마치 이 땅의 모든 장애인들의 입에서 나온 것처럼, 지금까지 이 세상에서 태어나고 죽은 수많은 장애인들의 겹겹이 쌓인 목소리인 것처럼 그 순간 광화문이라는 도시에 존재했던 모든 것들 속에 아프게 파고들었다.

“일하고 싶어도 일을 안 준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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