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급은 소멸했는가? 마르크스 계급이론의 현재성

[주례토론회] 계급 죽음 논쟁에 대한 맑스주의 비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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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급과 계급투쟁은 정치적 신화가 되고 있고,
그에 따라 맑스주의는 신화학이 되고 있다”(Balibar, 1988: 257, 강조는 인용자 표시).


1. 시작하는 말

계급이란 용어는 사회의 동학을 과학적으로 연구하는 고전사회학의 핵심 개념이자, 사회의 불평등 구조를 설명하는 일반적 표식으로 받아들여졌다. 사회학은 계급이라는 유일한 독립변수를 가진다(Stinchcombe, 1968)라는 극단적인 주장이 존재할 만큼 초기 사회학자들은 계급을 정의하고 그 관계를 분석하는 것에 관심을 집중하였다. 계급을 거시적인 사회변동(역사이론)과 미시적인 불평등 체제 모두를 설명하는 과학적 개념으로 정립함(신광영, 2008: 241)과 동시에 이를 혁명적인 정치적 실천을 모색하는 곳에서 최전방에 위치시킨 맑스주의는 사회과학이론으로서의 계급론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최근 사회학이 수많은 패러다임으로 분절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통상 맑스주의는 베버주의와 함께 20세기 후반 계급이론상의 논쟁을 계속 규정하였다(Crompton, 1993: 40). 다만 1980년대 후반 벌어진 소련과 동구권 국가사회주의 몰락을 배경으로 한 정치적·학문적 장에서의 ‘맑스주의 위기론’은 사회과학 영역으로 국한하여 봤을 때 단순히 계급에 대한 맑스주의 관점만을 쇠퇴시킨 것이 아니라 계급론 자체의 위기, 다시 말해 등급적인 계급 분석과 - 계층이론으로 분류할 수 있다 - 관계적인 계급 분석 모델 모두를 포함하는 계급이론 전체의 위기로 가시화되었다.

물론 분화된 계급 분석 방법 전체를 방어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하지만 현실 사회주의의 실패와 몇 차례에 걸친 노동자계급의 정치세력화 무산이 과연 과학으로서의 맑스주의와 그에 따른 계급 분석에 종언을 가하는 기점이 되는 것인가에 대해서는 분명 재고가 필요하다.

(중략)

본 연구는 이런 문제의식 하에 맑스주의 계급론에 대한 비판, 더욱 구체적으로 말해 1990년대를 정점으로 한 ‘계급 죽음 논쟁(death of class debate)’에 대한 비판을 시도한다. 본 연구에서 유독 계급 죽음 논쟁을 주목하는 까닭은 일견 많은 사회학자들이 벌인 비교적 최근 논쟁이라는 점에 기인하는 것으로 보일 수 있으나, 연구 목적은 단순히 이에만 있지 않다. 맑스주의 계급론에 대한 문제제기는 정세의 변화와 맞물리며 다양한 역사적 계기를 통해 분출되어 왔지만, 계급 죽음 논쟁만큼 심각한 ‘이론적 곡해’를 겪으며 위기에 처한 경우는 드물다. 가령 1977년 루이 알뛰세르의 맑시즘 위기 선언이 있었고, 1980년대 신우익의 선거 승리와 유로코뮤니즘의 파산, 그리고 현존 국가사회주의의 몰락 등의 상황에 힘입어 각종 포스트주의가 맑스 이론에 도전하는 위기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Laclau & Mouffe, 1985;1987, Offe, 1985a;1985b). 하지만 전자의 경우는 국제 공산주의 운동 상의 분열이란 당대의 정치적 위기를 그간 맑스주의 내에서 봉쇄돼온 위기를 마침내 분출하는 새로운 기회로서 포착한다는 의미의 위기 선언이며(Althusser, 1977), 후자의 경우는 분명 맑스주의 외부에서 가해진 이론적 위기에는 해당하나 계급 죽음 논쟁에서 불거지는 것만큼 맑스주의 비판자들의 비판 대상(맑시즘)에 대한 몰이해 혹은 왜곡이 심각하지는 않았다. 발리바르의 표현을 빌어 계급 죽음 논쟁의 구도를 묘사한다면 “계급과 계급투쟁은 정치적 신화가 되고 있고, 그에 따라 맑스주의는 신화학이 되고 있다”(Balibar, 1988: 257).

(중략)

2. 계급 죽음 논쟁에서 제기된 맑스주의 계급론 비판

계급 죽음 논쟁은 영미권 학술지를 통해 크게 네 차례에 걸쳐 이루어졌다. 본고에서는 1959년 Pacific Sociological Review에서 이루어진 1차 논쟁은 지면관계상 제외하고, 1990년대 이루어진 3차례 논쟁에 대해서만 살펴본다.1 니스벳(Nisbet)과 헤벌르(Heberle)로 대표되는 1차 논쟁의 경우 골쏩과 마샬이 맑스주의 계급론에 제기하는 비판과 유사한 방법론적 비판에 해당하기 때문이다. 본고에서 다룰 논쟁에 대해 간략히 정리하면 <표 1>과 같으며, 맑스주의 계급론이 받은 비판 지점을 명확하게 하기 위해 각 논쟁에서 맑스주의 계급론에 대한 비판적 논의를 격화시킨 대표적 논자들의 논의를 살펴보도록 한다.

  <표 1> 계급 죽음 논쟁의 진행 과정

1) 골쏩과 마샬의 맑스주의 계급 분석 방법에 대한 비판

골쏩과 마샬은 라카토스(Lakatos, 1970)의 과학방법론을 차용하여 ‘연구프로그램(research programme)으로써의 계급 분석’이란 개념을 제시하고, 맑스주의 계급론이 결코 과학적 연구프로그램이 될 수 없다는 극단적인 입장을 취한다. 이들의 연구프로그램으로써의 계급 분석은 “서로 다른, 혹은 경쟁하는 이론들 각각이 그들의 귀납적이고 설명적인 수행을 통해 표현되고 평가받는” 방식으로써 “프로그램의 가치 여하는 그 프로그램이 산출한 결과에 의해서만 결정되어야 한다”(Goldthorpe & Marshall, 1992: 382). 이런 관점 하에서 골쏩과 마샬은 맑스주의 계급 분석의 문제를 계급을 결과로써 입증하는 것이 아닌 선험적 존재로 가정한 채 분석을 시도한다는 데에서 찾고, 이를 맑스주의의 반증 불가능한 이론 종속적 성격으로 규정한다. 이때의 이론은 맑스의 역사유물론, 착취이론, 단선적인 집단행위이론, 그리고 환원적인 정치이론 등이다(위와 동일: 383-385).

(중략)

그런데 그들이 차용하고 있는 과학 개념이 라카토스 본인의 과학 정의와도 상당 정도 거리가 있으며, 일단 이를 차치하더라도 연구에서 이루어지는 일차적인 개념화가 과연 이론과 철저히 결별한 상태에서 구축될 수 있는지 상당히 의심스럽다(여기서는 우선 후자에 대해서만 간략히 반비판을 시도하며, 전자는 이어지는 3장에서 본격적으로 다룬다). 골쏩과 마샬이 논문 후반부에 제시하고 있는 사회학의 세 가지 주요한 연구 영역에서의 계급 분석의 지속적인 중요성은 계급의 분명한 정의를 필요로 하는데, 이때의 개념화가 단순히 묘사적·서술적 수준에서만 이루어질 수 있는지가 의심스럽다. 이와 연동하여 골쏩과 마샬이 거부하는 이론이라는 것은 순수히 관념적인 사유를 통해 만들어진 것으로 보이는데, 이런 의미의 이론과 맑스의 과학 방법으로써의 추상은 결코 같은 것이 아니다. 관념을 교조적으로 해석하고 체계화하여 변호하는 속류 과학과 구체에서 추상으로의 하강만을 과학이라고 본 이론가들에 대항하여 추상에서 구체로 상승하는 작업의 필요불가결성을 주장한 맑스는 골쏩과 마샬이 ‘이론’이라고 규정한 관념론과 가장 거리가 멀다. “만약 사물의 현상형태와 본질이 직접적으로 일치한다면 모든 과학은 불필요하게 될 것”(Marx, 1894: 995)이지만, 결코 그렇지 않기에 구체를 설명하기 위한 추상이 필요하며, 이는 결코 이론종속적인 반증불가능성과 등치될 수 없다.

(중략)

2) 맑스주의 계급론의 비설명력에 대한 폴의 비판

폴의 논문을 관통하고 있는 주장은 크게 두 가지다. 첫째, 사회학에서 도시와 사회 운동에 관해 연구할 때 관습적으로 적용하는 구조-의식-행위 모델(Structure-Consciousness-Action Model, 이하 SCA 모델)의 경험적 함의와 설명력의 결여, 둘째, 사회학에서의 어떤 유용한 작업을 수행하는 데에 있어 개념으로서의 계급이 갖는 무의미성이다. 우선 첫 번째 주장에 대해 살펴보면 이 모델은 폴이 지적한대로 분명 사회현상을 설명하기에 부족하다. 하지만 문제는 그가 이 모델을 맑스주의에서 집단 동학을 설명하는 방식과 등치시키고 있다는 데 있는데, 폴은 이와 같은 문제의식을 록우드(Lockwood)의 논문을 통해 얻었다고 밝히고2 이 모델을 맑스주의의 맹점으로 지적한다.

SCA 모델은 특정 맥락에서의 사람들의 물질적이고 존재적인 상황에서 시작하여(S), 그런 맥락에 내재한 착취 혹은 불이익에 대한 공통된 의식으로 나아가고(C), 종국엔 불쾌한 사회 기관과 지배적인 사회 관계 혹은 그런 여타의 것들을 제거하는 혹은 전환하는 사회적 행동의 형태를 이끈다는 것을(A) 말한다...... 이 모델의 기본적인 생각은 결정적인 논리로써 사람들을 그들의 지배받고 억압받고 착취당하는 상황에 대해 급진적인 의식을 얻도록 이끄는 그 무엇이 사회적이고 경제적인 범주 혹은 계급 안에 내재해 있다는 것이다...... 일단 그런 의식이 자리를 잡으면 이는 변화를 위한 힘이 되고, 이 힘은 그 자체가 애초에 괴로움을 야기한 상황에 대한 제거를 이끄는 사회 변화를 위한 정치적 혹은 폭력적인 행동으로 드러난다...... 이 모델에서는 이런 관계가 별반 문제시되지 않는다(Pahl, 1989: 710~711, 강조 인용자 표시)

폴은 맑스주의 연구자들이 대개 기술적 설명을 이론화하는 방식으로써 SCA 모델을 적용하고 있다고 보는데, 이는 라클라우와 무페로 대표되는 포스트 맑스주의 정치학의 문제제기와 동일선 상에 있다고 볼 수 있다. 실상 계급 위치의 이론적 지위 자체를 해체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 라클라우와 무페는 “노동계급의 존재론적 중심성, 한 사회의 유형을 다른 유형으로 이행시키는 본질적인 계기인 대문자 혁명의 역할, 그리고 정치의 계기를 무의미하게 만드는 완벽하게 단일하고 동질적인 집합의지에 대한 미망적 전망 등에 기반을 둔 사회주의 개념화가 위기에 처해있다”(Laclau & Mouffe, 1985: 28)고 보고, 이를 제 2인터내셔널 시기의 논쟁을 분석하여 맑스주의의 정통 교의로 정식화하고 있다. 여기서 특기해야 할 것은 그들이 맑스주의의 계급론을 이해하는 방식과 폴이 맑스주의 계급 분석을 SCA 모델과 등치시키는 것 사이의 유사성이다. 양자 모두 맑스주의 계급론이 계급위치→계급의식→계급행동이라는 일련의 단선적인 과정을 논리적으로 추론한다는 점을 전제하며 비판을 시도한다. 이런 관점에서 노동자계급의 보수당 지지 경향이나 각종 신사회운동의 대두는 그들에게 있어 맑스주의 계급론의 비과학성을 경험적 차원에서 입증하는 적극적인 지표로 간주된다.

이상과 같은 맑스주의 계급 분석에 대한 비판은 맑스주의 계급론을 단순하고 기계적인 결정론으로 오인하는 것에서부터 시작한다는 것을 알 수 있는데, 이런 오독은 생산에 입각한 계급 개념과 일방적인 경제결정론을 구분하지 못하는 것에 일차적 원인이 있다. 따라서 반비판은 우선 양자를 명확하게 구분짓는 것에서 시작하여, 맑스의 계급 분석이 결코 일방적인 결정론의 성격을 갖지 않는다는 점을 실질적으로 입증해야만 한다. 이는 맑스주의 진영 내에서 경제결정론을 극복하려는 역편향의 시도들 - 구조주의와 역사주의 - 마저 소모적인 논쟁일 뿐 실상 양자 모두 맑스의 변증법적 계급 분석의 기초임을 드러낼 것이다.

3) 파쿨스키의 맑스주의 계급 분석의 베버주의화 경향 비판

파쿨스키는 3차 논쟁에서 클라크와 립셋(1991), 그리고 클라크 외 저자들(1993)의 ‘계급 죽음’이란 결론을 정확하게 한 사조, 즉 맑스주의 계급이론에 맞추면서 죽음의 논의를 이어간 논자다. 그는 “라이트와 같은 주도적인 맑스주의 학자에게 복잡한 경험적 배치를 이해하기 위해 계급들을 증대시켜야 한다는 압박이 있다는 것이 사실이라면 이는 계층화의 분열에 관한 클라크와 립셋의 주장을 지지해주는 것이다”(1993: 284)라고 주장하는데, 이는 맑스주의 계급론이 갖는 정체성에 대한 비판, 즉 베버주의와의 비차별성을 지적하는 비판임에 분명하다. 물론 파쿨스키는 차후 워터스와 함께 맑스주의 계급론뿐 아니라 베버주의 전통에 있는 계급분석(대표적으로 Goldthorpe과 Marshall)까지도 비판의 대상으로 삼는데, 비록 이들이 맑스주의와는 달리 상대적으로 집단성과 행위적 연결에 방점을 두면서 변혁과는 거리를 두고 있긴 하지만, 계급을 계층화와 갈등 분석의 많은 분석 범주들 속의 하나로 위치시키게 되면 결국 계급이란 개념 자체가 갖는 특권적인 지위는 유지가 될 수 없으며, 그들 스스로를 굳이 계급분석가로 명명할 필요성 자체가 없어지게 된다고 본다. 소규모 자산 소유의 증가, 기술의 자격 부여와 직업의 전문화, 내부적이고 국제적인 국가의 규제, 소비와 소비 지향성의 증가, 매스미디어 영향 하에 있는 ‘가상 공동체(imagined community)'의 형성, 신사회운동과 새로운 정치(정당 정치에서 벗어나 대중의 정치 참여를 중시하는 정치)의 동원 등은 '불평등적인 무계급성(nonegalitarian classlessness)' 매커니즘에 따라 현대사회의 계층과 갈등이 구성된다는 것을 방증하는 중요한 지표며(Pakulski, 1993: 284), 이는 맑스주의 계급론을 비롯한 계급론 전반이 갖는 유용성에 심각한 의구심을 던지는 계기가 된다고 본다.

최종적으로 파쿨스키는 워터스와 함께 계급분석가들이 직면하는 세 가지 딜레마를 제시하는데 이는 직접적으로 맑스주의 계급론을 겨냥하고 있다(Pakulski & Waters, 1996: 23). 첫째, 정체성의 딜레마. 계급 구조와 사회구성체 사이의 조정이 더 성공적일수록 그들은 그들의 주요 경쟁자, 특히 네오 베버주의의 다층적인 계층 구조, 지위-성취 모델, 인간 자본론과의 구별이 적어진다. 달리 말하면 계급이론과 분석은 그들의 정체성을 희생함으로써만, 즉 비계급이론으로 전회함으로써만 신빙성을 얻을 수 있다. 둘째, 이론적 적합성의 딜레마. 계급 패러다임이 그들의 전제를 현대 사회 갈등과 변화에 더 맞춰갈수록 그 적합성은 더욱 적어진다. 집단 버전(Gesellschaftlish version)은 우리에게 사회가 나아가는 방향에 대해 말해주는 것이 거의 없다. 셋째, 이데올로기적 적합성의 딜레마. 계급분석가들의 계급 모델이 수정이 될수록 이데올로기적 매력과 계급이론의 요청, 그리고 매력적인 해방의 약속 등은 점점 엷어진다. 소수남은 급진적인 사회비판자들은 수정된 계급 모델에서 환멸과 실망감을 느끼게 되며, 다수는 자신의 이론적 경쟁자, 특히 시민사회에 대한 포스트 맑스주의 이론과 정치에 대한 포스트 유물론으로 전화한다.

이상과 같은 파쿨스키의 논의는 맑스주의 계급 분석이 베버주의의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으며, 따라서 맑스주의에 대한 비판은 베버주의에 대한 비판으로 간단히 대체될 수 있다는 인식을 내포한다. 그는 이런 인식의 기반을 특히 라이트의 신맑스주의 계급 분석 방법에서 찾고 있는데, 그가 제시한 딜레마 중 가장 핵심적인 정체성의 딜레마가 라이트에게서 도출되고 있는 것이 이를 방증한다. 그러므로 맑스주의와 베버주의 계급 분석 사이의 근친성을 토대로 한 이와 같은 계급죽음론에 대항하기 위해서는 라이트의 계급 분석 방법을 일정 정도 경유할 필요가 있다. 라이트가 제시하는 신맑스주의 계급 분석의 기초를 확인함으로써 맑스주의와 베버주의 계급 분석의 수렴화 테제를 일단 기각하고, 여기서 더 나아가 라이트가 맑스의 양대 계급론을 보완하는 과정에서 고안한 여러 개념들에 대한 비판적 고찰이 필요하다.

지금까지 살펴본 계급 죽음 논쟁에서 제기된 맑스주의 계급론에 대한 비판은 방법론, 이론의 설명력, 그리고 분석적 측면으로 나눠 간명한 질문 형태로 집약해볼 수 있다. 방법론의 우위는 분석과 설명의 정확성으로 결정된다는 과학 개념을 상기해봤을 때 상호 깊은 연관이 있는 이 세 측면을 따라 반비판을 전개하는 것은 효율적인 논의 방식이기도 하다. 논쟁에서 불거진 맑스주의 계급론 비판을 이 세 측면을 따라 정리해보면 <표 2>와 같다.

  <표 2> 맑스주의 계급론 비판의 세 가지 측면

3. 맑스주의 계급론 비판에 대한 반비판

1) 방법론 측면 - 계급 분석과 계급 이론


(중략)

특히 골쏩과 마샬로 대표되는 신베버주의자들의 경우 맑스주의 계급 분석이 결코 라카토스의 과학적 연구프로그램이 될 수 없다고 비판하는데, 맑스의 사적유물론, 착취이론, 단선적인 집단행위이론, 그리고 환원적인 정치이론에의 종속이 이를 입증하는 증거로 제시되었다(Goldthorpe & Marshall, 1992: 383~385). 일체의 이론과의 결별이 라카토스 과학 방법의 중핵일진대 맑스주의 계급 분석은 상술한 4가지 이론에 종속되어 있어 비과학적인 성격을 보인다는 것이다. 과연 그러한가?

이는 두 가지 방향의 검토를 필요로 한다. 첫째, 라카토스는 과학적 연구프로그램 개념을 신베버주의 계급분석자들이 수용한 방식에서처럼 일체의 이론과 단절하기 위해 사용한 것인가? 즉 라카토스 과학 방법 자체와 신베버주의 계급 분석에서 이를 수용한 방식 사이에 괴리가 존재하는 것이 아닌가? 라카토스의 과학적 연구프로그램 개념과 맑스주의 계급 분석의 공명을 생각하기에 앞서 맑스주의를 비판하는 근거로 차용된 개념의 명확한 의미를 살펴보는 것은 반비판을 위한 가장 일차적인 작업에 속한다. 둘째, 라카토스의 과학적 연구프로그램과 맑스의 과학 방법 사이에 어느 정도 접점이 존재하는가? 신맑스주의 계급분석가들도 일정 정도 라카토스 방법론을 수용하고 있기에 이 방향에서의 검토 또한 간략하게나마 필요하다. 다만 이때의 방점은 맑스의 자본주의 사회 분석 방법이 라카토스가 구축한 과학적 연구프로그램에서 전진적인 사례에 속한다는 점을 밝히는 데에 있다. 본 절의 목적이 계급 죽음 논쟁에서 제기된 맑스주의 비판에 대한 반비판에 있다는 점을 감안하면 라카토스와 맑스의 과학 방법 자체의 상이성을 논하는 것은 지나치게 논의 범주를 벗어난다. 따라서 맑스주의 계급 분석이 라카토스의 과학적 방법론이 표방하는 이론적 · 경험적 진보 기준에 비춰봤을 때에도 퇴보하는 연구프로그램이 아니라는 것을 입증하는 것에 반비판의 초점을 맞출 필요가 있다.

1) 과학적 연구프로그램들은 모두 그들의 견고한 핵심(hard core)에 의해서 특징지워질 수 있다. 과학적 연구프로그램의 소극적 발견법(negative heuristic)은 우리가 후건부정식을 이 견고한 핵심에 적용시키는 것을 금하고 있다. 그 대신 우리는 우리의 창의력을 이 핵심 주위에 보호대(protective belt)를 형성하는 보조 가설들을 정식화하여 표현하거나 심지어는 발명해 내는 데 사용해야 한다(적극적 발견법. positive heuristic). 그리고 나서 우리는 이 보조가설들에 후건부정식을 재적용해봐야 한다. 견고한 핵심을 방어하기 위하여 검증에 정면으로 맞서서 조정되고, 또 다시 재조정되며 심지어는 완전히 대치되기도 하는 것이 바로 보조가설들의 이러한 보호대인 것이다. 2) 만일 이런 모든 것이 진보적인 문제교체를 일으키면 하나의 연구프로그램은 성공적인 것이 되고, 만일 퇴보하는 문제교체를 일으키면 성공적인 것이 되지 못한다(Lakatos, 1970: 182, 번호 첨가 및 강조는 인용자 표시)

(중략)

라카토스에 따르면 어떤 연구프로그램이든 추상수준을 달리하는 명제들로 구성이 되며, 이 구성의 중심에는 후건부정식으로 단순히 부정될 수 없는 추상수준이 높은 핵심 이론이 반드시 존재한다. 골쏩과 마샬의 ‘계급 이론 없는 계급 분석 방법’은 논쟁 과정에서 베버주의의 기초를 드러내고 말았는데, 이런 입장에서 맑스주의 계급 분석이 사적유물론과 계급착취론을 ‘견고한 핵심’에 두기 때문에 이론종속적인 비과학적 방법이라고 비판하는 것은 분명한 자기모순이며, 근본적으로는 라카토스의 과학적 연구프로그램 개념에 대한 그들의 몰이해를 그대로 반영하고 있다. 라카토스 과학 방법 자체와 신베버주의 계급 분석에서 이를 수용한 방식 사이에는 분명 괴리가 존재하는 것이다.

라카토스에게 있어 과학적 연구프로그램은 일체의 이론과 결별한다는 의미에서 객관성을 확보하는 것이 아니라 관찰된 변칙사례들에 의해 즉각 연구프로그램 전체의 기본 원리를 부정하는 소박한 반증주의와의 거리두기3를 통해 객관성을 확보한다. “관찰이란 본래 이론 의존적인 것으로 그 자체 독립적으로 참인 순수 관찰이란 없다. 우리는 방법론적 결심에 의해 어떤 관찰적인 기초 진술을 참인 것으로 받아들일 뿐이다. 따라서 한 이론을 즉각적으로 폐기시킬 만한 관찰(반증사례)이란 있을 수 없다”(Lakatos, 1970: 24). 라카토스가 추구하는 과학의 객관성은 이론 자체의 내부 원리(발견법)를 통해 확보가 되기에 그의 과학적 연구 방법론은 이론적 진술의 내재적 합리성에 관한 이론을 제시해준다(Callinicos, 1982: 184). 이론의 내부 원리에 속하는 소극적 발견법은 과학적 연구프로그램의 견고한 핵심에 후건부정식이 사용되는 것 자체를 금지하는 것이고, 적극적 발견법의 역할은 연구프로그램에 의해 만들어지는 이론들을 체계화하고 변칙사례들을 해결하려는 기술을 고안하는 것이다. 소극적 발견법이 해서는 안되는 것을 지시해준다면 적극적 발견법은 해야만 하는 것을 지시한다(김정숙, 1992: 159). 라카토스에게 있어 한 연구프로그램의 과학성은 이와 같은 두 가지 발견법의 작동 여하에 의해 결정이 되며, 이것이 바로 이론의 내재적 합리성을 확보한다.4

(중략)

라카토스 과학 방법에 있어 이론적 진보의 기준은 이론과 경험의 단순한 일치가 아니라 연구프로그램의 ‘견고한 핵심’에서 사상(捨象)된 요인들을 보호대에 적절히 배치하는 능력, 즉 당면한 반박을 ‘설명’할 수 있는 능력 여하에 맞춰져야 한다. 이론적 작업에 있어 예측은 추상수준을 낮췄을 때 발생할 수 있는 현상들에 맞춰지는 것이지, 실제 발생하는 사건들에 맞춰질 수는 없다. 이렇게 봤을 때 새로운 사실의 예측이란 이론으로부터 독립된 외부 경험에서 새롭게 도출되는 것이 아니라 구체적인 현상을 설명할 시 연구프로그램의 견고한 핵심에서 사상되어 있던 요소들을 고려하며 이를 핵심과의 연관 하에 잘 설명할 수 있는 능력을 말한다. 그렇다면 이와 같은 기준에 입각해 봤을 때 맑스주의는 진보하는 과학적 연구프로그램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인가?

(중략)

생산관계 개념은 맑스주의 연구프로그램의 발견법을 구성한다고 볼 수 있다. 왜냐하면 이 개념은 설명이 이 프로그램에서 취해야 할 형식을 명시해주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특정한 생산양식과 사회구성체, 그리고 비경제적 사회관계의 개념들은 생산관계 개념들의 단순한 예증이 아니다. 이 개념들은 생산관계 개념에서만 도출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우리는 맑스주의도 다른 모든 이론처럼 연역체계가 아니라 하나의 생성과정, 내부적 변형과정이라고 말할 수 있다(Callinicos, 1982: 196)

위 인용문은 맑스주의 연구프로그램이 라카토스 과학방법론에 비춰봤을 때 진보적인 성격을 띤다는 주장을 담고 있다. 특히 맑스주의는 연역체계가 아닌 내부적 생성 과정에 있는 열린 체계라는 점이 강조되고 있는데, 여기서 연역체계란 보편적 명제와 일련의 초기 조건들의 결합에서 표현된 것이면 하나의 현상이 설명되었다고 간주하는 관점을 이른다. 이럴 시 구체는 추상 안에 포섭되어 도출되는 단순한 예증에 지나지 않게 된다. 하지만 맑스의 자본주의 분석을 보면 추상에서 구체로의 상승이 결코 이와 같은 의미의 연역이 아님을 알 수 있다. 불변자본과 가변자본, 사회적 총자본, 생산 비용 등의 개념은 ‘상품’이라는 추상 속에 포함되어 연역되는 것이 아니라 이를 기초로 하여 생성되기 때문이다. 또한 자본 일반 특성을 분석한 『자본』1권, 2권과 다수 자본들의 경쟁들로 구체를 분석한 3권 사이의 관계 역시 결코 이런 의미의 연역이라 볼 수 없다.

(중략)

그렇다면 본 절의 목적인 계급 분석의 추상수준 논의로 돌아와 이 문제를 생각해보도록 하자. 이는 맑스주의 계급 분석도 생성과정에 있는 열린 체계, 진보하는 연구프로그램이 될 수 있는지를 살펴보는 것이다. 일단 계급죽음론을 경험적 지표에서 주장하는 경우 - 전통적 의미에서의 육체노동자 감소, 계급 선거 경향의 약화, 정치 이외 생활영역에서의 계급의식 약화를 입증하는 경험적 연구 - 는 경험적 진보에는 단절이나 유예가 인정되기 때문에 당면한 반박 사례들에도 불구하고 한 프로그램을 독단적으로 고수할 수 있는 합리적인 이유를 찾을 수 있다(실증주의와 소박한 반증주의에 대한 반비판). 물론 이는 영구적인 합리화의 논거라기보다는 임시적인 논거에 해당한다. 하지만 맑스주의 계급 분석에서 가령 계급적 투표의 약화 현상이 어떤 정치적 상황 하에서 이루어진 것이며, 어떤 지배 이데올로기가 작동하였는지를 구체적으로 살펴보는 연구를 이런 유예 속에서 적실히 진행한다면 현상 그 자체만을 통해 비판받는 것이 아니라, 그 현상을 설명할 수 있는 능력 여하의 초점이 맞춰져 이론적 진보의 기회를 얻을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이론적 진보의 경우, 생산관계 개념만으로 설명될 수 없는 여타의 사회적 관계와 사회구성체 논의를 원인/결과론이나 본질/현상론에서와 같이 단순한 예증, 환원론으로 설명하는 오류를 범하지 않는다면 충분히 성취될 수 있다. 지금까지 진행되어온 “맑스주의 국가론”에 대한 열띤 논쟁들이 이를 방증하는 하나의 지표로 간주될 수 있다고 본다.

여기서 한 가지 강조되어야 할 것은 계급 분석의 경우도 충분히 여러 추상수준을 갖는 하나의 연구프로그램이 될 수 있다는 점이다. 가령 특정한 사회구성체의 계급을 분석하는 연구나 아니면 비교연구를 위한 계급 구조 모델을 고안하는 연구 모두 추상수준은 다르지만 계급 분석 영역에 속한다. 따라서 계급 죽음 논쟁에서 제기된 추상수준과 관련한 논쟁은 이론을 구성하는 데에 있어 분석이 갖는 위치와 관계를 재검토하는 방식을 통해 해결될 수 있다고 본다. 다만 어떤 추상수준에서 연구를 진행하더라도 맑스주의 계급 분석이 유지해야 하는 견고한 핵심을 확인할 필요가 있는데, 이는 ‘생산’에 입각한 계급 개념이다. 이는 단순한 경제환원론이 아니라 라카토스의 개념을 빌리면 방법론적 결심(methodological decision)이자 루벤(Roben)의 말을 빌리면 계급적 성실성에 입각한 정치적 선택이다. 물론 이런 주장 속에 환원론의 위험이 내재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물적 기초에서 사회의 구성을 설명하는 맑스의 유물론적 관점에 입각한다면 생산에 기반한 계급 형성과 사회 구성 개념은 맑스주의 계급 분석 프로그램에서 결코 폐기될 수 없는 견고한 핵심임에 분명하다.

2) 이론의 설명력 측면 - 토대·상부구조론과 SCA 모델

(중략)

다시 말해 경제를 우위에 둔 맑스의 토대·상부구조론은 계급을 정치와 사회 변화의 힘으로 설명할 시 단선적이고 환원적인 결정론으로 필히 귀결될 수밖에 없는 매너리즘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와 같은 비판에 대한 정확한 반비판은 상술한 두 가지 방향의 결정론을 다소 구별 짓는 견지에서 이루어질 필요가 있다고 본다. 계급 구조를 분석하는 것이 곧 경제주의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며, 경제의 동학을 분석하는 것이 곧 계급에 대하여 유일하게 구조적 접근만을 가능하게 만드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중략)

맑스 사후 진행된 이런 결정론적 해석에 대해 맨 먼저 문제를 제기한 사람은 다름 아닌 엥겔스였는데, 그는 맑스의 토대·상부구조 논의는 생산관계가 사회의 현실적 기초임을 분명히 하려는 의도를 담고 있을 뿐 그 이상의 함의를 갖지 않는다고 「블로흐에게 보낸 편지(1890년 9월 21-22일)」에서 분명히 밝힌다.

유물론적 역사 해석에 따르면 역사에서 궁극적으로 규정적인 요소는 현실적 생활의 생산과 재생산입니다. 맑스와 내가 항상 주장한 것은 그 이상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만약 이것을 경제적 요소가 유일한 규정적 요소라고 왜곡해서 말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이 주장을 무의미하고, 추상적이고, 이치에 맞지 않는 문장으로 바꿔 버리는 셈이 됩니다. 경제적 상황이 기초이지만, 그러나 상부구조의 다양한 요소들 - 계급투쟁의 정치적 형태와 그 결과, 즉 전쟁의 승리 후에 승리한 계급이 만든 헌법, 법률 형태들, 그리고 심지어 이러한 모든 현실적 투쟁에서 참여자들의 머릿속에 반영된 것들, 즉 정치적·법적·철학적 이론들, 종교적 관점들과 그리고 그것들이 체계적 교조로 발전하는 것 - 또한 역사적 투쟁의 과정에 영향력을 행사하며, 많은 경우에 그것의 형태를 압도적으로 규정합니다. 한없이 많은 모든 우연한 사건들 가운데서 경제적 운동이 최종적으로 자신을 필연적인 것으로 나타내는 것은, 이러한 모든 요소들의 상호 작용 속에서입니다(Engels, 1890: 488, 강조는 인용자 표시).

콜리어는 맑스의 유물론적 역사관은 더 일반적인 유물론적 세계관을 역사에 적용한 것이라고 보는데, 이와 같은 관점에서 보면 토대·상부구조론이 단순히 경제적인 것(경제적 유물론)이 아닌 물질적인 것의 우위 자체(유물론)를 나타낸다는 좀 더 유연한 관점을 취할 수 있게 된다(Collier, 2005: 134). 위 인용문의 강조된 부분을 보면 맑스와 엥겔스는 인간의 역사를 추동하는 힘이 현실 생활의 생산과 재생산에 있고, 이 (재)생산 과정은 상부구조의 다양한 요소들 없이는, 엥겔스의 말대로 하면 이 요소들의 상호작용 없인 불가능하다는 점을 밝히고 있다. 문제는 경제적 운동이 최종적으로 자신을 필연적인 것으로 나타낸다는 구절을 여타 심급들에 대한 경제의 일방적 결정으로 해석하려드는 데에서 발생한다.

엥겔스의 위와 같은 다소 거친 진술이 몇 가지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 있다는 점은 인정한다.5 하지만 여기서 명시되어야 할 것은 경제라는 심급이 현실적 생활의 (재)생산 개념과 결코 동일한 개념이 아니라는 점이며, 이 경제라는 심급이 필연적인 운동으로 나타나는 것은 생산양식의 재생산 과정, 즉 이미 경제를 비롯한 여타 심급들이 생산양식을 재생산하고 있는 구조 속에서 이루어진다는 사실이다. 실상 경제와 정치의 강력한 이분화는 자유주의 전통에 깊이 뿌리박고 있는 것으로, 맑스와 엥겔스의 토대·상부구조론을 이런 지반 위에서 이해하려는 시도가 경제결정론이란 오독을 낳는 주요 원인으로 작용하고 있다. 경제가 무한히 흩어지는 우연들 속에서 자신을 어떻게 필연적인 것으로 드러낼 수 있는가를 사유하는 것이 서로 독립된 심급들 중 단순히 하나의 심급(경제)에 절대적 우위를 두는 이데올로기적인 시도로 해석되어서는 안된다. 물질적 생활의 (재)생산을 사회의 기본적인 구성 원리로 사유하는 유물론의 관점에서 경제 역시 정치를 비롯한 여타 심급들과의 상호 관계에서만 규정될 수 있는 제약적인 개념이기 때문이다. 맑스의 토대·상부구조라는 건축학적 비유는 물질적 생활을 (재)생산하는 생산관계가 ‘현실적 기초’라는 점을 드러내기 위한 강력한 장치일 뿐 기계적·표현적 인과율을 따르는 경제결정론이 아니다. 맑스주의자들이 맑스 사후 사회의 동학을 설명하기 위해 이데올로기적·정치적 요소들이 경제와 상호작용하는 방식을 포착하여 설명하려는 시도를 끊임없이 전개해왔다는 사실 자체가 이를 방증하는 지표로 볼 수 있을 것이다.6

결론적으로 맑스가 다소 거칠게 기술한 토대·상부구조론만을 근간으로 하여 맑스주의 계급론에서 단선적인 환원 도식, 즉 경제결정론을 도출하려는 시도는 지극히 지엽적인 수준에 그친 ‘비난’으로 볼 수 있다. 맑스의 유물론적 역사관은 “인간이 환경을 만드는 것과 마찬가지로 환경이 인간을 만든다는 것을 입증하며”, “이념으로부터 실천을 설명하지 않고, 물질적 실천으로부터 이념의 형성을 설명하는”(Marx, 1845; 73~74) 관점일 뿐 계급죽음론자들이 주장하는 경제의 단선적인 결정론으로 볼 수 없다. 따라서 맑스의 토대·상부구조론에서 계급을 정치와 사회 변화의 힘으로 설명할 시 단선적이고 환원적인 경제결정론으로 필히 귀결될 수밖에 없는 매너리즘이 존재한다는 비판은 폐기되어야 한다.

다음은 구조와 행위(혹은 역사)를 대립시키며 ‘계급 구조의 결정론적 성격’을 반박하는 비판에 대해 살펴보도록 하자. 이와 같은 비판은 맑스주의 계급론을 앞서 살핀 것과 같이 경제결정론으로 해석하는 수준에서만 제기된 것이 아니라 계급죽음론에 맞서 맑스주의 계급론을 옹호·복원하려는 계급 분석자들조차 맑스의 저작들, 특히 저작들 사이의 관계에서 이와 같은 결정론을 읽어내고 있기에 문제가 심각하다.

(중략)

  <표 3> 맑스 계급 분석에서 추상의 이론적 대상과 수준 [출처: (Wright, 1985: 28)의 <표 1-1>]

위에 제시된 표는 라이트가 맑스주의 계급 분석의 공백을 찾아낸 결과를 담고 있는데, 검게 칠해진 부분은 맑스가 집중적으로 분석한 영역이고, 그 외 영역은 분석이 소홀했던 영역이다. 라이트는 여기에 덧대어 맑스가 계급 구조와 계급 형성에 대한 일관된 이론을 대강이라도 제공하지 않아 현대 맑스주의 계급 연구는 추상적인 계급 구조 분석과 계급 형성 분석의 간극을 이으려는 시도를 하고 있다고 주장한다(Wright, 1985: 32~33). 이런 문제의식 하에 그는 사회구성체 수준의 계급 구조를 분석한 바 있는데, 그 결과는 베버의 이념형과 매우 유사한 비역사적인 유형론을 제시하는 것에 그치고 말았다.

그의 이런 참담한 결과를 차치하더라도 그가 계급 구조와 형성을 지나치게 분리된 분석 대상으로 간주하여 맑스의 추상수준에 따른 계급 분석 작업을 적실히 평가하지 못한 오류를 범했음은 분명하다. 생산 양식 수준을 분석한『자본론』에도 계급들 간의 변혁적 투쟁(가령 시초축적과정)이 다뤄지고 있으며, 사회구성체 수준에서 분석을 시도한『루이 보나파르트의 브뤼메르 18일』에도 계급분파들이 정치 무대에서 연합하는 양상이 주어진 생산양식과의 연관 하에 고찰되고 있기 때문이다.7

(중략)

맑스에게 있어 ‘계급’은 투쟁(형성)과 구조의 통일로서의 모순물이다. 여기서의 모순은 순수한 대립과는 구별되는 하나의 끝없는 운동을 지칭하는 구체적 개념이다. 따라서 맑스는 사회를 분석하는 데에 있어 계급을 직선적으로 전개하지 않고, 그것이 투쟁(형성)에 의해 결정된다는 측면이 충족된 것으로 전제하고 난 후 구조라는 측면으로부터 그 법칙성을 명확하게 하며(독일 이데올로기, 자본론),8 그 다음에 그것을 역으로 투쟁(형성)의 측면에서도 법칙화 하는데(계급 분석 3부작)9 최후에 이 두 측면은 변증법적으로 통일되어 현실의 ‘계급’을 설명할 수 있게 된다. 계급 죽음 논쟁에 참여한 신맑스주의 계급 분석가들이 계급을 투쟁(형성)과 구조의 변증법적 통일로 보는 맑스의 관점을 제대로 포착하지 못한 면이 있다면(계급 구조와 계급 형성의 분리), 맑스주의 계급론을 기계적인 SCA 모델이라 비판하는 계급죽음론자들은 이런 분리를 기반으로 하여 S에 해당하는 계급 구조를 경제와 곧바로 등치시키며 맑스주의 계급 분석을 투쟁이 결여된 경제결정론으로 치부하는 우(愚)를 범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엥겔스가 밝힌 바 있듯이 맑스에게 있어 구조 - 사실 맑스는 계급 구조라는 표현을 쓴 바가 없다 - 는 생산관계와 이를 재생산하는 기능을 담당하는 모든 심급들의 상호작용 속에서만 이해될 수 있으며, 현실적인 생산과정의 담지자인 계급을 분석하는 작업은 이 상호작용을 구체적이고 실증적인 역사 연구를 통해 밝혀내는 것에 다름 아니다. 따라서 맑스가 구체적인 국면을 분석할 때 상부구조에 속한 여타 요인들을 계급 분석의 기초로 삼기 때문에 생산관계를 우위에 둔 그의 토대·상부구조론은 폐기되어야 한다는 비판은 그야말로 맑스의 역사 및 사회를 분석하는 유물론적 방법에 대한 몰이해를 반영하는 것일 뿐인데, 문제는 이런 비판이 횡행하게 된 책임이 일정 정도 맑스주의 계급 분석자들에게 있다는 점이다.

(중략)

구조/행위 논쟁으로 일컬어지는 대립을 보면 구조적 사회 분석에 대한 이와 같은 오해와 왜곡은 심각한 편이다(이 대립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연구자의 석사논문 Ⅱ장 1절을 참고하면 된다). 구조적 접근에 대해 생산양식이란 경험적으로 존재하지 않는 구조와 특수하고 국면적이며 무수히 많은 비결정성을 갖는 사회구성체 즉 역사를 철저히 구분하여 절대적인 결정론과 다른 것으로 환원할 수 없는 우연성이란 명백한 이원론을 낳는다고 비판하는 것은 실상 재고될 필요가 있다.

구조적 접근에 대한 이와 같은 왜곡을 바로잡으려는 시도는 코헨의 작업에서 일정 정도 발견된다. 그는 “구조 그 자체를 하나의 과정으로 기술하는 것은 구조의 개념과 역사유물론의 의도를 모두 침해하는 것”(Cohen, 1979: 182)이라고 밝히면서 구조 개념의 용도가 과정의 존재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과 사회적 과정이 변화시키는 것 중의 하나가 사회 자체의 구조라는 점 등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고 종용한다.

(중략)

따라서 구조적 접근에서 자본주의 생산양식과 자본주의 사회, 그리고 계급 구조와 계급투쟁을 개념상 구분하는 것은 끊임없이 운동하는 자본주의 동학과 생산관계를 파악하기 위해 맑스가 행한 변증법적 접근의 연장선으로 이해할 필요가 있다. 생산양식이라는 추상에서 시작하여 사회구성체라는 구체에 도달하는 맑스의 방법은 그의 전 저작들을 통해 확인할 수 있으며, 이는 사회라는 총체를 이해하는 과학적 방법이 구조적 접근과 역사적 접근 그 어느 한 방향에서가 아니라 양자 모두를 필요로 한다는 것을 방증한다. 물론 그간 맑스주의 진영 내에서 구조적 접근이 다소 우세하였다는 점을 간과할 수는 없다. 하지만 구조적 접근에 대한 역편향으로 역사적 접근을 주장하기보다는 그간 좀 더 설명을 필요로 했던 계급의식의 형성과 계급행동의 역학을 정치적, 법률적, 제도적 영향 하에 고찰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한다는 점에서 역사적 접근에 의미를 부여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다만, 이 때 행위로 환원되지 않는 사회구조적 사실이 엄존한다는 사실과 이 구조가 현실의 생산과정, 즉 토대를 기반으로 형성된다는 점이 간과되어서는 안 된다는 점이 강조될 필요가 있다.10

(중략)

3) 분석적 측면 – 노동가치론과 양대 계급론

이제 맑스주의 계급 분석이 결국 베버주의화 된다는 테제를 살펴보자. 이 주장의 근간이 되는 것은 라이트의 신맑스주의 계급 분석인데, 그가 복잡한 계급 배치를 경험적 연구를 통해 설명하는 과정에서 계급을 증대해야 한다는 압박을 받게 됐고, 이는 결국 계급을 설명하는 다양한 요인들을 설정하면서 베버주의 계급 분석과 같아지는 결과를 초래하게 되었다는 지적이다.

(중략)

  <표 4> 자산에 따른 착취와 계급구조의 역사적 이행의 유형 [출처: Wright(1985: 124, 132, 159)의 <표 3-2>, <표 3-4>, <표 4-1> 혼합]

지금까지 살펴본 바 있는 로머와 베버의 계급 분석에서 시장 교환이 차지하는 서로 다른 위치, 그리고 베버주의와 달리 기술 및 지위를 확실히 착취와 관련시키며 계급 구분 요소로 수용하는 방식 등은 계급 죽음 논쟁에서 제기된 맑스주의 계급 분석의 베버주의화 경향 테제가 잘못된 것임을 입증한다. 라이트 스스로도 베버주의는 맑스주의 계급 개념이 갖는 관계적, 적대적, 착취중심적, 생산중심적 제약(주 19에 제시된 제약 ③~⑥) 중 뒤의 두 제약을 완전히 벗어난다고 평가한 바 있듯이(Wright, 2000: 27~31) 베버(주의)가 계급 갈등을 생산에서 형성되는 공통된 이해보다는 시장에 만들어진 분할에 초점을 맞추면서 설명하는 것이 사실이기에 양자의 유사성을 주장하는 것은 분명 문제가 있다. 하지만 베버주의와 선을 긋기 위해 라이트가 새롭게 고안한 계급 분석 방법 또한 다른 이유에서 맑스주의 계급론을 이탈하고 있는 것으로 보이는데, 그가 새롭게 복원한 ‘착취’ 개념에는 계급의 관계적, 적대적 성격이 매우 약화된 형태로 나타나고 있기 때문이다. 이는 라이트가 기술 자산에 의한 착취를 분석하는 데에서 가장 극명히 드러나는데 이때 이루어지는 착취는 적대적 관계라기보다는 단순한 불평등 관계 정도에 그친다. 즉 착취 기제에 대한 인과적 설명이 결여되어 있는 것이다.

자본 자산, 노동력 자산, 조직 자산의 경우와 달리 기술 자산은 소유 그 자체로부터 어떠한 관계적 소유권들을 끌어낼 수 있는지가 전혀 명확하지 않다. 확실히, 기술 자신이 조직적 위계 내에서 어떤 직위에 채용되는지 여부를 결정하는 기준이라면, 기술이나 학력을 가진 개인은 그러한 학력을 갖지 못한 사람들과 특별한 관계에 있을 수도 있다. 그러나 이는 기술과 조직 자산 사이의 연결 관계 때문이지, 기술 자산 그 자체 때문은 아니다. 여기서 할 수 있는 최대한의 주장은, 전문가와 비전문가는 일종의 느슨한 관계로 존재한다는 것이다...... 기술과 학력이 착취의 기반이 될 수 있을지는 몰라도, 그 자체가 적어도 노동력, 자본, 조직 자산과 동일한 의미로 진정한 계급관계의 기반은 아닌 것처럼 보인다(Wright, 1985: 127~128).

(중략)

하지만 라이트는 노동력의 상품화가 착취의 기반이라는 맑스의 노동가치론을 부정함으로써 잉여노동의 창출 및 전유 기제를 자본주의 동학과 연계시켜 사유할 수가 없었고, 그 결과 소득의 차이를 가져오는 여타 요인들(조직에서의 지위나 기술)이 생산수단 자체의 소유로부터 발생하는 통제 효과와 대별되지 못한 채 부유(浮游)하고 마는 상황이 초래된 것이다.

(중략)

라이트는 베버가 기술 소유를 통해 자본주의 계급관계를 설명하려는 것을 두고 “생산양식의 추상 수준과 사회구성체의 추상 수준을 한데 묶어버렸다”(위와 동일: 149)고 비판한 바 있지만, 그도 역시 기술이나 조직에서의 지위 같은 계급 분파 및 파당을 설명하는 요소를 생산양식의 분석 수준으로까지 끌어올림으로써 동일한 오류를 범하고 있는 것이다. 이는 3차 계급 죽음 논쟁에서 워터스가 제시한 바 있는 4가지 사회 모델이 담지한 문제를 상기시키는 데(이에 대해서는 연구자의 석사학위논문 pp. 34~37을 참고하면 된다), 역사적 현상을 설명하기보다는 이를 관념적으로 구성된 유형학에 따라 파편적으로 배열하는 베버의 이념형 분석이 워터스뿐만 아니라 라이트의 계급 분석 방법에도 어느 정도 내재되어 있다. 초기 라이트의 모순적 계급 위치 개념에서는 자본주의 동학과 연계하여 기업의 소유 구조 및 노동의 통제 형태에 따라 계급을 분석하는 시도를 엿볼 수 있었으나, 이후 수정된 착취 중심적 계급 개념에서는 계급이 자본주의 생산양식의 역사적 과정에서가 아닌 상이한 생산양식 유형 사이의 접합(articulation)으로 설명이 되고 있기 때문이다.

(중략)

따라서 라이트의 수정된 착취 중심적 계급 분석 방법은 맑스주의 계급 분석과 등치될 수 없는 라이트 개인의 새로운 방향 모색으로 보는 것이 적확하다. 또한 노동자와 자본가처럼 생산관계 속의 그들의 위치에서 분명하고 일관된 이해가 도출되지 않는 중간계급의 애매한 계급성은 무리하게 명료한 이해관계를 도출하려는 시도에서보다는 자본주의 발전의 역사 속에서 이루어지는 구체적인 노동과정의 분석을 통해 설명하는 것이 맑스주의 계급 분석의 목적과 부합하는 분석 방법이라는 것이 확실시 될 필요가 있다고 사료된다.

4. 나가는 말

크롬프톤은 사회학에 대한 고전적인 논평을 가한 머튼(Merton)의 허위 문제(pseudo problems)라는 개념을 차용하여 본 연구에서 다룬 1990년대 계급 관련 논쟁을 허위 논쟁(pseudo-debates)이라 평가한 바 있다(Crompton, 1993: 36). 허위 논쟁이란 ‘계급’과 같은 사회과학적 연구 대상에 관하여 서로 다른 이론적·방법론적 가정을 전제하는 이론가들 사이에서 벌어지는 소모적이고 비생산적인 논쟁을 말한다. 물론 경쟁하는 이론들의 계급 정의와 연구 목적이 동일하다면 그 이론들 사이의 유용성이나 타당성을 평가하고 비교하는 작업이 원활하게 이루어질 수 있지만, 이는 현실적으로 기대하기 어렵다. 계급 죽음 논쟁을 비롯한 계급 관련 논쟁들이 허위성을 띠게 되는 것은 계급 분석에 대한 메타 이론적 접근을 지나치게 일축하거나 혹은 적확하게 다루지 않아 발생한다는 측면을 결코 배제할 수 없다.

연구자는 이런 관점에 입각하여 계급 죽음 논쟁에 개입코자 하였다. 이는 이론들 사이의 적당한 절충과 종합을 생산적 논쟁의 필요조건으로 받아들이게 하려는 절충주의와의 분명한 거리두기를 의도한 것이지만, 이런 접근은 분명 맑스주의 계급 분석에 대해 의의와 한계 모두를 갖는다. 사회과학 영역에서 맑스주의 계급론의 정립을 위해서는 보조 벨트 영역에서의 경험적 연구가 필히 이루어져야 하는데, 본 연구는 직접적으로 이를 다루고 있지 않다는 측면에서 한계를 갖는다. 하지만 동시에 상술한 의미의 경험적 연구가 원활히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과학적 연구프로그램의 방법론과 특정 과학을 구성하는 개념 및 명제들을 확고히 하는 이론 작업이 병행되어야 하는데 본 연구가 이런 메타 이론적 접근을 시도한다는 측면에서 의의 또한 갖는다. 결론적으로 메타 이론적 관점에서 계급 죽음 논쟁에 개입한 본 연구는 맑스주의 계급론의 정립과 활성화를 위한 초석임에는 분명하나, 결코 그 완성은 아니라는 점에서 추후 계속적인 연구를 필요로 한다.


* 주

1) 계급 죽음 논쟁의 전반적인 진행과정과 구체적인 내용을 알고자 하면 연구자의 석사학위논문 Ⅱ장을 참고하면 된다.

2) Lockwood, D.(1981), ‘The weakest link in the chain: some comments on the Marxist theory of action’, Research in the Sociology of Work, 1, pp. 435~481.
이 논문은 구조적 통합(system integration)과 사회적 통합(social integration) 사이의 개념적 연관이 사회학에서 가장 큰 문제로 다뤄졌다는 점을 밝히면서, 맑스주의 이론에 이런 강한 연관관계가 내재하고 있다는 점을 비판한다. 록우드는 자본주의 축적에 대한 경제 이론과 프롤레타리아 혁명에 대한 정치 사회학 혹은 철학적 인간학이 맑스주의에서는 지나치게 단순히 관련 맺고 있다고 보고, 이런 관련이 맑스주의 이론의 가장 결정적인 문제적 특성이라고 지적한다. 그러면서 그는 구조와 사회적 통합 사이의 주요한 연관은 기본적으로 갈등과 질서에 대한 불안정적이고 모순적인 설명을 낳는 ‘행동에 관한 실용적인 개념’에 의해 구축된다는 것을 강하게 주장한다. 그에게 있어 계급 이론의 가장 영향력 있는 옹호자들은 행위의 이런 개념으로부터 발생하는 문제들을 단순히 회피하거나 혹은 구조와 사회적 통합 사이의 고전적인 맑스주의 공식을 거부하는 방식을 통해 해결하고 있는 것으로 평가된다. 폴은 맑스주의 이론에 대한 이런 록우드의 비판을 수용하여 맑스주의 계급론을 SCA 모델이란 단선적인 행위모델로 지칭한다.

3) 라카토스가 말하는 소박한 반증주의란 경험적 관찰에 의해 확보된 사례에 의해 이론 자체가 반증될 수 있다고 규정하는 관점을 말한다. 이 관점에서는 반박 사례에 대해 임시방편적(ad hoc) 보조 가설을 도입하여 반증을 피하는 것이 비과학적인 방법으로 문제시 되지만, 라카토스는 이런 보조 가설들의 도입이 반증주의를 세련화 하는 방법으로 본다. 라카토스의 소박한 반증주의와의 거리두기 방식을 도식화해보면 다음과 같다.
T1(C+A1) → 변칙사례 → T2(C+A2)...(C: 견고한 핵심, A: 보조가설들)

4) 캘리니코스는 객관성 이론을 제공하려는 라카토스의 이런 방법이 맑스주의의 진리관을 암암리에 전제하고 있다는 점에 주목한 바 있다: “라카토스는 비록 그의 사후에 발표되었지만 훨씬 이전에 쓴 논문에서 엥겔스의 『반뒤링론』과 레닌의 『유물론과 경험비판론』을 원용하여 형이상학적 실재론(metaphysical realism) 혹은 유물론 - 실재의 세계는 인간 정신으로부터 독립하여 일정하게 자연법칙의 지배를 받는다는 사상 - 과 인식론적 낙관론(epistemological optimism) - 즉 인간은 자연법칙을 탐구할 수 있으며 이 법칙에 관한 정확한 또는 적어도 근사치에 가까운 관념을 형성할 수 있다는 사상 - 을 지지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 두 가지 명제, 그리고 여기에 함축된 진리의 일치론은 라카토스의 과학적 연구프로그램 방법론이 필요로 하는 인식론적 토대를 제공해준다”(Callinicos, 1982: 187).

5) 엥겔스의 위 서신이 갖는 몇 가지 문제에 대해서는 알뛰세르의『맑스를 위하여』3장 “모순과 과잉결정”의 “부록”(Althusser 1969: 117~128) 부분을 참조하면 된다.

6) 맑스주의 진영 내의 이런 시도들에 대해서는 제솝의 『전략관계적 국가이론』의 제1부 3장 “마르크스주의, 경제결정론, 상대적 자율성”(Jessop, 1990: 146~158) 부분을 참조하면 된다.

7) 맑스의『루이 보나파르트의 브뤼메르 18일』은 상부구조의 독자적인 자율성을 보인 저작으로 평가받거나 혹은 역사유물론을 적용한 과학적 분석과는 거리가 먼 텍스트로 간주되기도 한다. 이는 구체적인 국면을 분석할 시 생산관계를 우위에 둔 분석이 맑스에게서조차 유지되기 힘들었다는 비판이 왕왕하게 만들었지만, 맑스의 다음과 같은 보나파르트 체제에 대한 분석은 이런 비판에 대한 반비판을 충분히 가능케 한다.
“정통파 왕정은 대지주에 의한 세습지배의 정치적 표현에 불과한 것이며, 7월 왕정은 부르주아 졸부들이 찬탈한 권력의 정치적 표현이다. 그러므로 이 두 정파를 구분 지을 수 있는 것은 이른바 원칙에 있었던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오히려 그들 존재의 물적 조건, 다시 말해서 상이한 두 종류의 재산과 도시와 농촌 사이의 오래 전부터 있어온 대립, 즉 자본과 토지소유와의 적대에 있었다.,,,,, 상이한 부의 형태와 사회적 존재조건, 그 위에 본능과 독특한 형태의 감정, 환상 그리고 사고방식과 인생관이라는 상부구조가 놓여 있는 것이다. 계급 전체가 물질적 기초와 이에 상응하는 사회적 관계로부터 이러한 상부구조를 창출하고 형성한다”(Marx, 1852: 49).

8) 맑스의 『독일 이데올로기』에서 이를 확인해보면 다음과 같다.
“이(유물론적) 역사관의 토대는 현실의 생산 과정을 - 생활 그 자체의 물질적 생산으로부터 출발하여 - 상세하게 설명하고 그리고 그 생산양식과 관련되어 그것에 의해 만들어지는 교류형태를 - 즉 모든 역사의 토대인 여러 단계의 시민사회를 - 포괄적으로 파악하고, 그리고 그 시민사회가 국가로서 활동하는 모습들을 묘사함과 함께 각종의 이론적 생산물인 의식 형태, 철학, 종교, 도덕 등을 이 시민사회를 근거로 하여 설명하고, 또한 시민사회라는 토대를 근거로 하여 그것들의 형성과정을 추적하는 것이다”(Marx, 1845: 73).

9) 맑스의 『프랑스 내전』에서 이를 확인해보면 다음과 같다.
“꼬뮌의 존재는 적어도 유럽에서는 계급 지배의 통상적인 골칫거리이자 필수 불가결한 외투인 군주제의 부재를 전제로 하였다. 꼬뮌은 공화국의 진정한 민주주의 제도의 기초를 마련하였다. 그러나 ‘값싼 정부’도 ‘진정한 공화국’도 꼬뮌의 궁극적인 목표는 아니었다. 그것들은 꼬뮌의 부수물일 뿐이었다...... 꼬뮌의 진정한 비밀은 이것이었다. 꼬뮌은 본질적으로 노동자 계급의 정부였으며, 전유 계급에 대한 생산 계급의 투쟁의 산물이었으며, 노동의 경제적 해방이 완성될 수 있는, 마침내 발견된 정치형태였다”(Marx, 1871: 90~91)

10) 본고의 목적은 사회 분석에 대한 구조적 접근에 대한 오해와 편견을 바로잡는 것에 있다. 하지만 이런 오해의 원인이 구조적 접근의 발전 과정에 전혀 내재하지 않는다고 주장하는 것은 아니다. 여기서 알뛰세르의 뒤를 이은 풀란차스에 대해선 기실 유보가 필요하다. 그는 “생산양식은 엄격한 의미에서 현실에서는 존재하지 않는 추상적-형식적 대상을 구성한다”(Poulantzas, 1973: 15)고 밝히면서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에 구조적으로 적합한 국가 ‘유형’을 고안하는 이론적 작업을 수행한다. 이런 이론적 작업의 함의는 한 국가가 자본주의적인 것은 자본주의적 생산관계와의 현실적-역사적인 연관 때문이 아니라, 자율적인 이론적 구성이 추상적이고 형식적인 자본주의 생산양식으로부터 도출하는 일정한 구조적 특성들 때문인 것이 된다. 하지만 이럴 시 구조적 논리가 역사적 사실을 압도하게 된다. 역사적으로 실재하는 사회구성체들 안에서 국가와 생산양식 사이에 나타나는 실제로 유력한 관계들은 이러한 구조적 논리와는 별 관계가 없으며 거의 우연적인 것으로만 나타날 수 있는 것이다. 풀란차스의 이런 지나친 구조 중심적 접근에 대해서는 그의 Political Power and Social Classes(1973)에 잘 나타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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