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형록 에세이] 과학지식은 얼마나 타당한 것인가

최형록(인문학자)

  최근 미국의 여론조사기관 <해리스>에 따르면 미국인 대다수는 기적을 믿고 있으며 절반에 이르는 사람들이 유령을 그리고 1/3 정도의 사람들이 점성술을 믿고 있다고 합니다. 성경의 카인을 부끄럽게 만들 만한 부시를 대통령이랍시고 선출한 한편 세계 최대의 과학강국인 미국의 상황이 이럴진대 독립군을 때려잡던 천황의 충신을 대통령으로 선출하여 오늘날 그 ‘조국근대화’의 추악한 몰골을 여전히 제대로 직시하지 못하는 한편 출세욕을 교육열이라고 믿고 있는 이 호랑이 엉덩이 같은 나라의 상황은 어떠할까요?

  ‘백번 듣느니 한번 보느니만 못하다’(百聞 而 不如一見)는 속담은 얼마나 진실일까요? ‘눈’에 보이기로는 태양은 동쪽에서 떠서 서쪽으로 집니다. 이렇게 보이는 대로 생각하면 위의 속담은 수 만 번 지당한 것입니다. 그리고 천동설은 옳은 것 같습니다. 그러나 초등학교에서 지동설에 대해서 선생님의 설명을 듣고 교과서의 설명을 읽으면서 어린아이들은 눈에 비치는 시각적 경험이 진실이 아니며 적어도 태양계라는 개념, 보다 넓은 맥락에서 지동설이 진실임을 학습합니다. 따라서 이 속담은 ‘반짝반짝 빛나는 것이라고 모두 금은 아니다’라는 속담의 비판과 함께 이해할 때 우리는 체험의 의미를 보다 지혜롭게 알게 될 것이 틀림없습니다.

                          

  17세기―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겪으면서 조선조가 새로운 역동성을 지니게 될 무렵인데 왜란과 호란이라는 명사에는 소 중화(小 中華)주의적 곰팡내가 나지 않습니까?―에 초석이 놓인 근대 서구과학의 정신은 무엇일까요? 실험과 관찰이라고 알고 있습니까? 그것뿐만 아니라 ‘사고(思考)실험’이라는 것 역시 필수불가결한 것입니다. ‘사고실험’은 이탈리아의 갈릴레오가 운동법칙을 세우는 과정에서 독창성을 발휘한 과학적 연구방법입니다. 요컨대 과학적 실험과 관찰은 어떤 가설로부터 계획되는 것이며 이 가설은 어떤 개념들 사이의 관계 예컨대 인과관계와 같은 것으로 구성됩니다.

‘땅 짚고 헤엄치기’라는 속담은 이런 점을 잘 보여주는 비과학적 속담들 가운데 한 가지입니다. 이 속담은 우선 익사라는 공포감을 염두에 둔 것인데 헤엄치는 물의 깊이에 대한 한계설정이 없습니다. 비과학적인 이유는 물의 부력에 대한 고려가 전혀 없다는 것입니다. ‘부력’(浮力)에 대한 개념이 없었으니 이 땅에서는 아르키메데스의 그리스와는 달리 아무리 ‘부력’(富力)을 지닌 왕이라도 어쩌면 왕관 제조자의 속임수를 ‘시일야방성대곡’이 울릴 때까지 벌주지 못했을지도 모릅니다.

  쑥과 마늘을 먹고 인간이 되었다는 웅녀의 아들이 건국한 나라의 이웃 대륙에 있던 노나라의 공자는 ‘지나치면 부족함만 못하다’(過猶不及)고 했습니다. 비과학적 사고와 세계관도 극복해야하는 한편, 만사를 ‘환원주의적’인 과학, 끝이 열려 있다고 생각하지 않고 거의 완벽한 것이 과학이라고 생각하는 ‘과학주의’적 사고와―존 호간의『과학의 종말』은 이런 입장을 대변합니다―세계관 역시 극복해야 합니다.

‘과학주의’는 과학에 관한 일종의 ‘물신주의’(物神主義)입니다. 이것은 자본주의 체제에 있어서 ‘화폐물신주의’와 같은 사고방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흔히 ‘돈이 웬수야’라고 말하고 생각합니다. 원수라면 사형을 시켜야할 것입니다. 화폐에 에이즈가 발생할 수 있으며, 자기기만의 지적 능력이 있으며, ‘전원 교향곡’을 작곡할만한 창조성이 있습니까? 사실 원수인 것은 ‘사회적 인간관계’인 것임을 정확히, 철저히 깨달아야 합니다. 과학(적 지식) 역시 문화의 일 구성원소로서 ‘사회적이며 역사적인 인간관계’의 맥락 밖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2002년 회계연도 미국의 군사연구비는 580억 달러에 이르렀습니다. 약 70조원에 달하는 액수인데 고정 환율로 계산하면 소련과 체제경쟁을 할 때보다 더 많은 금액이라고 합니다. 여기서 지적하고자 하는 것은 ‘과학주의’의 자본주의 체제에 대한 그리고 국가권력에 대한 비과학적이며 반인간적 무비판 정신입니다.

  과학자들은 과연 객관적 입장을 지니고 있으며 과학지식은 과연 객관적인 것일까요? 인간은 물론 무릇 모든 생명체는 각자가 주체이며 동시에 타자와 상호작용하며 각자의 환경을 ‘능동적’으로 조성합니다. 즉 어떤 주체와 이른바 객관적 환경이란 일방적인 것이 아닌 쌍방향적인 것이며 상호 능동적인 것입니다. ‘카오스 이론’의 ‘나비효과’는 바로 이런 ‘연기적(緣起的) 인과관계’의 한 예입니다. 이렇게 볼 때 과학자 역시 계급적 관계, 성 역할적 관계, 동서양 문화적 관계, 세대 관계, 국가권력 관계 밖에 있는 존재가 아님을 확신할 수 있습니다.  

  이런 제반 관계를 유전공학 분야를 예로 들어 잠깐 생각해 봅시다. 유전자조작 농산물은 과연 다국적 곡물기업의 이윤을 위한 것이 아니고 농민을 그리고 영양실조 상태에 있는 수십억의 영혼을 위한 것일까요?(계급관계). 국책연구기관에서는 왜 조작농산물이 생태계와 인체에 미칠, 현재의 지식을 넘어서는 예상 밖의 폐해를 무시하고 긍정적으로만 판단할까요?(국가권력의 성격 관계). 조작농산물의 단일경작이 이른바 토착 전통농법보다 결국 경제적이지도 않다는 사실이 왜 무시당하고 은폐될까요?(동서양 문화적 관계). 이런 물음과 관계들은 상호 교(交)집합 관계에 있음, 역시 놓쳐서는 안 될 것입니다.

  이상 깊이 성찰해야할 내용은 자연과학에만 해당되는 것이 아님이 분명합니다. 남한사회의 현황과 장래전망과 관련해서 ‘전문가’들의 사고방식 역시 예외일 수 없습니다. 미국의 보수 반동적 국제관계 전문가인 브르제진스키는 남한과 같은 나라들을 ‘속국’이라는 용어로 규정합니다. 그가 세계라는 거대한 체스(서양장기)판을 보는 관점은 제국주의, 무자비하고 냉혹한 권력 정치적 관점 바로 그것의 결정판입니다. 이런 관점에 서서 남한의 상황을 보는 것이 남한의 다수 ‘전문가’들입니다.

그들은 대체로 배고픔을 비롯한 삶의 근본적 고통을 체험해본 적이 결코 없거나 직접 체험하지 않았더라도 고통 속에 있는 민중의 삶에 대한 해방의 문화적 체험이 없는 자들, ‘민중해방을 지향하는 인텔리겐챠의 여집합’에 속하는 패거리들입니다. 이들의 요설(妖說)―妖라는 글자 자체가 고대 남성 우월주의적 문명의 산물임도 놓치지 말아야합니다―에 현혹당하지 않고 자본주의 체제를 비롯한 온갖 종류의 억압적 문명에 대항하는 ‘저항의 문화’와 그 문화의 개념을 학습하고 ‘저항의 문화’를 심화·확대해야 할 것입니다.

만사를 ‘경영’의 관점에서 보는 ‘야만적’ 전문가들의 판단은 ‘민중의 복리의 여집합’이며 그들은 ‘모든 문명의 저변에는 야만이 가로놓여 있다’는 발터 벤야민의 지적을 들어보지도 못한 자들일 것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아동의 시위 참여, 부안주민의 시위, 이라크 파병, 송두율 교수에 대한 수사, 그리고 파업노동자에 대한 손해배상 가압류를 당신은 어떻게 판단합니까?

2004. 2. 25


본지는 재야 인문학자 최형록 선생의  철학, 역사, 과학, 정치에 관한 세계관을 접할 수 있는 에세이를 매주 토요일 시리즈로 싣는다. 최 선생은 서울대 인문대학원에서 수학했으며 민중당 국제협력국장, 사민청 지도위원, 진보평론 편집위원을 지낸 바 있다. 저서: 이 야만의 세계에서 어린 시절의 꿈나무를 키워나간다, 영역: 모든 노동자의 건강할 권리를 위하여. [한국인권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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