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난한 이들을 위한 순교, 로메로 대주교 34주기

[칼럼] 오스카 로메로 대주교의 시복시성을 기대한다

한국교회는 교황방문 결정과 더불어 윤지충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 123위의 시복식이 서울에서 열리게 되면서 벌써부터 축제 분위기다. 오늘 시작한 한국 천주교 주교회의 춘계정기총회는 이 문제를 다루고, 정부 고위층은 천주교 측 관계자들을 만나 상호협조를 다짐하고 있다. 때맞춰 국내 출판사들은 교황관련 서적을 쏟아낼 준비를 하고 있으며, 오는 4월 27일에는 요한 23세 교황과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의 시성식이 예정되어 있다. 결국 2014년은 가톨릭교회 안에서 ‘순교자’와 ‘교황’과 ‘성인’이 키워드가 될 공산이 크다.

1980년 3월 24일은 라틴아메리카의 민중들에게 사실상 성인으로 추대된 오스카 로메로 대주교가 군사정권에 의해 암살된 날이다. 미국에서는 레이건행정부가 출범하던 그해에 ‘사회적 복음’을 실현했던 위대한 두 영혼이 차례로 죽었다. 한 사람은 로메로 대주교이며, 또 한 사람은 도로시 데이다. 1980년 11월 29일에 숨진 도로시 데이는 가톨릭일꾼운동에 나서기 전에 성인들의 삶에 매료되었다. 그는 병자들, 절름거리는 사람들, 나병환자들을 돌보는 성인의 이야기에 감동을 받았다고 회상하면서 “그러나 또 다른 질문이 내 마음 속에 있었다. ‘왜 악을 처음부터 피하지 않고, 그것을 치료하는 일에만 매달려 있는가?’ 사회질서의 변화를 위해 일하는 성인들은 어디에 있는가? 노예들을 보살피기만 하지 말고, 노예제도를 없애기 위해 노력하는 성인들은 어디에 있는가?”하고 물었다.

"사회질서의 변화를 위해 일하는 성인들은 어디에 있는가?"
가난한 이들에게 봉헌된 도로시 데이와 로메로 대주교


[출처: 카톨록뉴스 지금여기]
도로시 데이의 질문은 중대한 것이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이들을 위해 울어줄 사람은 누구인가?”라고 람페두사에서 호소하였고, 가난한 이들을 비참 속에 버려두는 가혹한 자본주의 구조를 탄핵했다. 규제받지 않는 자본주의는 ‘새로운 독재’라고 비판했다. ‘인간이 인간에게 인간인’ 세상을 꿈꾸었던 교황은 당연히 ‘사회적 영성’을 강조하였고, 가난한 이들이 늘 그렇듯이 ‘세상으로 나아가 상처받고 더럽혀진 교회’를 희망했다. 그분이 교황선출 한 달 만에 오스카 로메로 대주교의 시성을 계속 추진한다는 결정을 낳았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지난 해 4월 20일 엘살바도르의 오스카 로메로 대주교의 시성을 가로막았던 장애를 제거하고 시성절차 개시를 승인했다. 라틴아메리카 교회의 요구로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은 1997년 오스카 로메로 대주교의 시성을 검토하도록 지시하고, 이듬해 로메로 대주교에게 ‘하느님의 종’ 칭호를 부여했다. 그러나 당시 신앙교리성 장관이었던 라칭거 추기경은 로메로 대주교의 입장이 해방신학처럼 ‘좌파적’이라는 이유로 이를 내켜하지 않았으며, 그가 2005년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의 선종에 따라 후임 베네딕토 16세 교황이 되면서, 이 사안은 더 이상 추진하지 못한 채 묻혀 버렸다.

현재 도로시 데이와 로메로 대주교는 시복 직전 단계인 ‘하느님의 종’에 머물고 있다. 도로시 데이와 로메로 대주교는 물론 ‘공식적인’ 성인이 되기 위해 살아온 사람이 아니다. 그러나 우리 시대는 자선을 베푸는 성인을 넘어서 세상을 바꾸는 성인을 요구하고 있다. 도로시 데이와 로메로 대주교가 ‘성인품’에 오른다면, 해방신학에 대한 교회 내 논란이 그랬던 것처럼 그들의 변혁적 삶이 교회 안에서 공식적으로 받아들여졌음을 사람들에게 상기시킬 것이다.

로버트 엘스버그는 <우리를 행복으로 이끄는 성인들>이란 책에서 ‘성인’에 대한 우리의 습관적인 생각을 바꾸어 주었다. 우리는 보통 성인들이란 결점이 없이 완벽하며, 기적을 행했고, 교회 안에서 생을 보냈으며, 고통 받을만한 기회를 열심히 찾고, 일찍 세상을 뜬 사람들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엘스버그는 “성인은 그들의 고행과 환시와 행적 때문이 아니라 사랑과 선함에 대한 탁월한 역량 때문에 성인”이라고 말했다. 그 모습이 다른 사람들에게 하느님의 사랑을 일깨워주었기 때문일 텐데, 성인은 “우리에게 하느님을 상기시켜 주는 사람들, 그들의 사랑과 용기, 그리고 내적인 조화가 보통의 인간성 위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사람이 취해야 할 바를 알려주는 기준으로 다가오는 사람들이다. 그런 사람들과 함께 있을 때 우리는 더 큰 기쁨을 느끼고, 살아 있는 것이 감사하며, 아마도 그들의 내적인 빛남의 비밀을 알고 싶어 할 것이다”라고 말했다. 로메로 대주교의 시성은 다른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새로운 삶과 신앙의 기준을 제시할 것이다.

로메로 대주교, 압제에 저항하는 교회의 상징
사순절에 군사정권에 의해 암살당한 순교자


군사정권이 통치하던 엘살바도르에서 하느님 백성은 ‘하느님 없음’을 경험했다. 이런 상황에서 로메로 대주교는 “교회는 목소리 없는 자의 목소리가 되어야 한다”면서 가난한 이들을 대변하고, 인권을 옹호하다가 우익 암살단에 의해 미사 중에 살해당했다. 그의 죽음은 엘살바도르 민중들에게 곧바로 ‘순교’로 간주되었고, 그동안 사회정의를 위해 투신하고 압제에 저항하는 교회를 상징하는 인물이 되었다. 그는 ‘자기 땅에서조차 유배당한 사람들’에게 ‘하느님 있음’을 상기시킨다.

[출처: 카톨록뉴스 지금여기]
로메로 대주교가 살해당하기 바로 전날인 3월 23일은 사순 제1주일이었다. 이날 미사에서 로메로 대주교는 군인들을 향해 “형제들이여, 그대들도 우리와 같은 민중입니다. 그대들은 그대들 형제인 농민을 죽이고 있습니다”라고 말했다. “어떤 군인도 하느님의 뜻을 거스르는 명령에 복종해서는 안 됩니다. 지금이야말로 그대들은 양심을 되찾아, 죄악으로 가득찬 명령보다는 양심에 따라야 할 때입니다. 하느님의 이름으로, 아울러 날마다 더한 고통을 받아 그 부르짖음이 하늘에 닿은 민중들의 아픔으로, 나는 그대들에게 부탁하고 요구하고 명령합니다. 탄압을 중지하시오!”

로메로 대주교는 살해당하기 직전에 한 기자와 인터뷰를 하면서 “순교는 은총”이라면서 “내 피가 해방의 씨앗이 되고 곧 현실로 다가올 희망의 표징이 되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전례력에 따른 그날 복음말씀은 “밀알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그대로 남아있을 뿐이지만,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습니다”라는 구절이었다.

현재 신앙교리성 장관은 “해방신학과 교황청 사이의 전쟁은 종식되었다”고 말했던 루드비크 뮐러 추기경이다. 그리고 그의 친구인 페루의 해방신학자 구스타보 구티에레즈는 “로메로가 나타나기 전에 가톨릭교회는 수많은 이들이 정치적 이유로 죽었다고 말했다. 그러나 로메로가 죽은 이유는 정치적 이유나 교회를 수호했기 때문이 아니라 가난한 이들의 권리를 지켰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가난한 이들을 위한 투쟁은 신앙의 본질에 속한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복음의 기쁨>에서 “교회에게 가난한 이들을 위한 선택은 문화, 사회, 정치 또는 철학의 범주 이전에 신학의 범주”라고 말했다. 하느님께서는 가난한 이들에게 ‘먼저’ 당신의 자비를 베풀기 때문이다. 교황은 “가난한 이들을 위한 가난한 교회”를 바란다며, “가난한 이들을 통하여 우리가 복음화 되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새로운 복음화는 가난한 이들의 삶에 미치는 구원의 힘을 깨닫고 그들을 교회 여정의 중심으로 삼으리라는 초대입니다. 우리는 가난한 이들 안에 계신 그리스도를 알아 뵙고, 그들의 요구에 우리의 목소리를 실어 주도록 부름 받고 있습니다. 또한 그들의 친구가 되고, 그들에게 귀 기울이며, 그들을 이해하고, 하느님께서 그들을 통하여 우리에게 전달하고자 하신 그 신비로운 지혜를 받아들이도록 부름 받고 있습니다.”(198항)

로메로 대주교가 목숨을 바친 엘살바도르는 ‘구원하시는 하느님’이라는 뜻이다. 이 나라의 수도인 산살바도르는 ‘거룩한 구세주’라는 뜻이다. 그 도시에서, 살육당하는 가난한 이들에게 희망의 되었던 로메로 대주교, 그는 우리시대의 성인이다. 신앙 안에서 하루의 눈물, 하루의 빵과 희망을 건져올리는 성인이다. 무자비한 권력에 저항하고, 복음 안에서 자유로웠던 영혼이다. 노예들을 보살피기만 하지 않고, 노예제도를 없애기 위해 노력하는 성인이었다. (기사제휴=가톨릭뉴스 지금여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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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황 , 천주교 , 로메로 대주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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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상봉(이시도로,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편집국장)의 다른 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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