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망은 단절 없이 오지 않는다

[시] 굴뚝광호 동지가 부르는 노래

1

민주가 민주를 조롱하고 평등이 평등을 배제하고
투쟁이 계급을 배반하는 시대

퇴로조차 버리고
45미터 벼랑 위에 배수진을 친 사람
굴뚝광호 동지여

흙 한 줌 없는 벼랑 위에서
비바람에 실려 오는 모래흙을 정성스럽게 쓸어 담아
화분을 만들고
마침내 참외 싹을 틔우는 동지의 모습이
난 이 야만의 시대, 가장 단호한 비판 같았다

감정으로 전락하지 않는 논쟁처럼
어설픈 중재를 허용하지 않는 차이처럼
전망은 단절 없이 오지 않는다

2.

폐업이 확실하다며
위로금과 권고사직이 실리라고 말했던 자들은
여전히 민주노총, 금속노조 조합원들이고 간부들이다
조합원들을 위로금과 권고사직으로 내몰고
회사에게 어떠한 요구도 하지 않겠다며 노예문서에 직권조인한 자들은
여전히 금속노조 투쟁결의대회에 참가하고 ‘임을 위한 행진곡’을 부르는 자들이다
조합원들이 선택한 것이기 때문에 어쩔 수 없다며
금속노조의 이름으로 위로금과 권고사직을 승인했던 자들은
여전히 우리 곁에서 비정규직 철폐를 외치고 정리해고 분쇄 투쟁을 함께 외치는 자들이다
회사를 대신 해 투쟁하는 조합원들을 제명하고
굴뚝투쟁에 발걸음을 딱 끊고
규약과 규정을 이유로 투쟁기금 지급을 거부한 자들은
여전히 민주노조 투쟁 조끼를 입고 있는 민주주의자들이다

그러나 관점의 차이, 좋아하지 마라
노동자들의 인간다운 삶 앞에 중립이란 없다
자본과 한 판 붙기 위해서라도
이 자들과 바리케이드를 마주 보고 설 수밖에 없었다
우리에게 가장 두려운 것은 노동자의 자존심을 버리는 것이었지만
이 자들은 통제되지 않는 아래로부터의 직접행동을 가장 두려워했고
투쟁하는 조합원들이 자신의 적이었다
계급적 경계는 청춘을 바쳐 건설한 민주노조의 심장에 살아 있었다
길은 단절로부터 시작된다

민주주의의 이름으로 정리해고를 허용하고
민주주의의 이름으로 비정규직을 합법화하고
민주주의의 이름으로 투쟁하는 조합원들을 제명하고
투쟁의 이름으로 계급을 배반하고
혁명의 이름으로 부르주아 선거일정에 목매다는 자들은 더 이상 동지가 아니다
바리케이드를 앞에 두고 마주 설 수밖에 없는 적,
자본주의와 내통하고
오늘도 자본주의가 유지되는 이유인 자들과 단절하자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생존을 위한 외교전이 아니라
진솔한 삶 속에 깃들어 있는 단호함이다

3

말을 잊지 않기 위해
매일 아침 굴뚝 위에서 차광호 동지가 부르는 노래는
가능하지 않았던 것들이 가능한 쪽으로 몸을 바꾸는 붉은 機微(기미)였다
무엇보다 토론과 직접 행동 속에서 성장한 KEC지회 조합원들이
파업을 하고 굴뚝 아래로 달려왔다
김동윤, 박종태 열사 투쟁 속에서 단련되고
행동해야 할 때 행동할 줄 아는 화물연대 구미지회 조합원들이
굴뚝 아래로 달려왔다
금강화섬 공장점거파업 속에서 노동자의 미래를 감지했던
차헌호 동지가 굴뚝 아래로 달려왔다
포장 덮게 하나로 폭염과 비바람을 견디는 그 서러운 고통을
몸으로 이해하는 사람들,
공인받지 못한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가장 먼저 달려왔고
열사정신이 달려왔고 계급투쟁이 달려왔고 노동자민주주의가 달려왔다

매일 아침 굴뚝 위에서 차광호 동지가 부르는 노래는
노동자 민주주의가 오른 높이이고
자본주의와 화해할 수 없는 치명적인 웃음이다
평등의 대지 위에 붉게 깃드는 가장 치명적인 웃음이다

2014년8월23일


"다시 와서 시를 낭송해주면 좋겠다"는 차광호 동지의 요청에 기꺼이 화답하고 싶었다. 어떤 시는 한 호흡에 쓰기도 하지만 차광호 동지를 위한 시는 쉽지가 않았다. 그를 생각하고 또 생각했다. 그가 있는 굴뚝 아래, 희망버스 문화제에서 시를 낭송하기 직전까지 수정했다.

난 낭송 전에 이 시는 어용세력에 맞서 구미지역에서 새롭게 시작되고 있는 민주노조운동에 대한 투쟁보고라고 말했다. 이 투쟁에 공동주체로 참가하기 위한 나의 결의라고 말했다.

흙 한 줌 없는 벼랑 위에서 그가 틔운 참외 싹은, 말을 잊지 않기 위해 매일 아침 그가 부르는 노래는 가장 뛰어난 시가 될 수 있었고 그래서 짧고 아름다운 서정시에 대한 유혹에 마음이 가기도 했지만 여기엔 민주노조운동의 성격을 둘러싼 계급투쟁이 삭제될 수밖에 없었다.

난 시인이기 이전에 굴뚝광호의 동지이고자 했다. 난 여전히 시가 가장 뛰어난 선동이 될 수 있다고 믿는다.

내가 차광호 동지가 있는 굴뚝 아래에서 낭송한 시는 차광호 동지에 대한 나의 신뢰고 투쟁연대다. 그에 대한 나의 연애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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