퍼거슨 사건을 통해 돌아본 미국 인종 폭동의 역사

[기고] 인종 문제 근본 원인인 흑인 빈곤은 현재진행형

지난 8월 9일 미국 미주리(Missouri) 주 퍼거슨(Ferguson) 시에서 흑인 청년 마이클 브라운(Michael Brown)이 경관의 총격으로 사망한 후 대규모 항의 시위가 2주 넘게 진행되었다. 시위의 원인이 된 흑인 남성에 대한 과도한 검문과 총기 사용은 이미 오래 전부터 반복적으로 지적되어 온 미국 경찰의 문제이며, 마이클 브라운 외에도 미국의 언론 보도에서 경찰의 총격에 사망한 민간인의 사례를 발견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 또한 경찰의 총격에 항의하는 시위가 시설의 파괴와 방화, 약탈을 동반한 사태로 발전하는 것 역시 지난날 미국 사회에서 반복적으로 나타난 현상과 대단히 닮아 있다. 이런 점에서 퍼거슨 사건은 우발적인 사고 이후 예상치 못하게 사건이 확대된 경우라기보다는 어느 정도 예고된 사건이었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이 사건을 보다 깊이 있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미국 사회의 고질적인 "인종 폭동(race riot)"의 역사와 성격을 살펴보는 것이 필요하다.

[출처: 포퓰러레지스턴스]

미국사를 이해하는 중요한 키워드에 속하는 인종 폭동은 KKK와 린치로 대표되는 백인의 흑인에 대한 공격이나 1992년 L.A.의 흑인 시위 및 파괴행위와 같은 흑백 문제에 한정되지는 않는다. 20세기 이전에도 아메리카 원주민이나 아일랜드, 이탈리아, 중국 등지로부터의 이민자들에 대한 적대적 감정이 집단적 폭력 사태로 분출된 수많은 사례를 발견할 수 있으며, 20세기 후반 이후에는 크게 증가한 히스패닉계 이주민들과 관련된 폭력행위가 새롭게 문제되고 있다. 많은 경우 인종 폭동의 원인은 인종적 소수 집단의 빈곤이라는 경제적 구조와 연결되어 있으며, 이번 퍼거슨 사건에서도 마찬가지다. 이 글에서는 노예해방 이후 미국의 흑백 인종관계에서 나타난 대표적인 인종 폭동의 성격과 흑인 사회의 대응을 간략하게 살펴보고자 한다.

부커 워싱턴과 두 보이스, NAACP의 탄생

남북전쟁 이후의 재건(Reconstruction) 시기부터 20세기 초반까지의 시기에 미국 내 흑인 인구의 절대 다수는 남부 주들에 거주하고 있었다. 전쟁 이후 피폐해진 남부 상황에 불만을 가진 백인들은 경제적 위기가 이후 남부의 전통적 인종 질서의 붕괴로 이어질 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을 가지게 되었고, KKK의 출현에서 잘 드러나듯 전통적 인종 질서에 순응하지 않는 흑인을 공격하는 사례가 점차 증가하면서 세기말에 이르러 남부의 흑백 인종관계는 극도로 악화되었다. 1887년 루이지애나(Louisiana) 주 티보도(Thibodaux)에서는 대부분 흑인으로 구성된 1만여 명의 사탕수수 농장 노동자들이 파업을 개시하자 루이지애나의 농장주들과 백인 자경단이 공격을 개시해 최소 35명에서 수백명에 이르는 노동자들이 사망했다. 특히 백인 여성에 대한 흑인 남성의 범죄 혐의는 사실 여부와 무관하게 린치와 학살, 방화 등에 이르는 백인 사회의 즉각적인 폭력적 대응을 유발했는데, 악명 높은 린치의 경우 1890년대 "코튼 벨트(Cotton Belt)"라 불리는 미시시피(Mississippi), 조지아(Georgia), 앨라배마(Alabama), 텍사스(Texas), 루이지애나 등의 남부 주들에서 가장 빈번히 발생했다.

흑인들이 19세기 말의 강고한 인종차별 구조에 전면적으로 맞서 싸우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기 때문에 이 시기에는 부커 워싱턴(Booker T. Washington)의 터스키기 기술학교(Tuskegee Institute)를 중심으로 한 경제적 자립 운동이 대표적인 흑인 운동으로 부상했다. 워싱턴은 흑인에게 정치적 권리나 사회적 평등 획득보다 경제적 자립이 더욱 시급한 문제라고 주장했고, 백인우월주의에 전면으로 도전하지 않았기 때문에 흑인뿐 아니라 많은 백인들로부터도 지지를 얻을 수 있었다. 그러나 두 보이스(W. E. B. Du Bois)를 비롯한 흑인 지식인들은 워싱턴의 순응적 태도에 동의하지 않았고, 대신 1905년 "나이아가라 운동(Niagara Movement)"을 통해 백인과 동등한 정치적 권한과 시민권을 요구하는 급진적 주장을 내세웠다. 나이아가라 운동은 이후 흑인 운동의 대표적 단체로 구심점 역할을 해 왔으며 오늘날까지 최대 규모의 흑인운동 단체로 남아 있는 전국유색인지위향상협회(National Assosiation for the Advancement of Colored People, NAACP)의 결성에 결정적인 영향을 끼쳤다.

대이주와 새로운 흑인

1910년대부터는 남부 농촌의 많은 흑인들이 전시 경제 호황에 따른 일자리를 찾아 북부 도시로 이동하는 “대이주(Great Migration)” 현상이 일어났고, 이에 따라 인종 폭동은 더 이상 남부만의 문제가 아니게 되었다. 노예제를 경험한 바 없는 “새로운 흑인(New Negro)"들이 시카고와 같은 산업화된 북부 대도시들에서 빈민층을 형성하면서 실업이나 주택 부족, 범죄와 같은 도시 문제들이 인종적 갈등과 연결된 것이다. 흑인 노동자들이 대거 도시로 유입되면서 일자리와 주거지를 놓고 백인과 흑인이 대립하게 되었고, 이와 같은 대립은 사소한 사건들이 인종 폭동으로 발전하게 되는 배경이 되었다. 특히 1919년의 “붉은 여름(Red Summer)”으로 알려진 찰스턴(Charleston), 롱뷰(Longview), 워싱턴 D.C., 녹스빌(Knoxville), 오마하(Omaha) 등 대도시에서 발생한 흑인과 백인 사이의 폭력사태는 이와 같은 사회적 변화를 반영하고 있었다. 붉은 여름 사건 도중 가장 심각한 피해를 낳은 시카고의 인종 폭동은 한 흑인 소년이 물놀이 도중 백인의 돌에 맞아 숨진 사건에서부터 시작되었는데, 백인 경관의 미적지근한 조사에 분노한 흑인이 경찰을 향해 총을 쏘면서 인종 폭동으로 발전해 2주간 흑인 23명과 백인 15명이 사망하고 537명이 부상당하는 등 당시 최악의 인종 폭동으로 기록되었다. 이외에도 1940년대까지 털사(Tulsa), 디트로이트(Detroit), 뉴욕(New York), L.A. 등지에서 대규모 폭력사태가 발생했다.

이 시기에는 폭력에 대한 흑인들의 대응 역시 이전과 달라졌다. 이전의 인종 폭동에서는 흑인에 대한 백인 군중의 습격과 학살이 두드러진 특징이었다면, 도시의 흑인들은 자신들의 생명을 위해 백인의 폭력에 맞서 싸우기 시작했다. NAACP 역시 비교적 온건한 노선이었으나 린치 반대 운동 등을 전개하며 전국적 차원에서 흑인 운동을 지원했다. A. 필립 랜돌프(Asa Phillilp Randolph)가 사회당과 흑인 노조 조직활동을 통해 유력한 흑인 지도자로 부상할 수 있었던 것 역시 도시 흑인 노동자의 증가라는 환경 변화를 반영하는 것이었다. 백인과의 타협 대신 완전한 분리와 독립을 주장하는 흑인 민족주의 운동 역시 1920년대와 1930년대를 거치며 등장했다. 자메이카 출신의 마커스 가비(Marcus Garvey)는 아프리카로 돌아가자는 구호를 외쳤고, 일라이자 무하마드(Elijah Muhammad)는 1934년부터 이슬람 민족(Nation of Islam)을 이끌며 급진적인 주장을 펼쳤다. 간디의 비폭력 시민 불복종 운동 역시 1930년대에 미국에 소개되어 시민권 운동에 도입되었다.

시민권 운동과 흑표범당

1955년 이후 시민권 운동이 적극적으로 전개되면서 미국 전역에서 차별에 반대하는 흑인 대중의 시위가 일어났으며, 시위대에 대한 경찰의 대응이 더욱 폭력적인 성격을 띠게 되면서 이에 반발하는 대규모의 항의 시위와 인종 폭동이 이어졌다. 전투적인 흑인 학생들은 남부에서 연좌 시위 등의 방식으로 공공연히 백인 지배에 도전했으며, 이 과정에서 시위대와 경찰, 시위대와 공격적인 백인들 사이에 수많은 물리적 충돌이 발생했다. 1964년 뉴욕 할렘에서는 비무장한 15세 흑인 소년을 백인 경찰이 숨지게 한 것을 계기로 대규모 시위가 발생했고, 1965년 LA 인근의 왓츠(Watts)에서도 음주운전 혐의가 있는 흑인 청년을 체포하는 과정에서 경찰이 총을 쏘면서 6일 동안 34명이 사망하는 인종 폭동이 전개되었다. 1968년 킹 목사의 암살 직후에도 뉴욕, 시카고, 워싱턴 D.C., 볼티모어 등 각지에서 대규모 인종 폭동이 발생했다.

시민권 운동 시기에는 널리 알려진 킹 목사와 말콤 엑스(Malcolm X) 외에도 급진적이고 전투적인 학생운동 세력이 부상했다. 학생비폭력실천위원회(Student Nonviolent Coordinating Committee, SNCC)는 미국 전역에서 차별과 전쟁에 반대하는 시위에 가담하며 스토클리 카마이클(Stokely Carmichael) 등을 비롯한 급진적 흑인 지도자들을 배출해 냈다. 1966년 휴이 뉴턴(Huey P. Newton)과 바비 실(Bobby Seal)이 경찰 폭력에 대항하기 위해 결성한 흑표범당(Black Panther Party)은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해 무장한 채 혁명적 활동을 전개했고, 그 결과 FBI의 중점 관리대상이 되어 활동에 많은 제약을 받았다.

1980년대 이후 인종 폭동은 그 이전 시기만큼 빈번하게 발생하지 않지만 흑인 남성을 잠재적 범죄 용의자로 취급하는 경찰의 고압적 검문행위와 총기사용에 대한 흑인 사회의 불만은 해소되지 않은 채 누적되어 왔으며, 1992년 LA에서 발생한 로드니 킹(Rodney King)에 대한 구타나 이번 마이클 브라운의 사망과 같은 사건을 계기로 그 불만이 언제든 인종 폭동으로 발전할 수 있음이 분명히 드러났다. 더욱이 퍼거슨 시위를 통해 미국시민자유연합(American Civil Liberties Union, ACLU)를 비롯한 단체들이 전부터 지적해 온 9/11 테러 이후 경찰의 군사화 현상이 우려할 만한 수준에 이르렀음이 확인되었고, 향후 민간인 및 시위대에 대한 과잉 진압이 더 큰 문제를 불러일으킬지 모른다는 우려를 갖게 한다.

부커 워싱턴과 마틴 루터 킹이 인종 문제의 근본 원인으로 지적했던 흑인의 빈곤 문제는 여전히 해소되지 않고 있다. 과거에는 백인과 흑인을 격리하기 위해 차별적 법과 제도가 동원되었다면, 오늘날에는 백인 인구가 떠난 교외지역을 빈곤한 흑인들이 채운 퍼거슨 시에서 나타나듯 인종간의 경제적 격차가 자연스럽게 흑인과 백인을 격리시키고 있다. 퍼거슨 시의 흑인 경찰관이 흑인 주민의 수에 비해 턱없이 적은 것처럼, 전체 인구에 비해 지나치게 많은 흑인들이 미국의 교도소에 격리되어 있다. 이 모든 문제들을 일거에 해결할 수는 없겠지만, 최소한 경찰의 검문과 총기 사용 관행에 대한 대대적인 변화가 없는 이상 더 많은 희생자와 피해 발생은 예고된 것이나 다름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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