칠레, 정당 민주주의 너머의 제헌 권력을 구성하다

[INTERNATIONAL3]

지방선거와 제언의회 선거 여운이 채 가시기 전인 지난 6월 8일, 한 개의 성명서에 이목이 쏠렸다. ‘민중의 대변인(Vocería de los Pueblos)’이라는 이름의 33명의 제헌의회 의원들이 헌법 제정 과정에서 인민 주권 실현을 목표로 6가지 정치 원리를 제안한 것이다. 이들은 2019년 11월 15일 칠레 정당 간의 합의로 탄생한 ‘사회적 평화와 신헌법 제정을 위한 협약’에 민중 동의가 없었음을 지적했다. 지금 칠레는 정당 정치를 넘어선 새로운 정치 질서를 만들어가고 있으며, 법률적 행위로서의 개헌이 아닌 정치적 행위로서의 헌법을 제정하는 중이다.

  2019년 10월 22일 시위 장면 [출처: https://en.wikipedia.org/wiki/2019%E2%80%932021_Chilean_protests]

2019년 10월의 각성

2019년 10월 칠레의 수도 산티아고에서는 지하철 요금 인상에 반발한 10대 중고등 학생들의 시위가 시작됐다. 트위터를 통해 집단행동을 조직한 이들은 인상된 지하철 요금을 거부하고 무임승차를 시작했다. 요금 거부 등의 소극적 시위는 열흘 후 지하철 역사에 불을 지르는 등의 적극적 양상을 띠었다. 구리광산노조, 보건노조, 항만노조 등 주요 노조가 총파업에 돌입하며 시위에 가세했다. 이들은 지하철 요금 인상을 가능케 했던 칠레의 신자유주의 경제 모델 전반에 대한 강력하고 급진적인 사회적 시위를 전개했다.

부유한 기업가 출신의 세바스티안 피녜라 대통령은 비상사태를 선포하며 대중 시위를 잠재우려 했다. 피녜라 대통령은 피노체트의 신자유주의 모델이 남긴 근대화라는 성과에 후한 점수를 주면서, 피노체트에 의해 자행된 반인권 행위는 비판해왔다. 그러나 걷잡을 수 없는 대중 시위 앞에서 피녜라 대통령은 결국 피노체트를 다시 불러들였다. 비상사태가 선포된 2019년 10월, 칠레인들은 산티아고 도심에서 군 병력을 목격하게 됐다.

군 병력과 시위대의 충돌로 사상자가 발생하는 가운데 칠레 사회에 대한 근원적인 성찰이 이뤄졌다. 1973년 이후 피노체트 독재와 1990년 이후 민주화 시대의 정당 간 연합이 만든 신자유주의 경제 모델과 엘리트중심의 정치 질서에 대한 뼈아픈 반성이었다. 결국 피녜라 정부는 8일 만에 비상사태를 철회했다. 11월 15일에는 공산당을 제외한 의회 진출 정당 모두가 사회적 혼란을 수습하고 새로운 정치 질서를 만들어내기 위한 합의에 도달했다. 합의 내용은 ‘사회적 평화와 신헌법 제정을 위한 협약’에 담겼다.

2019년 12월, 국민 의견 수렴

2019년 10월부터 현재까지 진행 중인 칠레 정치 질서의 재구성은 라틴아메리카에서 가장 일찍부터, 가장 뿌리 깊게 자리 잡아 온 정당 민주주의의 재검토 과정이기도 하다. 칠레는 라틴아메리카의 다른 국가들과 달리 원주민공동체 혹은 노예 노동을 기반으로 한 플랜테이션으로 조직된 농촌 사회가 부재하며 19세기부터 정당과 노조 등 근대적 정치 조직이 발달했다. 공화국으로 출발한 칠레는 정당 중심의 대의민주주의를 안정적으로 정착시켰다. 1970년 사회주의자였던 살바도르 아옌데가 선거를 통해 집권할 수 있었던 것도, 1973년 피노체트 독재가 선거를 통해 종식되고 콘세르타시온이라 불리는 정당 간 연합에 의해 민주화가 진행된 것도 칠레의 정당 민주주의의 발달 속에서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지금의 칠레는 인민의 정치적 의지가 정당을 통해 대변되는 대신, 실질적이고 직접적으로 실현될 방안을 탐구하고 있다. 그 첫 번째 과정은 2019년 12월 15일, 전 국민 대상 전자 투표로 진행된 의견 수렴이었다. 칠레기초자치단체연합(Asociacion Chilena de Municipalidades)은 총 3장의 질문지로 국민 의견을 수렴했는데, 현재 칠레 사회를 관통하는 가장 핵심적인 이슈에 대해 국민의 의견을 직접 표현하는 방법이었다. 가령 질문지 첫 장에는 신헌법 작성 여부와 작성의 주체에 대한 질문과 함께 기초자치단체의 권한 강화와 예산 증대 및 차등화된 생필품 부가가치세 부과에 관한 의견 등을 물었다. 두 번째 장에서는 가장 시급한 요구 세 가지를 선택하는 질문이 담겼으며, 공교육, 주거, 수도, 환경보호, 대학 학자금 대출, 공공의료 서비스, 연금, 소득 불평등 등이 선택지로 주어졌다. 세 번째 장에는 기초자치단체별로 자율적인 질문이 삽입됐는데, 자원 채굴이 초래하는 지역의 환경 문제에 관한 의견 수렴 등도 있었다. 가령 안토파가스타 지역은 광산 기업이 독점사용권에 대한 대가를 지불해야 하는지에 대한 주민 의견을 물었다.

2백만 명 이상이 참여한 의견 수렴에서 92%가 신헌법 제정에 동의했고, 73%가 제헌의회를 새로 구성하기를 원했다. 또한 기초자치단체의 강화에 대해서도 85% 이상이 지지를 보냈으며, 부패 공직자의 퇴출에 대해서는 97%가 찬성했고, 부가가치세 조정을 통한 생필품 가격 인하도 94%가 찬성했다. 가장 시급한 사회적 요구로 꼽은 것은 공교육, 공공의료, 연금제도 개선이었다.

이는 거센 대중 시위가 칠레를 각성시킨 지 두 달 만에 이뤄진 의견 수렴이었다. 이로써 길거리로 쏟아져 나온 ‘대중’은 명확한 정치적 요구를 통해 정치적 의지를 관철하고자 하는 ‘인민’으로 거듭났다.

2020년 정당 민주주의를 넘어서 제헌의회 구성하기

신헌법 제정을 위해서는 절차상 현행 헌법의 개정이 필요했다. 이에 따라 2019년 12월 24일 피녜라 대통령의 발의로 헌법이 개정됐고, 신헌법 작성을 위한 절차가 명시됐다. 이어서 신헌법 작성 여부와 그 방법을 묻는 선거가 2020년 10월 25일 치러졌다. 칠레 국민의 50.9%가 투표에 참여했고, 이들 중 78%가 신헌법 작성에 찬성했으며, 79%가 제헌의회의 신규 구성을 원했다. 이에 따라 올해 5월 15일과 16일 지방자치단체장 선거와 함께 제헌의회 구성을 위한 선거가 진행됐다. 이 선거에서 비례대표제로 선출되는 155명의 의원이 신헌법을 작성한다.

이는 칠레 역사상 전례를 찾아보기 어려운 선거였다. 광장과 길로 쏟아져 나온 사람들에 의해 두 달 만에 결정된 선거였고, 기존 정당 시스템에 흡수되지 않고 새로운 정치 질서를 만들어나간다는 의지가 꿋꿋이 관철된 선거였다. 제헌의회 구성을 위해 마련된 선거법은 기존 정당의 기득권을 견제할 수 있도록 제정됐다. 무소속 후보의 의회 진출 장벽을 낮추기 위해 후보자 등록에 요구되는 서명인의 숫자를 줄였고, 남녀 성비를 동률로 만들려는 적극적인 장치가 마련됐다. 일찍부터 17석은 원주민 집단에 할당됐다. 이로써 정당 민주주의 시스템 아래에서 정치적 의지를 온전히 실현하기 어려웠던 대표적인 세 개 집단, 즉 무소속 정치인, 여성, 원주민이 제헌의회에 다수 진출하는 데
성공했다.

기존 중도 및 진보 정당은 아프루에보 디그니닷(Apruebo Dignidad)과 아프루에보 리스트(Lista del Apruebo)라는 두 개 연합을 구성해 총 155석 가운데 53석을 얻었으며, 보수 정당 연합인 바모스 포르 칠레(Vamos por Chile)는 37석을 얻었다. 남은 48석은 무소속 후보들에게 돌아갔다. 원주민 집단에 할당된 17석은 마푸체인 7석, 아이마라인 2석, 그 외 집단 1석으로 배분됐다. 이에 따라 칠레 정부에서 공식적으로 인정한 총 10개 원주민 집단은 각각 자신들의 대표를 의회에 보낼 수 있게 됐다.

신헌법은 조항마다 의원의 3분의 2 이상의 동의가 필요하다. 즉, 155명 가운데 104명의 동의가 필요하다. 보수 정당, 진보 정당, 무소속, 원주민 집단으로 구분되는 155명 중 남성은 78명, 여성은 77명이다. 이들은 과연 신헌법의 조항마다 무엇을 지향하며 누구를 대변하게 될까. 그리고 누구와 연합하고 누구와 적대하게 될까. 이들의 길지 않은 의회 활동 속에서 현대 정치의 새로운 장이 펼쳐질 것만은 분명하다.

2021년 6월, ‘민중의 대변인’의 등장

그 첫 장이 2021년 6월 ‘민중의 대변인’에 의해 모습을 드러냈다. ‘민중봉기부터 헌법 제정까지 민중들의 대변인’이라는 제목의 성명서에 서명한 제헌의회 의원 33명은 정상성으로 복귀하는 것이 아닌 칠레의 새로운 정치적 전환기를 만들어 인민 주권을 실현할 것을 제안했다. 이들은 존엄성의 정치 원리로 6가지 사항을 제시했다. 자유, 진실과 정의, 회복, 탈 군사화라는 원리는 원주민 집단은 물론이고 여성과 자연을 정치적 폭력의 피해자로 상정하고, 국가가 주도해온 폭력의 종식과 피해 회복을 꾀한다. 제헌의회 구성에서 중요한 고려 사항이었던 원주민과 여성의 대표성은 선거 이후 다른 정치적 논리에 포섭되지 않고 오히려 새로운 정치 질서의 전면에 서게 됐다. 또한 성명서는 코로나19 확산에서 추방의 대상, 잠재적인 범죄 집단으로 간주하고 있는 이주민에 대한 배제와 탄압의 중단을 주장함으로써 국가주의 강화에 대한 반성을 요구한다.

  민중의 대변인(Vocería de los Pueblos)이라는 이름의 제헌의원 의원 33명이 6가지 정치 원리를 온라인을 통해 발표하고 있다. [출처: https://ellibero.cl/ 화면캡처]

무엇보다 민중의 대변인은, 제헌 권력이 한 사회의 정치체를 재배치하는 자율적인 권력임을 확고히 한다. 이로써 2019년 10월 광장과 길거리에서 시작돼 지금에 이른 이 모든 과정이 기존의 법질서 및 정치적 질서에 종속될 수 없다는 입장을 분명히 밝혔다. 다시 말해 피녜라 대통령의 동의 아래 기존 정당들이 서명한 ‘사회적 평화와 신헌법 제정을 위한 협약’과 현재의 헌법 질서는 제헌의회가 따라야 하는 규범이 아닌, 이제야 비로소 민중의 대변인이 등장한 제헌의회에 의해 재조정돼야 할 대상인 것이다.

지금의 칠레는, 헌법의 기원이 혁명이었다는 사실을 현실 정치 안으로 옮겨오고 있다. 법에 부여한 선험적 권위를 걷어내고, 법의 근본원리를 성찰하고 있다. 법에 대한 근원적인 질문이 칠레를 어디로 이끌 것인지, 그러한 칠레를 바라보는 우리는 법에 대해 무엇을 사유할 수 있을지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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