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낡은책10] 조세형의 <워싱턴 특파원>

현장에서 본 한미 외교풍속도

워싱턴 특파원 - 정치, 신문 그리고 한미 외교풍속도
(조세형, 민음사, 324쪽, 1976)


저자 조세형은 1931년 전북 김제에서 태어나 지난주 17일 뇌경색으로 숨졌다. 1950년 전주고를 나와 1953년 서울대 독문과 3년 수료 후 1955년 미국 노스웨스턴대 연수, 1965년 허버드대 니만펠로우과정을 수료했다. 1953년 평화신문 기자를 시작해 56년 합동통신 정치부 차장, 57년 관훈클럽 4대 총무, 58년 조선일보 정치부 기자, 60년 민국일보 정치부장, 61년 한국일보 편집부국장, 68-74년까지 한국일보 워싱턴 지국장(특파원)을 지냈다. 74년 한국일보 논설위원으로 복귀해 78년 편집국장을 지냈다.

79년 서울 성북에서 신민당 출신으로 10대 국회의원을 지냈다. 86년 민추협 상임운영위원을 지내다가 88년 성동을에서 평민당으로 13대 국회의원을 지내는 등 4선의 정치인생을 걸었다. DJ 정부 말년인 2002년부터 2년간 15대 주일본대사를 맡았다. 최근까지 민주당 상임고문을 지냈다. 저자 조세형은 고 노무현 전 대통령 영결식에 참석한 뒤 뇌경색 증세로 입원해 의식을 되찾지 못하고 지난주 숨졌다.

지난 68년부터 유신정권 초기까지 내리 6년을 한국일보 워싱턴 특파원으로 현장에서 한미 외교를 보면서 직접 체험했다.

72년 2월28일 닉슨-주은래 미중 정상회담때 한국일보 조세형 워싱턴특파원은 닉슨의 수행기자로 북경에 간 시카고 트리븐의 미 국무성 출입기자 알도 베크만 기자를 통해 간접취재했다. 당시 미수교국인 중국에 갈 수 없었기 때문이다. 조세형은 74년 11월22일 소련의 블라디보스톡에서 열린 포드 대통령과 브레지네프 서기장의 미소 정상회담때도 일본 동경으로 출장가서 역시 현장에 있던 베크만 기자와 전화통화하는 간접 취재방식으로 한국일보 지면을 채웠다.

당시 한국 언론사의 비중있는 미국 특파원은 한국일보의 조세형을 비롯해 조선일보엔 김대중 기자, 경향신문 문명자 기자가 함께 있었다. 이후 세 사람은 서로 다른 길을 걸었다. 조세형은 민주당 정치인으로, 김대중은 보수 논객으로, 문명자는 73년 김대중 납치사건을 계기로 유신정권으로부터 반체제인사란 낙인이 찍혀 미국에서 오랜 망명생활을 하면서 <말>지에 진보적 기고를 해오다 지난해 죽었다.

조세형은 이 책에서 직접 목격한 닉슨의 오른팔 헨리 키신저를 이렇게 평했다.

"74년 11월 22일 방한때 한국 총리(김종필)와 국회의장(정일권)이 자신의 하버드대 제자라고 떠벌린다. 숱한 여배우와 가수들과 문란한 사생활 끝에 74년 봄 낸시 배긴스와 비밀결혼했다. 유태인인 키신저는 하버드 교수를 지내다가 69년 초 첫 백악관에 보좌관으로 입성했다. 고분고분 말을 잘 듣는 나라는 키신저의 메모장에서 ‘바구니에 담겨진 고기’처럼 치부되고 만다. 그 대신 레둑 토와 주은래를 존경하고 마오쩌뚱을 어려워한다. 이들은 모두 키신저가 하버드에서 배운 척도를 가지고는 재어보기 어려운 상대들이기 때문이다. 키신저의 성공의 비결은 카우보이처럼 혼자 행동하는데 있다. 키신저의 힘은 그가 무자비할만큼 현실적인데서 나온다. 키신저의 현실주의는 ‘힘의 존중’과 연결된다."

조세형은 베트남전쟁의 일대 전환점이 된 뉴욕타임즈의 네일 시한(Neil Sheehan)기자의 근성을 소개하면서 "그가 결국 미 국방성을 진동시킨 ‘펜타곤 페이퍼’ 폭로의 도화선 역할을 했다. 71년 3월 월남전 전체 군사 진상을 담은 펜타곤 페이퍼를 입수해 동료들과 2달간 호텔방에 박혀 이잡듯이 분석해 71년 6월3일 첫회분을 실어 전세계를 놀라게 했다"고 회상했다.

그러면서도 조세형은 미국 언론의 몰락을 예고했다. "미국 언론인의 친목단체인 '내셔널 프레스클럽'에 점점 더 뜻있는 기자들의 발걸음은 줄어들고, 신문기자가 주업인지 로비스트 노릇하는 게 주업인지 모를 얼치기 기자들, 큰 회사의 선전요원들(홍보), 국회의원이나 각국 대사관의 공보관 등이 클럽라운지를 독차지해서 흡사 동네 사랑방 같이 되어 버렸다. 회원은 점점 줄고 적자는 쌓여 나갔다"며 자본과 권력의 품안으로 포섭돼 가는 미국 언론계를 목격했다.

책을 읽다보면 의외의 인물들도 만날 수 있다. 71년 10월25일 밤 11시15분 유엔에서 중공 가입과 동시에 대만 축출 안건인 알바니아 안이 76대 35로 통과될때 제3세계 대부분의 나라 대표들이 환호성을 지르며 좋아했던 사실도 볼 수 있다. 박수는 중공의 승리 때문이 아니라 그날 7번의 표결에서 미국이 6번이나 패한 사실에 대한 환희였단다. 조세형은 당시 유엔주재 미국대사였던 조지 부시(아버지 부시)가 "고개를 떨군채 애처로운 표정"이었다고 회상했다. 동북아를 넘어 세계의 권력 편재가 바뀐 이 사건을 접하고도 "우리 김용식 외무장관은 자꾸만 '큰일났다'는 말만 되풀이 했다"고 회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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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qnseksrmrqhr

    현장의 생동감이 그대로 전해지는 좋은 책인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