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삶은 우리들이 만들 세상과 닮아있어야 한다

[서평] <우리가 배후다> 충북·청주 경실련 성희롱사건 기록집


서울의 활동가로 20대를 사회운동에 바치면서 서울 소재의 시민단체 곳곳에서 활동가들이 겪어야 하는 온갖 인권침해를 들었다. 하지만 다른 지역에 있어서인지 충북·청주 경실련 성희롱 사건은 아주 최근에서야 접했다. 나는 경실련을 잘 모른다. 그저 큰 시민단체 정도인 것만 알고 있고, 파워가 있겠거니 하고 생각했지만, 기록집을 읽고 나니 그 파워가 다 무슨 소용일까 싶었다. 한편으로는 이렇게 든든한 지지모임을 꾸릴 수 있는 역량 있는 활동가들이 피해활동가 곁에 있다는 사실에 안심되었고 가해자들을 보면서는 기본도 안 된 사람들이 어떻게 저 자리까지 올라간 것인지 의아했다.

기록집은 충북·청주 경실련 성희롱 사건 피해자 3명의 목소리, 그리고 지지모임 구성원 16명의 글, 사건 기록, 비슷한 일을 겪은 사람들의 글, 자료까지 총 다섯 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성적괴롭힘(성희롱) 문제를 판단하는 기준을 간추리자면 네 가지라고 생각한다. 행위가 있었는가, 명시적 동의를 받았는가(위력이 있었는가), 누군가 성적 불쾌감을 느꼈는가, 문제 제기가 있었는가이다. 어떤 행위가 있었고, 상대방의 명시적 동의를 받지 않았고, 상근자와 임원이라는 위력이 존재했고, 상근자들은 성적 불쾌감(성적수치심)을 느꼈고, 피해자들이 문제를 제기했다. 심지어 가해에 동참한 한 임원은 잘못을 인정하고 사과하기까지 했다. 피해자들이 없는 공간이긴 했지만 말이다.

피해자들은 최선을 다했다. 이들은 사건 해결을 함께 책임지는 주체로서 충북청주경실련에 진상조사를 요구했다. 하지만 충북청주경실련은 책임을 지지 않았다. 피해자들과 협의 없이 중앙경실련을 사건에 개입시켰고, 충북청주경실련을 사고지부로 만들어 피해자들을 해고했다. 그 과정에서 계속해서 피해자들에게 화를 내며 2차 가해를 했던 사람이 논의 과정에 참여했다.

그렇다면 이 문제는 명백히 문제가 맞고, 해결하는 과정이 필요했다. 그 과정을 시작하자마자 스텝이 꼬여버렸다. 믿을 수 있는 조직은 문제가 발생하지 않는 공간이라기보다는 문제가 있을 때 문제를 드러내어 말할 수 있고, 조직의 구성원들이 문제를 회피하지 않고 문제를 제기한 사람들과 함께 문제 해결을 위해 노력하는 조직이다. 이러한 점에서 충북청주경실련은 안타깝지만 믿을 수 있는 조직이 아니었고, 중앙경실련은 더더욱 그러했다. 피해자와 지지모임을 비난하는 활동가들이 ‘이 사건의 배후에는 경실련을 접수해서 지지기반을 마련하려는 급진 페미니스트들이 있다’고 주장했다는 부분에서는 특히 실소를 참지 못했다.

기록집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부분은 지지모임에 참여한 연대자가 과거에 비슷한 일을 겪었던 경험을 공유하며 ‘바닥으로 떨어져도 손잡아 줄 사람들이 있다는 것은 생각보다 엄청난 일’이라고 이야기한 것이었다. 이 글쓴이는 피해자 지지모임 활동을 통해 ‘상처로 상처를 치유’했다고 자신을 표현하는데, 이 부분은 자신의 피해를 말하지 못하고 기억 저편 어딘가에 묻어두었던 사람들에게 큰 용기가 되는 말이었다.

이처럼 기록은 중요하다. 사정을 모르는 이들이 함부로 쓴 글과 말 때문에 성폭력 피해자들의 기억 또한 침범되거나 피해자가 자신을 자책하는 일들을 보아왔다. 그때 힘이 되었던 것은 피해당사자들의 기록이었다. 지워버리고 싶은 일을 경험했을 때 힘들지만 그 기억을 꾹꾹 눌러서 어딘가에 써 놓으면 당시의 감정과 사실관계를 파악할 수 있다. 그리고 그 글들은 언젠가 가해자 편에 선 말들에 맞서는 강력한 무기가 된다. 나 또한 지난 알바노조와 노동당 활동을 하면서 마주했던 문제들을 21명의 사람들과 함께 <OO계열 언더조직 조직문화 인터뷰집>으로 만들었다. 기록하고 편집하면서 이 작업이 끝나면 반드시 이 고통에서 자유로워 질 것이라고, 잊고 살고 싶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문제 제기자이면서 동시에 조직문화를 만들어왔던 당사자로서 책임을 져야 한다고 생각했다. 내 생각은 옳았다. 그리고 피해자 지지모임도 이 기록집을 통해 옳은 일을 했다.

충북청주 경실련 성희롱 사건 피해자 지지모임은 역사를 만들었다. 이 기록집은 역사책이다. 피해자들 그리고 연대자들, 배후로 지목된 사람들이 세대와 성별을 가릴 것 없이 우리가 이 역사를 똑똑히 봤고 그 현장에 있었노라고 증언하는 증언집이다. 기록집은 가해자들의 말들이 흩어지고 사라지지 않도록 붙잡아두는 역할도 한다. 또한 나는 충북청주 경실련의 폐쇄가 차라리 잘 됐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이 정도 사건을 해결할 의지도 능력도 없거나 그런 의지와 능력이 있는 활동가(피해자)들을 의사결정 구조에서 배제하는 조직이면 망하는 게 맞다. 다만 엉뚱하게 조직 폐쇄에 따른 피해를 다시 한번 피해자들이 입게 된 것에 대한 보상이 필요하다. 법적 싸움이 길고 지난하겠지만 피해자들이 반드시 밀린 임금과 피해보상액을 충분하게 받았으면 한다. 피해자들은 그럴 자격이 있다.

피해자들은 경실련 활동과 시민단체 활동가의 자부심이 있는 사람들이었다. 때문에 피해자들이 가질 두려움 중에는 시민사회에 대한 두려움도 있을 것이다. ‘앞으로 내 활동가로서의 경력은 어떡하지?’ ‘조직 내에서 문제를 제기했다고 소문나서 다른 시민단체에서도 나를 써주지 않으면 어떡하지?’ 하는 생각들. 실제로 나와 함께 언더그라운드 조직을 폭로하고 조직문화를 문제를 제기했던 젊은 활동가들은 이후 다른 시민단체나 노동조합에 취직할 때 면접 자리에서 ‘그 사건은 어떻게 되었느냐’, ‘조직에서 문제가 발생하면 어떻게 해결할 거냐’는 질문을 받았다. ‘걔네들 채용할 때 조심해야 한다’, ‘걔네들한테 말 잘못했다가 나중에 큰일 난다’라는 식의 소문도 들었다. 충북·청주지역의 시민사회단체는 이런 말들이 돌지 않도록 조심해야 할 것이고 이 사건의 피해자와 연대자들을 불필요하게 의심하거나 비난하는 질문을 하지 않아야 한다. 이들은 그 누구보다 단체를 애정했고 변화에 대한 기대를 했으며 문제를 회피하지 않고 해결하기 위해 노력했던 사람들이다. 시민사회는 이들을 두 발 벗고 환영해도 모자라다.

성폭력 피해자의 말하기는 그 말하기를 들을 준비가 된 청중이 존재할 때 세상에 나올 수 있다. 지난 수십 년간 페미니스트들이 만들어온 변화는 이렇게 들을 준비가 된 청중을 만드는 작업이었고 거센 백래시에 맞서는 연대의 말들을 준비하는 작업이었다. 때문에 사회는 조금씩 변화해왔고 드물겠지만 좋은 성폭력 사건 해결 과정도 가능하다. 피해자가 말하기를 시작했을 때, 그리고 연대자들이 두텁게 함께할 때, 성폭력 사건의 발생을 대비해 건강한 해결 과정을 고민해온 조직일 때 등등 여러 가지 조건들이 ‘좋은’ 성폭력 사건 해결을 위한 문을 열어준다. 이 기록집 또한 이후 어떤 조직에서 성폭력 사건이 생겼을 때 중요한 참고자료가 될 수 있다.

마지막으로 시민사회의 쇄신을 이야기하고 싶다. 안희정, 박원순, 오거돈 성폭력 사건, 그리고 그 가해자들을 감싸고 피해자의 얼굴과 인수인계서, 편지를 공유하며 피해자 비난하기에 앞장섰던 민주·진보 진영 인사들을 하루가 멀다하고 접하고 있다. 기록집을 보면 지자체장 성폭력 사건이 남 일이 아니다. 시민사회단체 임원들은 이 시기를 반드시 거울삼아 예외 없이 자신을 돌아보아야 한다. 또한 이 글을 읽고 있는 사람들이 자신이 소속되거나 후원하는 단체에서, 무슨 무슨 연대체에서 함께 활동을 고민하는 사람들이, 각종 토론회나 집회에서 얼굴을 마주치는 동지들이 겪고 있는 일을 외면하지 않기를 바란다. '좋아요'라도 한 번 눌러주고, 지지하는 메시지라도 한 번 보내주는 것들이 다 행동이다. 더 나아가 기록집이 나왔으니 이 기록집을 시민단체 집행부들이 함께 읽고 토론하는 시간을 가져보는 것만으로도 그 단체의 조직문화는 한 단계 개선될 수 있을 것이다. 부디 시민사회단체들이 조직 내에서 발생한 또는 발생할 문제를 뒷전으로 미루지 않기를 바란다.

‘헌신하다가 헌신짝 된다’는 말이 페미니스트들 사이에 유행했던 적이 있었다. 남자에게 헌신하지 말자는 이야기였지만 왠지 시민단체 내의 젊은 활동가들 사이에서도 공유되는 감각처럼 느껴진다. 건강과 시간을 쏟아 내 한 몸이 아니라 이 세상을 책임져 보겠노라고 기꺼이 헌신하는 활동가들 덕분이 우리나라 시민사회가 성장해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런 활동가들이 조직에서 상처를 받았을 때 그 문제 제기를 무마하기 위해 그들을 헌신짝처럼 버리는 일부 시민단체들을 보면 한숨이 나온다. 헌신하다가 헌신짝 되니 헌신하면 안 되는가 하는 깊은 회의감도 든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활동은 변화를 만들어내는 것이기에 희망을 버릴 수 없다. 평등한 조직문화를 만드는 것은 결국 이 사회의 불평등과 차별을 해소하는 것과 같은 일이기 때문이다. 어제보다 오늘, 오늘보다 내일 더 우리의 삶은 우리들이 만들 세상과 닮아있기를 바라며 이 기록집이 그 과정에서 빛을 발하리라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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