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김용욱] |
언젠가부터 한국 사회에 ‘거버넌스’라는 낯선 용어가 유입돼 여기저기 쓰이기 시작했다. 한국 사회에 ‘거버넌스’라는 개념이 들어와 널리 쓰이기 시작한 것은 2000년대 중반 무렵인데, 그 때나 지금이나 제대로 번역이 안 되는 것은 마찬가지다. 보통 정치학이나 행정학 분야에서 이 말은 ‘민관협치’라는 의미로 많이 이해된다. 그때 ‘협치’는 ‘통치’에 대한 대응 개념, 즉 정부 혹은 정부의 통치를 뜻하는 ‘거번먼트(government)’에 대응하는 용어로 흔히 이해된다. 이 협치라는 용어는 관료제적 통치가 아니라 민과 관이 함께 협력하여 통치하는 것과 같은 이미지를 만들어낸다. 그래서 사람들은 처음에 거버넌스를 새로운 국가 경영의 원리로 대략 이해했다. 한국사회는 오랜 시기 독재국가와 관료정치가 민주주의를 억압해왔고, 그 경험에서 비롯된 정부에 대한 불신은 진보적 시민사회가 이 개념을 의심 없이 받아들이도록 만들었다. 게다가 당시는 노무현 정부 시절이었고, 이 새로운 국가 경영 기술은 정부 차원에서 장려됐다. 당시 정부는 학진(현재의 한국연구재단) 등을 통해 관련 분야 연구를 적극 지원했다. 학계에 거버넌스 학회라는 것이 만들어지고 각 대학에 거버넌스 관련 수업들이 개설됐다. 친정부적 시민운동가들과 진보적 지식인들도 ‘거버넌스의 중요성’에 대해 말하기 시작했을 때, 정부를 견제할 수 있는 방법으로서 심지어 ‘참여민주주의’의 하나로 보이기도 하는 이 거버넌스라는 것에 누구도 ‘아니오!’라고 말하기는 쉽지 않았다. 무엇보다 그것이 무엇인지 제대로 몰랐기 때문에. 그리고 거버넌스는 곳곳에서 빠른 속도로 민주주의를 대체하는 용어가 됐다.
그러나 거버넌스라는 단어 자체에는 ‘민·관’이란 의미도 ‘협력’이란 의미도 전혀 들어있지 않다. 이전부터 거버넌스는 영어권에서 거번먼트와 유사한 의미로서 관리, 행정, 통치를 의미하는 말로 기업 경영학은 물론이고 일상용어에서도 이미 쓰이고 있던 일반 용어이다. 거버넌스 담론이 등장하기 전에는 거버넌스와 거먼먼트 사이에 개념상의 대립적인 의미는 전혀 없었다. 두 단어는 모두 ‘구베르노(guberno)’라는 라틴어에 그 기원을 가지고 있으며, 원래 ‘키를 잡다’는 뜻이다. 유사한 형태를 가진 희랍어 ‘퀴베르노(χυβερνω)’도 동일한 의미를 갖는다. 키를 잡는다는 것은 선장으로서 항해를 한다는 것이고 배를 이끌고 간다는 뜻에서 통치하다는 의미로 확장된 것이다. 고대 세계에서 배와 선장은 국가와 통치자로 종종 비유되곤 했다. 거버넌스 개념을 정치철학적으로 해석하고 있는 《거버넌스로 통치하기governing as governance》(Jan kooiman)와 같은 책1)은 이 선장의 자리를 나누자는 것이 거버넌스라고 말한다. 선장의 몫을 나누자는 이 주장은 선장, 즉 아르코스가 없는(an-archos) 무정부적 상태를 연상케 하며, 급진적 민주주의의 요구로까지 들릴 정도다. 그러나 거버넌스 이론가들은 그 몫을 ‘누구와’ 나눌 것인가에 대해서는 질문하지 않는다.
거버넌스의 주창자들은 소통과 협력, 토론과 절차적 합의 과정을 무엇보다도 중요시하고 ‘위에서 아래로(top-down)’의 방식이 아니라 ‘아래에서 위로(bottom-up)’의 방식을 강조했다. 그러나 토론과 합의 과정, 그리고 위-아래의 방향 전환이 곧 민주적 과정과 절차로 등치될 수는 없다. 민주주의와 거버넌스의 가장 큰 차이는 주체와 권력의 문제다. 민주주의의 원리는 통치의 주체가 민중(demos)임을, ‘민중의 지배(demos-kratia)’를 뜻하는 그 단어 자체에서부터 분명히 하고 있다. 그런데 거버넌스의 주체는 민중도, 국민도, 시민도 아니다. 거버넌스는 ‘이해당사자들’을 불러 모은다. 민과 관이라는 애매한 표현으로 제시되지만, 민관협치에서 그 ‘민’은 민중의 민도, 시민의 민도 아니며, ‘민간부문’의 ‘민’이다. 민간부분은 사적영역을 의미하며 이 말은 공-사 협력체계(public-private partnership)의 다른 표현일 뿐이다. 여기서 사적영역이란 국가라는 공적영역에 대한 사적영역으로서의 시장-사회를 의미한다. 민간 또는 비정부기구(NGO)라고 표현하면 곧 시민사회로 표상되지만 시민사회 안에서도 실제로 가장 힘 있는 집단은 기업과 기업이 지배하는 기관들, 즉 대학, 연구소, 싱크탱크와 법무법인들이다. 이런 반노동적 친자본적 시민사회는 점점 세력을 확장해왔다. 거버넌스 담론은 민관협치와 같은 혼동을 주는 번역어를 내세워 공공정책을 수립하는 과정에서의 기업의 지배력을 강화하고 자본이 국가라는 공적 관리의 영역 내부로 침투하는 것을 정당화했다. 그리고 교수들과 지식인들은 그것을 ‘신공공관리론’이나 ‘신국가경영론’과 같은 이름으로 포장해주었다.
또한 민주주의는 권력이 민중에게 있음을 분명히 하고 민중 권력의 강화를 지향한다. 그러나 거버넌스에는 그런 가치지향적 목표가 없다. ‘원활한 합의 체계의 작동’, 그리고 그것을 통한 ‘갈등 관리’ 그 자체가 목표일 뿐이다. 그래서 민주주의가 권력 밖에서 새로운 힘들을 창출해낸다면, 거버넌스는 언제나 지배적 권력의 내부에서 작동하고 그 참여자들은 원하든 원하지 않든 기존의 권력 체제를 공고히 하는 데 기여할 수밖에 없다. 대학이나 회사, 공장에서 민주주의가 잘 되고 있다는 말과, 거버넌스가 잘 작동하고 있다는 말의 차이를 생각해보면 알 것이다. 《한국 신자유주의의 기원과 형성》에서 지주형은 데이비드 하비(David Harvey)를 인용하여 “거버넌스의 민간참여자는 대개 소수(특히 지배적 자본, 지방 이익단체, 또는 토호세력)에 국한되므로 오히려 민주주의를 우회하는 통로로 작용할 뿐 아니라, 공사협력 같은 거버넌스 기제는 종종 사적 자본의 손실을 공적자금으로 보전하는 수단으로 작용”한다고 말한다.2)
‘관리론’으로서 거버넌스는 정치를 마치 다자간 협상 같은 방법론적인 문제로 환원시키면서 거리의 정치와 저항의 정치와 같은 정치과정 밖에서 일어나는 자율적이고 자생적이며 창조적인 정치행위들을 봉쇄하고 정치적 의제들을 협상장 안으로 가두는 역할을 했다. 그 과정에서 노동은 소외됐고 소수와 약자는 배제됐으며 전문가의 발언권은 강화됐다. 전문가 정치(테크노크라시)는 민주주의(데모크라시)의 반대말이나 마찬가지다. 거버넌스 테이블은 위에서 일방적으로 내리 꽂는 과거의 권위주의적 관료시스템과는 달랐지만 협상가들은 대부분 상당히 전문가적 엘리트로 충원됐고, 여기에 독자적으로 참여할 수 없는 노동자와 기층 민중들은 상층 부르주아 관리 계급의 일원 중에서 노동자와 민중을 대변하는 ‘호민관’ 역할을 해줄 사람들을 찾아야만 했다. 거버넌스는 중간지원조직과 중간관리조직을 강화했고, 이 모델은 똑같은 임금노동자이지만 임원진과 관리직들을 하층 노동자들과 분리하여 차별화하고 중간 관리자들을 계층화함으로써 ‘노동에 의한 노동 관리’라는 기업의 노무관리와 유사한 시스템을 만들어냈다. 거버넌스는 기업경영술을 시민사회에 적용했다. 기업의 통치술은 국가와 사회의 통치술이 됐다.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이 용어를 통해 정치의 기술이 경영술로 재정의됐으며, 기업 경영의 원리를 국가로까지 확대해 적용할 수 있게 됐다는 점이다. 1992년 정주영 현대그룹 설립자가 대선에 출마했을 때만 하더라도 그의 경영자로서의 경험은 대통령으로서 요구되는 정치적 역량과 구분됐다. 당시 많은 사람들은 이익을 추구하는 기업과 정의를 추구하는 국가는 그 경영과 통치의 원리가 근본적으로 다르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 다음 사장 출신 대통령 후보가 나왔을 때 기업을 경영한 경험은 나라를 잘 경영할 수 있는 능력의 증거가 됐다. 지금 정부와 여당은 대통령을 스스럼없이 ‘시이오(CEO)’라 칭하고 그것을 자랑으로 여긴다. 심지어 공기업이나 비영리단체들과 비정부기구, 사회운동 단체들도 상당수가 이 거버넌스를 수용하고 있다. 그동안 거버넌스는 노동의 정치세력화를 치명적으로 약화시키고 친자본적 중간관리계급의 시민대표성을 강화하는 데 기여했다. 노동은 여기에 어떻게 대처할 것인가. 워커스 사전에 이 개념을 등재하는 이유다.[워커스 46호]
[각주]
1) Kooiman, Jan. Governing as Governance. (Sage Publications Ltd., 2003)
2) 지주형. 『한국 신자유주의의 기원과 형성』(책세상, 2011). 492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