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적 경제로 부활하는 아랍 사회주의

[INTERNATIONAL4]

  지난 6월 17일 튀니지 의회에서 사회연대경제법이 통과되었다. [출처: https://www.aa.com.tr/fr/politique/tunisie-le-parlement-adopte-un-projet-de-loi-relatif-%C3%A0-l-%C3%A9conomie-sociale-et-solidaire/1881441]

사회연대경제법 제정

지난 6월 말 튀니지는 아랍세계 최초로 사회연대경제법을 제정했다. 사회연대경제1의 개념, 목표, 운영방식 등에 관한 규정을 담은 법이 제정되면서 튀니지는 사회적 경제 영역의 법적인 틀과, 관련 정책의 근거를 마련하게 됐다. 또한 사회연대경제 조직들은 재정조달과 함께 자신들의 이해를 대변할 기회 등의 다양한 혜택을 얻을 수 있게 됐다.

튀니지에서 이 법이 제정된 것은 사회적 경제 조직들의 역할 때문이기는 하지만, 이곳에서 시작된 아랍의 봄과도 무관하지 않다. 이제 중요한 것은 어떻게 이 법이 공허한 선언에 머무르지 않게 할 것인가이다. 정치권은 사회연대경제법 도입의 주된 목적으로 고용 창출과 경제성장을 내세웠다. 실제로 튀니지에서는 부와 일자리 창출에 있어 사회적 경제에 거는 기대가 크다. 하지만 문제는 산적해 있다. 법은 제정됐지만 이 분야와 관련된 국가 전략을 찾기는 어렵다. 사회연대경제 정책이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반면에 국가가 협동조합이나 자주관리운동의 자율성을 해쳤던 과거의 경험을 반복하지 않도록 해야 하는 과제도 있다. 사회적 경제에 대한 이해가 전반적으로 부족하고, 이 영역에 속한 조직들 간의 협동이나 다양한 주체들 간의 거버넌스 경험이 일천한 것도 문제다.

가까운, 그리고 먼 사회적 경제의 전사

이번에 제정된 법이 사회적 경제와 관련한 첫 입법 사례는 아니다. 튀니지에는 이미 협동조합, 공제조합, 민간단체에 관한 법 규정이 존재한다. 협동조합은 1967년에, 공제조합은 그보다 이른 1954년에 법제화됐다. 민간단체는 보다 늦은 2011년, 아랍의 봄의 성과로 관련 규정이 도입됐다. 그래도 여전히 중동 및 북아프리카 지역은 사회적 경제와 거리가 있어 보인다. 아랍인은 아프리카인과 함께 유럽에서 발달한 사회적 경제의 대상으로 익숙하다. 지중해 남쪽에서 온 이주민의 사회통합을 돕는 사회적 기업, 또는 공정무역을 중심으로 한 발전 NGO가 떠오른다. 중동 및 북아프리카 내부의 사회적 경제는 거의 주목을 받지 못했다. 그나마 이뤄진 연구도 외부의 주된 관심사인 이슬람, 종족 공동체 등과 연관된 것이 대부분이다. 이스라엘의 키부츠 운동, 꾸란의 해방적 해석에 근거를 둔 그라민은행의 사례, 그리고 무슬림형제단의 사회경제적 활동이 대표적인 사례로 언급되곤 했다. 실제로 한 시대를 풍미한 이슬람주의가 사회적 경제의 역사에도 한 획을 그었다는 점은 부정할 수 없다. 최근까지 직접적 정치활동이 어려웠던 상황에서, 이슬람주의는 지역사회의 교육, 의료, 문화, 소비 등을 담당하는 NGO 또는 일종의 사회적 경제 조직으로서 활동을 벌여왔다.2 이들의 활동이 남미 해방신학의 사례와 유사하다고 해서 ‘이슬람 기초 공동체’라는 용어가 사용되기도 했다.

보다 이 지역 사회적 경제의 전사에 가까운 것은 자본주의사회주의 진영 대립이라는 냉전 상황에서 제3의 길을 모색한, 그리고 정치적으로 비동맹세력의 핵심이던 아랍 민족주의 정권의 경제모델일 것이다. 아랍 민족주의의 거점이었던 이집트에서는 1952년 나세르 집권 직후 바로 토지개혁이 시도됐다. 영국 식민지배를 거치면서 토지를 독점한 대토지 소유주들의 토지 상당부분을 몰수해 이들 세력을 약화하고 가난한 농민들에게 분배함으로써 지지기반을 확대하고자 했다. 또한 토지개혁을 통해 국가가 확보한 재원을 제조업 발전의 종잣돈으로 활용했다. 이러한 농업분야의 개혁은 기대한 만큼의 성과를 거두지는 못했다. 특히 농민들이 기존 대농의 지배에서 자유로워진 대신 관의 지배를 받게 된 것이다. 그리고 이 국가의 주된 통제수단이 역설적으로 협동조합이었다.3

130년 식민지배에서 벗어난 알제리는 개방적인 정책을 편 튀니지, 모로코와 달리 국가주도로 석유 등 주요 산업의 국유화와 자주관리운동(Autogestion)을 전개했다. 알제리 사회주의를 표방하면서 국가 주도로 농업협동조합과 제조업협동조합이 만들어졌으며 협동조합들을 합병해 최초의 공기업을 만들기도 했다. 그러나 프랑스의 개입과 국가 관료제의 폐해 등으로 실패를 경험하게 된다. 그래도 알제리는 자주적 발전경험으로 80년대 중반까지 이웃나라들과 달리 심각한 금융위기를 겪지 않았고, 개혁 개방이 추진되는 과정에서도 자주적인 면모를 보였다.

튀니지도 독립 이후 추진됐던 자유주의적 경제정책의 실패를 교정하고자 했다. 60년대에 당시 수상이던 벤 살라(Ben Salah)는 자주적인 경제정책과 협동조합운동을 주요 내용으로 하는 정책을 폈다. 농업의 생산성을 높이기 위한 정책의 일환으로 소농들의 토지를 협동조합의 소유로 집단화한 것이다. 그러나 소농들은 더 빈곤해졌고 결국 1969년 살라가 퇴진하면서 이 정책은 중단되고 토지는 다시 개인소유로 환원됐다. 이렇게 사회적 경제의 역사적 유산은 계승해야 할 자산이기보다 어두운 기억으로 남아있는 측면이 크다. 튀니지에서 협동조합은 여전히 과거에 실패한 강제적인 토지 집단화 정책의 경험을 떠올리게 하고, 알제리에서도 사회적 경제는 본래의 의미와 정반대로 국가 주도의 경제모델로 인식되는 경향이 있다.

새로운 사회적 경제

위에서 사회적 경제의 사례로 중동보다 북아프리카 국가들의 사례를 언급한 것은 자의적 선택의 결과만은 아니다. 같은 아랍국가들의 경우에도 중동과 북아프리카의 상황이 다르기 때문이다. 중동지역 국가들은 시리아, 이라크, 예멘, 팔레스타인처럼 전쟁 상황이거나 사회적 경제가 발전하기 어려운 산업구조를 가진 산유국 등이어서 사회적 경제에 대한 관심이 약한 편이다. 이에 비해 북아프리카 지역은 석유 의존도가 크고 10년 가까이 내전이 지속되고 있는 리비아를 제외하면 사회적 경제라고 볼 수 있는 경제형태가 현재의 경제적 어려움을 극복할 수 있는 효과적인 무기로 여겨지고 있다. 특히 알제리, 튀니지, 모로코가 사회적 경제의 중심지 중 하나인 프랑스의 식민지배를 받았고, 지금도 가장 가까운 동맹국이라는 점이 중동과 다른 북아프리카의 양상을 설명해준다.

연대, 호혜, 협동은 북아프리카 사회에서 새로운 것이 아니다. 가족, 동네, 종교나 종족 공동체 등 전통적인 단위에서 호혜적인 관계가 존재해왔고 공동 노동은 흔한 관행이었다. 하지만 어느 정도 체계를 갖춘 사회적 경제의 부상은 1980년대 이후의 현상이다. 민간단체나 사회적기업 등 사회적 경제가 조직적인 형태를 띠게 된 것은 이 지역의 역사에서 새로운 것이다. 모로코와 튀니지에서는 1980년대 말부터 이 ‘새로운 사회적 경제’가 등장하는데 그 배경은 당시 진행된 구조조정에 따른 문제 해결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알제리에서는 조금 늦은 1990년대 중반에 모습을 드러냈는데 두 이웃나라와 마찬가지로 경제개방이 가져온 배제, 빈곤, 실업과 같은 문제를 완화시켜보고자 하는 의도에서였다.4

보다 본격적인 성장은 민중들의 저항운동이 계기가 됐다. 튀니지에서는 2011년 1월 혁명이 계층 간, 지역 간 격차를 적나라하게 보여주었다. 그리고 이러한 불평등 문제는 이 나라가 채택한 발전방식의 산물로 인식됐다. 알제리, 모로코까지 확산된 민중봉기는 생활수준의 획기적인 상승에 대한 대중의 강한 욕구를 보여줬다. 그리고 이러한 요구에 부응하는 방법 중 하나가 바로 사회연대경제였다.

  1963년 3월 22일 알제리 수도 알제에서 프랑스 식민주의자들이 민족해방전쟁(1954-1962년) 패배 후 알제리를 떠나면서 남겨진 자산에 대한 자주관리 법령을 지지하는 집회가 열리고 있다. [출처: https://editionsasymetrie.org/ouvrage/les-debuts-de-lautogestion-industrielle-en-algerie/]

혁명에서 싹튼 사회적 경제

일반적으로 프랑스 식민지배를 겪은 북아프리카 3국을 논의할 때 인구가 많고 국제정치적으로 비중이 더 큰 알제리를 먼저, 그리고 모로코나 튀니지 순으로 얘기하는 경향이 있다. 그런데 적어도 최근 사회적 경제 분야에서는 튀니지가 돋보인다.

위에서 소개한 사회연대경제법 제정을 전후해 이 분야에 대한 사회적 관심이 뜨겁다. 몇몇 사례가 이러한 분위기를 보여준다. 사회연대경제법 공표 직후 튀니지 최대 보험회사인 교직원공제보험(MAE)은 금융기관으로는 최초로 기업 비전에 ‘인간 가치’와 ‘지속가능한 발전’을 표방하며 사회연대 보험회사로 거듭났다. 1962년 교사단체가 설립한 이 회사는 비영리기업으로 회원이 약 30만 명이며 교사, 일반 직장인, 수공업자, 전문직, 기업, 민간단체 등 다양한 직종을 아우르고 있다. 그리고 이들에게 다양한 보험상품을 제공하고 있다.5 법 제정 과정에서는 페이스북 그룹 #Tounes solidaire의 활동이 두드러졌다. 이 모임은 튀니지의 90개 사회연대경제 조직을 대표하는 106명이 서명한 공개서한을 계기로 시작됐다. 사회연대경제법 제정과정에서 자신들의 의견을 개진했고 어느 정도 반영되기도 했다.

튀니지는 관광업과 함께 농업이 경제의 핵심 분야다. 《중동·북아프리카의 식량 불안정과 아랍혁명》6이라는 책에서 아예브와 부시(Habib Ayeb et Ray Bush)는 2011년 아랍민중의 봉기에 대해 새로운 해석을 제시했다. 잘못된 역대 농업정책이 농촌 주민들의 식량사정을 불안정하게 만들었고 봉기를 초래했다는 것이다. 그 근거로 아랍의 봄의 저항을 주도한 것이 농촌지역이었으며, 아랍의 봄을 상징하는 모하메드 부아지지의 이력에서도 이 점을 확인할 수 있다고 밝혔다. 부아지지가 2010년 12월 17일 경찰에 모욕을 당한 후 분신한 과일 노점상이라는 기존 설명에 덧붙여, 같은 해 6월과 7월에 그가 생을 마감한 시디 부지드 시 청사 앞에서 농민 시위에 참여했다는 것이다. 노점상이었던 그가 농민 시위에 참여했던 것은 그의 가족이 부채에 시달렸고 그 자신도 오랫동안 일했던 농장을 빼앗겼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이제 수출, 고용 등의 비중이 큰 농업 분야, 특히 빈곤, 지리적 고립, 낮은 교육수준과 문해율 등 소농이 직면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사회적 경제의 역할에 튀니지 사회가 주목하고 있는 것이다.

국가라는 딜레마

북아프리카의 사회적 경제 논의에서는 유독 국가의 역할이 중요하게 다뤄진다. 아랍 사회주의의 경험이 낳은 유산이기도 하고 그로 인한 트라우마 때문이기도 하다. 특히 지대경제의 성격이 강하고 석유수입으로 재정여력이 있는 알제리는 사회적 경제 조직에 보조금을 주거나 유리한 조건으로 대출을 해주는 등 적극적으로 개입하고 있다. 이와 관련해 사회적 경제 조직이 물질적 지원을 받으며 정권의 요구를 실현하는 수단이 된다는 지적도 있다. 이러한 사회적경제 분야의 정치도구화 현상은 이 분야의 가시성과 사회적 인정에 해가 될 수 있으며, 자율성이 생명인 사회경제적 혁신을 저해하는 측면도 있다. 공식적인 경제부문에 진입하기보다는 국가를 대신해 소액금융이나 돌봄서비스 같은 취약계층 대응 사업에 그치는 양상을 보이기도 한다. 국가 주도에 따른 사회적 경제의 왜곡 현상이 비단 한국사회만 겪는 문제는 아닌 것이다.

코로나19와 사회적 경제

세계적인 코로나19 사태로 사회연대경제는 그 어느 분야보다 타격이 크다. 매출액이나 기부액이 감소하고, 격리나 거리두기로 인해 자원봉사가 위축되기도 한다. 북아프리카 지역도 유럽만큼은 아니지만 한국보다는 심각하게 코로나19의 영향을 받고 있다. 특히 사회적 경제 조직의 상당수를 차지하는 소규모의 사회적 기업은 일반적인 소기업과 마찬가지로 존폐의 기로에 서 있다. 때문에 이 조직들의 상황에 부합하는 맞춤형 지원이 요구되고 있다.7

역으로 코로나19 사태로 사회적 경제가 유용한 대안으로 각광받기도 한다. 특히 최근 몇 년간 경제상황이 좋지 않던 북아프리카 3국에서는 고용의 약 절반을 차지하는 비공식부문을 중심으로 감염병으로 인한 극단적인 양상이 나타나며 사회적 경제에 큰 기대를 걸고 있는 상황이다. 앞에서 소개한 튀니지의 입법 사례가 이 점을 잘 보여준다. 또한 감염병에 따른 공공성과 사회적, 환경적 가치의 중요성이 재확인되면서 사회적 경제의 세계관과 경제관의 유효성이 입증되기도 한다. 사회적 경제의 현실은 고난을 겪고 있지만 그 정신과 대안으로서의 가치는 빛을 발하고 있는 것이다.

<각주>

1. ‘사회적경제’ 대신에 ‘사회연대경제’라는 표현을 쓰는 것은 문자 상으로는 경제활동이 사회적 가치를 고려하는 측면과 함께 연대의 정신과 방식을 반영한다고 볼 수 있지만 자본주의 경제와의 차이를 강조하기 위한 것이기도 하다. 연대적 경제의 핵심은 경제에 대한 새로운 관념에 있다. 경제가 단지 시장원리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재분배와 호혜성, 즉 비화폐적이고 수평적 관계를 포함하는 것임을 강조하는 것이다. 시민이 생산, 분배, 유통의 일부분을 재전유하기 위한 시도하고 말할 수 있다. 공정무역, 지역순환경제 등이 이러한 연대적 경제의 정신을 담고있는 대표적인 사례라고 할 수 있다.(엄한진, 박준식, 안동규, 2011, 「대안운동으로서의 사회적 경제: 프랑스 지역관리기업의 사례를 중심으로」, 《사회와 이론》 통권 제18집.)

2. 엄한진, 2014, 《이슬람주의》, 한국문화사.

3. https://laviedesidees.fr/Habib-Ayeb-Ray-Bush-Food-insecurity-and-Revolution.html

4. Malika Ahmed-Zaid, Touhami Abdelkhalek, Zied Ouelhazi, 2013, L’économie socialeet solidaire au Maghreb: Quelles realités pour quel avenir?, IPEMED.

5. https://www.ilboursa.com/marches/la-mae-premiere-compagnied%E2%80%98assurance-en-tunisie-a-integrer-les-valeurs-de-leconomie-socialeet-solidaire_24623

6. Habib Ayeb et Ray Bush, 2019, Food insecurity and Revolution in the Middle East and North Africa, Anthem Press.

7. https://www.agenceecofin.com/entreprendre/2108-79379-confederationmarocaine-des-tpe-pme-recommandations-pour-soutenir-les-entreprisestouchees-par-la-covid-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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