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송계의 변화를 이끄는 ‘송곳’ 같은 여성 노동자들

[미디어택] “여자니까”, “개편하니까” 그리고 “늙었으니까”, 여자라서 힘들다

“여긴 희망이 있어요? 선배들은 <뉴스나인> 앵커 맡고 보통 1년 차에 국장 달았어요. 그런데 저는 지금 7년 차예요. 여전히 직급은 부장이고요. 왜? 여자니까.”

JTBC <미스티>의 고혜란이 방송사를 떠나며 내뱉은 말이다. 그런데 이 드라마는 고려해야 할 게 있다. 고혜란은 그래도 정규직이었다는 사실이다. 방송사 내에서 여성이라는 이유로 승진에서 밀렸던 거다. 그 자체도 문제다. 2018년 1월 영국 공영방송 BBC에서 중국 편집장으로 일하던 캐리 그레이시가 남성 동료보다 적은 임금을 받고 있다며 차별 문제를 제기하고 사표를 낸 일화는 유명하다. 하지만 ‘그럼에도’라는 말을 내뱉을 수밖에 없는 이유는 우리가 비정규직이 넘쳐나는 한국 사회에 살고 있기 때문이지 않을까.

지난해 12월, 한국노동사회연구소는 <방송사 비정규직과 프리랜서 실태-공공부문 방송사 프리랜서 인력 활용> 보고서를 통해 “공공부문 방송사 프리랜서 10명 중 7명은 여성(71.2%)이고, 20대와 30대 여성이 75% 내외를 차지한다”며 “방송사 프리랜서의 대부분은 작가, 아나운서, 리포터, 캐스터 등이며, 특정 직업군에서 여성만 프리랜서로 활용되는 직무가 16개나 되며, 성별 임금 직무 분리가 확인된다”고 밝혔다. 방송사 정규직 임금을 100으로 할 때 프리랜서 노동자들은 24.7로 약 1/3도 안 되는 임금을 받고 있었다. 방송작가 평균 보수는 186만 원이었으나 ‘여성’만 있는 곳의 작가들은 평균 165만 원을 받고 있었다.

“늙은 여자 쓰지 말라”
쌍팔년도에도 문제 될 이 말이 여전히 통용되는 방송가

대전MBC 유지은 아나운서는 채용과정에서 성차별로 불이익을 받은 대표적 사례다. 대전MBC는 1990년대 중후반부터 아나운서직 정규직에 남성만 채용했다. 같은 시기 여성 아나운서직은 ‘계약직’ 혹은 ‘프리랜서’로만 자리를 채웠다. 동일 업무를 수행했음에도 말이다. 결국, 정규직과 비정규직을 가른 이유는 ‘성별’밖에 없었다. 여자니까.

대전MBC 주요 인사들은 “여자가 더 뛰어난 애였어도 얘(남성)를 뽑았을 거야”라고 말했다. 여성 아나운서만을 비정규직으로 뽑은 이유에 대해 “늙은 여자 쓰지 말라고 태클이 많이 들어온다”, “시청자의 몇 명은 ‘남자는 늙어도 중후한 맛이 있는데 여자는 늘 예뻐야 하므로 안 된다’라는 관점을 가지고 있다”라고 밝혔다. 쌍팔년도에도 문제 될 것이 빤한 말이지만, 동시에 오늘날의 현실을 그대로 보여주는 말이기도 하다. 어딘들 안 그렇겠느냐만 방송판 역시 여성들이 배제돼 온 구조와 시스템 그리고 그릇된 방송문화가 존재하고 있다.


그 안에 분투하는 이들이 있다. ‘다음 한 발이 절벽일지도 모른다는 공포 속에서도 기어이 한 발을 내디딘 송곳 같은 인간’(웹툰 <송곳>), 그것이 바로 유지은 아나운서였던 셈이다. 진행하던 프로그램에서 하차당하는 등의 불이익을 감수하면서까지 싸움을 멈추지 않았다. 다행히 국가인권위원회가 여성 아나운서들이 제기한 ‘차별 진정’에 대해 “동일한 업무를 수행하는 노동자임에도 임금, 연차휴가, 복리후생 등에서 진정인들을 불리하게 대우한 것은 성별을 이유로 한 차별행위”라며 ‘정규직 전환’을 권고하면서 상황은 달라졌다. 유지은 아나운서는 대전MBC 정규직으로 일하고 있다.

실제 독자적으로 일했다면 억울하진 않았을 텐데….

방송사 프리랜서 중 다수를 차지하는 작가들의 상황도 크게 다르지 않다. 저임금이 고착화된 직군의 문제도 있지만, 더 심각한 건 언제든 해고될 수 있다는 점이다. 지난해 6월, MBC 보도국 내에서 10년을 일했던 작가 3명이 한순간에 일자리를 잃는 사건이 벌어졌다. MBC 측은 ‘프로그램 개편 및 인적 쇄신’을 해고 사유로 설명했다. 그러나 실질적인 개편은 이뤄지지 않았다. 프로그램 진행자와 코너명만 바뀌었을 뿐, 작가들이 담당했던 업무는 그대로였다. 작가들은 그동안의 방송에 대한 열정과 노력이 부정당했다는 생각에 조용히 물러날 수 없었다. 서울지방노동위원회(지노위)에 ‘부당해고 구제신청’을 제기하면서 본격적인 싸움에 나섰다.

하지만 싸움의 판 자체가 그들에게 유리하지 않았다. MBC 사측은 “(작가들은)독자적으로 위탁업무(원고작성) 수행이 가능한 프리랜서”라고 주장했다. 그리고 지노위는 그 주장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여 ‘각하’를 의결했다. 작가들은 노동자가 아니기 때문에 부당해고 여부를 따져볼 요건조차 갖추지 못했다는 뜻이다. 이번 지노위의 결정을 보면서 분노가 솟구쳤다. CJB청주방송을 상대로 근로자지위확인 소송을 벌이다 사망한 고 이재학 프리랜서 PD가 떠올랐기 때문이다.

14년간 일하다 처음으로 본인을 비롯한 동료 비정규직 노동자의 임금 등 처우개선을 요구했다는 이유로 해고당한 이재학 PD. 그가 스스로 목숨을 끊은 시기는 공교롭게도 청주법원이 CJB청주방송의 손을 들어준 직후였다는 사실을 우리는 기억한다. 그렇다면 궁금하다. 과연 방송작가들은 독자적으로 업무를 수행할 수 있을까? 방송을 조금이라도 아는 사람이라면 “그렇다”고 답할 수 없다고 확신한다.

MBC <뉴스투데이>에서 ‘국제 뉴스’를 책임졌던 A 작가의 상황도 그랬다. 다양한 국제 뉴스 중 아이템을 고르고 차장(기자)에게 보고하면, 차장이 아이템을 선정하고 순서도 지정해줬다. 그 과정에서 아이템이 추가되기도 했다. 그런데도 지노위는 이 씨가 “독자적 업무를 수행한 것”이라고 판정했다. 그렇다면, 10년간 MBC 보도국 기자들의 감독과 지휘 아래 일할 필요가 없었다는 말인가.

MBC 보도국 작가들 해고 사태처럼, 방송사가 작가를 비롯한 비정규직 노동자를 손쉽게 해고하는 데 따라붙는 말이 있다. ‘개편’. 2018년 SBS <뉴스토리> 작가들 역시 ‘개편’을 이유로 “내일부터 나오지 않아도 된다”는 말을 들었다. 지난해 12월 KBS <저널리즘 토크쇼J> 비정규직 해고 사태도 개편이 주요한 근거였다. 방송사들은 하나같이 ‘더 좋은 방송을 위해 개편은 어쩔 수 없다’고 이야기한다. 하지만 하루아침에 일자리를 잃게 된 비정규직 노동자들에겐 생존의 문제다. 그럼에도 방송가에서 계속 일하고자 한다면 입을 다물고 조용히 물러나야 하는….

MBC 보도국 작가들 해고 사태를 보면서 떠오른 사건이 있다. 2012년 7월, MBC 작가 6명이 한꺼번에 해고된 사건. ‘MB 낙하산’으로 불리던 김재철 사장 시절이었다. 그에 맞서 전국언론노동조합 MBC본부가 장기 파업을 하고 있었다. MBC 사측은 작가들이 노조 파업을 옹호했다는 이유로 해고했다. 당시 작가들은 ‘비정규직’이라는 불안한 위치에서도 공정방송을 위해 싸우던 정규직 노동자들과 뜻을 함께했다. 그리고 2020년 6월, MBC에서 또다시 작가 해고 사태가 벌어졌다. 현재 MBC는 공정방송을 위해 투쟁했던 주역들이 경영권을 쥐고 있다. 이 풍경을 어떻게 봐야 할까. MBC 해고 작가들이 울분에 차서 김재철 사장한테 했던 말이 “작가는 씹다가 단물 빠지면 버리는 ‘껌’인가?”였다. 그렇다면 그때의 작가들은 동료였고 지금은 씹던 껌이란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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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문경락

    MBC 보도국 작가들 해고 사태를 보면서 떠오른 사건이 있다. 2012년 7월, MBC 작가 6명이 한꺼번에 해고된 사건. ‘MB 낙하산’으로 불리던 김재철 사장 시절이었다. 그에 맞서 전국언론노동조합 MBC본부가 장기 파업을 하고 있었다. MBC 사측은 작가들이 노조 파업을 옹호했다는 이유로 해고했다. 당시 작가들은 ‘비정규직’이라는 불안한 위치에서도 공정방송을 위해 싸우던 정규직 노동자들과 뜻을 함께했다. 그리고 2020년 6월, MBC에서 또다시 작가 해고 사태가 벌어졌다. 현재 MBC는 공정방송을 위해 투쟁했던 주역들이 경영권을 쥐고 있다. 이 풍경을 어떻게 봐야 할까. MBC 해고 작가들이 울분에 차서 김재철 사장한테 했던 말이 “작가는 씹다가 단물 빠지면 버리는 ‘껌’인가?”였다. 그렇다면 그때의 작가들은 동료였고 지금은 씹던 껌이란 말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