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랍의 봄’ 이후의 이주

[INTERNATIONAL2]

  2016년 1월 그리스 레스보스 섬 인근의 난민선 [출처: 위키피디아]

프랑스 남부도시 마르세유에 본부를 둔 NGO 단체 ‘SOS 지중해’의 구조선인 ‘대양 바이킹’(Ocean Viking)은 지난 1월 20일부터 이틀간 리비아 연안에서 구조작업을 벌여 374명의 난민을 구조했다. 당시 해당 지역의 기상 상황이 매우 나빴던 점을 고려하면, 구조되지 못한 사람들은 매우 낮은 수온의 바다에서 생존이 어려웠을 것으로 추정된다. 통상 그렇듯 구조된 난민들은 타이어로 만들어진 허술한 보트에 타고 있었다. 1월 12일에는 난민을 실은 보트가 리비아 해안에서 정박을 시도하다 43명이 익사하기도 했다.1 국제이주기구(IOM)에 따르면 지난해 1,200명 이상의 난민이 지중해에서 목숨을 잃었고, 사고 대부분이 이탈리아로 향하는 리비아 해안지역에서 발생했다. 또 다른 통계에 따르면 지난 6년간 리비아와 이탈리아의 시실리섬 사이에서만 1만6000명의 이주민이 목숨을 잃었다.2

무슬림의 침공은 일어나지 않았다

지중해의 다른 루트와 마찬가지로 리비아와 이탈리아를 잇는 중부 루트에서도 한 해 수십만 명의 사람들이 전쟁과 빈곤에서 벗어나기 위해 바다를 건넌다. ‘아랍의 봄’과 리비아, 시리아 내전을 떠올리면 이 배에는 리비아인이나 인근 아랍국가 사람들이 타고 있을 것 같다. 그러나 예상과 달리 이번에 구조된 사람들은 기니, 수단, 시에라리온 출신자들이었다.3

아랍의 봄과 그로 인해 촉발된 내전 초기, 세계의 언론은 북아프리카와 중동 출신 난민들이 유럽으로 밀물처럼 몰려오리라 전망했다. 그때가 2016년경이었다. 이슬람 극단주의 세력인 IS의 등장으로 시리아 및 이라크의 상황이 악화하면서 난민 행렬이 이어졌고, 이들의 수용을 둘러싼 논쟁이 전 세계의 관심을 끌었다. 당시 수용에 부정적인 입장을 보인 진영은 일자리 경쟁으로 자국민의 피해나 테러 위험 증대, 재정부담 등을 거론했다. 일부에서는 무슬림 유입에 대한 반감을 드러내기도 했다.4 그러나 언론의 자극적인 보도와 각국 정부의 민감한 반응과 달리 아랍인들의 유럽 이주는 아랍의 봄 이전과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그때나 지금이나 달라지지 않은 것은 또 있다. 바로 지중해 남쪽을 바라보는 유럽의 시선이다. ‘혁명은 훌륭합니다. 그러나 어떻게든 당신들이 있는 곳에 머무르시오. 왜냐하면 우리의 경제상황도 심각하답니다.’ 이것이 아랍인의 이주에 대한 유럽 국가들의 솔직한 심정이었다. 당시 이들에게는 혁명의 진원지였던 북아프리카에서 지중해 북단으로 난민이 몰려든다는 우려가 가장 큰 관심거리였을 것이다. 혁명 자체에 대해서는 최근 아랍의 봄 10주년을 맞아 국제사회가 보여주는 냉정한 평가가 당시에도 이미 존재하고 있었다. 아랍 세계나 세계 다른 지역에서 민주화가 역전되는 현상은 흔했고,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1990년대부터 간헐적으로 이어져 온 작은 ‘아랍의 봄’들도 예외는 아니었다. 또한 지나친 변화를 받아들일 수 없는 유럽과 북미의 입장에서 혁명의 성공은 어떻게 해서라도 저지해야 하는 것이었다.

‘걸프전은 일어나지 않았다’는 보드리야르의 표현처럼, 아랍의 봄 훨씬 이전부터 유럽 사회를 사로잡았던 무슬림의 ‘침략’은 일어나지 않았다. 대량 이주 현상은 시리아에 국한된 현상이었다. 석유 자원으로 인해 전통적으로 이주 노동자를 많이 받아들였던 리비아의 경우, 내전으로 80만 명에 이르는 이주민이 본국으로 귀환했다. 리비아인들은 대개 이웃 나라 튀니지로 피신했다가 대부분 다시 돌아왔다. 아랍의 봄을 겪은 북아프리카의 다른 국가들로부터는 혁명 초기 짧은 기간 일부 튀니지인의 유럽 행을 제외하고는 의미 있는 유럽 침공 양상이 나타나지 않았다.

사실상 큰 부하가 걸린 곳은 대다수의 난민이 이주한 북아프리카와 중동 내부였다. 사하라 이남 국가들 역시 자국민의 귀환으로 이러저러한 어려움을 겪었다. 극도로 빈곤한 본국의 가족들은 송금이 끊겨 막막해졌고, 귀환한 이들도 귀환 과정부터 다시 정착하기까지 내전 못지않은 상황을 겪었다. 귀환에 필요한 경비가 없거나 귀환 과정이 너무 위험한 이주민들은 리비아에 갇혀 내전의 위험을 감수해야 했다. 본국으로 귀환할 경우 생명이 위험해 전쟁터에 머물러있어야 하는 경우도 있었다. 물론 세계는 유럽 이외의 국가들이 겪었던 이러한 고통에 눈을 감았다.

방치된 지중해의 비극

유럽으로 가는 길이자 이주민의 무덤인 지중해에서, 아랍의 봄 이후 달라진 것은 아랍인의 유럽 행이 아니었다. 전통적으로 지중해를 거치는 이주는 일자리를 찾아 프랑스 등 유럽으로 떠나는 북아프리카인들의 몫이었다. 하지만 2000년대 이후, 특히 아랍의 봄 이후 해상을 통해 이탈리아 등 남유럽으로 오는 이주민 대부분은 지중해 연안 국가 출신이 아니었다. 이들은 말리, 기니, 에리트레아, 소말리아, 수단, 이라크, 파키스탄, 아프가니스탄 등지에서 온 사람들이었다. 그리고 이주 동기 역시 경제적인 것과 인도주의적인 것이 중첩된 경우가 많았다. 이제 지중해 남부의 북아프리카 국가들과 동부의 터키는 이주의 시발점이 아닌 사하라 이남, 중동, 아시아에서 시작된 이주의 중간기착지로서의 성격이 더 강해졌다.

변하지 않은 것이 있다면 지중해는 아랍의 봄 전후를 통틀어 세계에서 가장 인명피해가 큰 이주 경로라는 점이다. 해결은 요원하지만‚ 원인은 찾을 수 있다. 지중해 남쪽과 북쪽 간의 경제적 격차가 낳은 이주의 수요라는 구조적인 요인도 있지만, 정치적인 요인도 크게 작용했다. 1995년 바르셀로나 협정을 시작으로 지중해 남북 국가 간의 협력이 추진됐고 이주 분야에서도 국가 간 공조체계가 시도됐지만 별 성과가 없었다. 2007년에는 프랑스 주도로 지중해연합(Union for the Mediterranean)이 결성됐지만, 이 역시 독일이나 유럽연합의 반대에 부딪혔다. 그러는 동안 스페인과 이탈리아가 국경 통제를 강화했고 결과적으로 밀입국이 늘어나게 됐다. 밀입국 알선조직이 번성해 이주 비용이나 해상 통제 비용은 늘었고‚ 이주는 더 위험해졌다.

이렇게 된 배경에는 지중해를 공유의 바다가 아닌 남과 북의 경계로 바라보는 유럽인들의 시각이 있다. 경계를 넘는 이들을 막아야 한다는 편집증이 정규 이민과 비정규 이민 간의 이분법을 기반으로 한 통제 위주의 이주 정책을 고수토록 했다. 지중해 차원의 협력에서도 유럽이 북아프리카 국가에 기대하는 것은 사하라 이남 지역에서 튀니지나 리비아를 거쳐 유럽으로 향하는 이주의 흐름을 막아주는 것이다. 지중해가 세계에서 가장 철저하게 무장된 시기, 해마다 2천 명가량의 익사자가 발생했다. 이는 통제 위주의 정책이 비인도주의적인 결과만을 초래할 뿐 아니라 지속 가능하지도 않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주의 세계, 아랍

아랍 세계는 인근 유럽 국가들이 펼친 강한 제국주의의 역사적 경험과 20세기 후반의 분쟁 등으로 많은 국제이주민을 배출해온 지역이다. 동시에 걸프만 산유국이나 리비아, 요르단 등은 세계 어느 국가보다 이주민이나 난민을 많이 수용한 곳들이다. 이주를 많이 떠나면서 동시에 이주민을 많이 받아들이는 이 양면성은 세계 다른 지역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중동 고유의 특징이다. 2,600만 명으로 추정되는 세계 난민 중 팔레스타인 난민이 5~6백만 명가량이다. 터키는 가장 많은 난민을 받았고, 레바논과 요르단은 인구 대비 난민 비율이 가장 높은 나라다. 이러한 점에서 중동은 난민 현상과 밀접히 연관된 지역이라 할 수 있다. 한편 아랍 세계를 구성하는 양 지역인 북아프리카와 중동은 상이한 이주의 양상을 보인다. 중동지역의 아랍국가 출신 이민자의 60%가 걸프만 산유국과 리비아로 향하며, 유럽으로 가는 비율은 20%도 채 되지 않는다. 반면 북아프리카의 아랍국가 출신 이주민은 대부분 유럽 국가로 향한다.

아랍의 봄이 이주에 미친 영향

아랍 세계가 이주의 땅이었던 것처럼 이주는 아랍의 봄의 일부이기도 했다. 내전 발발로 리비아를 떠나는 주민들을 태운 차량 행렬, 이집트나 튀니지의 보호소에서 본국 귀환을 기다리는 이주 노동자들, 튀니지나 사하라 이남 출신자들을 싣고 지중해를 건너는 보트, 시위에 동참하기 위해 카이로로 귀환하는 이집트 출신 이주민이나 유학생들의 모습은 혁명의 한 페이지를 장식했다.

이주가 혁명의 에피소드에 그친 것만은 아니었다. 청년들에게는 유럽으로의 이주를 꿈꾸는 것과 더 나은 사회를 꿈꾸는 것은 별개가 아니었다. 2000년대 전후 유럽으로 가는 길이 점점 좁아진 것은 청년들이 거리로 나서게 된 것과 무관하지 않다. 이주는 정치적 저항의 대체재일 수는 있지만, 그것의 주요 원인인 해당 국가의 경제 문제는 해결하지 못한다. 떠나는 이보다 더 많은 이들이 고용시장의 문을 두드리기 때문에 이주로 실업 문제가 크게 완화되지 않는다. 송금 역시 해당 가족의 경제 상황을 나아지게 할 수는 있지만, 국가 전체의 지속적인 발전을 보장하지는 않는 것이다. 선진국에 이주민을 많이 보내 그들이 보내오는 송금으로 발전을 이룬 아랍국가는 찾아보기 어렵다.5

보다 직접적으로는 이주민과 그 후예들도 국외나 사이버공간에서 아랍의 봄에 참여했으며, 역으로 민중봉기의 주체들이 본국 안팎을 드나들며 혁명을 수행하기도 했다. 유럽에서의 정치적 경험을 본국 정치에 활용하면서, 유럽 대도시가 혁명의 배후지가 됐다. 혁명의 양상이 이주 현상을 낳기도 했다. 바레인, 이집트, 시리아와 같이 정권이 반발하거나 폭력적으로 대응할 때 국외로의 이주 현상이 나타났다. 역으로 혁명 초기 튀니지, 이집트, 리비아와 같이 기존 정권이 무너질 때 본국으로 귀환하는 현상도 나타났다. 아랍의 봄은 아랍 세계의 전통적인 이주 경향에 변화를 가져왔다. 앞서 언급한 대로 역외 이주는 혁명 초기의 튀니지나 내전을 겪은 시리아의 사례를 제외하면 이전의 흐름이 지속했다. 반면 아랍 세계 내부에서는 시리아와 리비아 난민과 이 지역에 거주하던 이주민 대다수가 역내로 이주하면서 이들을 받아들인 지역이 새로운 상황을 맞이하게 된 것이다. 주민들의 경이로운 연대의 모습과 함께 이주민에 대한 반감도 나타났다.

아랍의 봄 10년, 상당수의 아랍 청년들은 여전히 이주를 생각한다. 저항의 경험과 정치적 불안정이 청년 세대의 이주 욕구를 부추기고 있다. 혁명의 가장 중요한 배경이었던 고용 문제가 나아지지 않은 상황에서 이주에 대한 열망은 줄어들지 않았을 것이다. 게다가 아랍의 봄이 초래한 정치적 불안정과 치안 문제가 새로운 이주의 동인이 되고 있다. 그렇다고 유럽 등 선진국으로 가는 길이 넓어질 가능성은 보이지 않는다. 아랍인들은 이주할 곳으로 아랍 산유국보다 유럽을 훨씬 선호한다. 따라서 지중해 남에서 북으로의 이주 흐름을 막는 것은 비현실적이다. 코로나19로 유예된 이주 또는 강요된 귀환의 시간이 지난 후에는 지중해를 장벽이 아닌 공존의 바다로 바라보는 시각이 우세해져야 할 것이다.


[각주]

1
https://fr.hespress.com/186051-migrants-locean-viking-sauve-plus-de-120-personnes-au-large-de-la-libye.html, 2021년 2월 16일 검색.
2
https://www.ledevoir.com/culture/ecrans/595039/ecrans-mediterraneeꠓcimetiere-des-refugies-le-peril-bleu, 2021년 2월 20일 검색.
3
https://www.20minutes.fr/monde/2959919-20210123-106-personnesꠓsecourues-troisieme-sauvetage-48-heures-ocean-viking, 2021년 2월 20일 검색.
4
엄한진, 2016, 「시리아 난민 사태로 본 국민국가 체제」, 『모심의 눈』, 모심과 살림 연구소.
5
Philippe Fargues & Christine Fandrich, 2012, Migration after the Arab Spring, Migration Policy Center Research Report 2012/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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