탈성장

[워커스 사전]


노동자에게 탈성장은 고통스러운 것일까? 코로나19 대유행 초기에 이동이 중단되고 생산과 소비가 급감하자 곧바로 지구에 변화가 나타났다. 도로를 꽉 채운 자동차들이 사라지고 나니 그것만으로도 거짓말처럼 하늘이 맑아졌다. 사람들은 지금 겪고 있는 이 재난이 어디서 비롯된 것인지 직관적으로 깨달았다. ‘탈성장’이 화두로 등장했다. 탈성장이 전환 대안으로 조금씩 주목받기 시작할 때, 서사의 반격이 시작됐다. 주류 경제학자들은 사태가 장기화하면서 터져 나오는 불만의 목소리를 ‘저성장에 대한 공포’로 재빨리 전환했다. 그들은 자본주의 경제 위기 상황에서 자본과 권력이 책임을 회피하며 노동자에게 고통을 전가하고 민중의 경제에 타격을 가하는 장면을 ‘탈성장 사회’의 모습으로 왜곡해 설명했다. 재난 자본주의의 쇼크 전략은 코로나 위기, 기후위기에서도 여지없이 작동했다. ‘이대로는 안 된다’는 분노와 열망은 ‘지금보다는 그래도 나았던 옛날’로 인도하는 회귀 서사로 방향을 틀었다. 일상의 회복을 기다리는 사람들에게 ‘성장’이 다시 정상의 기준이 됐다.

회의주의적 관점의 비판도 있다. 지난 2월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한국판에는 ‘탈성장의 신기루’라는 제목의 글이 실렸다. 필자인 리 필립스는 “소박한 삶으로 회귀하는 것이 행복의 비법이라는 환상은 최상위 계층의 부르주아들을 매료시키고 있다”고 비판했다. 글은 ‘창백한 탈성장 사회’를 상기시키는 것으로 끝난다. “영화, 장난감, 와플 메이커, TV도 안녕에 기여할 수 있다.…(중략)… 구소련에서 내부적으로 가장 끊임없이 제기된 비판은 삶에서 생기가 없다는 것이었다. 화려한 색채의 옷도, 음악도, 파인애플도 없는 회색빛 사회였다.” 탈성장 사회는 정말로 ‘빵은 있되 장미는 사라진 회색빛 미래’일까? 이 글은 탈성장에 대한 대표적인 오해들을 드러내고 있다. 먼저 탈성장을 긴축으로 상상하는 것이다. 긴축은 노동자에게 고통스럽게 다가오는 단어다. 탈성장을 ‘허리띠 졸라매기’로 이미지화하면 노동계급의 대안으로 받아들여지기 어렵다. 탈성장은 대중을 설득하기는 어려운 도덕적 금욕주의적 노선이라고 비판받기도 한다. 그런 실천들로 체제를 바꿀 수 있을지 의문을 제기하기도 한다. 회의주의적 시선과 공포의 주입은 노동자들이 탈성장과 노동권을 연결해 사유하고 노동계급의 전환 전략으로 고려하는 것을 가로막는다.

탈성장이 추구하는 ‘소박한 삶’에 노동계급보다 최상층 부르주아들이 더 매료돼 있다는 아이러니는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성장의 한계〉는 로마클럽에서 나왔고, 억만장자 저커버그는 소박한 티셔츠를 입는다. 번잡한 도시를 떠나 조용한 교외에 적당한 집을 짓거나, 소박한 식단을 선호하고 정원과 텃밭을 가꾸는 삶을 누리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TV와 잡지, SNS를 요란하게 장식한 지도 꽤 됐다. 한참 전부터 ‘살 빼기’와 함께 부르주아적 유행으로 나타난 ‘미니멀리즘’이나 ‘다운사이징’ 에서도 성장 비판 서사가 들어간다. 그러나 더 이상 뺄 것도 줄일 것도 없는 가난한 사람들에게, 부유한 이들이 ‘이제 성장에서 벗어나 소박한 삶으로 돌아가자’고 말하는 것은 기만적인 소리로 들린다. 소박한 삶의 아름다움은 원래 없는 가운데서도 아름다움을 창조하는 가난한 이들의 것이건만, 이제는 가진 자가 빈자의 미학마저 빼앗아 간다. 개인적인 차원에서 미적이고 문화적인 방식으로만 추구되는 탈성장은, 분명 하나의 환상이다. 지배 담론은 모두에게 필요한 소박한 삶의 양식을 특권화함으로써, 미적 취향으로 소비되는 탈성장을 동경하게 만들고 체제에 도전하는 저항담론으로서의 탈성장은 거부감을 느끼게 만든다. 저항적 개념의 부르주아화는 ‘탈성장’ 뿐만 아니라 그동안 여러 용어에서도 나타났기 때문에 탈성장의 전유도 이미 시작됐는지 모른다. 그러나 계급 상층의 탈성장 신드롬조차 성장주의 문명에 대한 반대급부를 반영한다. 그들이 탈성장의 사적 경로를 가졌다면, 부유층과 달리 노동자들은 현존하는 자본주의 체제 안에서 그 누구보다 소박한 삶을 꿈꾸더라도 개인적 탈출구를 가질 수가 없다. 99%에겐 99%를 위한 탈성장의 경로가 필요하다.

그러나 ‘코로나바이러스가 탈성장의 고통을 드러냈다’는 식의 서사는 탈성장 운동을 노동운동과 분리하고 대립시키며, 탈성장을 다른 사회를 향한 탈자본주의적 경로로 상상하는 것을 가로막는다. 필요한 것은 성장의 무한궤도로부터 ‘함께’ 벗어날 수 있는 사회적 경로를 찾는 것이고 그것을 위한 제도적·정책적 대안을 만드는 것이다. 사회학자 백영경은 “코로나19처럼 예기치 않은 재난으로 발생한 성장의 둔화나 경제축소는 탈성장이라 볼 수 없다”라고 말한다. “탈성장은 삶의 방향을 바꾸려는 의지와 노력에 수반되는 전환”이기 때문이다. 탈성장에 관한 대부분의 오해는 우발적이고 급작스러운 강제적 중단과 사회적 의지의 결과로서 민주적으로 결정 및 수행되는 생산과 소비의 계획적 축소의 차이를 간과하는 데서 비롯된다.

탈성장을 고통스러운 과정으로 규정하면서 성장을 다시 해결책으로 가져오는 것은 우파 경제학자들만이 아니다. 경제도 성장시키면서 동시에 기후위기도 해결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타협적 그린뉴딜 노선도 탈성장의 대안을 무력화하는 데 일조한다. ‘다른 방식의 성장–녹색성장’을 통해서 기후위기를 막을 수 있다면, 왜 굳이 더 불편하고 더 고통스러울 탈성장의 길을 택할 것인가? 녹색성장론은 이런 물음을 던짐으로써, 체제의 근본적 변화를 촉구하는 이들을 슬며시 체제 안으로 불러 모은다. 이는 탈성장을 대안으로 검토하는 것을 회피할 뿐 아니라 녹색성장이라는 거짓 희망에 사회적 자원과 역량을 쏟아붓게 만든다. 이렇게 해서 우리가 ‘탈성장 사회’의 구체적인 모습을 상상해보기도 전에, 실업, 소득감소, 소비축소, 긴축재정 등 자본주의적 위기 국면마다 나타났던 어두운 모습이 마치 탈성장의 폐해인 것처럼 왜곡되고 있다. 기후위기의 원인이 탄소가 아니듯 대량실업의 원인도 코로나바이러스가 아니며 고통의 원인도 저성장이 아니다. 문제는 성장이다. 자본주의에서 출현한 이 재생 불가능한 성장은 멈추는 것밖에 답이 없다.

성장의 폐해를 비판하면서도 근본적으로는 성장을 절대 포기하지 않는 내면화된 성장주의는 ‘지속가능한 발전’, ‘적정성장’, ‘녹색성장’ 등, 여러 형태로 계속 반복돼 왔다. 모두 ‘착한 자본주의’의 변종들이다. 점잖은 성장론은 노골적인 개발주의나 침략주의와는 다른 것처럼 보이지만 이런 성장 담론의 다양한 변종들은 위기가 닥칠 때마다 자본의 출구 전략을 제공했다. 이렇게 위기론이 체제의 위기 관리론으로 전환되고 성장비판이 성장조절론으로 귀결되면 ‘(자본주의 말고) 대안은 없다’는 신자유주의의 공기는 전보다 더 쉽고 부드럽게 사회를 짓누른다. 탈성장론은 바로 그 성장주의의 강고한 신화에 도전한다.

노동의 관점에서 탈성장을 사유하면 ‘노동의 생태적 전환’과 곧바로 연결된다. 노동하는 인간의 몸도 자연의 한계 안에 있기 때문이다. 생태적 노동이 회복돼야만 전체 생태계도 회복될 수 있다. 지난해 탈성장 연구자·활동가 국제 네트워크는 공개서한을 통해 탈성장 사회로의 정의로운 전환 원칙을 표명했다. 여기에는 국가와 자본이 아닌 노동과 민중의 관점에서 어떻게 전환할 것인가에 대한 구체적인 방안이 제시됐다. ‘노동에 대한 생태주의적 전환’에 대해서도 구체적인 상을 그려볼 수 있어 참고할 만하다. 탈성장 선언문은 경제체제의 중심에 생명을 위치시켜야 한다는 것을 첫 번째 원칙으로 삼는다. 그래서 화석연료 생산만이 아니라, 반생명적인 군수산업, 광고산업도 폐지해야 한다고 말한다. 이는 두 가지 산업이 자본이 민중을 제압하는 무력과 문화 통치의 양 수단임을 일깨운다. 대신 노동은 파괴적 산업으로부터 보다 생명 평화적인 산업으로 이동할 것이다. 보건의료와 교육, 재생가능에너지, 생태농업은 더 확대돼야 하고, 더 많은 노동자가 필요하다.

두 번째 원칙은 노동 가치의 재평가다. 탈성장론은 모두를 위한 좋은 삶을 위해 어떤 노동이 얼마나 필요한지 근본적으로 재평가해야 한다고 말한다. 돌봄 노동 등 필수적인 노동에 제대로 된 사회적 가치를 다시 부여해야 한다. 노동시간을 줄이고 일자리를 나누는 것은 노동권만 아니라 생태적 회복을 위해서도 중요한 대안이다. 24시간 생산체제를 중단하고 야간노동을 제한하며 노동시간을 줄이는 것은 노동환경과 에너지 소비를 동시에 개선할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이다.

성장을 아무리 점진적으로 축소하더라도 전환 과정에서 사회적 약자들은 타격을 받을 수밖에 없다. 이에 대한 탈성장 전환의 세 번째 원칙은 식량, 주택, 교육 등 핵심적인 재화와 서비스를 보편적 기본권으로 제공하는 것이다. 한발 더 나아가 최저 소득과 최대 소득을 민주적으로 정의하고 도입하자고 주장한다. 이런 제도들은 부의 독점과 양극화를 막고 재산의 무한 증식과 축적에 원천적으로 제동을 걸 방안이 될 수 있다.

자신의 삶에 영향을 미치는 이런 결정에 모두가 참여할 수 있어야 한다는 사회민주화의 원칙이 네 번째다. 글로벌 기업과 금융 권력을 민주적 소유와 통제를 통해 축소하는 것, 에너지·식량·주택·의료·교육 등을 탈상품화, 탈금융화 하는 것이 민주주의의 조건이다. 세계화된 시장에서 기본적인 필요를 충족시키는 재화와 서비스가 거래되면 민중은 자기 삶의 결정권과 통제권을 잃게 될 수밖에 없다.

마지막 원칙으로는 정치경제체제를 세대, 젠더, 지역을 교차하는 연대의 원칙에 기초해 구축하라고 요구하고 있다. 연대의 원칙은 지금까지 기후위기와 불평등을 야기한 세력과의 적당한 타협 대신 분명한 책임을 묻는다. 특히 북반구에 대해서는 현재의 착취를 중단하고 과거의 착취에 대해 보상하라고 요구한다. 기후위기 같은 전 지구적 위기는 자국에 유리한 방식으로 기후통상체제를 만들거나 이런 국제질서에 편승하는 일국적 차원의 대응으로는 결코 해결할 수 없다. 세계적 차원에서 책임을 분담하고, 책임져야 할 행위에 대해 책임을 묻는 것이 기후정의다.

이러한 원칙들을 통해서 우리는 탈성장 사회의 미래를 구체적으로 그려볼 수 있다. 탈성장의 기본 이념과 방향을 간명하게 보여주는 이 원칙들은 기후위기를 비롯해 전 지구적·생태적 위기에 대응하는 노동자 관점 및 계급적 원칙과 상충하지 않는다. 탈성장 선언이 그리는 미래는 ‘회색빛’이 아니라 소박하고도 풍요로우며 생기 넘치는 삶이다. 성장 신화의 거짓을 폭로하고 자본의 성장 궤도에서 이탈하려는 사상적·실천적 반자본주의 운동으로서의 탈성장 운동은 노동운동과 함께 갈 수 있고 가야만 하는 것이다. 탈성장 개념을 이론화하고 선언으로 정리한 것은 연구자와 활동가들이지만 이 선언의 내용은 이미 성장의 연료로 태워지길 거부하는 수많은 노동자의 입을 통해 나오고 있던 것이다. 코로나 위기는 노동 전환의 새로운 주체도 드러냈다. 예를 들어 자신의 노동이 가진 가치를 재발견하고, 존엄을 부여하며, 그것을 사회적 인정으로 요구하는 ‘필수노동자’들과, 필수적이지만 낮은 노동의 대다수를 차지하는 여성 노동자들은 투쟁으로 저 선언의 내용을 요구하고 정당화하는 전환의 주체들이다. 전 사회적 전환 계획에서 청소년, 여성, 노동자, 농민 등 민중 주체들을 배제하는 것은 처음부터 정의로운 전환이 될 수 없다.

기후위기는 인류의 위기지만 또한 자본의 위기이기도 하고 노동의 위기이기도 하다. 어떤 식으로든 전환은 불가피하다. 자본은 자본의 관점에서 활로를 모색할 것이다. 탈탄소 사회도, 탈성장 사회도, 어떤 힘이 그것을 추동해내느냐에 따라 성격과 방향이 달라질 수밖에 없다. 자본 주도의 탈탄소 사회는 지금보다 더 불평등하고 부정의 한 방식으로 이루어질 수도 있다. 지금 한국에서 진행되고 있는 그린뉴딜처럼 새로운 사회를 위한 전환 협약이 노동자 민중을 배제하고 지배 연합적 성격의 뉴딜로 구축된다면, 자원의 독점을 통한 권력 독점은 불평등한 지배 관계를 더욱더 유지, 강화할 것이다. 여기에 맞서는 노동운동 생태주의 페미니즘 및 사회운동의 탈성장 연대가 필요하다. 지난 수십 년간 실패해왔으면서도 ‘그래도 다시 한번’ 다른 성장의 노선을 가 볼 것인가? 이제 선택해야 한다. 성장이냐 탈성장이냐, 그린뉴딜이냐 기후정의냐, 체제관리냐 체제전환이냐. 우리에겐 실패할 시간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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