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냥 사는 거지 뭐

[리아의 서랍]


요즘 나는 트랜스젠더 인터뷰나 수기집을 찾아 읽고 있다. 죽는 트랜스젠더가 계속 눈에 띄어서, 다들 어떻게 살아내고 있는지 궁금해져서다. 퀴어 커뮤니티 일원으로서 성별이 혼란스러운 친구들과 함께 지내는 게 일상이긴 하지만, 활동가 비슷한 사람들이 각 잡고 남긴 기록을 읽으며 따로 생각할 시간이 필요한 것 같다. 누가 죽는다고 해도 가까운 사이에서 오가는 말은 의외로 단출하고 소박하기 때문이다.

“오늘 기분은 어때?”

“좀 별로인 듯.”

“얘들아 약 먹어. 일찍 자자…….”

만나서 술이라도 먹지 않는 이상, 이다음은 각자 감당해야 할 영역처럼 느껴진다.

〈벤 바레스, 어느 트랜스젠더 과학자의 자서전〉은 1954년에 바버라 바레스로 태어난 사람의 기록이다. 여성은 수학을 못 한다는 편견이 상식인 시대였지만, 바버라는 수학과 과학에 뛰어난 실력을 보이며 과학자로 성공한다. 그는 아침에 일어나 밥을 먹고 이를 닦았다고 말하는 것처럼 시종일관 덤덤한 어조로 자신이 했던 일을 나열하는데, 읽다 보면 MIT에 진학해 화학과 컴퓨터 과학을 공부하고 다트머스에서 의사가 된 후 하버드 의학대학원에서 박사학위를 받아 연구원으로 근무하다 스탠퍼드 대학교 신경생물학과 교수가 되는 일련의 과정이 어찌나 거뜬하게 들리는지 모른다.

그러나 웬만한 일은 쉽게 해치워버릴 듯한 이 대단한 인간에게도 성별 불쾌감이란 자살까지 고려하게 하는 어려움이었다. 신체적 성별과 느끼는 성별이 일치하지 않아 괴로워했던 그는 40대가 돼서야 자신이 트랜스젠더임을 깨닫는다. 그리고 바버라에서 벤이 되기로 결심한다. 성공적으로 성전환을 마친 뒤 평소처럼 세미나 발표를 하고 내려온 남성 과학자 벤은 우연히 한 참석자의 말을 듣는다. “벤 바레스의 오늘 세미나는 훌륭했어. 이 사람 연구가 여동생(바버라)보다 훨씬 낫네.”

벤의 동료 낸시 홉킨스는 이 사건을 서술하며 “과학계에서 여성의 권리를 옹호하는 급진적인 운동가는 이렇게 탄생했다”라고 썼다. 이후 벤은 바버라로 사는 동안 겪었던 성차별, 즉 “같은 사람인데도 여성일 때와 남성일 때 다르게 대우받았던 경험”을 증언하며 여성차별, 학회 내 성희롱 등의 문제를 실질적으로 개선하는 업적을 남겼다.

〈Becoming a Visible Man〉은 아직 한국어로 번역되지 않았다. 언제나 인내와 애정으로 나를 일깨우는 소현이 이 책을 소개하며 인상적인 부분을 발췌‧번역해 주었다. 내가 심각한 트랜스젠더 혐오에 머무르지 않고 더 많은 사람을 만나 성장할 수 있었던 것은 전부 소현의 가르침 덕분이다. 이 책을 통해 소현이 들려준 환대의 이야기는 지금 쓰는 글의 방향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자서전의 주인공, Green은 트랜스젠더임을 숨기고 남성 합창단에서 노래를 부른다. 어느 날 그는 자신의 정체성을 밝히고 싶다는 생각을 하고, 결국 걱정과 긴장을 견디며 다른 남자들 앞에서 자신을 설명한다.

“남성으로 산다는 것은 게슈탈트이다. 마음과 몸이 온전하게 하나가 되기 위해 한쪽이 다른 한쪽보다 더 강해야 할 수도 있는 것이다. 인간으로 산다는 것이 바로 그런 것이다; 남성성과 여성성 조금이 섞여 있을 수도 있고, 그 모든 게 괜찮아야 한다. 왜냐하면 그건 그냥 살아있다는 것의 한 면이기 때문이다. 나는 그들에게 말했다. 끝으로 브루스의 드럼 소리가 멈췄다. 내 심장은 그 어느 때보다도 큰 소리로 뛰고 있었다. 나는 그들의 답을 기다렸다.”

그래서 그는 어떻게 됐을까? 떨면서 소현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상상만 해도 상처가 되는 상황이 먼저 떠올랐다. 최악의 경우에는 저자가 폭력의 대상이 될 수도 있을 것 같았다.

“긴 침묵 끝에, 우리 중 가장 존경받는 남자, 진중한 60대 멕시코인 남성이 천천히, 그리고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내가 지금 당신에게 느끼는 정도의 존경과 경외심은 다른 그 누구에게도 느껴본 적이 없어요. 당신을 우리의 형제라고 부를 수 있어서 자랑스러워요. 마치 영웅을 맞이하는 듯한 천둥과 같은 박수와 환대가 이어졌고, 나는 갓 태어난 충격을 뒤로하고 따듯한 목욕물에 풀어지는 아기처럼 그 속에 스며들었다.”

소현은 내게 이 귀한 장면을 전해주며 말했다.

“그런 느낌은 살면서 많이 느낄 수 없겠죠. 걱정하고 마음 졸였는데 온전히 환대받는 그런 느낌이요. 그런 걸 느끼고 받아본 것만으로도 이 저자는 세상의 비밀을 알게 된 거예요.”

트랜스젠더를 설명하는 글을 처음 접했을 때는 그 불완전성에 실망했다. 같은 트랜스젠더라도 누구인지에 따라 하는 말이 서로 조금씩 달랐고, 여기서 이 사람이 하는 설명으로 저기서 저 사람이 하는 설명을 반박할 수 있을 만큼 모순된 지점도 있다고 생각했다. 평범한 인생이라서, 인생은 원래 그래서 그렇다는 걸 뒤늦게 알았다. ‘사람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그대로 적은 것뿐이었는데, 내가 몰라서 이해하지 못했다는 걸 여러 과정을 거쳐 배웠다.

트랜스젠더 인권단체 조각보 홈페이지에는 트랜스젠더와 지지자의 인터뷰를 연재하는 코너가 있다. ‘마스터리’라는 닉네임을 쓰는 분의 인터뷰가 기억에 남는다. 그가 트랜스젠더임을 들은 친구가 “너 그렇게 안 하면 못 살겠냐”고 묻는데, "못 살겠다”고 대답하자 그 친구는 “그럼 그게 그냥 길이다. 그냥 가라”고 말한다. 가야지. 어쩌겠어. 그냥 사는 거지 뭐. 나는 사람이 못살게 되는 게 좀 별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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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문경락

    트랜스젠더를 설명하는 글을 처음 접했을 때는 그 불완전성에 실망했다. 같은 트랜스젠더라도 누구인지에 따라 하는 말이 서로 조금씩 달랐고, 여기서 이 사람이 하는 설명으로 저기서 저 사람이 하는 설명을 반박할 수 있을 만큼 모순된 지점도 있다고 생각했다. 평범한 인생이라서, 인생은 원래 그래서 그렇다는 걸 뒤늦게 알았다. ‘사람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그대로 적은 것뿐이었는데, 내가 몰라서 이해하지 못했다는 걸 여러 과정을 거쳐 배웠다.

  • 애호박만두

    좋은 글이네요. 이분이 글 계속 쓸수있으면 좋겠네요. ^^ 고료 오르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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