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속하는 코로나19 백신 불평등…“특허권 풀어 생명 구해야”

한국 정부와 국회의 역할 제기돼… “TRIPS 일시 유예안 지지에 결의해야”

코로나19 백신 배분의 불평등 문제가 심각해지는 가운데 백신 같은 의료기술에 적용되는 독점권을 일시적으로 유예해 신속하고 공평하게 백신을 생산해야 한다는 주장에 무게가 실리고 있다. 세계무역기구의 ‘무역 관련 지적재산권 협정(TRIPS 트립스)’의 특허 등 특정 조항을 일시적으로 유예하는 방법을 통해서다. 오는 5월 5일과 6일 진행되는 세계무역기구(WTO)의 일반이사회에서 TRIPS(트립스) 일시 유예안의 통과 여부가 논의되는데 그전에 한국 정부와 국회가 해당 유예안을 지지해야 한다는 요구도 시민단체들을 통해 나오고 있다.


건강권실현을 위한 보건의료단체연합을 비롯해 보건, 노동, 인권 등의 영역에서 활동하는 시민사회단체들은 29일 오전 국회 정문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백신은 인류 공공재! 특허권을 풀어 생명을 구하라!”라고 외쳤다. 이들은 코로나19 관련 백신 불평등이 심화되는 이 시기 한국 정부의 방향과 결정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단체들은 “문재인 대통령은 세계보건기구 제73차 총회에서 ‘개발된 백신과 치료제는 인류를 위한 공공재로서 전 세계에 공평하게 보급되어야 한다’고 연설했고, 제75차 유엔 총회 기조연설에서도 ‘백신과 치료제의 개발을 위한 국제 협력뿐 아니라 개발 후 각국의 ‘공평한 접근권’이 보장돼야’ 한다며 유엔의 포용적 다자주의 실현을 강조했다”라고 상기시켰다. 이어 “대통령이 국제무대에서 했던 약속처럼 정부가 뒤늦게라도 국제 사회에서 특허권 유예안을 지지하고 한국이 백신 생산 확대에 돌입한다면 약속했던 연대와 협력을 보여주는 사례가 될 수 있다”라고 강조했다.

더불어 단체들은 트립스 유예안이 통과된다면 백신 생산 능력이 충분한 한국이 중저소득국가를 위한 백신 생산 기지로서 더 많은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실제로 한국은 대규모 백신 생산시설과 생산역량을 갖춘 대표적인 국가로 꼽힌다. 이미 몇몇 코로나19 백신 제품들은 국내 생산시설에서 위탁 생산 중이며, 추가 생산 계약도 논의되고 있다. 톰 프리든 전 미국 질병통제예방센터(CDC) 국장도 한국이 코로나19 백신 허브가 될 수 있을 만큼 생산역량을 갖추고 있다고 주장한 바 있다.

이날 기자회견에는 트립스 유예안을 한국 국회가 지지해야 한다는 결의안을 발의한 장혜영 의원(정의당)도 참석했다. 장혜영 의원은 “그동안 트립스 협정은 지적재산의 독점적 지위와 이윤을 보호하는 데에만 치중해 저개발·저소득국가 국민이 의약품에 접근하는 것을 과도하게 막는다는 한계가 지적됐다. 이번에 코로나 팬데믹 상황에서도 이 한계를 극명하게 노출했다”라며 “변이 바이러스를 막기 위해서라도 ‘모두가 안전해질 때까지 아무도 안전하지 않다’는 것이 지금 우리 시대의 절대 명제”라고 강조했다. 장 의원은 이어 “대한민국 국회가 트립스 유예 결의안을 통과시켜야 하며, 정부도 말로만 백신이 전 인류의 공공재라고 선언할 것이 아니라 WTO에서 트립스 협정 유예안을 지지해야 한다”라고 촉구했다.

김선 시민건강연구소 건강정책연구센터장은 ‘인위적인 재난’이 이어지고 있다고 비판했다. 김 센터장은 “아프리카와 아시아에서는 의료진조차 백신을 접종하지 못하는 동안, 이스라엘은 ‘세계 첫 인구집단 면역’을 선언하고, 미국은 마스크 의무화 조치를 완화했다”라며 “반면 인도는 최근 변이 바이러스로 인한 대유행을 겪고 있고 자국민 우선접종을 위한 백신 수출 중단으로 코백스(COVAX)를 포함해 전 세계 백신 공급에도 차질이 생겼고, 한국도 그 영향을 받고 있다”라고 설명했다. 김 센터장은 “세계 최대 백신 제조업체인 인도 제약사도 SK바이오사이언스도 미국의 원재료 수출 중단으로 백신의 생산일정에도 차질을 야기했다”라며 이어 “현재의 백신 부족과 접종 지연, 그로 인한 추가적인 코로나19 확진과 사망은, 특허 독점권을 포기하지 않는 제약산업과 그를 비호하는 일부 고소득국가들이 만들어 낸, 피할 수 있었던, 인위적인 재난이다”라고 지적했다.

이동근 건강사회를위한약사회 사무국장은 코로나19 백신 개발에 막대한 공적자금이 투입됐음을 환기했다. 이 사무국장은 “코로나19 백신개발은 특허권이 아니라 엄청난 규모의 공적자금이 있었기에 가능했다”라며 “12조 원에 달하는 공적자금 덕분에 인기 없는 백신 분야에 70개 회사가 개발에 뛰어들었다”라고 설명했다. 이 사무국장은 일각에서 이야기되고 있는 ‘강제실시’ 조치에 대해선 “강제실시의 경우 수입과 수출에 제한을 받기 때문에 백신 생산시설이 제한적인 상황에서 대안이 될 수 없다”라고 주장했다.

김흥수 전국공공운수노조 사회공공성위원장은 “수십억 달러의 공적자금을 지원받아 백신을 개발한 화이자, 얀센, 아스트라제네카와 같은 다국적 제약사들은 백신 특허권으로 발생한 이익으로 지난해 한 해만 주주 배당금으로 약 260억 달러를 지급했다”라고 설명했다.

김조은 정보공유연대 운영위원은 “기술을 가진 강대국들이 ‘특허권’을 요구할수록, 기술 혁신의 비용은 커지고 가난한 나라의 수많은 사람은 꼭 필요한 의약품에 접근하기 어려워진다”라며 “의약품 특허의 효과와 결과가 무엇인지 물어야 한다”라고 강조했다. 이어 “에이즈 치료제에 대한 접근권을 확대하고 도하선언을 이끌어낸 지 20년이 지난 지금, 팬데믹 상황에 우리는 의료기술 독점의 폐해를 막을 방안에 대해 더 많이 고민하고 모두가 혜택을 누릴 수 있는 지식연구개발의 질서를 만들어야 한다”라고 주장했다.

한편 중저소득국가의 코로나19 백신 접종이 진전되지 않으면서 인도에선 하루 35만 명이 감염되는 등 초유의 사태를 맞고 있다. 단체들에 따르면 전 세계 코로나19 백신 접종이 10억 회 분을 돌파했지만 백신 접종의 3분의 2는 주요 10개국에만 돌아가고 있다. 반면에 북한을 포함한 다수의 가난한 나라에서는 지금 단 한 명도 백신을 접종받지 못하고 있으며, 부유한 국가를 제외한 대부분의 나라에서는 2023년이 되어서야 일정량의 백신 접종이 가능할 것으로 예측된다. 공평한 백신 공급을 위해 마련된 코백스는 5월까지 계획했던 물량의 5분의 1도 공급하지 못하고 있다. 이에 인도와 남아공 등은 지난 10월부터 기존 트립스의 한계를 지적하고 코로나19 맥락에서 감염병 대응에 필요한 의료제품에 한해 특허권 실행을 일시 유예할 것을 주장해왔다.
태그

로그인하시면 태그를 입력하실 수 있습니다.
박다솔 기자의 다른 기사
관련기사
  • 관련기사가 없습니다.
많이본기사

의견 쓰기

덧글 목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