英, 어산지 체포 위해 수년 간 에콰도르에 ‘기름칠’

공개된 영국 외무장관 일기와 외교문서 통해 드러나

영국 정부가 자국 에콰도르대사관에 망명 중인 줄리언 어산지를 넘겨받기 위해 에콰도르 정부를 상대로 치졸한 캠페인을 전개했다는 증거가 폭로됐다.

  2018년 11월 7일. 마크 랭커스터 영국 국군장관(좌)과 오스왈도 하린 에콰도르 국방장관(우) [출처: 영국 국방부 트위터]

이 같은 사실은 런던에 위치한 탐사보도 전문 언론 <디클래시파이드 유케이(Declassified UK)>가 최근 영국 외무부가 새로 공개한 외교문서와 어산지 협상에서 핵심 역할을 했던 앨런 던컨 전 영국 외무장관의 일기를 인용해 28일(현지시각) 보도하면서 드러났다. 레닌 모레노 에콰도르 전 대통령이 어산지를 영국에 인도하며 밝힌 공식 이유는 그가 대사관의 보안 카메라를 차단하고 보안 파일에 접근하는 등 망명 관련 국제규정을 위반했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 배경으로 모레노 대통령 집권 이후 친미로 돌아선 에콰도르 정부와 미국 측의 이해가 맞물린 결과라는 분석이 뒤따랐다. 모레노는 집권 직후 그의 전임자였던 라파엘 코레아 좌파 정부가 취한 정책을 뒤집고 미국과 제휴해 국제통화기금(IMF)에 구제금융을 신청한 바 있다. 동시에 주 런던 에콰도르대사관에 망명해 있는 어산지에 불쾌감도 공공연히 드러냈었다. 그러나 이번에 영국-에콰도르 외교 관련 기록이 공개되면서 영국 또한 치졸한 방법까지 동원해 어산지 체포한 것으로 드러났다.

<디클래시파이드 유케이>가 인용한 던컨 전 외무장관의 일기에는 2018년 3월부터 2019년 4월 어산지가 체포된 직후까지 영국이 관련 작전팀을 만들고 에콰도르를 설득하기 위해 고위직에 향응을 제공했으며, 언론 플레이까지 동원했다는 사실이 기록됐다. 그리고 이는 때에 따라 영국 외교문서에서 세부적으로 확인됐다.

  2007년 이라크에서 미군이 헬리콥터에서 민간인을 향해 발포하여 살해하는 장면. 현장에선 로이터 기자 등이 사망했으며 위키리크스가 공개해 세상에 알려졌다. [출처: https://en.wikipedia.org/wiki/Julian_Assange#Iraq_and_Afghan_War_logs_and_US_diplomatic_cables]

던컨 전 외무장관은 자신의 일기장에 2016년 1월 에콰도르가 “어산지의 인권을 옹호하고 있다”며 불만을 드러내다가, 2018년 3월에 비로소 “희망의 빛”이 보인다고 기록했다. 그는 이어 당시 테레사 메이 총리에게 “모레노 대통령에 기름칠을 하는 게 좋을 것”이라는 조언한다. 이후 영국 정부는 2018년 11월 오스왈도 하린 에콰도르 국방장관을 여행 경비 8,330파운드(약 1천3백만 원)를 후원해 초대한다. 이때 영국 쪽에선 수출입을 주무하는 담당 부처 장관인 루이스 테일러를 비롯해 수많은 고위 공직자가 나와 그를 맞이했다. 영국은 이후에도 몇 개월 만에 자국을 방문한 에콰도르 정부 관료들을 위해 2만 파운드(약 3천1백만 원)를 지원했다. <디클래시파이드 유케이>는 “한 국가가 외국 장관의 여행경비를 지원하는 것은 매우 이례적인 일”이며 그들의 방문 목적도 석연치 않았다고 설명한다.

영국 정보기관 MI6 관련 고위직의 에콰도르 방문도 늘었다. 대표적으로 영국 경찰이 어산지를 에콰도르 대사관에서 체포하기 불과 2주 전 리차드 무어 영국 국가안보부 부보좌관은 에콰도르를 방문해 대통령과 단독회담을 나눴다. 무어는 이후 MI6 최고책임자로 승진했다. 던컨 전 외무장관도 레닌 모레노 전 대통령을 몇 차례에 걸쳐 방문했다.

  2012년 줄리언 어산지가 주 영국 에콰도르대사관에서 연설하기 위해 나서고 있다. [출처: https://en.wikipedia.org/wiki/Julian_Assange#Iraq_and_Afghan_War_logs_and_US_diplomatic_cables]

에콰도르가 어산지 인도를 주저하자 영국이 언론 플레이도 감행했다는 의혹도 제기됐다. 2018년 9월 던컨은 호세 발렌시아 당시 에콰도르 신임 외무장관과 통화하고 “모레노 대통령이 어산지를 대사관에서 빼내기로 결심했지만 버튼을 누르도록 설득하기 위해서는 최종적인 압박이 필요하다”라고 기록했다. 이에 <디클래시파이드 유케이>는 “그 배경에는 던컨의 일기장에 언급되지 않은 협상이 분명히 이루어지고 있었다”라며 “2018년 10월 던컨은 ‘어산지 문제가 진행 중이다. 우리의 에콰도르 채널은 해결책을 준비하고 있다’고 기록했다”고 지적했다. 실제로 당시 영국에선 정확한 출처 없이 어산지를 비방하는 보도가 폭증했다. <가디언>도 2018년 11월 어산지가 2016년 미국 대선 전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핵심 측근이자 대선 캠프 선대본부장을 지냈던 폴 매너포트와 ‘알려지지 않은 러시아인’을 비밀리에 만났다는 기사를 낸 바 있다. 이 보도 또한 출처가 불분명해 어산지의 명성을 떨어트리기 위한 영국 정부의 언론플레이라는 의혹을 받았다. 어산지는 당시 보도 내용을 전면 부인한 바 있다.

영국 경찰은 결국 2019년 4월 11일 어산지를 체포해 런던 교외에 위치한 벨마쉬 특수감옥에 수감했다. 그러나 영국은 어산지가 체포된 후에도 언론플레이를 벌였다. 어산지 체포 이틀 후인 4월 13일 던컨 전 외무장관은 “([영국 황색언론] 데일리메일 기자인) 사이먼 월터스를 마르샨(에콰도르) 대사와 만나게 했고, 이를 통해 데일리메일은 어산지에 대한 특종을 냈다”고 기록했다. <디클래시파이드 유케이>는 당시 “데일리메일은 해당 보도에서 닦지 않은 접시를 의도적으로 찍은 것으로 보이는 사진 등 대사관 내부의 사진을 이용해 히트작을 냈다”며 이 언론은 사진과 함께 “‘대사관이 결국 그(어산지)를 쫓아내게 한 완전히 추잡한 공포’라고 보도했다. 또 기사에 ‘더러운 속옷이 화장실에 너무 많다’고 기록했지만, 증거를 첨부하지는 않았다”고 지적했다.

던컨 전 외무장관은 어산지가 체포되자 작전팀과 기념사진을 촬영했고, 이를 출력한 뒤 ‘2019년 4월 11일 줄리언 어산지 브렉시트 특별팀’라는 문구를 적어 나눠줬다고 기록했다. 에콰도르는 어산지가 체포된 뒤 한 달여 만인 2019년 5월 영국과 자유무역협정을 체결했다. 던컨은 2019년 7월 15일 다시 에콰도르 대통령을 방문하고 “감사를 표하기 위한 방문은 필수적인 것”이라며 “그는 영국을 사랑한다. 나는 그에게 버킹엄 궁전 기프트샵의 아름다운 도자기 접시를 선물했다. 수고했다”라고 일기장에 기록했다.

줄리언 어산지는 위키리크스 창립자로 미군 정보분석가 첼시 매닝이 제공한 미군의 아프가니스탄과 이라크 전쟁 범죄 등을 폭로했다. 이때 공개된 자료 중에는 미군이 이라크에서 헬리콥터에서 로이터 기자를 포함해 민간인 18명을 쏘아 살해한 동영상, 유엔과 세계 지도자들에 대한 미국 정부의 간첩 행위, 부패 등의 문제가 기록된 자료도 있었다. 미국이 기소한 혐의를 모두 합하면 어산지는 최고 175년의 징역을 살 수 있으며 최악의 경우에는 사형까지 선고될 수 있다. 영국 법원은 지난 1월 미국의 어산지 신병 요구를 ‘자살의 우려’를 이유로 거부했으나 항소심이 진행 중이다. 2019년 5월 어산지를 방문 조사한 닐스 멜처 유엔 특별조사관은 그가 장기간 심리적 고문을 당했을 때 나타나는 전형적인 증상을 보였다면서 그에 대한 처우가 생명에 위협적이라고 밝힌 바 있다.

<디클래시파이드 유케이>는 탐사보도 전문 언론으로, 주로 영국 정부와 정치인들의 출판물을 다루며 영국의 제국주의와 외교, 군사정책의 문제를 보도하고 있다.
  2011년 10월 어산지가 런던 세인트폴 대성당 앞에서 연설하고 있다. [출처: https://en.wikipedia.org/wiki/Julian_Assange#Iraq_and_Afghan_War_logs_and_US_diplomatic_cabl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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