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년의 세월, 광화문 차벽은 무너졌을까?

[질문들]

[출처: 홍진훤]

지난 4월 10일 세월호 7주기를 앞두고 진상규명 약속이행을 촉구하는 피케팅에 참여했다. 피켓과 촛불이 광화문 교보빌딩 앞에서 경복궁역을 지나 청운효자주민센터 까지 이어졌다. 코로나19로 한자리에 모일 수도 없고, 진상을 규명하라는 커다란 구호도 외칠 수는 없었지만 세월호 참사를 잊지 않는 사람들이 여전히 자신이 할 수 있는 행동으로 거리를 채웠다.

나도 피케팅을 하기 위해 걸어가는데 갑자기 경찰이 이곳을 지나갈 수 없다고 막아섰다. ‘이곳’은 미국대사관 앞이었고 다른 사람들은 그곳을 자유롭게 지나고 있었다. 내가 피켓과 촛불을 든 것이 막아선 이유였다. 대사관 앞에 서 있을 생각도 없고 지나갈 뿐이라고 했지만, 경찰은 우리 일행만 돌아가라는 명령을 했다. 다른 사람들은 다 지나는 곳을 우리만 돌아가야 하는 것은 받아들일 수 없었다. 우리는 그럴 수 없다고 실랑이를 한 뒤에야 경찰은 자신과 같이 대사관 앞을 지나가자며 감시와 다를 바 없는 인솔을 했다. 당시엔 너무 화가 나서 묻지를 못했는데 피케팅하는 내내 누가 왜 이런 지시를 했는지 계속 분노의 의문이 떠나지 않았다. 박근혜 정부 당시 세월호 리본만 보아도 통제를 했던 그때의 경찰을 다시 만난 느낌이었다.

2015년 4월

미 대사관 앞에서의 사건과 함께 어쩌면 조금 무뎌졌을 세월호 참사에 대한 나의 기억과 감각을 다시 깨운 일이 있었다. 지난 3월 25일 대법원이 세월호참사국민대책회의 공동운영위원장이었던 김혜진, 박래군 두 활동가에게 집회 및 시위에 관한 법률 위반, 특수공무집행 방해 치사상 등의 혐의를 적용해 최소 징역 2년, 집행유예 3년의 중형을 확정했다는 소식이었다.

두 활동가가 거리에 섰던 그 날, 나도 세월호 참사의 진상을 규명하고자 했던 시민들과 함께 거리에 있었다. 그날 거리에 선 우리의 행동이 범죄라는 것일까? 그때의 기록들을 다시 찾아봤다.

2015년 4월 16일 분향소를 폐쇄하고 모두 떠난 팽목항을 찾은 박근혜는 그 길로 해외 순방을 떠났다. 국민의 힘으로 만든 세월호 특별법을 무력화하는 시행령을 강행한 정부의 대통령이 자리를 비운 세월호 1주기, 광화문광장 분향소에 헌화하기 위해 길을 나선 유가족과 시민을 기다린 것은 광화문 일대를 점령한 경찰과 차벽과 최루액이었다. 그날 밤 사람들은 집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거리에서 밤을 보냈다. 거리의 시간은 계속 이어져 4월 18일 다시 광화문에서 종로3가까지 이어지는 거대한 차벽에 부딪혔다. 막힌 거리를 돌고 돌아 광화문으로 향한 사람들에게 경찰은 캡사이신을 분사하고 최루액을 넣은 물대포를 대량으로 살포하며 유가족과 시민 등 100명을 연행했다.

경찰의 대응은 갈수록 강도가 높아졌다. 5월 1일 노동절 대회와 세월호 특별법 시행령폐기 촉구 집회에서는 높은 수압의 물대포로 사람들을 조준해 살수했고, 거리는 최루액 때문에 하얀 거품으로 뒤덮였다. 경찰의 공격적인 물리력 사용은 결국 그해 11월 민중총궐기에서 백남기 농민을 쓰러뜨렸다. 2015년 내내 역대 최고의 최루액과 물대포를 사용하며 광장을 경찰로 뒤덮은 정권은 촛불집회로 무너졌고 차벽과 물대포도 사라졌다.

2015년 4월 이후 6년 만에 대법원의 판결이 나왔다. 그때 내가 겪은 것은 진상규명을 거부하는 정부가 공권력을 동원해 집회의 자유를 탄압하고 이에 저항하며 진상규명의 요구를 멈추지 않는 시민들을 폭력으로 진압한 장면. 폭력이었다. 지난 6년 동안 법원은 시민들의 행동에서 무엇을 보았던 것일까?

2021년 4월

광화문광장을 가로질렀던 차벽은 ‘한국 사회를 세월호 이전과 이후로 나뉜다’는 말을 형상화한 것처럼 보였다. 세월호 이후 세계로 나가려는 사람들은 세월호 이전 세계를 지키려는 권력의 성벽 같은 차벽을 무너뜨리려 했다. 그런데 촛불 정부와 함께 두 세계를 가로지르던 그 차벽은 무너졌을까? 세월호참사 후 7년, 그 세월 동안 우리 사회는 세월호 이전의 세계로부터 어디쯤 나아가 있을까?

유엔 고문방지위원회는 2017년 대한민국 국가보고서에 대한 최종견해에서 세월호 참사 1주기 집회와 관련해 과도한 무력 사용에 대한 수사에 착수하고 책임 있는 인물들을 기소하며 절차의 결과에 대해 위원회에 통지할 것을 권고했다. 최근 이에 대한 정부 보고서 초안에는 “경찰의 과도한 진압을 감시하기 위하여 1주기 추모집회를 비롯한 관련 집회 현장에 인권지킴이단을 파견하였다”는 엉뚱한 답변을 했다. 촛불 정부는 왜 자신의 책임을 이행하지 않고 있는가?

두 활동가가 유죄가 되는 동안 구조를 방기한 이들은 무죄가 됐고, 여전히 진상규명이 되지 않아 유가족은 온전히 가족을 잃은 슬픔에만 빠질 수 없는 7주기다. “나라다운 나라를 만들어보자는 국민들의 외침을 잊지 않고 있다”는 대통령의 말이 마음에 닿지 않는 2021년 4월이다. 판결문도 읽고 또 읽었지만, 오히려 판사들에게 묻고 싶은 것들만 생겼다.

판사님, 이의 있습니다!

판결문에서 “집회 시위의 자유는 민주사회에서 최대한 보장되어야 할 것이나, 그 집회·시위는 적법하고 평화적이어야 하고 (…) 법적 절차를 준수하지 아니하였다”는 내용을 보았습니다. 그런데 판사님, 국제인권 규범은 ‘평화적 집회의 자유에 대한 권리’에 대해 적법성 여부가 아니라 평화적인 집회를 권리로 국가가 보장할 책임이 있는 것으로 규정하고 있지 않습니까? 그래서 ‘적법한 집회’만을 보장하는 집시법은 문제라는 지적이 오랫동안 있었습니다. 집회 신고를 해도 금지할 때는 어떻게 해야 하나요? ‘교통 소통’이나 ‘생활평온 침해’라는 부당한 이유로 금지해 집회가 불가능한 상황을 의도적으로 만드는 것은 국가가 권리보장의 의무를 다하지 않은 것입니다. 이때 시민들은 권리침해에 맞서 거리에 나오지 말고 집회를 포기해야 하나요?

판사님은 또 두 활동가가 “집회·시위를 평화적으로 진행하려는 노력도 기울이지 않았을 뿐 아니라 경찰과의 충돌을 직·간접적으로 선동하면서 범행을 저질렀다”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집회를 평화적으로 진행하는 것은 집회하는 사람들만의 책임이 아닙니다. 오히려 국가와 경찰의 책임이 큽니다. 집회의 권리 박탈에 분노한 시민들에게 경찰은 차벽과 물대포, 최루액으로 진압합니다. 2009년 한국형사정책연구소는 2008년 촛불집회에서 나타나는 폭력 행동이 경찰 차벽에 의한 것이라고 연구 결과를 내놓은 바 있습니다. 연구소는 집회가 폭력적으로 변화하는 이유로 경찰의 집회 관리방식(차벽, 불심검문, 이동차단, 채증, 물포·최루액을 앞세운 경찰장비 등)을 손꼽았습니다. 그리고 경찰 폭력에 저항한 행동은 두 활동가의 선동 때문이 아닙니다. 정부와 경찰이 부당하게 법을 이용해 권리를 빼앗을 때 시민들은 정의로 맞섰습니다. 저항이 불법이라고 처벌하겠다는 으름장에도 시민들은 두려움에 떨지 않고 자신이 할 수 있는 행동을 실천했습니다. 유가족들과 함께 애도하고 진상규명을 해야만 우리가 제대로 된 나라에서 삶을 살 수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판사님은 시민들의 정의 실천을 부정하고 깎아내렸습니다.

무엇보다 판사님이 세월호 진상규명을 위해 시민들과 함께 거리에 섰다면 어땠을지 궁금합니다. 신고가 되지 않은 집회라서, 거리에 서면 일반교통방해가 되니 그대로 돌아섰을까요? 차벽에 가로막히고 그 앞에서 유가족과 시민들이 최루액이 섞인 물대포를 맞고 있다면 분노에 항의라도 하지 않았을까요? 두 활동가가 유죄라면 그날 그 거리에 선 모든 사람도 유죄겠지요. 하지만 불법적인 행동이기 때문에 처벌해야겠다면 적어도 집회의 권리를 빼앗고 폭력으로 진압한 정부와 경찰도 책임져야 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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