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rack9

[리아의 서랍]


안녕하세요. 〈병든 밀레니얼, 잠이 오지 않는 밤의 스케치〉의 답장 같은 글을 보내는 지금은 5월, 나뭇잎이 희미하게 반짝이는 초여름입니다. 잘 지내고 계신가요.

그간 저는 ‘좋다’고 설명할 수 있는 직장에 정규직으로 취업하게 되었습니다. 고등학생 시절부터 서빙과 주방 보조 알바를 시작해 대학을 졸업하자마자 반성폭력 활동에 투신하게 되기 전까지 온갖 - 콜센터, 공장, 과외, 편의점, 백화점… 도저히 전부 적을 수가 없네요 - 일을 다 해왔어요. 그런데 이렇게 육신을 노골적으로 깎아 먹지 않으면서도 용모단정한 여자를 요구하지 않고, 반대하는 가치관과 영합할 필요가 없는, 노동법을 철저히 지키는 일자리는 처음 만나 봅니다.

익히 알고 계시겠지만, 위 문단을 적어 놓고 보니 대한민국 노동 시장에 문제가 좀 있군요.

그럼 전에 고백했던 수면 장애는 어떻게, 해결이 되었을까요? 그럴 리가 없죠. 오전 9시에 출근해 6시에 퇴근하는 평일을 60여 차례 반복하는 동안 가장 힘들었던 부분은 역시 잠이었습니다.

그래도 전보다는 나아졌다고 쓰고 싶어요. 수면제 기운이 머리에서 빠져나가는 시간을 맞추지 못했던 근무 초반에는 몸이 혼자 뇌 없이 움직이며 아침밥에 손가락을 넣는 (대체 왜?) 등의 기행을 일삼았지만, 지금은 대충 적절한 타이밍에 깨어날 수 있게 된 것 같거든요. 환자들 특유의 착각이 아니기만을 바랍니다.

하여튼 저는 좋아요. 7시 50분 즈음 집 문을 밀고 나가 큰길로 넘어가는 횡단보도 앞에 서면 놀랍도록 비슷한 표정을 한 사람들이 하나둘 곁에 모입니다. 어둡고 흐린 하늘 아래, 밤사이 차게 식은 공기를 가르며 행군하는 직장인들. 그들 중 한 명이 바로 저예요! 손을 흔드는 제가 보이시나요? 지하철 역사로 향하는 무리에 합류 중입니다. 회사가 있는 깨끗하고 반듯한 동네로 가려면 서울 지하철 2호선 순환선을 왼쪽으로 반 바퀴 돌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사회적 거리두기가 불가능한 출근길 전동차 안에서는 구석에 끼어 휴대폰 액정을 주시하는 것 외엔 달리 할 수 있는 게 없습니다. 유튜브 알고리즘은 아직도 “면접관이 듣고 싶어 하는 답변” “자소서 광탈을 피하는 방법”과 같은 영상을 추천 목록에 올려 주네요. 취업 준비 기간의 광기 어린 플레이를 잊지 못한 모양입니다. 손가락이 앱과 앱 사이를 뒤적이며 새로운 관심사에 맞는 콘텐츠를 검색해 봅니다.

그렇게 정신없이 인기 있는 영상을 시청하고, 밀린 뉴스를 읽고, 친구들의 SNS 업로드를 확인하고 나면 어느새 목적지에 도착해 있어요. 근태 관리기에 지문을 찍고 사무실로 들어선 후엔 끝. 해야 할 일을 해내려고 노력하다 보면 차례대로 차분히 일과가 끝나고, 하고 싶은 말이 없다는 말 외엔 더 하고 싶은 말이 없어집니다. 업무를 잘 하고 싶다는 마음과 실수 없이 결재를 한 단계 한 단계 밟아가는 과정이 무엇보다 커다랗게 느껴져요.

물론 세상에는 제 취업과 출근 외에도 시급하고 중대한 문제가 수도 없이 많습니다. 반성폭력 활동 분야 이슈만 추려 봐도 다른 할 말이 차고 넘쳐야 마땅한 걸요. 하루 평균 성범죄 발생 건수가 거칠게 잡아 86건 언저리를 맴도는 사회니까요.

11일에는 경찰 단톡방 성희롱 사건 수사가 시작되었습니다. 직장 동료를 두고 성희롱 메시지를 주고받은 남경들은 성범죄 수사 및 경찰 비위 조사 등의 업무를 담당하고 있었다고 합니다. 12일에는 한 대학교수가 실명을 내걸고 교수 간 성폭력 사건에 관한 대학의 미온적 대처를 고발했습니다. 피해를 입은 교수는 가해 교수를 학생과 분리 조치할 것을 요구하며, 여자 교수가 강간을 당해도 이런 식이라면 학생들이 피해를 입었을 때는 어떻게 하겠느냐고 물었습니다. 8일인 어버이날에는 친족성폭력 생존자들이 친족성폭력 공소시효 폐지를 촉구하는 시위를 열었습니다. 친족성폭력 공소시효는 10년에 불과한데, 한국성폭력상담소 2019년 상담통계에 따르면 첫 상담을 받기까지 10년 넘게 걸린 피해자가 55.2%나 된다고 합니다. 6일에는 2차 피해 때문에 고통받아온 불법촬영 범죄 피해자가 성범죄 피해자 보호를 위한 제도적 변화를 촉구하는 국민 청원을 올렸습니다. 아동 청소년이 죽음에 이르거나 크게 다치게 된 성폭력 사건도 두어 건 보도되었습니다.

그리고 또 무슨 일이 있지? 어… 페미니즘 백래시… 페미니즘에 반발하는 남초 커뮤니티 유저들의 움직임이 있구나. 그렇구나….

그냥 이런 시기도 있는 거겠죠. 조용히 있고 싶을 때요. 온 사방이 흑백 무성영화로 변한 기분입니다. 슬픔이나 분노가 탄생해도 잠시 피부 아래로 열감이 일었다가 빠지는 것처럼 쓱 흘러가 버립니다. 평안해진 것과는 달라요. 평안과 무감의 같지 않은 얼굴을 매일 자세히 알아가고 있습니다.

어쩌면 아프기 때문일지도 모릅니다. 감정에 동요가 생기지 않는 것 또한 증상일지도 모릅니다. 저는 왜 아플까요? 의사의 견해에 따르면, 스트레스를 받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렇지만 현재 저의 가장 큰 스트레스 요인은 병원비인데요. 병원비가 너무 많이 들어서 스트레스 받는대요. 취업 후 생긴 여유보다 병원비의 크기가 커져서, 생활비와 병원비를 합치면 월급을 초과하는 숫자가 나오게 돼서요.

연쇄적으로 침몰하는 생활의 고리를 끊어보려고 틈틈이 운동을 합니다. 흙이 묻은 양질의 채소를 털고, 흐르는 물에 씻어 요리를 합니다. 술을 끊고 약을 먹습니다. 분명 좋은 직장을 얻은 덕분에 할 수 있게 된 시도가 맞고, 수면 장애가 나아진 것처럼 몸 상태도 차차 전보다 나아지겠죠. 저는 제가 뭐든 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할 수 없게 되기 전까지는요. 하지만 그다음은 뭘까? 나아지면 다음엔 뭐가 있을까? 만약 나아지지 않는다면? 누가 저를 가지고 죽지만 않게 살려 두는 게임을 하는 것 같아요. 행복이 자꾸 미래에 있어요. 무슨 방법이 없을까요?

퇴근길 풍경을 전하며 이만 줄이겠습니다.

합정과 당산 사이에는 지상 철교 위를 달리는 구간이 있습니다. 창밖의 어둠이 걷히고 하늘이 탁 열리는 순간이요. 발아래로는 너른 한강이 흐르고, 뉘엿이 누운 해가 세상 만물의 윤곽을 부드럽게 매만지는 가운데 물결이 잘게 구겨진 사탕껍질처럼 빛나죠. 혹시라도 제가 보는 것들이 당신께도 보인다면, 여기서는 위험하지 않은 음악을 들으세요. 계속 살아갈 수 있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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