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치와 모욕을 안고 싸우는 자긍심의 자리에서

[레인보우]

“프릭은 프릭 쇼에서의 착취와 전복이 복잡하게 엉킨 집단적 역사로 내게 그늘을 드리운다. 나는 (장애인을) 빤히 쳐다보고 싶어 하는 백인과 비장애인들로부터 이득을 취한 사람들이 있었다는 사실을 아는 게 즐겁다. 나는 한때 장애인들이 자신의 장애를 자랑스레 과시하고 공연하고 과장하고서 돈을 받았다는 점을 사랑한다. 동시에 나는 프릭 쇼가 장애인과 유색인, 비장애인에 관한 해로운 거짓말을 강화했던 방식을 증오한다. 나는 흥행사들이 사람들을 사고 납치해서 프릭 쇼로 끌고 오게 한 인종차별주의, 비장애 중심주의, 자본주의, 제국주의를 경멸한다. 나는 장애인들에게 얼마나 적은 기회만이 주어졌는가에 대해 분노한다.

프릭이란 단어에 자긍심을 불어넣기 위해선, 나는 프릭의 범주화에 관련된 내 개인사를 통과해, 프릭 쇼라는 더 큰 집단적 역사로 발을 들여놓아야 할 것이다. 내 자기혐오의 마지막 조각들을 통과해 가면서, 빤히 쳐다보거나 지진아란 단어와 짝지어 있던 고통을 통과해 발걸음을 떼어놓으면서...”



장애·환경·퀴어·노동운동가이자 작가이기도 한 일라이 클레어는 선천적 뇌병변 장애인이자 젠더퀴어이고, 친족 성폭력 생존자이자, 페미니스트다. 그는 책《망명과 자긍심》에서 장애인을 명명하는 여러 단어-핸디캡, 장애인(the disabled, people with disabilities, disabled people), 무능, 불구자, 절름발이, 지진아, 다른 능력을 갖춘, 신체적으로 어려움을 겪는, 프릭 등-의 의미를 하나씩 짚어간다. 그리고 그중에서도 ‘프릭’이라는 단어가 왜 자신에게 보다 복잡한 감정을 안겨주는지, 왜 선뜻 자신을 ‘프릭’으로 명명하기 어려운지를 길고 꼼꼼하게 탐색한다.

‘프릭’은 ‘기이한’, ‘괴물’ 같은 의미를 가지는 단어다. ‘퀴어’처럼 멸시의 단어였으나 지금은 당사자들이 적극적으로 전유해 사용하는 단어이기도 하다. 프릭쇼는 ‘인간이 덜 된’, ‘잃어버린 진화의 연결고리’로서 장애인과 유색인, 그 밖의 ‘이상한 존재들’을 전시하고 착취하던 곳이었다. 하지만 그 착취의 공간에서도 어떤 장애인들은 오히려 자신의 장애를 과시하고 과장함으로써 돈을 벌어들이기도 했다. 오늘날 이런 프릭쇼는 사라졌지만, 장애인과 프릭으로 분류된 이들을 다루었던 사람들의 인식은 여전하다. 의료 영역에서 범주화된 장애인의 몸은 ‘연구를 위해’ 또 다른 방식으로 전시되거나 대상화되며, ‘무능력한’ 존재로 취급된다.

때문에 당사자들이 이 단어를 전유하여 사용할 때, ‘프릭’은 장애를 과장했던 이들과 그 모든 역사에 저항했던 이들의 역사를 함께 담아내는 의미를 가진다. ‘프릭’은 멸시의 단어이자, 수치심에 대한 증언이며, 동시에 정상성의 세계에 균열을 만들어온 저항의 역사에 자긍심을 드러내는 단어이다. 그러므로, 프릭을 자긍심의 언어로 사용한다는 것은 수치와 모욕의 역사를 함께 전유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20대 중반 무렵, 한 선배는 나의 커밍아웃을 듣고 이렇게 말했다. “알겠는데, 요즘 성소수자들은 그걸 너무 자랑하는 것 같아. 그럴 것까지는 없잖아?” 90년대 후반에도, 2021년 현재에도, 우리는 여전히 이런 질문을 받고 있다. 당시 선배에게는 성소수자 모임이나 동아리가 만들어지기 시작하고, 자신을 드러내며 활동하는 성소수자가 등장한 것이 떳떳할 것 없는 일을 굳이 ‘자랑’하는 행위처럼 보였던 것 같다. 지금도 매년 6월이면 어디서 눈에 띄지도 않던 성소수자들이 거리에 나와 온갖 색상의 옷을 입고 (혹은 덜 입고) 거리를 행진하는 게 누군가에게는 부끄러운 일을 ‘자랑하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겠다. 맞다. 우리는 우리가 이상하고 변태스럽고 우스꽝스러운 사람들이라는 걸 자랑한다. 그런 사람들이 모여서, 숨죽여 우는 대신 한껏 이상한 모습으로 행진하기를 택했다.

그러나 이 자긍심은 수치와 모욕의 서사를 삭제하고는 아무것도 아닌, 그 경험과 감정이 뒤엉켜서 여전히 나를 쉽게 모욕하는 세상을 향해 수시로 고개를 들게 만드는 그런 것이다. 세상이 모르는 우리를 증언하게 하는 것, 하지만 그 증언 속에 묻혀 있기만 해서는 나올 수 없는 것, 그리고 세상을 향해 고개를 들기 위해 나의 일부를 드러내도 될지를 수없이 갈등하게 하는 것이다. 나는, 우리는, 그 수치와 모욕을 우리 자신의 역사로, 나의 것으로 안고서야 자긍심을 이야기할 수 있다.

해마다 6월이면 세계 곳곳에서 자긍심 행진이 열린다. 미국의 스톤월이라는 곳에서 경찰의 단속과 폭력에 맞서 거리로 나섰던 ‘변태’, ‘호모’, ‘복장 도착자’, ‘돈 받고 몸이나 팔던’ 이들의 저항 행동을 기념하는 행사다. 지금은 한국에서도 제법 큰 규모의 축제가 됐고, 다른 나라에서는 수십만 명의 사람과 기업과 정치인들도 참여하는 국제적인 행사가 됐다. 하지만 축제 밖에서는 그 웃음과 자긍심 안에 담긴 수치와 모욕을 차곡차곡 끌어안고, 생존을 위한 일상의 투쟁을 이어가는 현실이 계속되고 있다.

2021년 6월의 한국에서는 차별금지법을 제정하자는 청원에 10만 명이 모이고 나서야 겨우 관련 법률안이 발의됐다. 여전히 ‘동성애 반대’를 핑계 삼아 모두에게 보장돼야 할 가장 기본적인 평등을 가로막는 이들 앞에서, 오늘도 이어지는 수치와 모욕 속에서, 우리의 자긍심은 더 단단해지고 있다. 가난한 이들, 장애와 질병을 안고 살아가는 이들, 삶터에서 쫓겨나고, 낯선 땅에서 생존을 위해 분투하는 이들, ‘비정상’이라고 손가락질받는 이들이 반복되는 차별에 맞서 싸울 때, 그곳은 가장 치열한 자긍심의 자리가 된다. ‘누구도 차별받아서는 안 된다’는 당연한 전제를 넘어, 그 자긍심의 자리들이 모여 ‘차별금지’와 ‘평등’의 의미를 더욱 크게 채워갈 것이라 믿는다. 그 자긍심의 자리에 함께 서길 바란다.
최신기사
기획
논설
사진
영상
카툰
판화

온라인 뉴스구독

뉴스레터를 신청하시면 귀하의 이메일로 주요뉴스를 보내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