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 번 해고 당해도 마지막은 시그네틱스에서”

[르포] 영풍의 네 차례 해고에 맞서 20년 투쟁하는 시그네틱스 노동자들 이야기

  2010년 1월 시그네틱스 파주공장 앞에서 진행된 신년집회 [출처: 연정]

영풍그룹의 네 차례 해고에 맞서 20년 동안 투쟁하는 노동자들이 있다. 22명의 시그네틱스 노동자들(금속노조 경기지부 시흥안산지역지회 시그네틱스분회 소속)이다.

시그네틱스는 반도체 후공정 작업을 하는 회사다. 반도체 칩에 전기 기능을 연결하고 외부 손상이 가지 않도록 포장한 후 성능을 검사하는 일을 한다. 이렇게 만들어진 제품은 삼성전자 등 국내기업과 해외로 납품된다. 시그네틱스는 1966년 미국 시그네틱스사가 서울 강서구 염창동에 설립한 국내 최초의 외국인 투자 회사다. 그다음 해에는 필립스가 인수해 1995년까지 운영했다. ‘잘 나가던’ 시절에는 3천 명의 노동자가 근무할 때도 있었고, 은행 노동자보다 월급이 많을 때도 있었다. 하지만, 1995년 시그네틱스를 인수한 거평그룹이 무리한 인수·합병으로 부도를 내면서 위기에 처했다. IMF 직후인 1998년에는 워크아웃(기업개선작업) 대상 업체로 선정됐다. 시그네틱스 노동자들은 임금동결과 상여금 반납, 퇴직금 누진제 폐지 등으로 고통 분담에 나섰고, 그 결과 회사는 2년도 되지 않아 워크아웃을 조기 졸업을 했다. 이후 2000년에 들어 영풍그룹이 시그네틱스를 인수했다. 영풍그룹은 지난 20년간 ‘정규직과 노동조합이 없는 꿈의 공장 시그네틱스’를 만들기 위해 시그네틱스 노동자들을 네 번 해고했다.

20년 동안 민주노조를 지키며 현장으로 돌아가기 위해 투쟁해온 시그네틱스 노동자들의 최근 일상과 이들의 심정을 독자들과 나눈다. -필자 주-


영풍그룹 투쟁과 해고는 나의 고향

“너무 예쁘다!”

“색감과 디자인이 너무 예뻐!” “원단도 시원해 보인다!”

7월 14일 저녁, 광화문 동화면세점 앞이 시끌벅적 하다. 시그네틱스 해고노동자들이 천으로 만든 가방을 보고 있다.

“이건 한 번도 안 쓰고 버리려고 내놨던 건데, 예뻐서 챙겼어. 제대로 걸지도 않고 버리는 현수막이 너무 많은 거야.”

시그네틱스분회 윤민례 분회장이 버리는 현수막을 이용해 가방을 만들게 된 배경을 이야기해 준다. 가방을 만든 주인공인 남옥연 조합원은 한복도 만드는 시그네틱스분회의 장인이다. 정혜경 씨는 옥상 텃밭에서 길러 수확한 호박을 조합원에게 나누어준다. 이들의 소란스러운 대화와 웃음소리를 들으며 생각한다. 시그 언니들 살아있구나.

  7월 14일 광화문 인근에서 일인시위를 하고 있는 시그네틱스 1차 해고노동자 남옥연 씨 [출처: 연정]

“자, 이제 얼른얼른 사라지세요. 여기 모여 있으면 안 됩니다. 두 사람은 저쪽 건너로 가시고, 여기 두 사람은....”

즐거운 수다도 잠시, 윤민례 분회장이 조합원들에게 일인시위 위치를 정해준다. 7명의 조합원이 피켓을 하나씩 챙겨 들고 광화문 인근으로 흩어진다. 코로나19 수도권 거리 두기 4단계 시행으로 말 그대로 일인시위만 할 수 있다.

“나는 영풍그룹 투쟁이 고향이자 그냥 삶이에요. 여기가 내 고향이야. 해고가 그냥 고향인 거야. 영풍에서 시그네틱스에서 해고 없는 삶은 있을 수가 없어. 영풍은 석포제련소도 그렇고 온갖 환경파괴는 다 하면서 앞에서는 책도 팔고 반도체 생산도 하고 4차산업혁명을 선도하는 우수기업이라고 선전을 해요. 그러면서 우리 여성 노동자는 네 번씩 해고해서 길바닥에 있게 하고, 복직하면 일은 안 시키고 또 해고할 궁리나 하는 아주 나쁜 기업이에요. 영풍은 열 번도 해고할 거예요. 노동조합 없고 정규직 없는 공장 만드는 게 영풍의 목표거든요. 나는 이제 정년이 몇 년 안 남았는데, 그때까지 몇 번 해고가 될지 모르겠으나 끝까지 간다 이런 마인드에요.”

1987년에 첫 직장인 시그네틱스에 입사해 올해로 35년 차가 된 김양순 씨(시그네틱스분회 수석부 분회장)는 네 차례나 해고된 장본인이다. 반도체 칩 테스트 업무를 했던 양순 씨는 열 번 해고를 당하는 한이 있어도 반드시 시그네틱스에서 마지막 꼭짓점을 찍을 거라고 했다.

복직하던 날 해고할 거라는 걸 알았어요

2018년, 대법원은 회사의 세 번째 해고가 부당하다는 판결을 내렸다. 하지만 회사는 노동자를 출근시키지 않고 휴업을 했다. 노동자들은 위장 휴업 소송을 거쳐 1년 만에 생산설비도 없는 시그네틱스 광명사업부로 네 번째 복직을 했다. 일거리를 주지 않던 회사는 결국 경영악화를 이유로 폐업을 하고 9명의 노동자를 해고했다.

4차 해고 노동자 7명과 2001년 1차 해고자 15명 등 총 22명은 시그네틱스 본사인 파주 공장으로의 복직을 요구하며 투쟁을 이어가고 있다. (남은 조합원 22명 중 절반 정도는 4차 해고 후 절망감에 아직 투쟁에 합류하지 못하고 있다.) 시그네틱스 노동자들은 종각 영풍문고와 강남 영풍그룹, 반월· 시화공단에 있는 영풍그룹 계열사 코리아써키트· 테라닉스 등에서도 피켓 시위를 하고 있다.

동화면세점 앞에서 피켓을 들고 있는 김은정 씨 역시 4차 해고자다. 1988년 스무 살 되던 해에 시그네틱스에 입사했다. 은정 씨에게도 시그네틱스는 첫 직장이자 마지막 직장이다.

“세 번째 복직해서는 한 열흘 정도밖에 못 다녔어요. 2~3시간 정도 육안으로 칩을 검사하는 일을 주고, 그이후에는계속앉아서시간을보내게해요.감옥 같았어요. 그게 싫으면 스스로 그만두라는 거죠. 또 해고할 거라는 걸 알았어요. 역시나 70% 휴업수당 주면서 나오지 말라고 하더니 2월에 해고했어요. 싸우는 것이 지겹지만 할 수 없잖아요. 이 나이에 어디 가서 취직할 수도 없고. 회사가 미우니까 내가 할 수 있는 만큼 내 소신껏 투쟁하는 거예요.”

올해 초, 네 번째 해고를 당한 김은정 씨는 세 번째 복직하는 날 네 번째 해고를 예상했다고 했다. 안 맞아도 전혀 서운하지 않을 그 예감은 신기하게도 딱 들어맞았다. 이제 광화문에서 피켓을 드는 대신 돗자리를 깔아야 할 판이다. 처음에 투쟁을 반대하던 가족들도 두 번째 해고 이후로는 별말을 하지 않는다.

“언니들 다 떨어져 나가고 복직자들도 지금 7명 밖에 안 남았어요. 포기할까 고민도 많이 했어요. 돈 준다고 나가라는 유혹도 많았고. 그런데 그런 돈은 성에 안 차고, 내 속마음에 ‘이건 아니다’ 그런 게 있어요. 우리가 잘못한 게. 없으니 투쟁하고 법적으로 다투면 또 이길 거다. 2차 해고부터 악착같은 게 생겼어. 오기가 생긴 거죠. 이번 4차도 마찬가지예요. 너희가 해봐라. 나는 또 이길 자신이 있으니까. 저는 끝까지 싸우기로 했어요.”

20년 동안 시그네틱스 노동자는 많은 일을 겪고 견뎠다. 투쟁 중에 세 명의 동지가 세상을 떠난 가슴 아픈 기억도 그중 하나다.

그것 때문에 인생이 이렇게 꼬일 거라곤...

“우리가 순진했던 걸까? 거평은 정말 그럴 생각이었는데, 영풍이 아니었던 걸까? 영풍이 우릴 인수 안 했으면 달랐을 텐데.... 무노조 경영에 비정규직으로만 회사를 운영하겠다는 영풍이 인수하다 보니 우리가 계속 해고를 맞지 않았나.” (김양순 수석부분회장)

1995년 시그네틱스를 인수한 거평그룹은 염창동 공장을 담보로 대출을 받아 파주의 만여 평 부지에 새 공장을 지었다. 당시 파주공장 착공식에 현장 노동자 백여 명이 참석했고, 양순 씨도 그 자리에 함께했다. 불안한 마음이 있었지만, 파주공장이 완공되면 노동자들도 가게 될 것이라는 회사의 말을 믿었다. 회사는 파주공장 출퇴근을 위해 통근버스를 운영하고, 이사를 원하는 사람에게는 이사비용을 주겠다고 했다.

  2011년 11월 시그네틱스 경기도 파주 공장 앞 집회 [출처: 금속노조 시그네틱스분회]

“끝나고 메기 매운탕을 먹었어. 그 메기 매운탕 맛이 아직도 짜릿해. 매콤하고 시원하고 수제비도 쫀득쫀득하고. 술도 한 잔씩 했을 거야. 그때는 뭐 잔치 분위기였죠. 우린 당연히 파주공장으로 가는 줄 알았어요. 우리도 그렇게 비협조적이지 않았어요. 공장도 크게 짓고 공기도 좋고, 통일되면 북한도 가깝고 괜찮겠다 생각했죠. 그것 때문에 인생이 이렇게 꼬일 거라곤 전혀 생각을 못 했어요.”

하지만, 2001년 시그네틱스를 인수한 영풍그룹은 파주 본사 공장 이전에 관한 기존 노사합의를 백지화했다. 이어서 안산 원시동에 낡은 장비를 채워놓은 공장을 만들어 염창동 공장 노동자들을 인사발령 냈다. 노조파괴와 정규직 없는 공장 만들기 수순임을 알아챈 노동자들은 전면 파업에 돌입해 용역과 구사대에 맞서 공장사수 투쟁을 전개했다. 회사는 파업에 참여한 노동자 130여 명을 해고했다. 한강대교 아치 위 고공농성, 집단 단식농성, 영풍 본사와 산업은행 앞 노숙농성, 연행과 구속 등 장장 6년간의 투쟁이 이어졌다. 그리고 2007년, 대법원 판결로 64명의 해고노동자가 안산공장에 복직했다. 회사는 갖은 방법으로 복직한 노동자들을 괴롭혀 퇴사를 종용했다. 유앤씨라는 하청회사를 만들어 입사를 종용하기도 했다. 1차 복직한 조합원들이 이를 거부하자 2011년에 또다시 해고했다. 2년간의 투쟁과 법적 승소 끝에 2013년 두 번째 복직을 했지만, 회사는 경영악화를 핑계로 2016년에 세 번째 해고를 했다.

2002년 염창동 공장을 매각한 영풍은 예상대로 파주공장 생산라인을 천 명의 비정규직 노동자로 채웠다. 처음에는 시그네틱스 지분 99.7%를 소유한 자회사 STI를 만들어 고용했다. 그러다 2004년 불법 파견 문제가 불거지자 공정별로 소사장제를 도입해 30~60명의 인원이 소속된 2차 하청업체 10여 개를 만들었다. 무노조에 정규직 없는 회사야 모든 자본의 로망이겠지만, 그렇다고 모든 자본이 같은 노동자들을 네 번이나 해고하지는 않는다. 노동자들 역시 모두가 네 번 다 투쟁을 선택하지도 않을 거다.

  6월 16일 시그네틱스 4차해고 규탄 해고자 복직을 위한 투쟁선포 기자회견 [출처: 전국실업유니온]

어쨌거나 시그네틱스 노동자들이 ‘가자! 파주로!’ 라는 구호를 외치는 데에는 이러한 이유와 배경이 있다. 파주공장은 시그네틱스 투쟁에서 중요한 의미가 있다. 세 차례 부당해고 소송에서 승소한 배경에도 파주공장이 있다. 회사는 안산공장과 광명사업부가 별개의 독립적인 공장이라고 주장했지만, 법원은 시그네틱스의 일개 부서로 판단했다. 법원은 부당해고 판결은 내렸지만, 노동자를 파주 공장으로 복직시키는 것까지 강제하지는 않았다.

해고자들은 4차 해고자인 막내 윤선애 씨가 정년을 맞을 때까지 ‘이 짓’을 계속할 거라고 했다. 정년이 16년 남은 윤선애 씨 역시 투쟁을 포기할 생각이 없다고 한다. 물론, 16년 뒤 시그네틱스분회의 모든 노동자가 정년을 맞는다고 이 투쟁이 끝나리라는 보장 또한 없다.

빼앗길지언정 내줄 수는 없다

2007년 대법원에서 부당해고를 인정받지 못한 29명의 노동조합 간부와 조합원들도 현재까지 투쟁을 이어가고 있다. 파업 당시 교육선전부장을 했던 임은옥 씨도 그중 한 명이다.

  2014년 4월 시그네틱스 파주 공장 앞에서 집회에서 율동을 하고 있는 시그네틱스 여성노동자들 [출처: 금속노조 시그네틱스분회]

“이번에 신랑한테 그랬어요. 우리 진짜 이번이 마지막일지도 몰라. 싸울 수 있는 주체가 많이 줄어든 상황이고, 이번에 우리가 잘해서 이기면 혹시 영풍도 마음을 고쳐먹지 않을까 하는 조그만 기대감도 있어요. 우리도 나이 먹고 하면서 이렇게 같이 싸울 수 있는 게 이번이 마지막이지 않을까 하는 그런 위기의식과 절실함도 있고. 더 나이 먹고 기운 없어지기 전에 하루라도 더 싸워보자 그 생각도 있어요. 싸우다 정년을 맞는 것과 스스로가 포기해서 정년을 맞는 것은 다르니까. 나중에 복직해서 ‘나 너무 힘들어서 못 해 먹겠어’ 할 때 사표를 낼 순 있어도 이렇게 잘린 채론 못 그만두니까. 이정도 인원이 남아있는 것도 참 대단한 거 같아. 같이 할 수 있을 때까지 같이 하고 같이 마무리하고 싶어요. 조합원들에게 해주고 싶은 얘기? 지금 이 자리에 같이 있어 줘서 고맙다. 끝까지 가자.” (임은옥, 1차 해고자)

윤민례 분회장은 1차 해고자들에 대한 법원의 재심이 필요하다고 이야기한다. 실제로 1997년 IMF 이후 비정규직과 정리해고가 만연하면서 해고를 제한하는 노사 단체협약과 파주공장 이전에 관한 노사 합의가 이뤄졌다. 하지만 사측은 노조파괴 시나리오로 노동자를 해고하고 노조를 와해하려 했다. 그럼에도 보수적인 법원이 시그네틱스 노동자의 파업을 경영권에 도전한 불법 파업으로 규정하고 노동자 권리를 인정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어느새 한 시간이 지나 조합원들이 일인시위를 마무리한다. 윤민례 분회장이 벗은 몸자보를 곱게 접어 지퍼백에 담는다. 몸자보를 이렇게 보관하기도 하는구나 생각하는데, 옆에 있던 김양순 수석부 분회장이 몸자보를 접어 예쁜 파우치에 담는다. 아무래도 영풍그룹은 시그네틱스 노동자들을 절대 이길 수 없을 것 같다.

“설사 복직하지 못한다 해도 끝까지 저항하고 싶어요. 복직하고 싶다고 외치고 싶어서 투쟁해요. 빼앗길지언정 내줄 수는 없다. 포기할 수는 없다. 이렇게 외치지 않으면 너무 억울하니까. 1차 해고자들은 아마 대부분 그런 심정일 거예요. 종종 제가 다루던 기계의 스타트 버튼을 누르는 꿈을 꿔요. 후지세이끼라고 일본 기계인데, 유릿가루로 IC 반도체 컴파운드를 클리닝 해주는 기계를 다뤘거든요. 파란불이 스타트고 빨간불이 스탑인데, 꿈에서 스타트 버튼을 눌러요. 올해는 정신이 없어서인지, 한 번도 못 꿨어요. 6월에 영풍 앞에서 선포식 하던 날, 일할 때 입던 황산이 묻어 누런 작업복을 입었거든요. 그거 입었으니까 이제 그 꿈을 꾸려나....” (윤민례 분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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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문경락

    2002년 염창동 공장을 매각한 영풍은 예상대로 파주공장 생산라인을 천 명의 비정규직 노동자로 채웠다. 처음에는 시그네틱스 지분 99.7%를 소유한 자회사 STI를 만들어 고용했다. 그러다 2004년 불법 파견 문제가 불거지자 공정별로 소사장제를 도입해 30~60명의 인원이 소속된 2차 하청업체 10여 개를 만들었다. 무노조에 정규직 없는 회사야 모든 자본의 로망이겠지만, 그렇다고 모든 자본이 같은 노동자들을 네 번이나 해고하지는 않는다. 노동자들 역시 모두가 네 번 다 투쟁을 선택하지도 않을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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