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판 뉴딜 2.0’을 보며 박정희가 떠올랐다

[녹색 스트라이크]


가끔 한국 사회에서 당연한 것들이 어색하게 느껴질 때가 있다. 노인이 ‘어르신’이 되고 아저씨나 아줌마를 ‘사장님’이나 ‘여사님’으로 부르는 호칭의 인플레는 여전히 적응이 안 된다. 맛있는 식당이나 좋은 제품이 아닌 ‘유명한’ 것을 찾는 심리도 대략 난감하다. 가장 당황스러운 것은 너무나 자연스럽게 순위나 서열, 경쟁을 강조하는 것이다. 조금 나아졌는지 모르겠지만 얼마 전까지도 한국은 올림픽에서 은메달을 딴 선수가 죄송하다 말하고 1등을 놓친 고등학생이 자살하는 나라였다. GDP 같은 경제지표도 꼭 세계 몇 등인지를 따져야 하고 개인이든 나라든 등수를 중심으로 목표를 세운다. 삼성 재벌가에 비판적인 이들도 삼성 반도체의 세계 점유율 1위에는 뿌듯해한다. 그뿐이 아니다. 폭포건 빌딩이건 대학이건 꼭 ‘세계 몇 대’와 같은 수식어를 붙여야 한다. 그런데 대부분 근거도 빈약하다. 누구는 순천만을 ‘세계 3대 습지’라 하고 누구는 새만금을 ‘세계 3대 습지’라 한다. 해외에서 주로 B급 언론이나 인터넷 매체들이 즐기는 순위 따지기가 한국에서는 주류 문화의 지위를 누린다.

이러한 문화는 한국인에 내재해 있는 인정욕구를 반영한다고 볼 수 있다. 인정욕구는 대개 현실에서 개인이나 집단이 가지는 소외와 불안감, 즉 콤플렉스의 표현이기도 하다. 한국인이 원래부터 콤플렉스 덩어리였던 것은 아니다. 구한말 서구 문물의 ‘우월성’을 동경한 소수 양반 지식인 사이에서 싹튼 콤플렉스는 1961년 쿠데타로 집권한 박정희를 통해 확산됐다. 박정희는 경제발전을 도모하고 사회통제를 강화하면서 한국인의 후진성 콤플렉스를 극대화하는 방식을 채택했다. 가난의 원인으로 한국인의 게으름과 낙후된 의식을 탓했고 ‘선진국’과의 공공연한 비교를 통해 한국인의 마음 속에 강한 콤플렉스를 심어 놓았다. 이런 집합적 콤플렉스는 ‘100억 달러’ 수출 혹은 ‘1인당 평균소득 1,000불’과 같은 경제적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강력한 동원의 기제로, 정치 권력 유지를 위한 통치 수단으로 활용됐다.

옛날이야기가 아니다. 박정희가 죽은 지 40여 년이 지난 지금, 민주화된 사회에서 월 수백억 달러의 수출을 하고 한국 대중문화가 세계적인 인정을 받고 있다지만 이런 콤플렉스는 사라질 줄을 모른다. 수치화된 목표에 대한 집착은 여전하고 개인이나 정부는 경쟁에서 뒤처지는 것을 가장 두려워한다. 박정희·전두환 시절의 16자 표어는 사라졌지만, 정부 시책을 구호화하는 방식도 크게 변한 것이 없다. 정부가 정책 실행을 위해 국민을 계몽과 시혜의 대상으로 파악하는 권위주의적 태도도 그대로다. 지난해 7월 14일 정부가 발표한 ‘한국판 뉴딜’ 1주년에 맞춰 발표된 ‘한국판 뉴딜 2.0’을 살펴보면 이런 답답함이 훨씬 커진다. 달라진 것 없는 기본 틀에 대선용으로 보이는 내용이 몇 가지 추가된 ‘한국판 뉴딜 2.0’은 지난 일 년의 성과를 홍보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42개 뉴딜 펀드 등 민간 투자가 확대됐으며 각종 입법을 통한 제도적 기반으로 경제가 회복세를 보인다는, 그리고 “국제사회도 한국판 뉴딜 방향에 동참”하고 있다는 황당한 판단이 평가의 기준이다. 그래서 이 여세를 몰아 경제·사회 구조 전환을 가속화해야 하는데 양극화는 심화되고, 대외적으로 “글로벌 디지털 경쟁에서 우위를 선점”했으나 “선도적 지위를 공고화”하기 위해 뉴딜의 보완이 필요하다는 논리다. 글로벌 경쟁에서 이기기 위해 산업 전환이 필요하고 이를 위해 구조조정이 쉬워야 하는데 대선을 앞둔 판에 양극화는 심화되고 있으니 무언가 대책이 필요하다는 정치적 판단으로 읽힌다.

그린뉴딜과 관련해서도 큰 기조의 변화는 없다. 애초부터 정부의 그린뉴딜은 기후 위기 대응을 목표로 삼은 게 아니었다. 기후재앙을 막고 노동자나 일반 시민이 겪을 어려움에 대비해야 한다는 문제의식 대신, 환경규제가 강화되고 녹색산업의 경쟁이 심해지는 글로벌 경제에서 도태되면 안 된다는 위기의식이 동기로 제시됐다. 지난해 말 정부가 탄소중립을 선언하면서 ‘그린뉴딜 2.0’에도 탄소중립이라는 단어가 등장 하기는 했다. 하지만 “탄소중립이 글로벌 뉴노멀로 정착”된 상황에서 “탄소중립을 전략적으로 활용하여 미래 성장 동력으로 육성”해야 한다는 식의 경쟁력을 위한 배경으로만 언급될 뿐 탄소중립이 목표로 제시되지는 않는다. “탄소중립 추진기반 구축”이라는 과제가 추가됐지만 탄소중립을 어떻게 달성할 것인가의 계획은 없고 온실가스 측정/평가 시스템이나 디지털화된 ‘자원 순환 산단’ 등 기업의 돈벌이를 도와줄 사업들만 나열한다. 기대되는 효과도 탄소중립이 아닌 “그린 강국으로 도약”이다.

가장 큰 변화를 보인 지점은 ‘안전망 강화’가 ‘휴먼 뉴딜’로 바뀌고 ‘지역 균형 뉴딜’이 추가된 것이다. 1.0에서 제시한 고용/사회 안전망 확대에 더해 산업 안전과 일자리를 위협받는 자동차, 석탄화력발전, 철강, 정유, 시멘트 산업 노동자의 “전직 준비 및 재취업 지원”을 강화하겠다는 내용이 포함됐다. 이는 산업재해에 대한 사회적 관심과 점점 커지는 발전 및 자동차 산업 노동자의 목소리를 반영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구체적 방안 제시 없이 추상적 원칙만 밝힌 수준이라 노동자의 불안을 해소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하다. 불평등 심화를 언급하며 청년, 교육, 돌봄 정책도 추가했는데 이는 대선을 앞두고 이탈한 민심을 달래기 위한 대책으로 밖에는 보이지 않는다. 지역 균형 뉴딜도 온통 지역 산업시설 건설 계획으로 가득하다. 이것이 어떻게 기후 위기 대응에 도움이 되고 농어촌을 비롯한 지역사회에 활력이 되는지는 침묵한다.

정부가 시민을 바라보는 관점도 눈에 걸린다. 민주주의 체제에서 한국판 뉴딜과 같은 대규모 국책 사업을 추진하려면 응당 주권자인 시민의 목소리를 담아내는 과정과 절차가 중요하다. 그런데 정부가 민간 참여를 강화하겠다며 내세운 대책은 ‘정책형 뉴딜펀드’나 ‘국민 참여형 공모 사업 확장’이다. “국민이 주체가 되는 탄소중립 추진 체계”를 마련하겠다면서 내놓는 방안도 “생활 분야 온실가스 감축 실천 운동”과 “취약계층 기후변화 적응 지원”이다. 이는 노동자와 여성, 청년, 지역사회 등 사회를 구성하는 핵심 당사자 집단을 동등한 주체로 보고 함께 토론하는 방식이 아닌, 개별화된 개인만 사회구성원으로 파악하는 전형적인 권위주의적 통치 방법이다. 탄소중립 위원회가 있다지만 시민사회의 대표성 없이 정부가 선정한 인물들로만 구성된다. 이미 결론과 방향을 정해놓고 이를 ‘심의’하는 역할만 맡는 위원회가 민의를 대표한다고 볼 수는 없다.

경쟁력 강화라는 프레임 속에서 기업 지원을 중심으로 설계된 ‘한국판 뉴딜 2.0’을 보며 한숨을 쉬다 도달한 물음은 ‘우리는 어쩌다가 이런 지경에 이른 것일까?’라는 것이었다. 주류 정치 담론은 산업화와 민주화를 구분하고, 학계는 ‘87년 체제’니 ‘97년 체제’니 하며 마치 근본적 변화가 있었던 것처럼 말한다. 하지만 한국사회의 구성 원리나 정부 행정은 1961년 5월 16일 쿠데타로 집권한 박정희 정권의 시스템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했다. 정부만 탓할 일은 아니다. ‘민주화’니 ‘촛불 정권’이니 ‘협치’니 하는 수사들 속에서 과거 우리가 가졌던 민주주의에 대한 의지와 감수성을 스스로 포기했던 것은 아닌지 돌아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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