몸에 대한 시선과 말, 그리고 정치적 올바름

[사파시평]

‘다 거기서 거기’라고? 아니다. 나라마다, 집단마다, 그리고 개인마다 사람의 몸을 보는 시선과 몸을 두는 방식은 의외로 다양하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면서 바뀌기도 한다. 역사적이라고까지 말할 수도 있겠다.

어떤 사회에선 낯선 사람에게 시선을 둘 때 사람을 정면으로 뚫어지게 보는 것이 심한 실례이고, 특히 여자들을 위아래로 훑어보는 시선(gazing)은 절대 하지 말아야 할 행동이다. 나는 이를 여러 나라 사람들이 모인 뉴욕에서 다양하게 경험하고 관찰할 기회가 있었다. 얼마나 다양한 몸에 대한 시선과 몸을 두는 방식들이 사회적으로 가능하고 실제로 수행되고 있는지, 이 글은 일종의 인류학적인 참여 관찰의 결과를 바탕으로 두고 있다.

말하자면 사회적 시선의 사회학이라고나 할까. 사람에 대한 시선 처리가 얼마나 사회적이고 문화적이며 국가-특정적(nation-specific)인가, 즉 장소성을 가지는가를 알 수 있다. 그리고 그것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변할 수 있는 것이다. 사회적 시선두기라는 행위는 시간이라는 변수 속에서 항시적이지 않으며, 지금의 관습이 언제까지나 지속할 것이라고 확언할 수 없다는 점에서 ‘시간성’을 가지기도 한다. 사실 지난 3-4년 사이에 한국에서도 젠더 문화와 젠더 정치와 관련해 얼마나 급격한 변화가 이뤄졌는가 말이다. 지금은 80년대와 다르고, 90년대와 다르고, 2010년대와도 다르다. 특히 지난 5년간 #미투(나도 고발한다) 캠페인 전후로 젠더관련 이슈와 태도는 큰 변화를 겪었다.

하지만 사회적 시선의 관행이 어느 사회나 쉽게 바뀌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문제화의 과정, 사회적 감수성, 정치적 올바름이라는 3가지 축을 경유하면서 사회적 문화가 바뀐 결과다. 특히 젠더(혹은 트랜스젠더)에 관한 문화적인 감수성이나 사회적 태도, 무엇이 수용 가능한 언행인가는 매우 미시적인 사회적 관계에 기초한다. 때문에 그 변화의 범위와 속도는 점진적이기도 하고, 그러다가 걷잡을 수 없이 한꺼번에 변화의 물결이 몰려오기도 한다. 따라서 한국사회도 서서히 바뀔 것이다. 지금 아무 것도 아니라고 여겨지는, ‘다 거기서 거기’라고 치부되는, 문제로 취급되지도 않던 일들이 중요한 사회적인 쟁점이 되고, ‘문제화’되고 있다. 개인적인 것이 정치적인 것이 되고 있다. 사적인 것이 사회적인 것이 되고 있다. 앞서 언급했듯이 이러한 문제화는 그에 대한 기존의 사회적 감수성과 충돌하게 되고, 결국 정치적 올바름에 대한 논쟁을 거치면서 사회문화로 정착되거나 정착되지 않건 간에 바뀔 것이다.

윤석열 씨의 몸에 대해 홍혜은 씨가 8월 12일 경향신문에 쓴 기고글에서 “언론 카메라 앞에서도 쩍 벌어진 그의 다리에서는 무엇을 읽을 수 있을까? 혹자는 법조계 출신 중년 남성의 오만한 태도 문제로 보기도 하지만, 내 주변의 체육인, 의료인들은 허벅지 안쪽 내전근의 실종과 지나친 복부 비만이 근본적인 문제일 수 있다고 본다”라는 단락을 두고 나오는 예민한 반응들도 그렇다. 그 예민함이 애초에 타인을 의식하는 예민함, 그리고 그런 행동이 타인을 불쾌하고 불편하게 만들고 있는 상황에 대한 예민함으로 앞서 발현됐으면 얼마나 좋을까. 특히 여성의 몸에 대한 공공연한 평가에 놀랍도록 둔감했던 것과 대비돼 이런 예민한 반응들이 흥미로우면서 안타까웠다. 왜 이런 예민한 사회적 감수성은 유독 이런 식으로 발현될까? 만시지탄, 즉 너무 늦은 반응이라는 것이다. 우리는 이미 이런 사회적 예민함을 진작부터 가졌어야한다. 이것이 내가 말하고 싶은 요지다.

예컨대 여성들, 특히 한국 사회에서 태어난 여자들은 얼마나 오랫동안 자신의 몸에 대한 시선들과 말들을 참고 살아야 했나. 불편하고 불쾌한 표정조차 짓지 못하고, 설령 그런 표정을 지어도 얼마나 사소하다고 무시당했는데. 나아가 표정을 짓다 못해 말 한마디 하는 걸 용기내야만 했는데…. 그렇게 사소한 것들에 목숨 거는 것처럼, 혹은 그런 비아냥을 뚫고서라도 불편함과 불쾌함을 말했어야하고, 사소함에 대한 예의를 두고 정치적인 논쟁을 해야 했는데. 바로 그 ‘몸’이라는 걸 두고 말이다. 몸에 대한 시선이나 품평을 두고 말이다.

몸이 왜 문제가 아닌가. 몸이 문제다. 사회적인 몸이 문제다.

그리고 여성의 몸은 이미 언제나 문제였다. 사회적 몸이었다. 개인적인 몸으로 보호되지 않았다. 그러니 무엇이 그리 새삼스러운지 모르겠다.

여자들의 몸이 남자들의 눈요깃거리로 마구 던져지는, 방송 카메라고 낯선 행인이고 민망할 정도로 쳐다보고 품평하는 것이 예사인 사회에서 말이다. 심지어 대통령조차 외모와 몸매를 두고 면전에서 품평을 당하는 사회가 바로 한국 사회다. 집권당 중진들이 청와대 당정 모임에서 박근혜 대통령 면전에 대고 외모를 품평하는 한국 사회다. 독신인 여자 대통령에게 ‘처녀’ 운운하는 말들이 버젓이 공적인 자리에서 회자하고, 그 평가 대상인 사람은 설령 그가 대통령이라도, 마치 사회적 규범이 잘 내면화된 인간이라면 웃으며 넘어가야만 그 인성에 특별한 문제가 없다고 간주되는 사회다. 대통령 박근혜도 그렇게 넘기고 말았다. 불쾌한 표정 하나 짓지 못하고 말이다.

바로 그런 사회문화에 대한 판박이 미러링도 아니고 말이다. 타인을 억압하는 위계적이고 군림하는 몸에 대한 비판 한마디가 뭐 그리 불편하다고 이 난리인가 싶기도 하다. 이럴 양이면 지금껏 언제나 호사가들의 품평거리가 되고 남자들의 사회적 시선에 발가벗겨지고, 면전에서 자신의 몸이 끊임없이 품평당하던 여자들의 경우 백번, 천번 난리가 났어야할 것이다.

그러니 몸이 왜 문제가 아닌가. 몸이 문제다. 사회적인 몸이 문제다. 다 같이 인정하자. 그리고 타인의 몸에 대한 품평과 평가가 얼마나 예민하고 문제적인가를 이 기회를 통해서 십분 깨달았으면 좋겠다. 그렇게 한껏 예민해진 사회적 감수성과 정치적 올바름이 평등하게 골고루, 남녀노소 누구에게나 할 것 없이, 대상을 차별하지 말고 확산되길 바란다.

또한 이 해프닝을 통해서 ‘정치적 올바름(political correctness)’이라는 개념을 다시 살려내길 바란다. 그 개념은 그렇게 목욕물과 함께 아기를 버리듯 내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정치적 올바름은 다수가 아닌 사회적 소수자를 위한 안전망이다. 사회적 약자와 소수자에겐 ‘공공연히 하지 말아야할 말’이 주는 안전막이 얼마나 든든한데 말이다. 속으로 할 말이 있고, 뒤에서 할 말이 있고, 페이스북 ‘따위’에서나 쓸 말이 있지 어찌 신문 칼럼에 버젓이 남자의 몸에 대해서 썼냐는 말에 대한 얘기다. 그렇게 신문지상이나 방송, 공적인 언로를 통해서 할 말들을 구분하는 것, 공적인 자리에서 할 말 안할 말 가려서 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예민함, 그것을 남자 윤석열 씨에만 적용하지 말고 이 땅의 여자들, 소수자들, 남녀노소 모두에게 평등하게 적용하길 바란다. 몸이 그렇게 문제적이라면 말이다. 타인의 몸에 대해서 말할 때에는 부디 예민한 사회적 감수성과 정치적 올바름을 모두의 기준으로 삼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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