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놀면 뭐하노, 진밭에 올라가 보초나 서지”

[소성리를 쓰다⑧] 비오는 진밭에 울려 퍼지는 ‘꾸꿍꾸꿍가’

5.18 광주항쟁 41주년을 맞은 지난 5월 18일 새벽, 경북 성주군 소성리에 1,500명의 경찰 병력이 들어왔다. 이들은 사드 기지 장비 반입 위해 주민을 고립시키고 반발하는 이들을 강제해산시켰다.

2016년 소성리에 사드 배치가 결정된 이후, 지난 5년간 주민들은 끊임없는 경찰 폭력에 시달렸다. 촛불정부를 자임하던 문재인 정부가 출범한 2017년에도, 코로나19가 전 세계를 덮친 2020년에도 폭력과 침탈은 이어졌다. 소성리 주민들의 투쟁이 장기화되고 있는 가운데, 최근에는 주민들을 상대로 소환장이 날아들기 시작했다.

소성리 마을 주민인 시야 기록노동자는 지난해 5월부터 소성리 마을에서 벌어진 일들을 기록해오고 있다. <참세상>은 총 11회에 걸쳐 시야 기록노동자의 글을 연재한다. <편집자 주>



7월 8일, 미군육로수송 20번째 군경합동작전이 있었다. 마을길에서 경찰에 끌려 나온 뒤 주저앉아 펑펑 울었다. 한 번씩 펑펑 울고 나면 속이 시원했다. 경찰청인권위원회가 소성리로 찾아왔다. 마을길에서부터 성주 경찰서장의 관용차로 의전을 받으며 들어왔다. 방송을 하는 경비계장의 목소리가 한층 낮고 부드러워졌다. 시위대가 갓길로 이동하길 ‘간곡히’ 바란다고 말했다. 경찰들의 행동도 느려졌다. 예의를 갖춰 집회 참가자들에게 마을회관 쪽으로 이동하겠느냐고 물었다. 하지만 사람들을 끌어낼 때는 여전히 완력을 썼고, 팔과 다리를 꽉 잡고 놔주지 않았다. 나는 허리가 아파서 다리를 먼저 들면 안 된다고 말했지만 경찰은 개의치 않고 내 다리를 들었다. 그러다가 안경이 바닥에 떨어졌다. “내 안경, 안경 떨어졌잖아. 안경 주워달라고!” 조금 전까지만 해도 친절했던 경찰은 내 목소리를 외면한 채, 나를 마을 구판장 앞 땅바닥에 눕혀놓고 가버렸다.

마을회관 쪽에 갇힌 사람들이 도로를 향해 구호를 외쳤다. 그때 119구급차가 올라왔다. 누군가 쓰러졌다고 해서 의자 위로 올라가 보니, 체크무늬 윗옷이 보였다. 혹시 백광순 할머니가 아닐까, 겁이 덜컥 났다. 페이스북 라이브를 확인해보니 이미경 님이 쓰려져 구급차에 실려간 것이었다. 안도감과 서러움이 북받쳤다. 그동안 쌓였던 설움이 폭발했나보다. 경찰청인권위가 지켜보고 있는데도 우리는 여전히 끌려나왔고, 부상을 당했고, 쓰러져서 실려 나갔다. 마치 원숭이가 된 느낌이었다. 경찰의 쇼에 소품이 된 기분도 들었다. 울고 싶은 만큼 실컷 울고 나니 속이 후련해졌다.

  7월 8일 20차 경찰 침탈 당시, 연대자가 쓰러져 구급차로 이송됐다. [출처: 사드철회상황실]

“비오는 날이라고 사드가 안 들어오더나”

경찰병력이 들어오지 않는 수요일에도 할머니들은 진밭을 지킨다. 나도 아침 일찍 집을 나섰다. 지난주부터 할머니들은 아사히비정규직지회에 연대하러 가서 부를 ‘꾸꿍꾸꿍가’를 연습하기 시작했다. 부녀회장님은 ‘꾸꿍꾸꿍가’를 완벽하게 외워 부르면 밥을 쏘겠다고 약속했다. 나는 ‘꾸꿍 트리오’인 도경임, 여상돌, 도금연 할머니들이 입을 무대 의상을 준비했다. 그리고 할머니들의 노래를 뮤직비디오로 만들겠다는 야심찬 계획도 세웠다.

집을 나서는데 폭우가 쏟아질 조짐이 보였다. 나는 부녀회장님에게 전화를 했다. 내가 진밭 보초를 설 테니, 할머니들과 부녀회장님은 하루 푹 쉬었으면 하는 마음이었다. 하지만 부녀회장님은 내게 진밭 보초를 선뜻 맡기지 않았다. 할머니들과 통화해 의견을 물어보겠다고 했다. 잠시 후 부녀회장님에게 전화가 왔다. 그는 “비 온다고 집에서 놀면 뭐하노, 진밭이나 지키고 있지”라는 할머니들의 말을 전해왔다. 그러면서 아랫마을 상돌 할머니와 경임 할머니를 모시고 소성리마을회관으로 오라고 했다.

  7월 8일 오후평화행동 [출처: 사드철회상황실]

경임 할머니 집 앞에 도착하니, 맞은편 재영 아저씨네 참외작업장에서 경임 할머니와 상돌 할머니가 나왔다. 비가 억수같이 쏟아지는데도, 집에 있는 것보다 진밭에 올라가 보초를 서는 게 마음이 편하다며 내 차에 올라탔다. 마을회관에는 도금연 할머니와 소성구판장 이옥남 사장님, 그리고 부녀회장님이 기다리고 있었다. 모두 함께 진밭 초소로 올라갔다. 아침 평화행동을 마친 강형구 장로님과 조은학 님도 진밭에 도착했다. 비가 너무 많이 내려 물길이 막혔는지, 도로에 물이 넘쳐났다. 강형구 장로님이 할머니들에게 내려가시라고 간곡히 부탁했다. 하지만 할머니들은 오히려 그에게 자기들 걱정은 말고 쉬다 오라고 했다.

나는 비가 오는 와중에도 ‘꾸꿍 트리오’가 입을 무대 의상을 꺼내 놓았다. 꽃무늬가 화사한 원피스 형 앞치마였다. 금연 할머니와 상돌 할머니가 꾸꿍옷을 입자마자 엉덩이를 흔들어대며 ‘릴리리야, 릴리리야, 얼쑤 좋다’라고 흥얼거렸다. 우리는 한바탕 웃음을 쏟아냈다. 할머니들이 비가 오는 진밭 도로에서 꾸꿍옷을 입은 채 우산을 쓰고 노래를 불렀다. 장관이었다. 조은학 님이 영상을 찍어 할머니들이 비오는 진밭을 지키고 있는 모습을 사람들에게 알렸다. 할머니들은 “비오는 날이라고 사드가 안 들어오더나”라고 했다. 사드가 들어오던 날, 밤새도록 내렸던 비를 우리는 잊을 수가 없다.

‘꾸꿍 트리오’가 부르는 ‘꾸꿍꾸꿍가’

상돌 할머니에게 금요일 아침 진밭 보초를 설 때 꼭 꾸꿍옷을 입고 오시라고 했다. 이제 꾸꿍가 연습은 할머니들의 진밭 지키기 프로그램 중 하나가 됐다. 나는 할머니들이 노래 연습하는 모습을 카메라에 담겠다고 약속했다. 그리고 변변찮은 실력이지만 할머니들 공연 모습을 꼭 영상으로 만들겠다고 마음먹었다.

금요일, 부녀회장님과 꾸꿍 트리오 할머니들이 진밭 초소에 올랐다. ‘꾸꿍가’는 원래 구전으로 불려오던 구슬픈 노래다. 이걸 개사해서 부르다보면 계속 고쳐야 할 곳이 생겨서, 몇 번의 연습 끝에 가사를 여러 번 바꾸고 고쳤다. 커다란 우드락에 큼직하게 글씨를 써놨지만, 할머니들은 부를 때마다 헷갈려했다. A4용지에 인쇄해 한 장씩 나눠드렸더니 할머니들이 종이를 쳐다보며 노래를 부르기 시작한다.

  진밭을 지키는 소성리 할머니들과 평화지킴이 [출처: 사드철회상황실]

도경임 할머니가 선창을 하면 상돌 할머니와 금연 할머니가 따라 부른다. 경임 할머니는 진즉에 노래를 다 외웠다. 하지만 정작 꾸꿍가를 알려준 금연 할머니는 개사한 가사를 외우지 못했고, 계속 엇박자를 냈다. 여러 번 연습을 하다 지겨워졌는지, 상돌 할머니가 예전 삼동연수원 교무님이 불렀던 아리랑이 듣고 싶다고 했다. “그 교무님 아리랑 정말 잘 불렀는데….”라며 추억에 잠기기도 한다. 나는 휴대폰으로 ‘아리랑’을 검색해 상돌 할머니에게 들려줬다. ‘진도아리랑’도, ‘정선아리랑’도 아니라고 하더니 ‘홀로아리랑’을 듣고는 손바닥으로 무릎을 탁 친다.

“이 노래는 우리 할마이 셋이 부르면 되겠다.” 그렇게 꾸꿍 트리오가 부를 노래가 한곡 더 선정됐다. 때마침 민들레합창단의 노래지도를 맡고 있는 박형선 교무님이 도착했다. “우리가 이 노래를 부르면 어떻겠는교?” 할머니들이 그에게 묻는다. 나는 음원을 구해야겠다고 생각했는데, 교무님은 음원은 무용지물이라며 할머니들 음정에 맞춰 불러야 한다고 했다. 할머니들은 교무님에게 다음 보초 설 때 노래지도를 해 달라고 부탁했다. 그렇게 노래 연습할 거리가 하나 더 생겼다. 그 옆에서 부녀회장님이 꾸꿍가를 다시 사드투쟁가로 개사하겠다는 야심찬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앞으로 할머니들의 꾸꿍가가 계속 이어졌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이른 새벽, 마을길로 나오는 할머니들의 모습

문득 할머니들이 새벽 일찍 마을길로 나오는 모습을 촬영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백광순 할머니에게 새벽 일찍 찾아가겠노라 허락을 얻고, 새벽 5시에 댁으로 들어갔다. 할머니 집에서 창문을 열면 마을회관 앞에 어떤 차들이 지나가는지, 사람이 있는지 없는지가 훤하게 다 보였다. 백광순 할머니는 늘 아침에 나올 채비를 하며 창밖을 바라보고 계셨나보다. 할머니가 내게 ‘꼬모’(요거트)를 하나 권한다. 딸이 취업해 월급을 받기 시작하면서 집에 올 때마다 사온다고 했다. ‘우리 엄마는 꼬모를 제일 좋아한다’면서 사들고 오기 시작한 게 벌써 30년이다. 당신이 못 오면 언니나 동생에게 부탁해 엄마에게 ‘꼬모’를 사다준다고 했다.

  소성리 백광순 할머니 [출처: 이재각 사진가]

어느 날은 새벽 4시 50분경에 도경임 할머니 댁을 찾아갔다. 소성리에서 1킬로 정도 떨어진 아랫동네라 할머니들 걸음으로 30분은 걸리는 거리였다. 경찰차는 새벽 5시 30분에 들어오곤 했다. 할머니는 걸어가다 경찰버스 만나는 게 싫어서 남들보다 훨씬 일찍 집을 나선다. 다행히 이웃에 상돌 할머니가 살고 있어서 두 분이 자매처럼 늘 같이 다닌다.

7월 15일에는 새벽 일찍 여상돌 할머니 댁을 찾아갔다. 할머니는 몸살이 나서 오늘은 도저히 갈 수가 없겠다고 말했다. 나는 걱정 말고 푹 쉬라고 말씀드리고는 경임 할머니 댁으로 건너왔다. 상돌 할머니가 편찮으시다고 하니, 경임 할머니는 “원래 약골이라 잘 아프다”라며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아프다고 하면서 생전 병원 한번 가는 일이 없다는 걱정 반, 질타 반 섞인 목소리였다. 2017년 경찰 병력이 수시로 들어와 매일 싸움이 벌어지면서, 몸살이 난 할머니들을 모시고 한의원을 다녔다. 그때도 상돌 할머니는 늘 괜찮다면서 한의원을 가지 않았다. 할머니들 중에서 몸이 가장 약한 분인데도 말이다.

새벽 5시 20분, 도경임 할머니와 소성리로 올라갔다. 경찰버스가 올라오고, 주민과 연대자들도 하나둘 모여들기 시작했다. 회관으로 모여든 할머니들과 의자에 앉아 한담을 나누고 있는데, 갑자기 경찰 한 무리가 내려오더니 우리 앞에 주황색 폴리스라인을 치기 시작했다. 우리가 스프링 튕기듯 벌떡 일어나 도로로 나와 보니, 팔순이 넘은 도경임 할머니가 의자를 갖고 도로에 나와 있다. 팔순 넘은 할머니의 순발력이라고는 믿어지지 않았다. 경비과장은 도로에서 나와 마을회관 쪽으로 이동하라고 방송을 해댔다. 그는 우리를 마치 범법자처럼 취급했고, 체포될 수 있다며 지속적으로 협박했다. 도경임 할머니가 의자에서 내려오더니 도로에 털썩 주저앉아버렸다. 문영희 어머님도 깔개를 가지고 나와 주섬주섬 나눠주더니 도로에 털썩 주저앉았다. 젊은 경비과장이란 자가 마을길에 서 있는 할머니들에게 불법을 운운하는 게 가소로웠는지, 그가 뭐라고 떠들어대든 아랑곳하지 않는다. 그 날은 스물두 번째 경찰 침탈이 있던 날이었다.
덧붙이는 말

[기록노동자 시야] 소성리사드-미군기지 건설을 반대하는 성주주민이다. 노동자 편드는 글을 쓰고 싶어서 인터뷰하고 기록한다. 함께 쓴 책으로 <들꽃, 공단에 피다>와 <나, 조선소 노동자>,<회사가 사라졌다>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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