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조직가 이태복과 복지부장관

[1단 기사로 본 세상] 70년대 노동중심성 앞세웠지만 90년대 이후 자유주의 품으로

[편집자주] 주요 언론사가 단신 처리한 작은 뉴스를 곱씹어 세상을 보는 눈을 키우려고 한다. 2009년 같은 문패로 연재하다 중단한 것을 이어 받는다. 꼭 ‘1단’이 아니어도 ‘단신’ 처리한 기사를 대상으로 한다.

엄혹했던 유신 말기, 70년대 후반 전국을 누비며 노동자를 조직했던 전국민주노동자연맹(전노련) 활동가 이태복 전 복지부장관이 지난 3일 숨졌다.

  조선일보 12월 6일 12면.

그의 죽음을 놓고 언론은 ‘일평생 노동자를 위해 행진한 세계의 양심수’(경향신문 12월6일 21면)라거나 ‘노동운동에 평생 헌신한 세계의 양심수’(한국일보 12월6일 23면)라고 추켜세웠다. ‘평생 노동운동에 헌신’했다는 언론의 평가는 과연 진실일까.

  한국일보 12월 6일 23면.

  경향신문 12월 6일 21면.

학생운동을 하다 강제 징집당해 1974년 7월말 제대한 24살의 이태복은 용산시장에서 배달노동자(지게꾼)로 첫 노동을 시작했다. 구로공단 대한광학에 입사해 한 달쯤 공장생활을 경험한 이태복은 인천 부평공단으로 옮겼다. 이후 7년 동안 안양, 대구, 포항, 부산 사상공단, 전주 팔복동, 전북 이리공단 등 전국의 공단지역을 돌았다. 영등포 대림통상에선 하루 12시간씩 맞교대하는 중노동을 감당했다. 대구에선 판자촌에 살면서 제화공노조 조직에도 나섰다. 포철 하청업체 삼풍공업에서도 일했다.

70년대 포철은 인건비를 줄이고 비자금을 만들려고 박태준의 수족들에게 하청업체를 하나씩 맡겼다. 울산을 거쳐 부산에 근거지를 마련한 이태복은 광주, 서울, 대구를 다니며 소그룹을 조직했다. 광주 광천동에선 영원히 잊지 못할 윤상원과 박관현을 만났다. 부산 사상공단에 살 땐 공사판에 나가거나 금형 시다를 했다.

전두환 정권은 1981년 6월 전노련 활동가 수백 명을 붙잡아 이태복 등 28명을 구속하면서 민주화운동을 말살하려고 했다. 이른바 ‘학림’사건이다. 감옥 안의 이태복은 1986년 엠네스티가 뽑은 ‘올해의 양심수’가 됐다. 늘 그를 따라다니는 ‘양심수’라는 이름표는 이렇게 만들어졌다. 그는 1988년 가석방 때까지 7년 4개월이나 복역했다.

이태복은 70년대 학생운동을 했던 이들 가운데 학생이 아닌 노동자를 중심에 놓고 사고했던 몇 안 되는 인물이었다. 그는 확실히 시대를 앞서 나갔다.

부유(浮游)하는 계층에 불과한 ‘학생’ 대신 노동자라는 ‘계급’을 선명하게 앞세웠던 이태복은 수많은 노동 입문서를 출판한 ‘광민사’를 설립할 때도 “현실과 동떨어진 관념적 에세이나 비과학적 이론이 횡행하는 현실을 분석하고 평가해 실천적 이론에 기여할 출판을 목표로 했다”며 노동 중심성을 명확히 했다. 광민사의 첫 책은 미국 사회학자 돌스타인 베블렌의 책을 번역한 ‘유한계급론’이었다. 두 번째 책 ‘한국노동문제의 구조’도 거대 담론이 횡행하던 70~80년대 한국 진보운동 안에서 끊임없이 노동 현장 중심성을 내세웠다.

그는 80년 5월 서울역 회군 때도 ‘더 싸워야 한다’며 심재철 지도부의 해산 결정에 격하게 반발했다. 80년대 말 그가 전민련 편집실장이 된 것도 노동계의 강력한 요구 때문이었다. 그는 장기표, 김근태, 이부영 같은 명망가 중심의 전민련 활동에 회의를 품고 이탈해 1989년 주간노동자신문(주노신)을, 1999년엔 주노신을 확대해 노동일보를 만들었다.

이랬던 그가 김대중 정부의 청와대 복지노동수석을 거쳐 보건복지부 장관까지 하면서 자유주의 세력에 포섭된 채 노동 중심성을 잃어버렸다. 못내 아쉬운 장면이다.

그가 자유주의에 포섭되는 과정의 큰 계기는 자서전 ‘쓰러져도 멈추지 않는다(동녘, 2002)’에 잘 드러난다. 그는 자서전에 “나는 1993~94년 울산 현대정밀(현대정공) 장기파업을 거치면서 노동계의 ‘전투적 노동운동’에 문제제기를 했다. 반발이 컸다. 나를 친자본이라고 공격하기도 했다”고 썼다. 곧이어 그는 “1996년 나는 수원 모 공장에 교육가서 한국경제가 조만간 위기에 직면하니 노조가 정신차려야 한다고 했다. 나는 중앙의 임단투 지침이 잘못됐다고 비판했다. IMF가 터지자 노조간부들이 내 얘기를 알아들었다”고 썼다.

물론 그가 IMF 위기의 모든 책임을 노조에 모두 돌린 건 아니다. 그러나 노동에서 이탈해 정치권으로 가는 이들은 한결같이 사회적 연대보다는 경제투쟁만 매몰하는 대기업 노조 비판부터 시작한다. 그러다가 어느새 자본과 정권보다 대기업 노조를 주적으로 삼으며 전선의 저편으로 넘어가고 만다.

노동운동에서 이태복은 94년 6월 전국지하철노조협의회(전지협)와 전국기관차협의회(전기협) 공동파업을 일거에 잠재운 ‘6인 원로성명’으로 더 유명하다. 당시 전국의 지하철과 철도 노동자가 동시에 파업하는 바람에 궁지에 몰린 김영삼 정부는 김수환 추기경, 강원룡 목사, 송월주 스님 등 종교계 거물 6명이 발표한 원로 성명 덕분에 명분을 얻어 노조를 철저하게 파괴했다.

‘파업투쟁 자제 요구 및 정부의 성실한 대화’라는 이 원로 성명 때문에 물도 없이 커피봉지를 생으로 입에 털어 넣으며 졸음을 쫓으며 기차를 운전하던 기관사들의 살인적 노동강도 완화 요구는 한 숨에 깨졌다.

당시 파업을 이끌었던 노동자들은 성명서가 나온 경위를 진상조사 해 그 해 7월 22일 ‘6인 원로성명 경위 최종보고서’를 발표했다. 보고서에 따르면 당시 이태복 주간노동자신문 사장이 청와대 등과 교감해 파업 중재를 자청하는 과정에서 파업노동자와 협의 없이 원로들 선의를 왜곡해 독단으로 추진한 것이다. 이 씨는 추기경에게 성명서 작성을 권해, 승낙 받고 성명서 문안을 만들어왔다. 당시 성명에 참가한 강원룡 목사는 명동성당에 가보니 이미 기자회견장과 성명서가 만들어져 있었다고 했다. 이 내용은 전노협 백서에도 자세히 나온다.

덕분에 이 씨는 이후 김대중 정부에서 보건복지부 장관에 올랐지만 정작 자신과 노동운동을 연결 짓는 강고한 고리였던 노동일보는 문을 닫았다.

그가 복지부장관이 된 2002년 초는 의약분업과 의사파업, 건강보험 재정 안정화, 약가 정책 개선 등 수많은 갈등과 혼란이 난무했다. 복지부장관 이태복은 재임기간이 6개월(2002년 1~7월)에 불과해 평가할 내용이 별로 없다. 다만 그가 퇴임사에서 밝힌 “국내외 제약회사의 압력 때문에 경질됐다”는 주장이 영 빈말은 아니다. 장관 이태복은 출퇴근 시간이 아까워 장관 집무실에서 자거나 과천청사 옆에 9평 원룸을 얻을 만큼 업무에 열중했다. 그러나 혼자로는 아무 것도 못한다. 원래 들판에서 외치고 싸우던 이들은 함께하는 조직의 힘으로 장관 자리에 올라도 그 자리를 지탱할까 말까 한데 이 씨처럼 개인기로만 장관이 되면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잘 보여줬다.

대선을 앞두고 자유주의 정당으로 간 수많은 과거 노동운동가들이 이태복의 교훈을 가슴 깊이 새겼으면 좋겠다. 과거의 노동운동 이력으로 거기서 뭘 하겠다는 생각이랑 깨끗이 접고 그저 밥숟갈이나 챙겨 드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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