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인보우 패밀리, 딸 인보와 두 아빠의 이야기

[어서 와요, 소소부부네]

“오랜만에 기동이 형한테 연락해볼까?”


둘이 오붓하게 마주 앉아 술잔을 기울이던 어느 여유로운 주말 저녁, 문득 보고 싶은 한 사람이 떠올랐다. ‘여기동’, 그는 우리 부부가 활동하는 성소수자 인권 단체인 ‘행동하는성소수자인권연대(행성인)’의 오랜 회원으로, 90년대 후반부터 성소수자 운동의 반석을 갈고 닦은 한국 성소수자 운동의 산증인이다. 우리 부부에겐 존경하는 활동 선배이자, 같은 성소수자로서 든든한 인생 선배이기도 하다. 가까운 거리에서 자주 왕래하고 지내면 좋으련만, 그는 2015년 필리핀 이주노동자 찰스와 동성결혼식을 올리더니, 이듬해 불현듯 배우자 찰스의 고향인 필리핀으로 이주해 타지 생활을 하고 있다.

얼굴이 보고 싶어 영상 통화를 걸었다. 야심한 시간이라 전화를 안 받지 않을까 내심 걱정했는데, 신호음이 몇 번 울리더니 이내 반가운 얼굴이 핸드폰 화면에 떠올랐다.

  소소부부와 기동-찰스부부의 영상통화 캡쳐 [출처: 소소부부]

“기동이 형!! 잘 지냈어요?!”

“어, 그래, 우리 아우들!”


2천 킬로미터 넘게 떨어져 있었지만, 마치 바로 옆에 있는 것처럼 서로를 반갑게 맞이하며 그간 쌓인 회포를 풀었다. 대화는 자연스레 사는 얘기로 흘러갔고, 요즘 그의 핫 이슈인 육아 얘기를 듣게 됐다.

필리핀에는 배우자의 친척이나 지인의 아이를 입양하는 풍습이 자연스럽게 자리 잡고 있다. 지난해 찰스의 먼 친척이 여기동-찰스 부부에게 입양을 제안했고, 그렇게 부부는 한 아이의 아빠들이 됐다. 4월 말, 첫 돌을 맞이하는 아이의 이름은 ‘레인보우’(!). 한국 이름은 레인보우의 가운데 두 글자를 따서 ‘인보(어질 인 仁, 보배 보 寶)’라고 한다. ‘레인보우 패밀리’의 탄생이다.

“인보 너무 보고 싶어요! 한국 언제 들어오세요?”

“나는 이제 못 가. 죽어도 필리핀에서 죽을 거야.”


사진이나 영상을 통해서는 만나봤지만, 역시 직접 만나는 것만은 못하기에 응석을 부려봤으나 우리가 직접 만나기엔 현실이 녹록지 않았다. 사연은 그가 필리핀 이주를 결심한 때부터 시작된다.

  기동-찰스부부와 딸 인보 [출처: 기동-찰스부부]

그 당시 찰스는 갖고 있던 비자가 만료돼 미등록 상태였는데, 출입국 관리소의 단속과 추방을 두려워해 기차역이나 버스터미널 같은 공공장소조차 가지 못했다. 해결책 중 하나는 한국 국적의 배우자와 결혼해 혼인 비자를 획득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한국은 동성결혼이 법제화돼 있지 않아 여기동-찰스 부부는 법적 부부로 인정받지 못했고, 혼인비자 역시 발급이 어려웠다.

이에 둘은 찰스의 고향인 필리핀으로 이민을 결정했다. 필리핀 역시 동성결혼이 법제화돼 있지는 않지만, 다행히 ‘은퇴 비자’라는 제도가 있어 기동은 이를 이용해 이주 생활을 하게 된 것이다. 은퇴 비자는 은퇴하고자 하는 외국인이 일정 금액을 예치하면 발급받을 수 있는 비자로, 영구히 체류할 수 있으며 취업이나 학업 등을 할 수 있는 제도다.

필리핀에서의 생활은 가능해졌지만, 문제는 한국을 방문할 때 생긴다. 내일모레면 환갑을 바라보는 기동은 한국을 방문했을 때 혹여 아프거나 사고가 나는 걸 걱정한다. 갑자기 아파서 병원에 입원해도, 심지어 삶을 마감하더라도, 미등록 상태로 한국에 머물다 필리핀으로 간 찰스는 한국에 재입국이 불가능하다. 그렇게 레인보우 패밀리는 마지막 순간, 손 한 번 잡아보지 못한 채 이별을 맞이하게 되는 것이다. 아이가 없을 때는 그래도 종종 한국에 방문하던 그였는데, 이제 아이까지 생기니 이별이 더 크게 다가온 모양이다.

사연을 들으며 눈물이 났다. 사랑하는 가족과 생이별을 당할 수도 있다는 현실이 슬펐고, 한국에 오고 싶지만 올 수 없는 마음이 느껴져서 슬펐다. ‘동성결혼도 안 되는 엿 같은 나라’라며 한국에 대한 불만을 늘어놓는 기동이지만, 사실 그는 누구보다 ‘모국’에 많은 관심과 애정을 가진 사람이다.

일례로 2020년, 결혼 5주년을 맞이한 여기동-찰스 부부는 해외여행을 가려고 비행기를 예약했다가 돌연 취소하고 기동 홀로 한국행 비행기를 탔다. 때는 코로나19 초창기, 대구 지역에서 1차 유행이 시작되던 때였다. 전 국민이 대구에 방문하는 것조차 기피하고 의료 지원이 절실하던 그때, 간호사 출신이던 기동은 곧바로 대구로 가 1년간 코로나 의료인 자원봉사 활동을 자처했다. 그 정도로 기동은 한국을 ‘모국’이라 칭하며 애정하고, 무엇보다 한국에는 그의 원가족들과 그가 항상 ‘사랑하고 보고 싶다’고 말하는 ‘행성인 아우들’이 있다. 그런 그가 이제는 한국에 방문하는 것조차 어려워하게 된 것이다.

무엇이 문제인가. 여기동-찰스 부부를 비롯해 서로 사랑하며 서로에게 헌신하는 관계인 두 사람을 왜 국가는 보호해주지 못하는가. 왜 단지 동성이라는 이유만으로, 배우자가 아파서 병원에 입원해있을 때 보호자로서 옆에 있지 못하고, 금융·보험·주택 등 모든 복지제도에서 가족의 권리를 박탈당하고, 정부의 주거 지원책에서 배제돼 불안정한 주거 환경과 노후를 맞이해야 하는가.

이렇듯 여기동-찰스 부부와 우리 부부를 비롯해 한국에서 살아가는 모든 성소수자 가족에게 동성혼·파트너십의 권리는 어느 특정한 때가 아닌, 일상에서 늘 부딪히는 큰 장벽으로 다가온다. 이런 와중에 최근 좋은 소식이 들려왔다. 2019년 진행한 ‘동성혼·파트너십 권리를 위한 성소수자 집단진정’에 대한 국가인권위원회의 결정이 나온 것이다. 인권위는 지난달 13일 국회의장에게 성소수자의 기본권 보장을 위해 주거, 의료 등 성소수자의 생활공동체를 법적으로 보호할 수 있는 법률인 ‘생활동반자법(가칭)’ 제정을 권고했다.

5월은 ‘가정의 달’이라고 한다. 그리고 마침 5월 23일은 여기동-찰스 부부의 결혼기념일이고, 우연히 그 다음다음 날인 5월 25일은 우리 부부의 결혼기념일이다. 우리에겐 동성결혼의 달이라고 할만하다. 국가와 사회가 호들갑 떠는 ‘가정의 달’이란 말에 언제쯤 동성 부부도 포함될 수 있을까.

동성결혼의 달을 맞이해 다시 미래를 그려본다. 기동이 아주 오랫동안 납부한 국민연금의 혜택을 딸 인보가 받을 수 있기를. 기동-찰스 부부가 한국에서 서로의 임종을 지킬 수 있기를. 아플 때 병원에서 ‘내가 배우자다, 보호자다’라고 당당하게 말할 수 있기를. 수많은 동성 부부가 세상의 축복 속에서 부케를 던지고 받을 수 있기를.

우리가 가족이라는 당연한 사실을 세상이 알기를.

곧 그런 세상이 오리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사랑은 언제나 이기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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