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폭력 시민불복종 행동을 기후정의 운동의 무기로 삼자

[녹색 스트라이크]


지난겨울, 한 학술 저널에는 IPCC 보고서에 참여했던 과학자들이 쓴 ‘기후변화 과학의 비극’이라는 제목의 논문이 발표됐다.(1) 이 논문에서 저자들은 기후 연구를 할 만큼 다했고 기후 과학의 성과도 쌓일 만큼 쌓였지만, 과학의 성과가 정책으로 연결되지 못하고 있다며, 이는 과학과 사회, 과학과 정책 사이에 맺어진 일종의 사회적 계약의 파기라고 단정했다. 이런 상황에서 과학자들이 선택할 수 있는 세 가지의 옵션을 제시했는데, 첫째는 지금까지 해왔던 대로 기후 연구를 계속하는 것, 둘째는 연구가 정책으로 이어지지 못했던 이유와 이를 위해 필요한 연구는 무엇인가를 포함해 연구를 강화하는 것, 세 번째는 현 상황에서 과학자들이 더 이상 연구를 계속하는 것은 의미가 없으니 아예 연구를 중단하는 것이었다.

저자들은 세 가지 중에서 가장 급진적인 세 번째 옵션을 선택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과학자들이 이미 충실히 기후변화에 관한 지식을 전달한 상황에서 또다시 뻔한 연구를 하는 것은 기후위기 대응의 진전에 아무런 기여를 할 수 없으니 IPCC 보고서를 포함한 모든 기후 연구의 모라토리엄, 즉 중단을 선언해야 한다는 것이다. 대신 이를 통해 오늘날 기후 과학의 비극을 드러내고 과학의 역할에 관한 새로운 사회적 합의를 찾아야 할 것이라 주장했다. 연구가 본업인 과학자들의 연구 중단은 지금까지 해왔던 방식으로는 아무것도 달라질 것 없다는 무력감을 보여주는 동시에, 틀을 깨고 나와 보다 적극적인 방식으로 목소리를 내야 한다는 절박함의 발로로 읽힌다.

실제 이런 절박함은 연구실을 박차고 나오는 과학자들의 직접행동 참여로 드러나고 있다. 지난 4월 초, 28개국 1,200여 명의 과학자들은 IPCC 보고서 공개에 맞춰 동시다발 ‘과학자 반란’ 행동을 벌였다. 이들은 피켓과 플래카드를 들고 행진하다 도로 위에 눕거나 셸 등 화석연료 기업의 창에 기후 과학 논문들을 덕지덕지 붙이고, 화석연료 기업에 돈을 대는 금융사의 유리문에 강력 본드로 손을 접착하는 행동 등을 하다가 수백 명이 경찰에 연행됐다. 이와 별도로 진행된 의사들의 직접행동 과정에서도 수십 명이 연행됐다.

LA에서 신규 화석연료 사업에 투자를 결정한 JP모건 은행 입구에 스스로를 결박했다가 연행됐던 한 과학자는 신문 기고를 통해 왜 불복종 행동에 참여할 수밖에 없었는지를 밝혔다. ‘기후 과학자이자 아버지’로 자신을 소개한 그는 개인의 탄소 발자국 90% 줄이기, 비행 최소화를 위한 소속 학회에 압력 가하기, 책과 앱, 홈페이지 등을 통해 기후 현실 알리기, 지역에서 ‘미래를 위한 금요일’을 조직하고 각종 시위와 행진에 참여하기 등 많은 일을 해왔으나 아무런 변화도 발견할 수 없었다고 했다. 그는 “처음에는 필요에 의해, 그 후로는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 시도해 보고 나서야 나는 스스로를 희생하며 지구를 위해 몸을 던지는 대열에 합류했다”고 고백했다.(2) 영국의 ‘멸종반란을 위한 과학자들’도 “과학자들은 법을 어기지만 정부는 우리 모두를 위험에 빠뜨리고 있다”라며, 사실을 알리는 것만으로는 변화가 오지 않기에 보다 적극적인 불복종 행동이 필요함을 주장했다.

해외 멸종반란 등 기후 활동가들의 비폭력 불복종 행동에는 많이 익숙해졌지만, 과학자와 의사들의 불복종 행동은 새롭다. 그만큼 절박함을 느끼는 이들 사이에서 비폭력 시민불복종 행동에 대한 기대가 크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구체적인 맥락과 조건이 고려될 필요는 있지만, 사회운동 연구자들 사이에서 비폭력 시민불복종 행동의 영향력, 특히 공공 영역에서 특정 이슈에 대한 주목도를 높이는 효과에 대해서는 큰 이견이 없다. 최근 전장연의 지하철 행동이 사회적 논의의 불을 지피며 결국 박경석 공동대표와 이준석 국민의힘 대표의 TV 토론회까지 개최된 것도 같은 맥락에서 볼 수 있다.

국내 기후 운동에서도 2020년 말 멸종반란 활동가들이 국회 정문에 자전거 자물쇠로 목을 걸어 잠그는 비폭력 시민불복종 행동을 결행한 이후 몇 차례의 행동이 이어졌다. 이제 한국 기후 운동에서도 비폭력 시민불복종 행동은 어렵지 않게 들을 수 있는 이야기가 됐다. 불복종 행동은 이전까지의 운동 방식과 확실한 차별성을 드러내며 많은 활동가와 시민들의 관심을 불러일으켰고 그들의 행동 참여를 자극했다. 언론의 관심도 커졌고 시민사회에서는 더 많은 불복종 행동에 대비한 ‘기후 불복종 기금’도 만들어졌다. 그러나 여러 차례의 불복종 행동 감행에도 참여는 뚜렷한 증가세를 보이지 못하고 있고, 장애인 권리 투쟁만큼의 사회적 파급력을 만들어내는 것에도 실패하고 있다.

변화가 없는 것의 책임을 불복종 행동에 참여했던 활동가들에게 물을 수는 없다. 그러나 불복종 행동을 실행하는 것 자체가 목적이 될 수 없는 이상 지금까지 진행됐던 불복종 행동을 돌아보고 기후정의 운동의 무기로서 불복종 행동을 새롭게 벼리려는 노력은 필요하다. 국가 차원의 부정의한 ‘기후위기 대응’이 2년을 맞이하고 새로운 정부의 등장과 함께 달라진 지형 속에서 새로운 전략을 고민해야 하는 지금, 이는 더없이 중요한 숙제다. 이를 위해 비폭력 시민불복종 행동은 무엇이며 어떤 방식으로 변화를 추구하고자 하는 것인지 다시금 짚어 보고 기후정의운동의 불복종 행동의 업그레이드를 위해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살펴보자.

비폭력 시민불복종 행동이 가진 힘의 원천

비폭력 시민불복종 행동은 국가 정책을 변화시키려는 목적으로 의도적이고도 공개적인 방식으로 법이나 규범을 위반하는 정치적 도전 행위다. ‘불복종’ 개념은 법을 어기는 행동, 이에 따른 결과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태도, 그리고 이 모든 것에 내재한 의도성을 포함한다. 법을 어기면서까지 어떤 정치적 행동을 하려면 그 근거가 필요한데, 대개는 부정의한 현실의 법보다 상위에 있는 보편적이고 도덕적인 권위와 원칙을 내세운다. 정치학자 존 롤스는 그것을 양심이라 봤고, 간디는 ‘진실에 충실하기’ 정도의 의미를 가지는 ‘사티야그라하’라는 개념을 통해 ‘진실’을 위해 현실의 법보다 상위에 있는 도덕적 권위를 따라야 한다는 근거를 마련했다. 마찬가지로 마틴 루터 킹 목사는 성서의 절대적 권위를 행동의 기반으로 삼아 미국의 연방법을 어길 수 있는 도덕적 근거를 삼았다.

하지만 비폭력 시민불복종 행동도 갈래를 가진다. 간디의 사티야그라하의 경우 개인의 내적 믿음과 신념 체계를 정치 영역에서 드러내는 것에 초점을 두었다. 간디는 비폭력 저항을 ‘강한 자의 무기’라 불렀는데, 이는 그가 비폭력 불복종을 운동의 ‘수단’ 혹은 정치적 효과의 측면이 아닌 도덕적 정당성 혹은 우월성에 대한 절대적인 신념 체계로 접근했기에 가능했다. 간디는 내면의 도덕적 힘을 통해 상대를 감화시키고 변화를 만들어낼 수 있다고 굳게 믿었고, 비폭력 불복종도 자신이 고통을 감내하면서 수행해내는 ‘수동적 저항’의 형태로 이해했다. 이런 점에서 간디의 사티야그라하에서 비폭력은 수단이자 목적의 통일체였다. 정치적 결과는 도덕이 가진 진실의 힘에 따라오는 문제로 파악됐다.

반면 60년대 미국 남부 지역의 시민권 운동을 이끌었던 마틴 루터 킹은 간디로부터 큰 영향을 받았지만, 운동의 수단 혹은 전술로서의 비폭력 불복종 행동에 상대적으로 큰 관심을 보였다. 400km에 이르는 간디의 소금행진이 내면의 도덕적 힘을 공적 공간에서 표현하기 위한 목적을 가졌다면 킹이 주도했던 알바니나 버밍엄에서의 행동, 또한 세 번에 걸쳐 셀마에서 몽고메리로 향했던 행진은 의도적으로 주 정부와 경찰의 폭력을 이끌어내기 위한 도구적 성격이 강했다. 백인 경찰에 의한 흑인 폭력의 이미지를 창출해 사회적 분노를 만들어내려는 전략이었고, 실제 폭력의 이미지가 전 세계로 타전되고 냉전 시기 미국의 민주주의에 대한 의문이 커지는 상황에 압박을 느낀 미국 정부는 결국 시민권을 법제화했다.

비폭력 시민불복종 행동의 양태도 납세나 병역 등 법에 의해 시민의 의무로 규정된 것을 거부하는 ‘비협조’에서부터 파업이나 농성 같은 물리적 행동, 또는 도로나 교량 점거와 같은 불법적 행동에 이르기까지 그 범위가 넓다. 이런 차이에도 비폭력 시민불복종 행동의 공통분모는 주어진 법과 제도를 따라 반복되는 일상을 뒤흔들고 파열시켜 위기 상황을 창출하는 것에서 찾을 수 있다. 사회 구성원들의 자발적 협조를 통해 유지되는 권력 체제의 작동이 멈출 때 변화의 힘이 만들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자주 인용되는 킹의 문구처럼, 비폭력 직접행동을 통해 위기를 조성하고 긴장을 고조시켜야만 협상을 거부해왔던 이들을 이슈에 주목하게끔 강제할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소수에 의한 국지적 긴장 조성만으로는 변화를 위한 힘을 만들어낼 수 없다. 역사상 성공적인 불복종 행동은 하나 같이 더 큰 운동의 한 부분으로 기획되면서 정치적 긴장을 고조시키고 변화를 만들어낼 수 있었다. 인도의 소금행진은 인도 독립운동의 일환으로 납세 거부와 행진 경로에서의 다양한 집단행동과 결합하는 방식으로 기획됐고, 24일의 행진 기간 6만 명이 넘는 이들이 구속되는 대규모 행동을 이끌어냈다. 미국의 시민권 운동도 몇 차례의 불복종 행동만으로 가능한 것은 아니었다. 인종분리정책에 저항하는 버스 보이콧이나 식당 연좌행동(sit-in)에서부터 알바니와 버밍엄의 도심 시위와 셀마 행진과 같은 불복종 행동은 예외 없이 영향력 있는 시민권 운동 조직들에 의해 기획됐고, 인구 5만의 알바니에서만 천명 이상이 감옥에 갇히는 거대한 참여의 물결을 수반했다.


더 조직적이고 많은 비폭력 시민불복종 행동이 필요하다

그러나 한국의 사회운동, 특히나 기후(정의) 운동 지형은 많이 다르다. 전문성을 기반으로 한 소수 활동가가 운동의 주축을 이루게 되면서 대중운동의 기반은 많이 약해졌다. 게다가 핵심 활동가들이 ‘성장’을 우선시하는 정부와 기업 주도 ‘K-기후위기 대응’을 정당화하기 위한 거버넌스에 적극 참여하면서 담론 지형을 둘러싼 싸움도 제대로 하기 어려운 토양이 만들어졌다. 불복종 행동을 함께 기획하고 사전 트레이닝에서부터 다양한 사후 지원을 제공할 수 있는 조직적 의지도 없었고 기반도 취약했다.

한국의 불복종 행동은 해외와 다르지 않게 절박한 기후위기 상황에서 무책임하고 부정의한 정책에 반대 목소리를 극적으로 표출하기 위한 수단으로 사용됐고, 적어도 기후 운동 안에서는 작지 않은 파장을 만들어냈다. 하지만 운동의 대중적 기반이 약하고 행동 참여의 풀이 작은 조건에서 언론 노출의 극대화를 신경 쓰는 만큼 더 큰 운동을 만들기 위한 면밀한 계획과 행동, 이를 통해 어떤 정치적 성과를 성취하려는 가에 관한 구체적 계획을 마련하는 작업은 미진할 수밖에 없었다. 행동은 정세적 흐름에 대응하는 방식으로 조직됐지만, 연속성을 가지며 더 큰 운동의 궤적을 만들어 나가기보다 일회성 행동들이 고립적으로 벌어지는 양상을 띠었다. 그 결과 더 많은 이들의 행동 참여를 이끌어내기 힘들었고 전 사회적 이슈를 만들어내지도 못했다.

이제 걸음마를 시작한 한국 기후 운동의 비폭력 불복종 행동에 너무 박한 평가라 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지금은 불복종 행동의 등장만으로 시선을 끄는 시기는 지났다. 보다 전략적인 접근과 전술적인 정교함이 필요하다. 이를 위해 두 가지를 고민해보자. 하나는 기후정의 운동 차원의 계획과 조율이다. 기후 운동 안에서 정치적 목표, 타깃, 전술, 또 메세징 전략을 둘러싸고 차이는 있을 수 있다. 그러나 대중운동 기반이 허약한 조건에서 경쟁하더라도 상호 보완하는 방식을 취할 필요가 있고, 이를 위해선 계획과 조정, 행동의 배치가 필요하다. 이는 일차적으로 불복종 행동을 준비하는 활동가 모임 사이에서, 또한 불복종 행동 단위와 기후위기비상행동이나 기후정의동맹 같은 연대체들 사이에서도 이뤄져야 한다. 기후정의를 위해 판을 키워야 하고 이는 전술적 연대를 필요로 한다.

또 하나 기후정의의 확산을 위해 필요한 것은 비폭력 불복종 행동을 포함한 직접행동 참여 확산을 위한 의식적 노력이다. 한국인 대부분은 기후위기가 실질적 위협임을 인지하고 있고 일상생활에서 개인적 실천을 하는 시민도 증가하고 있다. 또한 기후위기가 자본주의 체제의 문제이며 개인적 실천을 넘어 정치적 실천이 필요하다는 것에 공감대도 커졌다. 문제는 지식이 곧바로 정치적 행동으로 이어지지 않는다는 점이다. 지금까지 기후 운동은 기후위기에 대해 널리 알리기만 하면 필요한 실천은 따라올 것이라는 암묵적 가정을 가지고 있었던 것 같다. 그래서 정부나 지자체, 재단 등에서 나오는 사업비를 받아 숱한 교육을 해왔다. 그러나 대부분의 교육 사업은 ‘교육을 위한 교육’을 넘어서지 못했고 이는 결국 정부와 기업의 ‘탄소중립’ 그린워싱에 힘을 실어주는 결과만 낳았다.

점점 악화하는 기후위기와 교묘해지는 그린워싱의 현실에서 개인적 실천만을 위한 혹은 지적 호기심을 채워주는 교육이나 사업은 거부돼야 한다. 대신 모든 사업은 기후정의 실현을 위해 필요한 정치적 실천과 시민적 권리 행사에 나서야 하는 이유를 중심으로 짜일 필요가 있다. 이 속에서 어떻게 우리의 절실함과 몸뚱이가 강력한 무기일 수 있는지, 그걸 무기로 삼은 비폭력 시민불복종 직접행동은 왜 정당하고 절실하게 필요한지, 그리고 행동함을 통해서만 느낄 수 있는 자유와 희망, 연대의 감정이 어떤 것인지를 나눌 수 있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교육자부터 새롭게 교육받아야 하는데, 이를 위해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그들이 직접 시민불복종 행동을 조직하고 참여하는 것이다. ‘운동한다’, ‘현장 다닌다’ 하는 전문가나 활동가들이 못 할 일일까? 연구실에 처박혀 살던 과학자와 의사들도 나선 일이다.

<각주>
(1) Bruce C. Glavovic, Timothy F. Smith & Iain White. 2021. "The Tragedy of Climate Change Science." Climate and Development. https://doi.org/10.1080/17565529.2021.2008855
(2) https://www.theguardian.com/commentisfree/2022/apr/06/climate-scientists-are-desperate-were-crying-begging-and-getting-arres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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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문경락

    어릴적 버릇이 여든까지? 간다고 하는데 선진국에선 시위에 대한 올바른 인식과 행동지침을 초등학교부터 가르친다고 합니다....정치,경제,사회 문화의 환경에 대한 기초적인 인식과 조직력과 연속성을 지닌 시위의 성과를 보려면 우리도 조기 교육이 필요한 것은 아닌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