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평] 만민공동회가 이름값을 하려면

대중 스스로 운영하는 명실공한 만민공동회를 열자

만민공동회가 3차 집회를 진행하면서 작은 규모지만 대중의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8.15범민족대회의 규모에 비할 데 없이 적은 인원이었지만, 파병 반대 투쟁의 뚜렷한 정치적 방향을 제기하고 지속적인 실천을 약속하고 있어 이후 활동에 대한 관심이 커지고 있다.

만민공동회를 준비하고 있는 단체들은 앞으로도 한 달에 한 번씩 만민공동회를 여는 것으로 하고, 해당 시기 상황에 맞추어 다양한 방식의 집회를 진행할 것이라고 밝혔다. 또 최근 인권단체에서 제안한 민중법정 사업에도 적극적으로 결합한다는 계획이다.

파병반대 투쟁이 계속되는 가운데, 그동안 세 차례 만민공동회가 열렸다. 1차 만민공동회는 김선일 씨 죽음 이후 파병반대비상국민행동(국민행동)이 전개해온 6월 26일, 30일, 7월 3일 전국동시다발 범국민추모대회가 행사 참여자들의 의지와 요구를 담아내는 데 한계를 보였다고 지적하고 기존 촛불집회 형식에서 탈피해야 한다는 인식에서 출발하였다.

1차 만민공동회 제안문에 따르면 "여중생 살인미군 처벌 투쟁이나 탄핵반대 투쟁이 집권세력이 아닌 미국과 한나라당에 대한 투쟁이었기에 정권에 대한 분명한 태도를 밝히지 않고도 대중적인 참여를 이끌어낼 수 있었지만, 이라크 파병이라는 사안은 대중들의 참여와 정치의식을 높여나갈 수 있는 정치적 폭로와 이를 강행하려는 정권에 대한 입장을 명확히 해야만 대중의 지지를 획득할 수 있다"며 노무현정권에 대한 태도를 강조한 바 있다.

1차 만민공동회는 참가 단위의 정치발언 중심으로 진행되어, 만민공동회라는 취지를 살리지 못했다는 지적이 많았다. 그러나 7월 24일 인사동 시민공원에서 열린 인사동 2차 만민공동회는 기획 의의를 살린 산뜻한 집회였다는 평이다. 기획과 당일 진행, 발언자의 구성, 발언의 내용, 이후 행진 과정에서 정치적 입장을 선명히 하면서도 대중적 호소력을 갖는 만민공동회가 진행되었다.

8월 14일 열린 3차 만민공동회는 앞으로 파병반대 싸움을 어떤 방향으로 해야 하는 지를 뚜렷이 했지만 보다 많은 대중과 함께 공간을 열지 못했다는 점에서 아쉬움을 남겼다. 아무리 좋은 내용의 집회라 하더라도 대중 속에서 파병반대 투쟁을 열어가지 않으면 주최 단위만의 행사로 전락하고 말 것이기 때문이다.

주지하듯 만민공동회는 1898년 3월 10일 독립협회가 종로 네거리에서 개최한 민중대회의 다른 이름이었다. 이 대회에 1만여 명의 서울 시민이 참여했다고 해서 붙여진 만민공동회는 당시 정부의 친러시아 정책을 규탄하는 내용이 주를 이루었다. 이후 계속된 집회에서 시민의 자발적 참여가 이루어졌고, 독립협회의 영향력에서도 벗어나는 모습을 보였다. 1898년 10월 29일 열린 만민공동회에서는 백정 출신이 개막 연설을 하였고, 민권신장 방법으로서 하원 설치를 해야 한다는 주장을 포함한 '헌의6조'를 결의하여 정부에 요구하기도 하였다. 이는 독립협회의 주장에서 한 발짝 더 나아간 내용이었다.

만민공동회는 정부의 탄압에 의해 해산되었다. 그러나 만민공동회는 당시 신분해방의 현장으로서 시민들의 자발적인 참여를 이끌었고, 도시소상인·소수공업자·빈민과 일부 지식인층이 참여한 반제 대중정치투쟁이었다는 역사적 의의를 갖는다. 다만 독립협회의 영향권에서 완전히 독립하지 못했고, 당시 농민과의 결합을 이루지 못했다는 점이 한계였던 것으로 평가된다.

100년이 훨씬 지난 지금, 서울 시내 한 복판에 만민공동회라는 이름이 내걸린 것은 여러 모로 실천적 함의를 갖는다. 주지하듯 지금까지 만민공동회는 좌파 정치조직과 일부 사회단체, 빈민, 인터넷 네티즌모임과 학생운동 단체들이 이끌어가고 있다. 좌파운동 세력들이 대중으로부터 정치적으로 외면받고 있는 현실에서, 만민공동회라는 기획을 연출함으로써 자신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는 것 자체로 남다른 의미가 있다. 최소한의 공간도 열지 못했던 지난 탄핵 국면과 비교하면 더욱 그러하다.

국민행동의 파병반대 실천의 주된 흐름이 노무현정권에 비껴가는 태도를 보이는 상황에서, 파병을 강행한 노무현정권을 퇴진시켜야 한다는 정치적 방향을 뚜렷이 제시하고 있다는 점도 중요한 의의가 있다. 비록 규모가 작고, 큰 대중적 영향력을 발휘하지는 않지만 지속적이고 꾸준한 실천을 전개하기로 한만큼 대중들은 관심을 갖고 지켜보게 될 것이고, 또 노무현정권에 분노하는 대중으로 하여금 동참 기회를 제공할 것이기 때문이다.

만민공동회가 상설 기구가 아니었고, 따라서 상임 간부가 따로 없이 개최될 때마다 수시로 임시 회장과 총대위원을 선출하여 민중의 결의사항을 집행하도록 했던 구성과 운영 원리 문제도 시사하는 바 크다. 집회에서 자유발언을 강조하는 등 노력하는 모습을 보이고는 있지만, 3차까지 진행된 만민공동회는 여전히 참가 단위의 입김이 크게 작용하는 형편이다. 대중의 자발적 참여가 강조되는 데서 더 나아가 시나브로 대중 스스로 운영하는 만민공동회가 되도록 세심하게 배려하는 것이 필요하다.

만민공동회가 역사적 사건이었던만큼 역사적 교훈도 새겨볼 일이다. 만민공동회가 정부와 외세 의존 세력의 탄압으로 해산된 배경에는 당시 기층 민중이었던 농민과 결합하지 못했던 점이 손꼽힌다. 지금까지 파병반대 투쟁을 벌여온 세력들도 주로 단체, 시민, 학생, 네티즌 등으로, 노동자 농민 빈민 등 기층 민중의 참여는 상대적으로 미비했다. 지난 6,7월 임단투 시기 총파업을 벌인 연맹, 노조 등은 파병반대를 요구로 내걸지조차 않거나 부차적으로 다루는 모습이었다. 이러한 한계는 만민공동회 내부를 들여다보아도 확인된다. 보다 많은 대중과 함께 하기 위해서는 만민공동회 구성 단위의 활동을 증폭하는 동시에 노동자 농민 빈민 등 현장으로 파고들어가는 기획과 조직, 실천 프로그램이 함께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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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꼭두각시

    글 감사드리며 늘 건강하시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