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범민중재판 릴레이 인터뷰Ⅰ] 최병수 현장 미술가

"무고한 사람들을 죽인 죄, 지구 생태와 환경을 파괴한 죄로
부시-블레어-노무현을 전범으로 기소한다."

차돌맹이 같던 그가 쓰러졌다.

병수 아저씨가 쓰러졌다. 피를 많이 쏟고 쓰러졌다 한다. 쏟은 피가 우유 두 곽은 채울 정도가 될 거라 했다. 얘기를 전해주는 환영이 아저씨와 마리아 선생님 목소리가 많이 긴장 되었다. 그런데 나는 솔직히 그 얘기를 들으면서 크게 걱정스럽지 않았다. 왠지 아저씨는 내일이라도 벌떡 일어나 다시 어느 집회장에 나타나 펭귄 얼음을 깎고 있을 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왠지, 왠지…….

지난 해 봄에도 그랬다. 한국이라크 반전평화팀 1, 2, 3, 4진이 2월 27일부터 3월 5일까지 첫 번째 이라크 활동을 하고 요르단 암만으로 돌아오던 날 반전평화팀 5진이 암만에 도착했다. 당시 후세인 정권이 다스리고 있는 이라크에는 입국도 출국도 자유롭지 못했다. 전쟁이 임박한 당시에는 더욱 까다롭고 어려웠다. 아니, 반전평화활동가, 인간방패로 가는 거라 해도 이라크 당국에서는 입국 비자를 더는 내주지 않았다. 누가 미, 영이 보낸 스파이일지 모른다는 공포는 외국인을 경계했고, 곧 공습과 함께 전쟁이 시작될 거라는 긴장이 높아지던 즈음부터는 아주 문을 닫았다. 이미 들어온 외국인조차 온갖 구실로 내보내려 할 정도였다.

그런 상황 속에서 팀원들은 모두 심각했다. 관심은 오로지 하나 ‘어떻게 하면 다시 이라크로 들어갈 수 있을까’였다. 이미 목숨이야 다 내놓은 이들. 어떻게든 이라크로 들어가겠다고, 전쟁이 일어난다 해도 이라크 인들과 함께 그 전쟁을 겪겠다고 마음을 먹고 있었다. 그러나 당시 상황에서는 입국 비자는커녕 이라크 대사를 만날 수조차 없었다. 그 때 꿈처럼 전해온 날아온 일갈, 이라크 대사가 한국이라크 반전평화팀과 만나고 싶다는 거였다. 병수 아저씨가 한국에서 그려온 걸개 <<야만의 둥지>>가 그것을 가능하게 했다. 우리는 할 수 있는 한 이라크 대사의 마음을 움직이느라 노력했다. 우리는 당신들의 운명과 함께 할 거라고, 우리는 이 전쟁을 막기 위해 무엇이든 할 거라고, 결코 우리는 당신들 나라에 해가 되는 짓은 하지 않을 거라고.

팀원들이 모두 고단해서 깊은 잠에 들어 있던 새벽이었다. 병수 아저씨는 혼자 깨어나 피를 토했고, 몸을 가누지 못하다가 화장실에서 고꾸라졌다. 이가 깨졌고 머리에 큰 상처가 나 있었다. 나머지 팀원들이야 영문도 모르고 있다가 아침이 되어서야 아저씨를 요르단 대학 병원으로 데리고 갔다. 아저씨는 말도 통하지 않는 중동의 나라 병원에서 링거 주사를 꽂고 누워 있었다. 그리고 아저씨가 그렇게 누워 있는 동안 이라크 입국 비자가 나왔다. 팀원들은 손뼉을 치며 좋아했다. 그런데 이 사실을 병수 아저씨에게 말을 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저 몸으로 어떻게 들어간단 말인가? 안 그래도 그곳은 죽음을 넘나드는 곳, 어떻게 할 것인가? 결국 이라크로 들어가는 밴을 타기 한 시간 전, 팀원 가운데 하나가 병원으로 가서 이 상황을 전했고 소식을 들은 아저씨는 의사가 말리는 것은 아랑곳 않고 주사바늘을 뽑은 채 병원을 나와 이라크 행 자동차에 올랐다.

나는 아저씨가 피를 토했다는 얘기를 들으면서 그 때 모습을 떠올렸다. 우리하고는 뭔가 다른 몸을 가진 것 같은, 차돌멩이 같은 아저씨는 며칠이면 다시 벌떡 일어날 것만 같았다. 그런데 아저씨는 일어나지 못했다. 암인가 하더니 암이라는 진단이 나왔다고 했고, 암이라지만 배에 칼은 대지 않을 거라고 했다. 동양 의학이던 대체 의학이던 그렇게 해서 고치지 배에 칼은 안 댈 거라 했지만, 위선암 3기 진행 중이라는 정밀 검사 결과 앞에서도 고집만 세울 수는 없었다. 그리고 다음 날 동인 게시판에 들어가 수술 동의서를 썼다는 소식을 확인했다. 병수 아저씨와 두 동생들, 그리고 환영이 아저씨가 함께 상의하고, 의지를 모으고, 마지막 결의를 다진 뒤 수술 동의서를 썼다는 글을 보고 있으려니 내 몸에도 닭살이 솟는 것 같았다. 안 돼, 아저씨. 아저씨는 아직 우리 곁에 있어야 해.

수술을 했다. 중환자실에서 마취가 깨어나면서 괴로워하던 아저씨 모습은 마치 ‘상처받은 산짐승’ 같았다고 했다. 배를 갈라보니 내시경으로 볼 때보다 훨씬 암이 컸다고 했다. 위의 삼분의 이를 잘라냈지만 그 보다 더 걱정스러운 건 다른 곳으로 암이 전이 되었는가 하는 거였다. 겉으로는 웃고 있지만 검사 결과를 기다리며 피를 말리던 열이틀, 어제 결과가 나왔다.

위의 2/3을 떼어내는 수술을 받은지 여드레가 되던 날, 그래도 아저씨는 웃는다. (2004.10.08)


아저씨, 축하해요. 깨끗하다고 얘기 들었어요. 아, 정말. 됐다, 됐어. 그쵸? 지금 몸 상태는 어떤 거예요?”

“응, 지금 몸 상태는 어제부터 물을 먹었어. (아, 이제 처음으로 물을 먹었어요?) 어, 그리고 설사를 하니까 지금 속은 편해졌는데 기가 쫙 빠져나갔고 지금 기운이 없네.”

어휴 정말. 이거 이렇게 피 토하고 쓰러진 게 이게 처음이 아니잖아요. 그 때 이라크 들어갈 때 생각하면 지금도 아찔하다니까요.

“그 때는 전혀 피 토하기 직전만 해도 거 요르단에서 비자 기다리면서 잘 돌아다니고, 증세에 대해서 잘 모르고 그러고 있었는데 밤 한 시 반쯤에 갑자기 위경련이 크게 일어나면서 벽에 부딪히고 기절을 했어. 그러다가 새벽 네 시쯤 혼자 깨어 나가지고 속이 메스꺼워서 화장실에 갔더니 변 색깔이 아주 새까맣더라고. 그러고 또 이따가 보니까 또 구토증이 나서 피를 토하니까 변 색깔보다는 약간 묽지만 또 검은 피가 나오더라고. 아 그러고선, ‘야 이거 나쁜 피가 많이 나왔구나’ 이렇게 생각을 하고 일단 그 날 이라크 대사관(요르단 주재) 대사를 만나서 (이라크로) 가는 거를 확인을 하고 피를 많이 토했으니까 요르단 대학 병원에 가서 내시경 검사를 하고 그랬지. 그 때도 피가 조금씩 난다고 했고, 그러던 차에 비자가 나왔지. 비자가 나와서 링겔 세 대 째 맞을 때쯤에 나가지 말라는 거를 이라크 들어가 전시를 해야겠다는 그 생각 때문에 링겔을 뽑고 나가서 합류해서 먼저 들어가는 팀과 함께 이라크로 들어갔지.”

공습 개시 예상 일을 하루 앞둔 저녁, 바그다드에 모인 온 나라 평화활동가들이 모여 티그리스 강에 촛불 배를 띄웠다. (2003.03.17)


피를 토하고 기절을 했지만, 나는 가야했다.

아니, 피를 토하면서 기절까지 하고 그래서 병원에 누워 링겔 주사까지 맞고 있던 상황인데 어떻게 주사바늘까지 뽑고 나와 이라크까지 갈 생각을 했냐고요. 그 때는 아저씨를 안지도 본지도 며칠 안 되었으니까 그랬지, 만약에 지금 만큼만 친했으면 못 가게 막았을 거야. 당시에 비자가 다섯 사람한테 밖에 안나온 거라 팀원이 다 들어갈 수 있던 것도 아닌데 아니, 무슨 병원에서 링겔을 맞던 사람이 주사 바늘을 뽑고 나와서 가냐고.

“그 때는 작가로서 어떤 의지도 있었겠지만 어쨌든 목적이 이라크 인간방패로 같이 들어가서 그림 전시를 하는 목적으로 그랬던 거였고, 나름대로는 버틸 만 하다는 생각과 함께 들어가서 전시를 해야 겠다 하는 마음이 앞서서 그랬던 거죠. 그리고 그 전쟁 자체가 너무 부당한 전쟁이었고 그래서 들어가야겠다는 마음이 커서 들어갔지. 그건 내가 지금이래도 똑같아. 다시 그런 상황이 와도 똑같이 그렇게 했을 거야.”

하여튼 나는요, 이라크 안에서 한 활동 중에 아저씨를 생각하면 아저씨가 한국에서부터 준비해 간, <<야만의 둥지>>그 걸개를 가지고 타흐리 광장에 걸고 당시 바그다드에 모여 있던 온 나라 평화활동가들하고 함께 하던 거, 그리고 <<오일 갱스터>>라는 퍼포먼쓰 그게 크게 기억에 남아요. 그 다음에 우리 이라크에서 나오기 전 날 밤 티그리스 강에서 촛불 배 띄우던 거 있잖아요, 그리고 요르단으로 나와서는 파병반대 대사관 앞 집회할 때 아저씨가 그린 <<메두사 부시>>그림, 그거 메두사 부시는 요르단 숙소에 있으면서 그린 거잖아요.

이런 것들이 아저씨 하고 같이 이라크에서 활동한 기억으로 크게 남는 것들인데, 아저씨가 스스로 생각할 때는 이라크 안에서 활동 가운데 어떤 것이 기억이 가장 크게 남아 있어요? 아니면 뭐 꼭 무슨 활동을 떠나더라도 이라크를 돌아보면 가장 절실하게 마음에 남아 있는 건 어떤 건지 들려주세요.


“어쨌든 위출혈이 있는 상태에서 열 시간 넘게 지프를 타고 이라크를 들어간 거잖아. 들어가서 뭐, 문화를 알려면 음식을 알아야 한다지만 그 상황에서 나는 못 먹고 그냥 퀭하니 이렇게 보기만 했는데 의외로 전쟁이 임박한, 아니지 전쟁이 아니고 침공이 임박한 거지, 그런 속에서도 사람들 표정이 굉장히 태연하고 이런 걸 보면서, 그게 첫인상인데 일단 그게 나한테는 가장 인상적이었어. 저, 이제… 바그다드 해방 광장에서 퍼포먼쓰를 준비하기 위해서 같이 간 동료들하고, 우리나라로 치면 남대문 시장 같은 데 가서 재료 구하러 가고 그러면서 ‘한국에서 왔는데 뭐 이런 퍼포먼쓰를 하려고 그런다’ 하니까 함께 갔던 유은하 씨가 이뻤든지 뭐 어쨌든 그 비싼 도구들을 그냥 내 주기도 하면서, 고맙다는 표현도 하고. 그 평온한 상황에서도 사람들 모습이 내적으로는 도와달라는 어떤 절실함도 보였고, 서민들의 소박한 간절함 이런 것도 굉장히 절절하게 느껴지던 기억이 있고. 그리고 우리가 해방 광장에서 퍼포먼쓰를 할 때 그 둘레에 모여든 서민들이 아주 크게 호응을 하던 모습이나 그런 것들이 나한테는 가장 기억에 남아.”

최병수 님이 한국에서 그려간 걸개 <<야만의 둥지>>, 바그다드 해방 광장에 그림을 걸고 바그다드의 시민, 각국 평화활동가들과 함께 반전 퍼포먼쓰를 벌였다. (2003.03.16)


그렇게 아저씨 나름으로는 목숨까지 다 걸고 곧 전쟁터가 될 곳에 들어가 나름으로 반전 활동을 하고 그런 거지만 결국 전쟁은 터지고 말았잖아요. 전쟁이 터졌다는 건 그 많은, 아저씨가 직접 그렇게 시장에서 만났던 사람들, 퍼포먼쓰 때 만났던 광장 둘레의 서민들이 그야말로 그렇게 끔찍하게들 죽어간 거고 그런 건데, 전쟁이 터지는 걸 보는 아저씨 심정은 어땠어요?

“우리가 공습 이틀 전에 이라크에서 요르단으로 나오면서 그 때 마음이야 착잡하기 이루 말할 수도 없었고, 그런 상황에서 요르단의 베이스캠프로 돌아왔을 때 씨엔엔을 보면서, 공습을 하는 장면을 보면서 하, 불과 진짜 얼마 전, 이틀 전만 해도 거기서 활보하고 사람들하고 대화하고 이랬던 곳이 그냥 폭염으로 지축이 흔들리는 그런 화면을 봤을 때 과연 이럴 수 있는가, 세상이 과연……. 그러면서 딱 생각나는 건 그 최고 통수권자, 미국의 부시가 눈앞에 딱 떠오르는데 악마 같더라고, 악마. 그래서 그 야누스상의 악의적인 전설의 그 메두사를 부시 얼굴로, 얼굴이 떠오르길래 <<메두사 부시>>라는 작품을 그 공습을, 떨어지는 걸 보면서 스케치를 하게 됐지. 그러면서 그게 완성이 되면서 그걸 대량 확대 복사해서 요르단 주재 한국대사관 앞에서 시위할 때도 쓰고, 팔레스타인들 반전 집회할 때도 가서 나눠주고 그랬고.”

전쟁은 시작되었고, 당시 요르단 암만에 있던 최병수 님은 부시의 악마성을 형상화하여 <<메두사 부시>>라는 그림을 그렸다. 요르단 암만의 로마 극장 터에서 반전 집회를 가질 때, 한 소년이 <<메두사 부시>>를 들고 난간 위에 올라섰다. (2003.03.29)


모순이 있는 곳에는 거기에 맞는 적확한 내용으로

저도 기억이 나는 게 요르단 암만에 나와 있으면서 기어이 공습이 시작한 것을 보고 난 뒤였는데 어느 날부터 아저씨가 방에서 안 나오고 그 안에서 뭘 하더라고요. 나중에 보니까 그 <<메두사 부시>>라는 작품이 그 즉석에서 나온 거더라고요. 그걸 보면서 ‘아, 이 아저씨 정말 예술가는 예술가다’ 하는 생각이 들고 그랬어요. 하여튼 그러고 나서 한국으로 돌아오고도 여태까지 일 년 넘게, 일 년 반 가까이 돌아오자마자 <<너의 몸이 꽃이 되어>> 걸개 작업부터 해서 이루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작업을 했잖아요. 아부 그레이브 학대 사건이 알려지면서는 그걸 가지고 무슨, 그 제목이 뭐였더라? 무슨 기, 성조기를 패러디해서… (아, 패륜기?) 맞아, <<패륜기>>. 이런 작품을 했다거나 최근에는 평택 미군기지 집결과 관련한 축제 때 보여준 전시 작품에, 김선일 씨가 목숨을 잃게 되던 때에는 <<살고 싶다!>>는 굵고 간명한 선만으로 이루어진 목판화로 우리가 하고 싶은 말을 다 대신해주고 그랬고요.

여기에다 반전활동 뿐 아니라 아저씨의 원래 주종목이던 새만금 솟대에 북한산 지킴이 농성, 각종 행사(‘지구의 날’ 행사, 6.10항쟁 15주기)들에서 한 얼음 펭귄 깎는 퍼포먼쓰……. 어휴, 하나하나 다 기억해서 말하기도 어려울 정도야. 정말 엄청난 양의 작업을 해왔는데요, 아저씨는 아저씨 스스로 그렇게 쉼 없이 계속 작품으로 싸움을 해 올 수 있었던 힘이 어디에서 그렇게 샘솟아서 할 수 있었다고 생각해요? 사실 이렇게 쓰러진 게 다 그렇게 쉬지 못하고 그래서 그런 걸 텐데.


“일단 뭐, 과거로 다시 돌아가면 그림을 시작한 동기인데… 일단 개인적으로는 사회 운동을 하기 전에 나는 사회 활동을 십 년을 넘게 하면서 사회 모순을 많이 봤지. 모순을 보면서 그거를, 실제로 구조적인 모순을 최종적으로 봤을 때 ‘아, 이건 너무 심각하다’ 그러면서 운동을 해야겠다고 했거든. 그랬지만 그 방법, 운동을 하는 방법을 고민을 해보다가 생각한 게 그래도 그림을 쪼금 할 줄 안다는 걸, 해서 뭐 ‘미술가가 되겠다’ 하는 이거보다도 ‘운동을 하는데 미술을 이용해서 싸움을 하겠다’ 그런 생각으로 시작을 했어.

그니까 뭐 예술가이기 전에 ‘사회운동가가 되겠다’ 하는 마음을 먹은 거고, 그 마음을 지키려고, 처음에 마음먹은 거… 해서 올해까지 17년인데 하여튼 그 마음으로 계속했던 거 같애. 모순이 있는 데에는 거기에 맞는 적확한 내용을 찾아서, 그려서 보여주겠다. 그게 이제 큰 집회 때에는 걸개를 하고, 어… 또 상황에 따라서 뭐, <<오일 갱스터>>처럼 부시 가면을 쓰고 퍼포먼스를 한다던가 이런… 그런 거를 갖다가 그냥 속에서 치미는 감정을 그냥 그렇게 풀어서 하게 되고 그러지.”

최병수 - 성장한 야만의 도구 <<핵도끼>> 인간이 만든 도구는 잘 쓰면 편리한 것이지만 잘못 쓰는 순간 무서운 살상의 무기가 되어 버리고 만다. 그 옛날 돌도끼도 그랬다. 생명을 죽이는 야만의 도구. 최병수 님은 문명의 성장이라는 것이 결국 '야만의 성장'에 다르지 않음을 들여다 보았다. 이전 시기와는 견줄 수 없을 만큼 엄청난 학살, 성장한 야만. 돌칼이 있는 자리를 핵탄두가 대신한 '핵도끼'가 바로 성장 지상주의의 본질을 그대로 보여주지 않는가. (2003.07) [사진-우리 땅 지키기 문화예술인연대 http://ohmypeace.cafe24.com]


그렇게 쉼 없이, 멈춤 없이 아저씨 같은 경우에는 처음 미술이라는 표현을 통해 반전 운동을 해왔지만 결국 이 나라 군대가 떠났잖아요. 아니지, 아저씨 뿐 아니라 온 국민이 반대한 전쟁에 결국 자이툰이 8월 3일 떠났잖아요. 그야말로 우리는 침략국가가 되고 말았는데 하여튼 전쟁이 일어날 때부터, 아니 일어나기 전부터 지금까지 누구보다 반전 운동의 한 가운데에서 누구보다 절실하게 전쟁에 반대하는 활동을 해 왔는데, 결국 내 나라가 전범 국가가 되고 내가 전범자, 전범 국민이 된 이 현실을 아저씨는 어떻게 여기고 있어요?

“어, 일단 올 해 직장인으로 이라크에 가서 일을 하다가 젊은이가 이라크 무장단체에게 납치되어 그걸 비디오를 통해서, 무장단체가 뿌린 비디오 자료를 통해서 우린 봤지만, ‘살려 달라, 살려 달라, 살고 싶다…….’ 우리 외무부나 이 현 정부는 ‘테러범들하고는 타협이 없다’ 그러면서 ‘우리 의지는 확고하다, 군부대를 보낸다’ 하, 정말 너무 허무했어. 하… 정말 ‘대를 위해 소를 희생시킨다’는 말을 나는 예전부터 싫어했지만은, 지금도 싫어하고. 야아, 정말 각자들 한 번씩이라도 전부 다 자신이 김선일이가 되고, 자기 형제가 되고 친자식이 됐다고 한 번만 생각을 했어도 과연 그런 말이 나올까 하는 것만 따져도, 야 이거는… 뭐 그래서 너무 울분이 차가지고 그거 그림을 그려봤지. 그래가지고 바로 시작해서 하여튼 빨리 새벽에 그렸던 거 같애. 그래가지고 마스터로 대량으로 복사해서 또 뿌리고, 나름대로는 해봤는데 결국은 죽었지.……

우리 나라 이 분단도 강대국 논리로 분단돼 있는 거고, 또 일제 치하 뒤에 미국이 들어와서 일제 다음으로 미국이 식민화 시키고, 이런 거를 보면서 이건 식민 국가다 이렇게 생각하고 반미 운동을 하고 있는데, 어 정말 이 현 정부는 역시 그냥 또 거기에 꼭두각시놀음 밖에 아닌 거야. 부당한 침략 전쟁에 우리 국민들을 보내고, 그런 걸 볼 땐 당연히 우리도 같이 뭐 그 나라 주권을 침략한 거니까 우리가 전범국이 된 거는 당연하지. 그런 거를 볼 때 한 없이 부끄러웠고, 반전 운동하는 입장에서도 ‘야, 이게 너무 부족했구나. 아무리……’ 그러면서 반성도 많이 하고 있는 상황이고, 그렇다고 뭐 그게 지워지는 건 아니고, 그니까는 그래서 지금 인터뷰하는 기범이가 전범재판 이야기 했을 때, 그거 ‘전범 기소’, 나는 당연히 이 운동을 펼쳐야 한다고 봐.”

납치 동영상을 보자마자 최병수 님은 자신이 김선일 씨가 된 마음으로 새벽에 다급하게 판화를 조각해 <<살고 싶다!>>라는 작품을 광장에 모인 이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그건 우리 모두의 외침이었고 간절한 마음이었다. 배반당한 외침, 버림받은 목숨. (2004.06.26 광화문 촛불 집회에서.)


네, 그래요. 안 그래도 그런 얘기들을 더 해 보고 싶었는데요, 아저씨가 말씀 가운데에서 잠깐 말한 것처럼 반전 운동에 대한 부족함이나 반성 같은 것은 비단 아저씨 개인한테만 돌아갈 게 아니라 반전 운동을 했다는 이들 모두가 함께 느끼고 이야기해야 한다고 생각하거든요. 여기에서 저마다 느끼는 부끄러움이나 반성 뿐 아니라요, 이게 어쨌든 하나의 운동인데, 전쟁이 일어나면서부터 우리가 해온 반전운동이랄지 파병을 막기 위한 운동을 해 온 것을 돌아볼 때 우리가 정말 반성을 해야 하는 게 있다면 어떤 대목인지, 아니면 모자란 점이 있다면 어떤 부분에서 모자랐는지 그런 말씀 좀 부탁드릴게요. 아니 뭐 꼭 그렇게 잘못하고 모자란 부분만 꼬집는 게 아니라 성과나 자긍심, 뿌듯함 같은 게 있었다면 그런 것도 함께요. 그러니까 전체적으로 지난해부터 이어져 온 우리나라의 반전 운동이 어땠던 거 같아요?

“반전운동은 초기부터 이렇게, 우리가 분단국가이니까 당연히 반전운동을 해야 한다는 의식이 다 내재되어 있다고 생각하는데, 분단국에 있는 사람들이라고 치면은, 근데 분단 반세기가 넘었는데 그 기간으로 보면은 아주 미미하지만, 그 동안 독재정권이라던가 이런 그… 또 국가보안법이라거나 이런 것 때문에 어쨌든 많은 사상의 자유, 이념의 자유, 또 표현의 자유 이런 게 다 막혀있는 사회에서 그나마 그래도 반전운동이 작년에 그… 한국에서만 보더라도, 전 세계에서 이루어졌지만은, 그 수준으로 볼 때는 절대로 자긍심 그런 건 느끼지 않고, 하지만 짧은 시간 내에 큰 폭발력을 갖고 사람들이 뛰쳐나왔지만은 거기에서 이제 체계화가 못되고, 안 되었던 거, 뭐 이런 거 있잖아. 조직과 조직끼리, 단체와 단체끼리 뭐 연결고리가 뭐라 그럴까, 제대로 되지 못했다고 그럴까, 뭐 이런 거서부터, 단체 간끼리의 연대나 이런 게, 방향 이런 것도 서로가 공유 못하고 우왕좌왕하면서 실지로 김선일 씨 사건으로 뭉쳤을 때 확연히 그게 드러났죠, 그런 거 보면서 아, 나 자신부터 반성을 해야겠지만은, ‘좀 깊이 고민을 해봐야 한다’ 하는 생각을 갖게 됐어.”

무고한 사람들을 죽인 죄, 지구 생태와 환경을 파괴한 죄로 부시-블레어-노무현을 전범으로 기소한다.

“하여튼 역사적으로 죽 봐도 전쟁을 선동하고 일으킨 자들은 소수이고 오래 살았고, 그 피해자는 전쟁하고는 무관한 노약자들이었지. 힘없는 노인네, 힘없는 아이들. 이라크도 마찬가지고 뭐. 민간인이 너무 많이 죽었어. 지금 꿈을 키우고 막 이래야 할 아이들이나 노후에 편안히 살아야 할 어른들이 그냥 무차별로 살생당한 거니까. 나한테는 일단 그 죄 없는 서민들이 죽인다는 게 가장 마음이 아프고, 그리고 그거 군수 산업을 옹호하고, 또 그 무기로 그 사람을 죽이면서 피의 대가로 진짜 호위호식 정도가 아니고 그 이상으로 자신들의 부를 무척 쌓아 놓고서는 히히덕거리는 그런 사람들을 생각하면 도대체…… 그런 사람들 생각하면 분노만 앞서지 뭐.

그리고 나는 그 동안 환경 운동에 비중을 많이 두고 해왔는데 그러다가 이 부당한 전쟁의 조짐을 보일 때, 그건 과거에도 그 사례는 있었고, 또 그 91년도 걸프전쟁 때만 해도 이라크 주변의 바다에 폐유가 흘러갖고 많은 생물들이 거기에 기름에 엉겨가지고, 물고기나 새들이 엉겨가지고 고통 받는 사진들도 전 세계로 다 알려진 자료도 봤거든. 거기서 또 유전을 폭파시켜서 그 시커먼 연기가 하늘로 올라가고, 전쟁이 지구온난화, 특히 지구온난화 같은 경우에는 최고의 CO2 배출이 아닌가, 지구온난화로 지금 해수면이 상승하고 이런 상황에서, 그걸 본 상태에서 ‘야, 이번에 또 이런 전쟁이 나면은……’, ‘이라크는 세계 제2의 석유 매장국인데’, ‘당연히 환경운동을 하면은 전쟁부터 막아야 하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당연히 드는 거지.”

부시, 블레어, 노무현을 전범으로 민중재판에 회부한다. 병상에서 기소장을 쓰는 최병수 님. (2004.10.08)


아저씨가 지금 정말 무고한 백성들을 죽이는 거, 어린이, 노인… 거기에 더해서 전쟁을 일으킨 부시, 블레어, 노무현은 지구환경까지 생태까지 파괴하고 있다는 그런 걸로 기소 이유를 말씀해 주셨는데요, 앞으로 이 민중재판은요, 아저씨가 말씀하신 것 같은 아저씨 나름의 기소이유서와 함께 누구나 다 참여해서 말하는 기소의 까닭이나 전쟁을 반대하는 이유들을 다 모아갈 거예요. 이 전쟁이 파괴한 것들, 짓밟은 가치, 직간접으로 빼앗고 아프게 하고 파괴한 것들이 정말 많잖아요. 이것들을 모아 법정의 증언이 될 건데요, 그런데 이 증언이라는 것을 지금 말씀하신 것처럼 말이나 글로만 밝히는 것이 아니라 실제 이라크 사람들을 영상으로 취재한 영상 증언이나 또는 누구는 노래나 음악으로 기소장을 대신하고, 누구는 그림으로, 또 누구는 퍼포먼쓰로 대신하고 그런 것도 함께 준비하고 있거든요.

그래서 나는 아저씨는 아저씨만의 방식으로 표현하는 기소장을 쓰실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아까 침대에서 보여준 그림, 수술을 마치고 병상에서 그렸다고 한 <<생명 그리고 희망>>이라는 작품도 그렇고, 그 동안 전쟁 관련해서 해 온 <<야만의 둥지>>나 <<너의 몸이 꽃이 되어>>, <<살고 싶다!>> 같은 작품들은 모두 어떠한 말이나 글보다 훨씬 마음에 파고드는 전쟁 고발장이 된다는 생각이 들거든요.


“그렇지. 일단 이 그림(<생명 그리고 희망>)을 먼저 설명을 하면은, 거 핵 관련해서 ‘지구의 시간이 얼마 남았냐’, 이러면은 7분 남았다, 뭐 어느 때는 11분 남았다 이러기도 하고 그런 게 왜 있잖아. 그거를 보듯이 핵 때문에 위기가 다가오고 있다는 거는, 우리가 사는 세상이라는 게 얼마 남지 않았다 하는 건 누구나 다 느끼는 상황이지? 그러면은 그거, 그 무기들을 우리가 만들어 놓고 결국은 우리가 만든 그 무기로 전멸하고 말 거냐, 그렇지 않고 ‘무기를 녹여 보습으로’라는 아주 유명한 얘기가 있듯이, 내가 5월에 이거를 평택 미군기지 들어오는 논에다가 이거를 세웠지, (“아, 그 마을 이름이 뭐더라, 무슨 리, 무슨 리였죠?”, “어어, 대추리.”)

그걸 보고 농민들이 아, 이거 너무 좋다 하면서 이거를 캐릭터화 하면 좋겠다 하고 며칠 전에 전화를 해 와 가지고… 사람이 흙을 떠나서는 살 길이 없잖아, 원래가. 이 그림을 보면 미사일이라는 이 쇠는 생명을 죽이는 쇠고, 이 삽이라는 이 쇠는 생명을 살리는 쇠잖아? 그래서 이제 생명, 그리고 이 전체 이미지에서 희망을 나타내고 있으니까 <<생명 그리고 희망>>이라고 제목을 정한 거거든.“

평택 미군기지 집결을 반대하는 529 평택 평화축제에서 최병수 님은 지난 해 그린 걸개 <<너의 몸이 꽃이 되어>>를 전시했고, 그 자리에서 즉석으로 미사일에서 삽과 낫, 쟁기가 피어나는 전시물을 만들었다. 이 전시물은 축제를 마친 뒤 미군 기지가 들어가려 하는 대추리의 논으로 옮겨 놓았다. (2003.05.29)

수술을 마치고 나온 뒤에 가장 먼저 찾은 것도 스케치북이었다고 한다. 병실에 있는 그이의 스케치북에는 어느 새 적지 않은 작품이 담겨 있었다. 그 가운데 사진에서 보여주는 그림은 바로 위에 있는 529 평택 집회에서 설치 미술로 전시한 작품을 토대로 해서 그린 그림이다.
지금도 평택에서 미군기지 반대 운동을 하고 있는 지역 주민들이 설치한 작품이 너무 좋다면서 그것을 그림 캐릭터로 만들어 달라는 부탁을 받았다. 생명을 죽이는 쇠에서 생명을 살리는 쇠로……. <<생명 그리고 희망>> (2004.10.08)


산수는 할 줄 알기 때문에

아저씨 이렇게 쓰러지면서 각종 언론에서 아저씨 소식을 전하기도 하고, 막 인터넷 게시판으로, 지면으로 아저씨에 대해 재조명을 하듯이 막 이렇게 얘기가 많았어요. 그러면서 아저씨를 기억하는 사람들 중에는 아저씨의 활동이나 작품, 그리고 아저씨의 삶 자체를 소중하게 여기기도 하지만 또 어떤 사람들은 아저씨의 남다른 이력 같은 데에 관심을 더 두기도 하더라고요. 아저씨가 남다르게 살아온 얘기들 있잖아요. 초등학교를 겨우 마치고, 전수 학교로 가서 잠깐 다니다 만 것, 그 뒤로 학교를 그만 둔 뒤에는 거의 밑바닥 생활을 전전하면서 온갖 경험을 다 했다는 것, 그리고 목수로 일하던 게 우연한 계기로 벽화나 걸개그림 같은 작업을 시작하게 되었다는 것까지 말이에요.

아, 그리고 지금은 세계적인 참여미술가 라는 칭호까지 얻게 된 것까지 더해서요. 그런데 막상 아저씨는 사람들이 그런 부분에만 더 눈길을 줄 때는 솔직히 어때요? 그러니까 내가 하는 작품이나 작품의 내용 보다는 자꾸만 내 사적인 얘기에 더 관심을 둘 때는 어떤지, 아저씨가 사람들에게 정말 호소하고 싶은 건 어떤 건지, 사람들이 아저씨의 삶이나 작품을 보면서 궁극으로는 뭘 봐주었으면 좋겠는지, 그런 얘기 들려주세요.


“그, 아까도 잠시 언급을 했지만 올 해로 삼십일 년째야, 사회생활이. 열네 살부터 했으니까 한 십 삼년 정도 사회생활을 하면서 많은 직장, 많은 사람, 또 많은 사장 이런 사람들하고 신경전 벌이면서 일을 해왔고, 거기에서 스트레스 받고, 사장은 어떻게 운이 안 좋았는지, 전체가 그런 건지, 하여튼 사장이라는 사람들이 전부 다 내 돈 뜯어먹으려고만 하지, 그래서 혼자 속으로 ‘야, 내가 그래서 참 운도 없다, 인복도 없고’ 막 그렇게 생각하면서 좌절 비슷한 것도 많이 해본 것 같애. 그러다 목수 시절을 할 때였는데 친구가, 어 초등학교 동네 친군데 김환영이라고, 그 친구가 벽화를 하는데 사다리를 짜 달라 이거야, 얘가. 그래서 내가 ‘아이, 야, 사다리 짜주는 목수 일당이 센데 돈 있냐?’ 이랬더니, 없대나 뭐 이러면서 여학생들 앞세워가지고 막 짜달라고 그러더라고. 내가 거기에 넘어가서 사다리를 짜준 거지.

그래가지고 사다리를 짜주고 나니까 금방 그림이 지워지고 (학교 당국에 의해) 이런 걸 보면서, 그래서 ‘야 이거 왜 이러냐?’ 생각했어. 그런데 내 성격이 비겁하게 빗겨가는 성격이 아니야, 어려서부터. 학교도 ‘아, 이게 아니야’ 하면 탁 안 가고, 담임도 ‘어, 이 담임 아닌데’ 그러면 또 아니라 그러고, 그렇게 어디에서나 종일 얻어터지면서도 ‘아니다’ 이런 얘기를 많이 했거든. 그게 직업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였거든. ‘아, 사장이 이게 아닌데’ 딱 이러면 사장을 갈아 치우고, 그러면서 이제 사회에 대한 공부를 하게 됐는데 공부를 해 보니까 사회도 이게 아닌 거야, 이게. 야, 그러면 내가 정상으로 내 꿈이, ‘가정을 꾸려가지고 애 낳고 그냥 행복하면 살게 되겠다’ 하는 게 내 꿈이었는데, 그게 확 달아난 거지. 그니까 뭐 인혁당 사건이나 이런 걸 볼 때는 어느 날 갑자기 내가 막 빨갱이가 됐으면 바로 그냥 내가 결혼한 상태에서, 그러면 내 가족이랑 그냥 다 뿔뿔이 깨지는 거라고. 이런 상상을 해 볼 때, 그거 굉장히 산수적인 얘기 아니냐고.

그래서 내가 산수는 할 줄 아니까. ‘야, 내가 이 상태에서는 장가를 못가겠다’ 그래가지고 ‘싸우자’ 이 생각을 하고 시작을 한 건데 근데 이제 일부 언론에서는 그게 더 재밌는 거지, 국졸 화가니 뭐, 내가 그래도 중학교 중퇴인데 말이야 (웃음), 국졸 화가니 뭐 이런 자극적인 헤드라인으로나 뽑아가지고 관심 끌게 하고 신문 부수나 늘리려고, 그런다고 늘려지는지는 모르지만 (웃음) 그런 식으로 이야기들을 하고 그러는데, 실제로 최병수 그림은 최병수 보다 그림이 항상 먼저 심어 왔기 때문에 그림으로 그래도 먼저 얘기되지 않았나 생각을 해. 그니까 집회장에 그림을, 걸개를 걸어 놓는 거니까 ‘야, 저거 누가 그렸냐’ 하는 거 보다는 ‘무슨 내용의 집회인데, 그림이 나왔는데, 뭐 그렇더라’ 그거지, ‘야 저거 최병수가 그렸다’ 이거는 별로 관심이 없거든. 그렇기 때문에 내 그림은 언제나 먼저 대중들 앞에 보여지고, 나중에 가서 ‘아, 거 최병수라는 사람이 그렸다고 그러더라’ 그래서 좀 아는 기자들은 이제 그러다가 ‘아, 이 사람 국졸 화가야’ 뭐 이러고 재밌게 쓰기도 해.

그랬으니까 그래도 나는 언제나 내용이 먼저였던 거 같아. 현장 미술의 장점이 또 그거고. 전시장 미술을 하면은 뭐 막 이름 뭐 이렇게 해가지고 막 이렇게 하는데 그런 거하고 나하고는 거리가 있고.”

손수 만든 부시 가면을 가지고 석유에 대한 탐욕으로 온 세계에 전쟁을 벌이고 있는 부시를 형상화한 퍼포먼쓰 <<오일 깡패>> . (2003.03)

벌써 몇 해 전부터 이대로 가다가는 모두 죽는 길 뿐이라고 호소하고 있다. 사람들이 모인 곳으로 가서 얼음을 조각해 펭귄을 깎았다. 곧 녹아 버리고 마는 펭귄 조각들. 펭귄이 녹아 내리는 것으로 지구 온난화의 심각함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지구가 우리 것인가? (2003, 지구의 날, <<남극이 녹고 있다>>)[사진:부안 21 http://www.buan21.com]

2000년 3월 26일, 부안의 해창 마을 앞 갯벌에서 새만금 간척 사업을 반대하는 장승제가 있었다. 최병수 님은 이 때 환경단체들의 부름으로 내려가 일주일 밤을 새워 장승을 만들었다. 이 때 세운 70여개의 장승들로 해서 사람들은 해창 갯벌을 '장승벌'이라 한다. 최병수 님은 이 일을 계기로 새만금 사업으로 가장 먼저 피해를 본다는 부안군 하서면에 작업장 겸 집을 두고 살아왔다. (2003.03)


내 그림을 통해 만들고 싶은 언어

- 그 문명의 외도된 길에서 이탈하라!


아저씨 쓰러지고 이렇게 큰 수술을 받으면서 정말 많은 사람들이 걱정을 했거든요. 아저씨 식구들이나 가까운 지인들은 물론이고, 또한 그동안 아저씨의 작품을 아끼고 활동을 보배처럼 여기면서 함께 운동해온 분들 모두 얼마나 걱정이 대단했다고요. 위암이라는 선고를 받고, (“아 그런데 위를 지금 얼마나 떼어낸 거죠? 삼분의 이?”, “응, 삼분의 이.”) 그니까 위암 선고를 받아 수술을 하고 난 뒤에도 전이 여부를 묻는 검사 결과가 나올 때까지 정말 불안 불안했는데 그 동안 가장 생각나는 건 어떤 거였어요?

“응…… 전이가 됐으면 뭐 고치면 되지 않을까 이 생각을 했지 그렇게 불안하고 그러지는 않았어. 미안합니다, 불안하지 않아서. (웃음)“

아아, 아저씨 미워하는 사람들?

“어, 무슨 건설교통부나 이런 쪽 사람들, 그리고 어떻게든 새만금 갯벌을 메우려는 사람들, 그런 사람들은 ‘저거는 어떻게 위암인데도 살아났나’ 했을 거야. (웃음)”

하여간 정말로 수술 결과가 좋다 해서 얼마나 다행인지 몰라요. 아까 김환영 아저씨하고 전화하면서도 얼마나 좋아했는지 몰라요. 맨 처음 암이라 하는 얘기를 처음 들을 때, 그리고 수술을 막 하고 나서 중환자실에서 고통스러워하는 얼굴을 볼 때 그 때는 정말 말할 수 없이 막막하고 아득하고 그랬거든요. 아저씨도 수술하고 처음에는 막 아프다고 힘들어하고 그랬다면서요?

“아, 아이. 요즘 수술은, 내가 수술도 많이 받았지만은, 요즘 수술은 별로 안 아프다고 하더라고. 근데 생각보다도 이게 엄청 아픈 거야. 근데 마침 환영이가 왔길래 내가 옛날 새악도 나고, 또 엄살도 피우느냐고 ‘야, 내가 속았다, 야, 씨발 안 아프다더니 왜 이렇게 아프냐’ 그 얘길 한 거야. 그걸 가지고 환영이가 그런 거고. 아니, 뭐 실지로 뭐 수술하고 나면 다들 아픈 게 사실은 사실이니까.”

그럼요, 맹장 수술을 하느라 조금만 배를 갈라도 아픈 건데요, 그렇게 위를 다 들어내다 시피 했으니……. 하여튼 이제 앞으로 몸 잘 추스르면 좋겠고요, 어떻게 보면 정말 다시 태어난 거나 마찬가지잖아요. 물론 이라크 갔을 때도 목숨 걸고 간 거니 그 때도 다시 태어난 거고, 몇 번을 다시 태어나고 있네요. 그래서 지금 또 다시 이 병상에서 다시 태어나는 거나 마찬가지인데 지금 아저씨가 가장 간절히 바라는 게 있다면 그게 뭘까요? 다시 살게 된 생에서 아저씨가 정말 바라는, 그게 개인적인 것일 수도 있겠고, 아저씨가 해 가는 싸움 남은 생, 다시 사는 생에서 아저씨가 정말 바라는, 그게 개인적인 것일 수도 있겠고, 아저씨가 해 가는 싸움에서 평생을 걸어 꼭 하고 싶은 어떤 것일 수도 있을 거고요.

“어쨌든 문명의 혜택을 받는 인구가 지구의, 총 치면 60억이라고 그러는데, 저 아마존 오지나 아프리카 오지 같은 경우는 전기가 뭔지도 모르고 테레비도 뭔지 모르고 이런 사람들은 문명하고는 거리가 있지. 그 사람들을 빼고 만약에 50억이 문명의 혜택을 받는 사람들, 그럼 난 거 문명의 컨베이어벨트에 같이 타고 가고 있는 거라고 봐요. 근데 이제 그게 지금 나는 잘못가는 흐름이라고 하는데 그걸 큰 주제로 ‘성장한 야만’이고 ‘문명의 외도’라고 생각을 해봤어요. 설정을 해 봤어요. 그 쪽으로 지금 쭈욱 가고 있는데, 알고 있는 입장에서는, 물론 알고 있는 사람은 혼자가 아니지, 여러 반전활동가나 평화활동가나 또 생태운동가나 많은 사람들이 그 쪽 길이 아니다, 유턴 하자 하고 계속 얘기들을 외치고 있지. 그래 나도 거기에 한 입이 돼서 그 문명의 외도된 길에서 이탈하라, 그렇지 않으면 그건 죽음의 길이다, 그런 외침을 화가니까 그걸 그림을 통해서 그런 언어를 계속 만들 계획이에요.”

병실에서 최병수 님의 작품 리플렛을 보다가 물었다. "어, 저 이거는 처음보는 거 같은데요.", "그래, 이거 왜 몰라? 이거 유명한 거잖아, 지구 반지.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반지 말이야." 제목을 들으니 바로 느낌이 왔다. '정말 반지구나, 반지. 세상에 하나 뿐인 아름다운 반지!' …… "그런데 이 반지를 낄 수 있는 주인이 누구냐 말이야." 뭇 생명을 통틀어 저 반지의 주인이 될 수 없는 종은 딱 하나가 있다. 그건 바로 저토록 아름다운 지구를 망치고 파괴하고 있는 괴물, 인간이다. (1997, <<지구 반지>>)


개인적으로는 앞으로 어떻게 지내시려고 하고 있어요?

“당분간은 뭐 일단 이제, 이게 위암 수술은 최소 3년은 요양을 해야 한다고 그러는데 뭐 주변에서 걱정도 많이 해주고 그래서 그런지 빨리 낳은 거 같아요. 그래도 좀 빨리 낳아서 그림도 좀 과거보다 더 새로운 패러다임을 짜서 그림을 좀 더 많이 표현하고 싶고, 욕심이 나네, 내가. 너무 급하니까.”

그만큼 절실하고 간절해서, 계속 갈수록 더 절실해져서 그러신가 봐요. 그 욕심이 난다는 얘기가. 어, 이제 여기 오면서 꼽아본 질문은 대충 다 드렸는데요, 얘기하다 보니까 뭐 하나가 개인적으로도 궁금하고 그런데요, 아저씨가 정말 많은 작업을 했잖아요, 다양한 주제와 온갖 영역에서. 새만금에서 솟대 일도 하고, 반전 운동 관련해서 걸개나 퍼포나 뭐 이런 것도 하고, 북한산에서 농성을 하다가 다치기도 하고……. 그런 것들 중에서 아저씨가 한 작업 중에 가장 기억에 남는다거나 아저씨 스스로에게 계속 힘이 되는 것이 있다면 어떤 거예요?

"일단 어.... 거 동양화 하는 사람은 동양화만 하고, 유화를 하는 사람은 유화만 하고, 조각하는 사람은 조각만 하고 대부분이 그래. 그거를 장르를 깨거나 섞어서 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그건 별로 드물고. 그게 나는 이제 적확하게 하려고 다양하게 하는 거지, 어, 뭐 욕심을 부려서 막 하는 건 아니야.

나는 사회를 이 인체보양으로 그려가지고 사회 구성원을 인체로 보고 이렇게 하거든요, 그럼 뭐 뇌의 역할, 위의 역할, 발의 역할, 손의 역할, 피의 역할 이런 것을 이렇게 놓고 보는데 (“이 사회가 하나의 커다란 생명?”) 응, 그렇지. 그러니까 내가 적확하게 하겠다는 거는 무좀이 걸렸는데 두통약을 쓰면 소용없듯이, 그러니까 내가 적확하게 하겠다는 거는 맞는 약을 쓰겠다는 말인 거야. 거기에는 어느 게 더 좋다 나쁘다 할 수가 있는 게 아니라 지금 어떤 몸에 어떤 약을 쓰면 더 맞는가 하는 문제인 거니까. 어… 내가 소중하게 생각하는 그림은 <<장산곶매>>라는 그림인데, 그 그림은 나에게 이제 설계도면 같은 그림이지. 미래에 모습을 설정해 놓고 거기까지 가기 위해 끊임없이, 거기까지 가기 위한 어떤 설득을 시킬 수 있는 내용들을 끊임없이 만든다는 거지."

최병수 님 스스로 자신의 작업 설계 도면과 같은 작품이라고 말하는 <<장산곶매>>. 가장 소중한, 의미 있는 작품을 꼽아달라고 부탁드릴 때, 작가에게 그런 부탁이 실례일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지만 최병수 님은 주저 않고 <<장산곶매>>를 말했다. 이 작품 안에 작가가 지향하는 세상을 다 담았기에 더는 아름답고 평화로운 작품을 하지 못하고, 이 작품에서 그린 세상으로 가기 위한 싸움의 작품들을 하고 있는 거라며 말이다. (1990, 걸개그림용 밑그림 목판화)[사진: 부안21 http://www.buan21.com]


그는 벌거벗은 임금님을 벌거벗었다고 말할 뿐이다.

병수 아저씨는 벌써 몸이 근질근질한가 보다. 벌써부터, 아니 벌써가 뭐야? 중환자실에서 일반 병실로 옮기면서부터 아저씨는 어서 나가야지, 나가서 산이나 다녀야지 하는 말을 입에 달았다.

“얼른 환영이네로 가서 맑은 공기 마시면서 맨발로 산에나 오르고 그러면서 지금 내 몸에 있는 거 싹 씻어 내야지. 지금 이게 내 몸이 아니야. 맨발로 산에 다니고 그러면서 몸을 한 번 싹 씻어 내야지. 주사에, 약에 완전 화학 덩어리지, 몸이 지금 화학 투성이야.”

그 동안 병수 아저씨가 처음 피를 토하던 때부터 수술을 받고 이렇게 병원에 있는 동안 당사자인 병수 아저씨만큼이나 함께 아파하고 힘겨워하던 이가 있었다. 어린이 책 일러스트레이터 김환영 선생님이다. 두 아저씨는 어렸을 적부터 함께 자란 배꼽 동무이기도 하고, 병수 아저씨가 인터뷰 중간에 얘기한 ‘벽화를 그릴 수 있게 사다리를 짜 달라던 대학생’의 주인공이 바로 환영이 아저씨이기도 하다.

병수 아저씨는 그 때 환영이 아저씨를 비롯한 대학생 패거리가 <<남북상생도>>를 그리는 걸 돕다가 경찰에 끌려가면서 이른바 '관제 화가'라는 딱지를 얻게 되는 계기가 되어 본격적인 현장 설치 미술에 발을 담그게 되기도 했다. 병수 아저씨가 쓰러진 뒤로 환영이 아저씨는 병수 아저씨의 수술 전반의 과정부터 수술 뒤 요양에 대해서까지 자기 일보다 더한 마음을 쓰며 병수 아저씨를 살피고 있다. 둘 다 이름난 그림장이이지만 형편이 궁색한 건 어쩔 수 없다. 환영이 아저씨는 가평의 골짜기 시골에 옛 집을 얻어 살고 있는데 몇 해 전부터 개울 건너에 있는 집을 사려고 마음 먹어, 한꺼번에 값을 치루지는 못하고 조금씩 값을 내고 있었다. 그런데 그 집의 주인은 처음부터 따로 있었나 보다.

지금으로서는 병수 아저씨의 퇴원 후 요양이 무엇보다 걱정인데 환영이 아저씨는 무리를 해서 그 집을 샀고, 병수 아저씨가 들어와 살게 하느라 지금 집 수리에 한참 바쁘다. 두 아저씨는 아마 40년 전에 그랬음직한 얼굴로 둘이 같이 이웃해 살 생각으로 잃어버린 시절의 꿈을 되찾고 있는 것 같았다. 아저씨가 된 개구쟁이들, 아니 개구쟁이가 된 두 아저씨.

준비해간 질문과 답을 모두 마치고 병수 아저씨에게 물었다. 힘들었어요? 별로 힘들지 않았다 한다. 나만 힘이 들었나 보다. 인터뷰를 하기 전만 해도 나는 크게 걱정을 하지 않고 있었다. 그리 오랜 사귐이 있던 건 아니지만 그래도 병수 아저씨와 꽤 많이 친한 사이가 되었기 때문이다.

아저씨를 처음 안 게 반전평화팀으로 만난 지난 해 3월이니, 내가 아저씨를 알고 지내온 건 꼭 이라크 전쟁이 벌어지고 있는 시간 만큼이다. 인연도 참…, 첫 만남이라는 게 가면 돌아오지 못한다는 전쟁터에서였고, 그 뒤로도 아저씨를 만나는 자리는 광화문이나 시청 앞, 국회 앞, 명동성당, 평택 같은 이 전쟁의 소용돌이가 있는 자리가 거의 다였다. 그러니 우리는 그야말로 '전우(戰友)'가 되는 건가? 좀 썰렁하군.

처음에 나는 이 아저씨가 그렇게 이름난 사람이라는 걸 잘 알지 못했다. 물론 나도 <<한열이를 살려내라!>>를 알았고, <<장산곶매>>를 본 일이 있고, <<새만금의 솟대>>를 들어 알기야 하지만 그런 것들이 어느 개인의 작품이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아니 누군가 작업을 한 사람이야 있다 하더라도 그것들을 모두 어느 한 사람이 작업한 걸 거라고는 전혀 생각지 못했다.

나중에, 나중에 바그다드가 함락된 뒤 한국에 돌아와서야 알았다. 이 아저씨 대단한 분이었구나, 한국에서 뿐 아니라 외국에서는 더 많이 유명한 사람. 우와아 했다. 그러면서 비로소그러면서 비로소 아저씨가 해온 작품, 활동들에 대해서도 자세히 알게 되었다. 게다가 내가 평소 아주 잘 따르며 친하게 지내던 환영이 아저씨하고 배꼽 동무 사이이기도 해서 나는 '현장 미술가 최병수'가 아니라 '고집불통 최병수'의 이야기도 많이 들었고, '사회면 작가 최병수'가 아닌 '어린 시절 최병수' 이야기를 듣곤 했다.(물론 언제나 그렇듯 야사와 뒷담화는 더욱 재미있는 법이다.)

그리고 지금 나는 그럴 수 있었던 것을 아주 다행이라 생각한다. 내가 만약 병수 아저씨를 ‘사람’으로 만나지 못했고, ‘인격’으로 알게 되는 과정이 없었더라면 어쩌면 나는 '최병수'라는 잘못 이해해도 한참 잘못 알았을 것 같다. '어떤 의식으로만 뭉쳐 있는 사람' 정도로 여기며 말이다. 뭐랄까 '생명을 주제로 삼지만 인간의 내음이 별로 느껴지지 않는 사람', '생태와 환경을 고민하지만 자연의 품을 느낄 수 없는 사람'이라 느끼지 않았을까 싶은 거다. 어떤 불굴의 의지나 신념만 단단하게 있는 사람으로.

시간이 갈수록 들어오던 생각이기도 했지만 요사이에 나는 ‘신념’이라는 것과 ‘순정’이라는 것을 더욱 자주 생각하곤 했다. ‘신념’을 어떤 의식의 작용이라 한다면 ‘순정’은 그에 견주어 태도의 문제다. 자신을 되돌아보는, 자신의 둘레에 대한 사람들을 바라보는, 그리고 자연이나 세상에 대해 자신을 관계 맺는 기본 태도 같은 것. 아니, 다른 식으로 다시 풀어 말하면 ‘개인으로든, 집단으로든, 또는 관념으로든 어떤 욕심도 끼어들지 않은 상태’라고 말하면 풀이가 좀 더 비슷한 것 같다. 어쨌든 나는 요즘 ‘순정’이 빠진 상태에서 갖는 ‘신념’이라는 게 얼마나 위험한지 하는 생각을 하곤 했다.

오히려 그런 상태에서의 신념이란 강하면 강할수록 무섭고 위험한 것이 된다는 것을 말이다. 그건 비단 보수 우익들이 가진 신념에만 해당하는 문제가 아니라 이른바 진보나 개혁의 길 위에 있는 이들에게도 마찬가지일 거라 생각하며 말이다.

병수 아저씨는 특유의 그 빡빡머리부터 해서 눈빛, 말투, 가무잡잡한 살갗에 골격과 옷차림까지 전반적으로 아주 단단한 느낌을 준다. 게다가 작품들은 또 어떤가? 도무지 외면할 수 없게 하는 힘, 그리고 그 작품을 보고 있으면 발바닥에서부터 온 몸을 통째로 흔들어 놓는다. <<한열이를 살려내라!>에서부터 김선일 씨의 모습을 담은 <<살고 싶다!>>까지 작품 하나 하나가 모두 그렇다. 어디 그런 걸개 그림만 그런가? 새만금에 세운 백 개 가까운 솟대부터 얼음 펭귄 조각을 하는 퍼포먼스까지 아저씨의 작품들은 작업 자체가 아주 힘겨운 노동이고, 한계에 대한 싸움이다.

그 작업의 양은 또 얼마나 엄청난지 모른다. (그러니 몸이 배겨 날 텐가? 생각해 보니 아저씨가 배를 잡고 아픈 걸 참는 모습을 본 게 한두 번이 아니었다. 최초 요르단에서 쓰러진 건 벌써 몇 차례 얘기한 거였고, 올 5월 평택 평화축제 때에도 1박 2일 행사를 하는 내내 배가 아프다면서 얼굴을 찡그리고 다녔다. 그리고 6월 광화문에서 날마다 촛불 집회를 나가던 때에도 아저씨는 늘 한 쪽 손으로 배를 틀어잡고 다녔다. 그게 다 암 세포가 1기에서 2기로, 2기에서 3기로 번지던 때였겠지? 이제 와 돌이켜보니 나는 한 번도 아저씨에게 병원에 가보라는 말을 못해드린 것 같다.)

병수 아저씨는 흔히 말하는 '강골'임이 확실하다. 아주 단단하고 고집스럽다. 하지만 아저씨가 가진 단단함이나 고집스러움이 그 어떤 욕심에서 비롯하는 게 아니라는 걸 점점 더 가까이 알아 가고 있다. 아저씨는 신기할 정도로 아이 같다. 귀여움이나 철없음, 또는 순진함이나 유치함 같은 걸 지닌 사람들에게 말하는 그런 아이다움이 아니다. 아저씨는 세상의 더러움을 겪을 만큼 겪었고, 온갖 거친 싸움 또한 지겹도록 겪었다. 그렇다고 그 싸움이라는 게 대의명분을 논하는 이른바 운동판의 싸움만 말하는 건 아니다.

삶의 어느 구석에서 튀어 나올지 모르는 온갖 치사하고 비열함이 난무하는 생활 현장의 싸움. 그런데도 아저씨는 신기할 정도로 순정 하나 만큼은 때를 묻히지 않고 지니고 있다. 솔직히 말해서 아저씨가 무슨 말을 잘 하기를 하나, 아니면 무슨 책을 많이 읽기라도 했나? 하지만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아저씨는 언제나 그것의 근본이나 본질의 문제를 정확히 짚어 얘기한다.

오히려 논리가 복잡해서 고려할 게 많은 사람들, 공부가 많아서 따질 것이 많은 사람들하고 얘기를 나누다 보면 더 답답해지기만 하던 것들도 아저씨하고 얘기하다 보면 그게 환하게 열리는 것 같다. 여기에 아저씨의 '단단함'과 '고집스러움'의 비밀이 있다. 마치 벌거벗은 임금님을 보고 "임금님이 벌거벗었다!" 하고 말하는 게 너무 당연한 아이처럼 아저씨는 우리 사회의 '벌거벗은' 자리들을 볼 때마다 본 그대로, 있는 그대로 말을 하고 있는 것일 뿐이다. 아저씨의 눈에는 훤히 보이거든.

이대로 살아서는 모두 죽음의 길로 갈 거라는 게 훤히 보이고, 문명이 성장하고 있다 하는 세상이라지만 사실은 '야만의 성장'에 다르지 않다는 게 뻔히 보이는 것이다. 아저씨는 그저 본 대로 벌거벗었다고 애기할 뿐이다. 죽음의 길로 간다고 얘기할 뿐이고, 이것은 문명이 아니라 야만이라고 얘기하는 것 뿐이다. 이한열 열사의 죽음 앞에서, 김선일 씨 죽음 앞에서 다른 말이 더 필요없었다.

"한열이를 살려내라!", "살고 싶다!" 그건 우리 모두의 마음을 정확히 대신해 주는 말이었다. 아저씨는 장승 작품을 남기고 싶은 게 아니라 새만금을 지키고 싶은 거였고, 아저씨는 펭귄 조각을 깎아서 어떻게 기록 되기를 바라는 게 아니라 지구의 온도가 높아지고 있다는 걸 어떻게든 더 많은 사람들에게 호소하고 싶었을 뿐이다. 아저씨가 도전한 건 작품의 한계가 아니라 우리 삶을 파괴하는 것들에 대한 싸움의 한계였다. 아저씨의 '신념'은 그대로 '순정'에서 비롯하고 있었다.

병수 아저씨와 만나 이야기를 나눈 것은 내가 앞으로 두어달 동안 '부시, 블레어, 노무현을 전범으로 민중법정에 올리기 위한 민중재판'의 기소장을 받는 릴레이 인터뷰의 첫번 째 순서였다. 생각하기로는 그대로 가장 편안하게 만날 수 있고, 가장 쉽게 정리할 수 있을 것 같았는데 막상 녹음 테이프를 몇 차례나 되감고, 되감다 보니까 그게 아니었다.

솔직히 더욱 부담스러운 건 아저씨와 나눈 이야기가 별 것 아니어서 더 그랬다. 아저씨도 그렇지만 나도 엄청나게 말을 못하기는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내가 가진 식견의 깊이나 폭은 너무나도 좁고 얕다. 하지만 둘 다 어눌하게, 띄엄띄엄 이어가는 이야기 속에서 이미 서로 하고 싶은 말은 충분히 다 되고 있다는 것 또한 알았다. 아저씨와 나는 바그다드와 암만을 기억하며 그곳에서 만난 선한 얼굴의 사람들 모습 위로 이 전쟁을 생각했다. 국회 앞과 시청 광장, 그리고 광화문과 평택을 떠올리며 그 숨가쁘던 때로 돌아갔다. 그리고 아저씨가 말하는 생명, 지구 생태와 전쟁…….

이 글을 정리하면서 아저씨의 작품들을 찾아 볼 수 있는대로 다시 다 살폈다. 그리고 작품을 들여다보면서 아저씨와 못다한 대화를 더 길게 나누었다. 나로서는 힘들기도 했지만 무척 좋은 시간이었다. 아저씨는 전범 민중재판에 기소장으로 <<야만의 둥지>>와 <<너의 몸이 꽃이 되어>>, <메두사 부시>>, <살고 싶다!>>, <<생명 그리고 평화>>를 그림 기소장으로 함께 내 주었다.

순정을 가진 사람들이 이렇게 절실함으로 다시금 힘을 모으고 있다. 오늘(2004.10.12) 신문을 보니 '알 마스리 순교자'라는 이슬람 무장 단체가 14일까지 한국군 철수를 하라고, 하지 않으면 자이툰 부대와 한국 시설물에 테러를 할 거라고 경고했다고 한다. 이 나라는 언제까지 우리를 배반할 것인가? 언제까지 우리 목숨을 버릴 것인가? 모쪼록 하루라도 빨리 철군을 이룰 수 있기를 바란다. 아직 몸이 많이 불편하지만 인터뷰에 흔쾌히 응해준 병수 아저씨께 다시 한 번 감사를 드린다. 무엇보다 힘든 병과 잘 싸워주어 얼마나 고마운지 모른다. 아저씨는 아직 우리 곁에 있어야 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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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기범 , 전범민중재판 , 최병수 , 기소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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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미희

    최병수님!!부디 빨리 일어나셔서 같이 활동하길 바랍니다.

  • 이미희

    최병수님!!부디 빨리 일어나셔서 같이 활동하길 바랍니다.

  • likebau

    그 그림을 그린 분이군요. 빠른 괘유 바랍니다.

  • likebau

    그 그림을 그린 분이군요. 빠른 괘유 바랍니다.

  • 삐딱이

    민족예술 월간지에서 당신을 처음 알게 되었습니다. 그 때가 2000년 정도 되나요 새만금 장승제를 위해 장승 제작하는 당신을 보게 되었죠 그리고 얼마전 그 곳을 지나다가 장승은 겨울 바람에도 춥지도 않으지 우두커니 새만금을 지키고 있더라구요
    그러면서 당신이 까까머리를 하고 전기톱을 두손에 들고 불도저처럼 거칠게 뭔가를 만드는 사진 한 컷이 뇌리를 스치고 지나가더라구요
    그리고 지금 친구가 보내준 메일을 통해서 당신의 소식을 접하게 됩니다.

    선생님의 장산 곶매의 깊이를 알수 없는 세상에서 처럼 우리 또는 저와 같은 사람들은 당신의 세상을 동경하며 그리워 할 것 입니다.
    그리고 그 세상이 그림에서만 존재하는 세상이 아닌 현실과 소통을 가능케하는 다리가 될것입니다. 그것은 당신이 존재하여기에 가능한 일입니다.

    선생님의 건안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 삐딱이

    민족예술 월간지에서 당신을 처음 알게 되었습니다. 그 때가 2000년 정도 되나요 새만금 장승제를 위해 장승 제작하는 당신을 보게 되었죠 그리고 얼마전 그 곳을 지나다가 장승은 겨울 바람에도 춥지도 않으지 우두커니 새만금을 지키고 있더라구요
    그러면서 당신이 까까머리를 하고 전기톱을 두손에 들고 불도저처럼 거칠게 뭔가를 만드는 사진 한 컷이 뇌리를 스치고 지나가더라구요
    그리고 지금 친구가 보내준 메일을 통해서 당신의 소식을 접하게 됩니다.

    선생님의 장산 곶매의 깊이를 알수 없는 세상에서 처럼 우리 또는 저와 같은 사람들은 당신의 세상을 동경하며 그리워 할 것 입니다.
    그리고 그 세상이 그림에서만 존재하는 세상이 아닌 현실과 소통을 가능케하는 다리가 될것입니다. 그것은 당신이 존재하여기에 가능한 일입니다.

    선생님의 건안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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