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회에는 모처럼 전공 학회에 다녀온 기념으로(?) 역학 이야기를 해볼까 한다. 같은 전공의 친구 하나는 "도를 아십니까?"라며 접근한 지하철 도인(道人)에게 "제 전공이 바로 역학입니다"하고 정중하게 답을 해서 줄행랑을 치게 만들었는데, 사실 우리 전공은 易學이 아니고 疫學이다. 건강과 질병의 분포, 원인들을 규명하고 이를 토대로 예방 전략을 개발하는 학문!!! (너무 교과서스러운 표현이로군).
흔히 질병의 원인이라면 우리는 특정한 세균이나 바이러스를 떠올린다. 식중독의 원인은 포도알균, 독감의 원인은 인플루엔자 바이러스... 물론 흡연이나 동물성 지방 섭취, 운동 부족 같은 생활 습관이 심장병과 암 같은 만성질환의 원인이라는 것도 잘 알려져 있다.
하지만, 여기에서 한 가지 유념할 부분이 있으니, 이러한 질병의 원인이나 결과가 모든 사람들 사이에 고르게 나타나지는 않는다는 점이다. 남자나 여자나, 돈 많은 사람이나 가난한 사람이나, 백인이나 흑인이나 똑같은 확률로 병에 걸리지는 않는다는 소리다. [잘 먹고 잘 사는 법] 같은 TV 프로그램에서 몸에 좋다는 걸 백날 가르쳐 준다 한들, 유기농 현미 사 먹으려면 돈이 들고, 신 새벽에 나가 오밤중에 퇴근하는 사람들에게 하루 30분 이상 유산소 운동을 하라는 건 거의 미션 임파서블이다.
사회 불평등은 우리 몸 밖에서만 작동하는 게 아니다. 우리 몸은 부모님으로부터 물려받은 개인적인 자산일 뿐 아니라, 역사의 궤적과 사회적 질서를 반영하는 거울이기도 하다. 오늘은 건강 불평등이라는 주제로 미국 사회를 들여다보고자 한다.
다른 국민, 다른 건강 수준
지난 회에도 잠깐 언급했지만, 세계 최고(?) 선진국 미국은 엄청난 보건의료비 지출에도 불구하고 평균 수명이나 영아 사망률 등으로 비교한 건강 순위는 그다지 높은 편이 아니다. 그 이유 중 하나는 흑인들이 국가 평균을 확 깎아먹고 있기 때문이다. 과연 어느 정도나? 2000년 현재, 평균 수명을 살펴보면 남성 74세, 여성 79세로 세계 최고 수준은 아니지만 그럭저럭 평균 이상을 보이고 있다 (물론 OECD 국가들 중에서는 바닥!). 그런데 이를 인종 별로 나누어 살펴보면? 남성의 경우, 백인 75세, 흑인 68세. 여성은 백인 80세, 흑인 75세. 즉 흑인 남녀의 평균 수명이 백인에 비해 각각 7년, 5년 씩 짧다. 이러한 흑인의 평균 수명은 1인당 소득이 4300불에 불과한 수리남과 비슷한 수준이고, 5500불인 도미니카 공화국보다는 약간 낮다. 심지어 수도 워싱턴이 위치한 DC (컬럼비아 특별구)에서 흑인 남성의 평균 수명은 58세밖에 안 되니, 이 정도면 가나, 방글라데시 등과 자웅을 겨룰 만 하다. 흑/백간의 평균 수명 격차는 미국 내에서도 워낙 잘 알려진 것이라, 심지어 부시도(!) 알고 있다. 지난 1월, 부시는 흑인 지도자(?)들을 모셔다 놓고 사회보장 사유화 지지를 부탁하는 자리에서 희한한 궤변을 늘어놓았으니, 흑인들의 평균 수명이 짧기 때문에 사회보장 혜택을 받는 기간이 백인보다 짧으니까 개인구좌 중심으로 사유화하는 게 흑인들에게 훨씬 이득이 된다는 망언을 한 것이다. (빈축을 산 것은 말할 것도 없다. http://blog.jinbo.net/hongsili/?cid=5&pid=94 참조)
그렇다면 평균 수명이 왜 이렇게 차이가 나는 것일까?
우선 가장 중요한 이유로 영아 사망률의 차이를 들 수 있다. 미국의 영아 사망률은 출생아 1천 명 당 7.1명으로 1인당 국민 소득 3천불에 불과한 쿠바보다도 높다. 이를 인종 별로 나누어 보면, 흑인의 영아 사망률은 13.9로 백인의 5.9에 비해 두 배가 훨씬 넘고, 심지어 일리노이 주 같은 곳은 16.9나 된다. 실제로, 흑/백 어린이간의 영아 사망률 격차는 80년대 이후로 계속 증가 일로에 있다. 어디 이 뿐이랴? 심장병과 당뇨, 암, 중독과 손상 등 대부분의 질환에서도 흑/백 인종간의 유병률, 사망률 차이는 뚜렷이 관찰되고 있다.평균수명, 영아사망률
* 평균 수명 : 출생 시의 기대 여명(life expectancy)으로, 현재의 연령대별 사망률을 이용해 산출한 일종의 가상 지표로서 한 국가의 건강 수준을 종합적으로 보여주기 때문에 국가간 비교에 널리 쓰인다. 평균 수명이 70세라고 해서 지금 69세 노인들이 평균적으로 1년 밖에 더 못 살 것이라는 뜻이 절대(!) 아님.
* 영아 사망률 : 출생아 1천 명 당 만 1세 이전에 사망하는 아기의 숫자. 역시 한 국가의 보건 수준을 종합적으로 반영하는 지표로, 국가간 비교에 널리 쓰임. 한국의 영아 사망률은 약 7/1000
사회적 불평등, 그리고 차별
그동안의 연구들은 통계적인 보정을 통해서 이러한 격차의 상당 부분이 흑/백인종 간의 사회경제적 격차에서 비롯되고 있음을 보여주었다. 사회경제적 격차라면 과연 어느 정도? 이를테면 백인의 소득 중앙값 (median)은 4만 5천불인데 비해 흑인은 약 3만 불에 불과하며 (2001년 기준) 빈곤 가구의 비율은 백인 가구가 10% 내외인 반면, 흑인 가구는 22%에 이른다(2000년). 인구 구성비로 보자면 흑인이 전체 미국 인구의 13%를 차지하고 있지만, 의사 혹은 판사/변호사 등의 직업에서 흑인이 차지하는 비율은 겨우 5% 정도에 불과하다. 또한 흑인의 실업률은 백인의 두 배를 웃돈다. 의료보험? 전체 백인 중 11.1%가 의료보험이 없는 데 비해 흑인은 19.4%가 보험이 없다. 의료 이용의 인종 차이를 비교한 연구들을 종합한 보고서 (Kaiser Family Foundation 2002)에 따르면, 대부분의 연구들은 흑인이 백인에 비해 진단 검사나 심혈관성형술 같은 고가 치료를 받을 가능성이 적다고 보고했다.
흑인들은 사는 동네도 다르다. 일전에 미시건 대학에 재직하는 저명한 사회학 교수의 특강에 참석한 적이 있는데, 법으로 인종 간 주거 분리를 강제했던 남아공의 악명 높은 아파르트헤이트 정책보다, 이를 불법으로 금지하고 있는 미국에서 주거 분리가 더 성공(?)적이라고 지적했다. 미국의 지역 간 격차는 상상 초월인데, 일례로 출장 차 방문했던 매사추세츠 서부 지역의 학교 건강증진 프로그램 담당자는, 영양 교육 시간이면 실제 과일을 가져가서 아이들에게 꼭 보여준다고 했다. 왜? 가난한 동네일수록 슈퍼마켓이 없는 경우가 많고, 있다한들 정크 푸드나 통조림, 주스 등 가공 식품만 팔기 때문에 아이들이 진짜 과일을 보지 못한 경우도 있어서란다. 21세기 미국에서 이 무슨 황당한....
하지만 이게 다는 아니다. 소득이나 직업, 교육 수준들을 보정해도 흑/백의 건강 격차는 여전히 남는 것이 보통이다. 예를 들면, 똑같은 소득 혹은 교육 수준의 흑/백 산모를 비교해도 영아 사망률의 차이는 여전히 지속된다. 인종 간의 차이는 사회경제적 지위 차이만으로 설명되지 않는다. 똑같은 학위를 가지고 있어도 흑/백인이 벌어들이는 소득에는 차이가 난다. 3년 전, 시카고 대학과 MIT 대학 연구팀은 지역 신문에 난 구인광고를 토대로 1300여 곳의 회사에 가상의 이력서 5천장을 보냈다. 이들의 이력서에 표시된 학력/경력 수준은 모두 같고 단지 이름만 다르게. 백인에게 흔한 이름(예, 크리스틴, 캐리)과 흑인에게 흔한 이름(예, 케냐, 타미카)으로.... 그랬더니만 백인 이름을 가진 이력서에는 10.3%의 면접 요청이 들어왔고 흑인 이름의 이력서에는 6.9%만이 응답이 왔더라는 것이다. 법적으로는 차별을 엄격하게 금지하고 있지만, 현실은 그와 다르다. 1990년도 일반사회조사에 따르면, 백인 응답자의 56%가 "흑인들은 정부 보조금으로 살아가는 것을 더 좋아한다"는 문장에 그렇다고 답했고, 44%가 "흑인들은 게으르다"에 동의했다.
좀더 충격적인 결과도 있다. 현재 18-24세 흑인 남성의 25%는 대학생이고 10.5%는 감옥에 있다. 흑인이 미국 인구의 13%를 차지하고 있는데 비해, 주 교도소 수감자의 46%가 흑인이다. 흑인 남성의 17%는 평생 한 번 이상 교도소에 수감된 경험이 있다. 흑인이 그만큼 범죄를 많이 저질렀으니까? 하지만, 1999년의 조사에 의하면, 미국 전체 마약 사용자의 13%가 흑인인데 비해 마약 혐의로 체포되는 사람의 37%, 유죄 판결을 받는 사람의 55%가 흑인이고, 실제 징역을 선고 받는 경우의 74%가 흑인인 것으로 나타났다. 사법제도의 불공정함은 여기에서 끝나지 않는다. 미국의 많은 주들이 범법자들에 대해 투표권을 박탈하는 제도를 가지고 있어서, 그 결과 현재 흑인 남성의 13%가 투표권이 없으며 플로리다 같은 주에서는 세 명당 한 명꼴로 투표권이 없다.
궁금하면 유전자에게 물어보세요.
상황이 이 정도 되니, 흑인의 건강 수준이 좋다고 하면 그게 오히려 이상할 지경이다. 그런데, 요즘 미국 의학계는 유전체 연구의 붐과 함께 인종 간의 유전적 차이를 찾는데 혈안이 되어 있다. 흑인과 백인의 건강 격차가 그 어떤 (아직 하나도 밝혀내지 못한!) 유전자 때문에 일어난다는 것이다. 그 중에서도 군계일학은, 지난 봄 대박을 터뜨린 일명 소금 유전자 학설이다. 현재 미국 흑인의 고혈압 유병률은 백인보다 높은 것은 물론, 그 조상 격인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인들보다 훨씬 높은데, 여기에 우리 몸의 소금(정확하게는 소디움 Na. 콩팥에서 소디움 배출을 줄이면 그와 함께 우리 몸의 수분도 보존이 되고 과다한 염분/수분의 유지는 고혈압 발생의 한 가지 기전으로 알려져 있음)을 보유하는 유전자가 그 원인이라는 것이다.
즉, 아프리카에서 미국까지 노예로 팔려올 때 배 안에서 땀과 잦은 설사병, 그리고 배 멀미 구토 때문에 탈수가 되어 미처 신대륙에 도착하기도 전에 상당수가 죽었는데, 그들 중 일부는 (우연히) 소금 보유 유전자를 가지고 있었고 그 덕분에 탈수가 덜 일어나 무사히(?) 노예로 팔릴 수 있었다는 이야기. 이렇게 살아남은 생존자들의 후손이 지금 미국 흑인의 다수를 이루고, 옛날 그 노예선과는 달리 소금이 풍족한 환경 속에서 소금을 보유하는 그들의 유전자는 오히려 고혈압의 주범으로 기능하게 되었다는 설명이다.
하지만, 이 가설을 입증할만한 역학적 근거는 제시되지 않았고, 더구나 바로 그 핵심이라 할 수 있는 소금 보유 유전자는 아직 후보 물질조차 확인되지 않았다. 하지만 그게 무슨 대수인가? 일간지, 주간지는 물론 웬만한 학술지에 이르기까지 이제야 흑인 고혈압 문제의 비밀을 풀었다고 모두들 난리법석을 떨어댔으니...
지난달에는 '흑인을 위한' 심부전 치료제라는 바이딜 (BiDil)이 미국 식품의약안전청의 승인을 받았고 최초의 "ethnic drug"라고 또 한바탕 난리굿이 벌어졌었다. 흑인은 백인에 비해 심부전으로 인한 사망률이 월등하게 높고 그동안 치료 약물에 잘 반응하지 않았었는데, 바이딜은 '자칭' 흑인들을 대상으로 한 임상 시험에서 우수한 효과를 가진 것으로 보고되었다. 하지만, 일반적 통념과 달리, 생물학적으로 "순수" 인종을 구분할 수 있는 유전자나 객관적 지표는 존재하지 않는다. 피부색이나 외양은 차이가 있어 보여도, 막상 유전적 구성을 보면 인종을 구분할 만한 특정한 차이를 발견하기 어렵다. 오히려 인종이란 생물학적이라기보다 사회적 개념이라는 것이 사회 역학계의 정설이다.
이를테면 미국 사회에는 "한 방울의 법칙 (one drop rule)"이라는, 아프리카인의 피가 단 한 방울이라도 섞이면 흑인으로 분류해야 한다는 노예법령을 가지고 있었다. 이런 점에서, 이 임상시험에 참가한 흑인들이 생물학적으로 단일한 유전적 특성을 가진 집단이라는 근거도 없을 뿐더러, 그동안의 다른 임상시험 결과들을 살펴보면 약물 반응에서 흑인과 백인이 보이는 차이만큼이나 흑인과 흑인 사이의 개인 차이가 크다는 점이 밝혀져 있다. 더구나 이 약제가 흑인에게만 있는 어떤 특이한 수용체와 결합하거나 생화학적 작용을 갖는지도 아직 밝혀지지 않았다. 흑인을 위한 "맞춤" 약제라는 표현은 사실 어불성설인 것이다. 이래저래 격렬한 학술적 논쟁이 벌어졌지만, 약은 승인되고 언론의 열화와 같은 지지가 이어졌으니...
▲ 최초의 흑인 전용 심부전 치료제- 바이딜 (BiDil) 소개 페이지 |
맺음말
지금 미국 사회에서 인종간의 불평등 - 특히 건강 - 문제는 두 가지 측면에서 큰 고비를 맞고 있다. 하나는 전례 없는 사회경제적 불평등의 심화와 그에 따른 소수 인종들의 주변화, 고통의 증대, 그리고 이로 인한 건강 악영향. 두 번째는 유전체 연구의 발달에 힘입은 생물학적 환원주의의 득세와 이러한 연구 결과가 가져올 이데올로기 (사회 환경이 문제가 아니라 그들의 유전자가 문제다!)가 그것이다.
사회 역학자들이 인종 개념을 중요하게 다루는 것은 그것의 생물학적 의미 때문이 아니라 사회적/역사적으로 정의된, 구조적인 억압과 불평등의 산물이라고 여기기 때문이다. 4백여 년 시련의 역사, 현재도 진행 중인 사회 불평등은 이들의 몸에 고스란히 흔적을 남겨왔다. 불안이 영혼을 잠식한다면, 억압과 착취, 불평등과 차별은 그들의 몸을 병들게 한 것이다.
그런데 왜 미국을 들여다보면서 거울을 보는 듯한 느낌이 드는 걸까? 사회 양극화, 소수자에 대한 억압과 차별, 그리고 유전자 만능주의까지....
▲ 지난 가을, 버몬트 주의 유명한 골동품 벼룩시장에서 보았던 유일한(!) 흑인 인형. 나머지 수천 개의 인형들은 모두 옆과 같은 백인 공주, 왕자, 천사, 귀족 아가씨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