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평] 또다시 노동자 협박하는 8.15 경축사

'분열' 주체가 '통합' 강조하는 허위의 광복 60주년

노무현 대통령은 15일 열린 제60주년 광복절 경축사를 통해 다시 한 번 '국민통합'을 강조했다. A4지 6장 분량의 경축사는 '국민통합'이라는 큰 의제를 두고 △역사에 대한 반성과 교훈을 바탕으로 과거사 정리 △사회 분열구조의 하나인 지역구도 해소를 위한 선거구제 개편 △양극화 해소를 위한 정부, 기업, 노동조합 등 경제주체의 역할 등을 핵심으로 다루었다. 여기서 노무현 대통령은 우리 사회가 겪고 있는 분열의 요인을 △역사로부터 물려받은 분열의 상처 △정치 과정에서 생긴 분열의 구조 △경제적 사회적 불균형과 격차로부터 생길지도 모르는 분열의 우려 등 세 가지를 들었다.

역사로부터 물려받은 분열의 상처는 "친일과 항일, 좌익과 우익, 그리고 독재시대의 억압과 저항의 과정에서 비롯된 것"으로 "이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그 시대 역사에 대한 올바른 정리와 청산이 이루어져야" 한다고 정리했다. 정치 과정에서 생긴 분열 구조는 "지역구도와 대결적 정치문화"를 들었고, 이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선거구제가 반드시 개편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경제적 사회적 불균형과 격차에 따른 분열에 대해서는 정부가 사회안정망 확충, 긴급 지원 확대, 일자리 제공, 인재 양성을 위해 노력하고, 기업은 연구개발 투자, 정규직을 늘리고 경력자를 활용하는 경영 전략, 노동조합은 대기업 노동조합의 기득권 포기와 해고의 유연성 수용으로 기업과의 대타협 등을 통해 극복하자고 종용했다. 그리고 모두에게 '대화와 타협' '양보와 협력'을 위한 결단을 촉구하는 것으로 마무리 하였다.

우선 역사로부터 물려받은 분열의 상처 극복에 대한 의지 천명은 그 자체로 중요한 문제이다. 친일과 항일, 좌익과 우익, 독재와 반독재의 과정에서 희생된 역사에 대해 새롭게 평가하고 보상하는 일은 시급히 이루어져야 한다. 배상과 보상에 대해 민형사상 시효 적용을 배제하거나 조정하는 법률 제정을 언급한 대목도 긍정적이다. 그러나 과거사에 대한 분열의 극복은 명예 회복과 배상과 보상의 문제를 넘어 친일과 우익과 독재의 편에서 기득권을 누려온 세력에 대한 역사적 심판을 분명히 하는 것이어야 한다. 광복60년을 맞는 지금도, 친일과 우익과 독재를 했던 양아치들이 지배세력의 다수를 점하고 있다는 사실을 한시도 잊지 않아야 한다.

한편 노무현 대통령은 역사로부터 물려받은 가장 큰 분열의 상처인 X파일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았다. 청산해야 할 과거사는 일제 식민지와 독재 시대의 유산만이 아니다. X파일에서 폭로된 정경언검의 검은 지배사슬은 과거사 그 어느 때보다도 심각한 '분열의 상처'를 보여주고 있다. 신자유주의를 지배 이데올로기로 삼아 유혈 구조조정을 강행하고, 초국적자본의 자유로운 이동을 보장하고, 경쟁과 효율의 강요로 민중의 삶의 기반을 뒤흔들어놓은 지난 10여 년, 사회구성원의 삶을 감시하고, 호흡을 통제하고, 생활을 장악해온 지배구조, 그 왜곡 굴절된 신자유주의 지배세력의 횡포야말로 청산해야할 가장 중대한 과거사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정치 과정에서 생긴 분열의 구조'에 있어 노무현 대통령은 "정당이 이념과 정책이 아니라 지역으로 나뉘어져 있으니 국회가 정책 토론장이 아닌 감정대결의 장"이 되어버린다며 지역 구도 극복에 대한 강한 의지를 피력했다. '지역구도와 대결적 정치문화'가 민주주의 발전을 저해하고 끊임없이 분열과 대립을 조장한다는 주장이다.

그런데 지역구도가 분열의 구조라는 지적은 오늘날 신자유주의정치가 갖는 불안정성과 정치위기의 본질을 호도하고 있다. 노무현정권이 말하는 지역구도 극복을 위한 선거제도는 지금까지 알려진 대로라면 중대선거구제로의 재편이나 이원집정부제와 내각제 따위를 들 수 있다. 하지만 석패율제 고려 여부를 포함한 중대선거구제는 국회의원의 출신 지역 구도 변화를 유도할 지는 몰라도 신자유주의 지배연합을 재생산한다는 점에서 본질이 바뀌지 않을 것이다. 더군다나 비례대표제의 획기적 도입이 없다면 현재 다수를 점하고 있는 지배세력에게만 유리한 여건을 제공하게 될 것이다. 또한 이원집정부제나 내각제는 현재의 힘 관계로 미루어 볼 때 보수와 개혁세력의 지배연합을 체제내화 하는 성격이 강하다. 선거제도의 변화가 곧 지역구도로 인해 생기는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라면 그에 걸맞은 방안을 제시해야 할텐데 노무현 대통령은 이 방안에 대해서는 일언반구하지 않았다.

따라서 "합리적인 국정운영을 불가능하게" 하는 지역구도 극복 처방 호소의 주된 관심사가 지역주의 해소 그 자체에 있지 않다는 것이 확인된다. 노무현 대통령은 '지역구도 극복'을 신자유주의 지배연합의 새로운 틀을 짜는 데 활용하고 있으며, 동시에 정권의 지지 기반을 넓히기 위한 정세적인 의제 설정 소재로 삼고 있다는 점을 간과하지 않아야 한다.

'국민통합'의 마지막 칼날은 역시 노동자를 향했다. 노무현 대통령은 우리 사회가 안고 있는 가장 큰 위협인 양극화에 대해 인지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처방에 있어 노동자를 공격하는 기조는 조금도 바꾸지 않았다. 노무현 대통령은 기업에게는 연구개발 투자와 내수 기반을 키워 일자리를 늘리라고 권유하는 대신, 대기업 노동자에게는 "기득권을 포기하는 과감한 결단"을, 노동조합에게는 "해고의 유연성"을 열라고 강요했다. 그 대신 "정부와 기업은 정규직 채용을 늘리고 다양한 고용기회를 만들어주는 대타협"을 할 테니 이를 통해 '국민통합'을 이루자는 이야기다.

대기업이 사상 최대의 수익으로 넘쳐나는 현금을 보유하고 투자처를 찾지 못해 장롱 속에 쟁여둔 마당에 대기업 노동자의 기득권을 거론하고, 더 이상 물러설 곳 없는 노동조합 한테 해고의 유연성을 공공연히 강조하는 데서, 국민통합을 강조하는 광복 60주년, 노동자가 설 자리는 없다는 것이 확인되었다. 이로 미루어 하반기에도 중단된 비정규법안 처리를 강행하고, 로드맵 입법 추진도 중단하지 않을 것임을 예상케 한다. 노동유연화의 강조는 사회적 빈곤으로 이어지고 사회적 빈곤은 다시 양극화를 추동한다. '대기업 노동자 기득권 포기'와 '노동조합 해고의 유연성' 제기가 곧 양극화와 사회 모순의 심화로 연결된다는 것을 모르지 않을 테고, 대립 대결과 분열을 가속화하는 원인이 될 텐데, 여기서 도대체 어떤 통합이 가능하다는 것인지 알 수 없는 노릇이다.

광복 60주년 경축사의 키워드는 '결단'이었다. 정치인은 기득권을 포기하는 결단을, 노동조합도 결단을, 국민 모두도 국민통합을 위해 결단하자고 한다. 모름지기 민중은 무엇이든 때가 무르익고 방향이 보이면 결단하는 데 망설이지 않는다. 그러하니 노무현 대통령은 제발 "분열의 역사에 종지부를 찍고 국민통합의 시대를 여는" 최소한의 방법을 제시하라. 더이상 '대화와 타협', '양보와 협력'만 강요하지 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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