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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민이 된다는 것과 난민으로 산다는 것

[해방을향한인티파다](27) - 발라타 난민촌에서 아부 무사브 씨를 만나

난민, 제가 국제문제에 관심을 가지면서 계속해서 들어왔던 말입니다. 오늘은 팔레스타인에서도 커다란 난민촌인 나블루스에 있는 발라타 난민촌을 찾았습니다.


우리가 흔히 난민촌하면 텐트를 치고 살고 뭐 그럴 것 같지만 팔레스타인에 있는 난민촌들은 그런 형편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난민이 된지 너무 오래 되었으니깐요.


여기에는 크게 두 종류의 난민이 있습니다. 하나는 1948년 전쟁 전후로 해서 생긴 난민, 즉 시오니스트들이 이스라엘 건국을 본격화 하는 과정에서 생긴 난민이고, 다음은 1967년 전쟁에서 생긴 난민입니다. 그러니 이미 수 십 년 째 난민이 되어 2세와 3세가 태어난 상황이라 초기 상황과는 얼마만큼 달라졌습니다. 그렇다고 상황이 아주 좋아졌다는 것은 아니구요.


                                                        아부 무사브씨


오늘은 1967년 전쟁에서 난민이 된 아부 무사브씨의 집을 찾았습니다.


“지금은 이스라엘이 파르사바라고 부르지만 원래 우리 마을 이름은 쿠포르사발이에요. 1967년이니깐 11살이었어요. 우리 집은 토마토나 메론 같은 것을 키우는 농민이었죠. 그런데 어느 날 이스라엘 군의 탱크와 비행기가 몰려와서 공격을 했고, 우리는 세간 하나 챙기지 못하고 입고 있던 옷만 가지고 피난을 떠났죠. 처음엔 며칠 있으면 돌아올 수 있을 줄 알았어요.


한국 전쟁 당시 피난을 떠났던 사람들도 그렇게 생각했을 것입니다. 잠깐 떠났다 오면 될 거라고…….


“우리 마을에 한 5천명쯤 살고 있었는데 정말 서로 가족 같았어요. 그런데 전쟁이 시작되고 모두들 피난을 떠났어요. 어떤 사람들은 너무 두려운 나머지 아이들을 잊어버리기도 하고, 백기를 흔드는 사람도 있었죠. 처음엔 깔낄리야로 갔었는데 이스라엘이 우물을 파괴하는 등의 짓을 저질러서 다시 이곳 나블루스로 왔죠. 그때 팔레스타인에 무슨 차가 있나요, 다 걸어서 피난을 떠났죠. 그나마 다행인 것은 48년 전쟁에 비하면 67년 전쟁에서는 사람이 적게 죽었다는 거죠. 나블루스로 오니깐 너무 많은 사람들이 몰려드는 바람에 집도 음식도 모든 것이 부족했죠.”


67년 전쟁은 이스라엘에게는 ‘혁명적 시기’였습니다. 48년 전쟁에서 다 쫓아내지 못한 팔레스타인인들을 다시 쫓아낼 수 있는.


“처음 난민이 되고 UNRWA(유엔 팔레스타인 난민 구제 사업국 - 미니 주)에서 텐트를 하나 제공했는데 한 텐트에서 10~12명씩 4년 동안 살았어요. 물을 길러 1km씩 멀리 가기도 하고, 함께 사용하는 화장실 앞에서 오래 기다려야 하기도 했죠.”


가슴 아플 줄 알면서 고향에 다시 간 적이 있냐고 물었습니다.


“76년과 84년에 고향에 갔었죠. 그 때는 일하러 노동자로 갔었죠. 고향에 가니까 이스라엘 사람들은 새 건물을 짓고 좋은 땅에서 농사를 짓고 있었어요. 그리고 이스라엘 사람들이 돈으로 저희 땅을 사겠다고도 했었지만 거절했어요. 그 뒤에도 큰 돈을 주겠다고 몇 번 제안 했었지만 모두 거절했어요. 언젠가 돌아갈 수 있을 거라 생각하니깐요. 지금도 고향땅 땅문서를 가지고 있어요.”


 발라타 난민촌에 있는 공동묘지. 자연사한 사람과 함께 이스라엘 군의 공격으로 죽은 사람들이 묻혀 있었습니다. 어떤 집의 경우는 세 아들이 한 곳에 묻혀 있기도 했습니다. 사진 속에 이스라엘 군의 공격으로 죽은 친구의 무덤 앞에 앉아 있는 사람들이 보입니다.


아부 무사브씨는 수 십 년 째 난민으로 살고 있지만 고향으로 다시 돌아갈 수 있을 거라는 믿음으로 큰 돈도 거절했던 것입니다. 그러면서 UNRWA에 대한 불만도 말씀 하셨습니다.


“UNRWA가 3개월마다 설탕 5kg, 기름 2병, 우유 1kg과 질이 아주 나쁜 쌀을 줍니다. UNRWA는 팔레스타인 난민들을 위해 국제적으로 돈을 모으지만 그 돈을 다 어디에 쓰는지 모르겠어요. UNRWA가 운영하는 병원에 가 보면 늘 진통제 처방만 해요.”


뒤에 들은 얘기지만 그나마 있는 UNRWA도 미국과 이스라엘이 계속 없애려 한답니다. 왜냐하면 UNRWA가 존재하는 한 팔레스타인에 난민이 있다는 것이 계속 알려지니깐 난민이 없는 것처럼 만들기 위해서라는 거죠.


“너무 화가 나고 슬픕니다. 이스라엘이 매일 같이 팔레스타인 마을을 공격하는 바람에 저는 제대로 잠을 잘 수가 없어요. 그리고 눈은 거의 앞을 보지 못합니다. 사람도 목소리를 통해 구별하는 정도죠. 약값은 비싸고, 수술을 받고 싶어도 돈이 없으니 엄두를 못 내죠.”


그러면 지금 생활은 어떻게 유지하고 있는지 물었습니다.


“우리 집에서 돈을 버는 사람은 저 하나였어요. 이것저것 팔러 다녔죠. 하지만 이스라엘이 여기저기를 봉쇄하는 바람에 그것도 할 수 없게 되었죠. 눈도 이러니…….지금은 개인들의 후원으로 생활하고 있습니다. 유럽등지에서 팔레스타인 정부로 돈을 보내지만 팔레스타인 정부는 가난한 사람들에게 그 돈을 쓰지는 않죠. 아랍 국가들도 물론 아무 것도 하지 않아요.”


이스라엘과의 평화협상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시는지도 물어 봤습니다.


“우리는 평화를 믿어요. 하지만 이스라엘은 평화를 믿지 않아요. TV에서 이스라엘은 늘 평화를 원한다고 하지만 우리는 감옥과 같은 곳에서 일자리도 없이 이동할 수도 없이 살고 있어요. 그저 먹고 자고, 먹고 자고 하면서 집에 머물러 있는 거죠. 이건 사람 사는 게 아니라 동물과 같아요.”

늘 그랬습니다. 누구는 감옥이라고 말하고 누구는 동물원이라고 말하고…….


나블루스에 있던 팔레스타인 정부 청사 무카타. 2002년 이스라엘의 대규모 공격으로 완전히 파괴 되었다.


“가자 지구 철수만 해도 그래요. 이스라엘은 철수했다고 하지만 지금도 매일 같이 탱크와 아파치 헬기로 공격을 하고 있고, 점령민들은 가자 지구를 떠나 서안 지구로 옮겨 갔을 뿐이죠. 서안 지구에 있는 사람들은 가자 지구에 있는 가족들을 만날 수도 없어요. 여러분들은 제루살렘으로 갈 수 있지만 저는 제루살렘에 있는 병원으로도 갈 수 없어요.”


이런 질문을 해도 되는지 잠깐 망설이기도 했지만 삶의 희망을 가지고 있는지 물었습니다.


“제 희망은 자식들이 모두 좋은 교육을 받고, 자신의 삶에 대해 이해했으면 하는 거에요.”


교육, 한국의 부모님들도 상황이 어려울 때 자식들만이라도 제대로 가르치고 싶어 했었죠.


“여러분들이 이렇게 팔레스타인으로 와 주셔서 고맙습니다. 그리고 한국이나 다른 나라들이 이스라엘에게 더 많은 압력을 넣고, 팔레스타인을 더 많이 지원해 주셨으면 좋겠어요. 유엔 안전 보장 이사회 같은 곳도 마찬가지구요. 우리는 돈을 원하는 것이 아니에요. 여러분들이 한국으로 돌아가셔서 팔레스타인의 진실을 더 많이 알려 주시면 좋겠습니다.”


마지막 당부의 말씀을 듣고 고맙다는 말씀을 드린 뒤 자리에서 일어났습니다. 그리고 제가 아주 큰 실수를 저질렀습니다. 다른 곳에서 늘 그랬던 것처럼 인사를 한답시고 악수를 청했던 거죠. 그런데 아부 무사브씨는 제 손을 바라보지도 않고 아무 행동도 하지 않았습니다. 앞을 잘 못 보신다는 사실을 제가 깜빡했던 것입니다.


결국 미안하고 당황스런 마음으로 인사말을 건네며 짧은 만남을 마쳤습니다. 아부 무사브씨의 집을 나서며 우리는 돈을 원하는 것이 아니라 진실을 알려달라던 말씀이 가슴에 깊게 남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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