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도 문제는 미국입니다

[기고]상황이 복잡하게 보일수록 생각을 단순하게

평화가 [구조적 폭력]이라는, 말하자면 사회적 불공정과 억압이 없는 상태까지를 포함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입장을 취한다면, 그것은 한층 적극적인 개념의 실체화라고 하는 운동을 필연적으로 동반하게 된다. 그들 가운데 일관되어 있는 것이 전쟁과 [구조적 폭력]을 목적의식적으로 이용해서 혹은 추구하는 국내적-국제적인 지배체제에 대한 비판적인 시각이라는 것은 이제 와서 지적할 필요도 없는 것이다. - [평화학], 일본평화학회 편집위원회, 문우사, 17쪽

오래된 억압은 일상이다?

자본주의/성차별주의/제국주의 세계에서 평화를 찾는다는 것은 인간 집단 사이의 지배-피지배 관계를 극복하고 연대의 세계로 전환한다는 것입니다. 즉, 평화라는 것이 추상적인 감성의 문제만이 아니라 평화도 계급적/성적/국가적 성격을 갖는다는 것이며 평화와 관련된 문제를 인식할 때도 인간 집단 간의 관계를 기본으로 인식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북한 핵’이라는 주제에 대해 논의할 때도 ‘북한 핵’만 떼어놓고 설명할 것이 아니라 ‘북한 핵’을 둘러싸고 있는 지배-피지배 관계에 대한 설명을 먼저 해야 합니다. 북-미 관계의 기본 문제는 미국은 북한을 지배하려고 하고, 북한은 지배당하지 않으려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1950년에서 1953년까지 벌어진 북-미 전쟁 이후 계속된 미국의 대북 적대․봉쇄 정책 및 공격 위협의 과정에서 북한이 ‘핵’이라는 대항 수단을 들고 나왔다는 것입니다.

특히 2001년 아프가니스탄 침략, 2003년 이라크 침략 이후에도 계속 되고 있는 소위 ‘악의 축’ 국가들에 대한 공격 위협은 북한에게는 상당한 압박일 수밖에 없습니다. 미국의 이라크 침략 이후 시리아의 태도 변화만 봐도 현재 미국의 국제 정책이 다른 국가들에게 어떤 위협이 되고 있는지 알 수 있습니다.

‘상호확증파괴 전략 하에서 핵무기는 사용할 수 없는 무기다. 미국과 소련 모두 상대와 인류 전체를 절멸시키고도 남을 핵전력을 보유한 상황에서 핵무기의 사용은 공멸을 의미하기 때문이다......이러한 경직된 핵전략에 반대해서 나온 것이 유연반응(flexible response) 전략이다. 규모가 작은 미니 핵무기, 즉 전술핵무기는 공멸의 위험을 피하면서도 얼마든지 사용할 수 있다는 것이다.’ - [부활하는 네오콘의 대부 레오스트라우스], 박성래, 김영사, 189쪽

미국은 1만개 이상의 핵을 보유하고 있으며 세계에서 유일하게 핵을 실전에서 사용한 국가입니다. 그리고 언제든지 핵을 이용해서 상대를 제압하겠다고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진보진영까지 미국이 가진 1만개의 핵무기보다 북한의 핵실험에 더욱 강하게 반응하는 것은 왜 입니까? 혹시 한국 진보운동이 미국의 핵무기 보유는 달갑지는 않지만 은연중에 기정사실이나 현실로 받아들이면서 북한은 안 된다고 하는 것 아닌가요? 북한이 핵을 보유함으로써 한반도에 위기가 닥치기 이전에 미국이 핵무기를 가지고 있음으로 해서 이미 위기는 만연되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한국 정부가 친미 정부이고 한국이 미국의 공격을 받을 위협이 없다보니 한국의 진보운동 또한 미국의 핵 보유를 북한의 핵 보유와 같은 위협의 정도로 느끼지 않는 것은 아닌가요?

예를 들어 민주노동당 진보정치연구소는 ‘핵실험을 통해 북한은 판을 바꿔버렸다. 이제 남는 문제는 북한의 핵을 해체시키고 북한의 추가적 행동을 막는 일이다. 그렇지 않으면 핵무장한 북한과 공존해야 하는 어려운 상황에 직면할 수밖에 없다.’라고 했는데 그러면 핵을 보유한 미국과의 공존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제가 하는 얘기는 미국이 핵을 가졌으니 북한이 핵을 가지는 것도 정당하다는 것이 아니라 미국이 오랫동안 한반도에 대해 정치적, 경제적, 군사적 억압을 가하고 있으니 이 상태를 마치 당연한 일상으로 느끼는 것은 아니냐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일상을 깨뜨리는 집단을 억압하는 집단보다 더 큰 문제집단으로 지목하고 있는 것은 아니냐는 거죠. 북한이 비이성적이라면 미국은 그에 100배쯤 비이성적인 문제집단인데도 말입니다. 제국지배가 안겨다주는 안정감이 평화라고 생각한다면 모르겠지만 말입니다.

북-미 관계의 근본적인 문제는 북한의 핵 실험이 아니라 미국이 가지고 있는 핵무기와 대북적대정책입니다. 북한이 핵실험을 했다고 해도 마찬가지입니다. 무력에서 우위인 미국이 북한을 공격하면 했지 북한이 미국을 공격할 가능성은 적기 때문입니다. 한반도에서 전쟁이 일어난다면 그것은 미국이 북한을 공격하면서 전쟁이 확대될 것이라는 게 제 생각입니다.

핵을 통한 전쟁 억지력 - 이상과 현실

국제정치에서 핵무기와 관련된 논의의 하나는 핵의 전쟁 억지력을 들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그토록 미워했던 소련을 미국은 왜 공격하지 않았었냐는 것입니다. 그 이유로 한쪽에서는 소련이 핵무기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하고 다른 한쪽에서는 앞의 얘기가 하나의 가정이지 사실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다른 예를 들어보죠. 미국이 이라크를 침략하는 명분으로 이라크의 대량살상무기 보유를 내세웠습니다. 하지만 이라크는 대량살상무기를 보유하지 않았고, 미국도 이 사실을 알고 있는 상태에서 침략을 감행했습니다. 그리고 지금까지 수십만의 사람이 죽거나 다쳤습니다. 그런데 만약 이라크가 핵무기에다 대륙간탄도미사일까지 가지고 있었다면 미국이 이라크를 침략했을까요? 전 세계에서 수백만, 수천만의 사람들이 미국의 침공을 반대하며 거리로 쏟아져 나왔지만 막지 못했던 침략을 막을 수 있었을까요?

저의 입장은 침략을 막는데 ‘핵’만이 대안은 아니지만 이라크의 경우 만약 이라크가 핵무기를 보유하고 있었더라면 미국은 이라크를 공격을 하지 않았을 거라는 것입니다. 역사적으로도 미국은 핵을 보유한 국가를 침략하지는 않습니다. 반대로 핵을 보유하지 않은 국가에 대해서 핵을 적극적인 위협 수단으로 사용해 왔습니다.

‘트루먼은 당시 주미소련대사인 그로미코를 백악관으로 불렀다. 그리고 만일 소련군이 48시간 이내에 이란으로부터 철수하지 않으면 미국은 원자탄을 사용할 것이라고 말했다. 소련은 그 후 24시간 만에 철수했다......존슨 대통령도 1968년 베트남에서 구정공세로 위기에 몰렸을 때 핵 위협을 한 일이 있으며, 리처드 닉슨 역시 1969~72년 사이 북베트남과의 종전협상에서 핵무기사용위협을 협상수단으로 동원했다.’ - [20세기의 문명과 야만], 이삼성, 한길사, 250쪽

1946년 당시 소련은 핵을 가지고 있지 않았고 미국은 핵을 가지고 쉽게 소련을 협박 했습니다. 하지만 소련이 핵을 보유한 이후에 이런 협박을 마음대로 할 수 없었습니다. 여기에서 미국으로부터 공격 위협을 받는 국가들이 왜 핵을 가지려고 하는지를 찾아볼 수 있습니다. 북한이 미치고 김정일이 미쳐서 핵을 보유하려는 것이 아니라 과거의 역사가 핵을 보유함으로써 자신을 지킬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줬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제게는 핵을 통한 전쟁 억지력의 이상과 현실 사이의 고민이 있습니다. 원칙으로야 핵을 통해 전쟁을 억지해야 한다는 것에 동의할 수는 없지만 현실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을 없다고도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리면 그 다음에 남는 문제는 북한에게 과연 ‘핵’ 말고는 다른 방법은 없느냐 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윤영상님은 [레디앙]에 쓴 “참혹한 대혼전의 시간이 시작됐나”라는 글에서 ‘쿠바를 보라! 많은 어려움과 고통이 뒤따랐지만 미국에 굴복하지 않으면서 남미와 세계에 수많은 친구들을 만들었다. 그들은 친구를 만들기 위해 노력했고, 그 친구들과 함께 하기 위한 노력으로 지금의 성과를 얻고 있는 것이다.”라며 북한의 태도를 비판하고 있는데 저는 쿠바의 사례가 적절할까 생각합니다.

1962년 소련과 쿠바는 미국 바로 밑에 위치한 쿠바에 미사일을 배치하려 하려 하였고 미국은 해상 봉쇄와 공격 위협으로 대응하였습니다. 결국 미국과 소련의 타협으로 미사일이 배치되지는 않았습니다. 그리고 이후에 쿠바가 미국의 봉쇄와 억압으로 무너지지는 않았지만 오래된 봉쇄 정책으로 식량, 의약품, 연료 등이 부족하여 사회의 비정상성이 지속되었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문제는 쿠바가 무너지지 않았다고 하지만 아프가니스탄의 탈레반 정권, 이라크의 사담 후세인 정권 등 수많은 정권들이 미국의 직․간접 무력 공격으로 무너졌습니다. 그리고 해당 정권의 붕괴는 정권만의 붕괴가 아니라 민중들에 대한 학살과 동시에 진행됩니다.

핵만이 유일한 대안은 아닙니다. 적극적인 대외 관계 형성으로 국제적 압력을 미국에게 행사할 수도 있습니다. 여기서 저는 또 고민에 빠집니다. 반전운동이요? 아프가니스탄 침략도, 이라크 침략도 막지 못했습니다. 외교 정책이요? 북한이 이미 많은 것을 했다고 생각합니다. 전 세계의 비핵화에 찬성하지만 침략과 대량학살의 위기가 높은 상황에서 대항 수단으로 등장한 핵에 대해 무조건, 100%, ‘그건 아이야’라고만 하지 못하는 저의 고민이 여기에 있습니다. 그야말로 아직 풀지 못한 고민입니다.

조금은 멀리서 길 찾기

한국에서 북한과 관련된 이야기를 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북한과 관련 되었다고 하면 많은 사람들에겐 ① 이 일이 어떤 사건인지를 규정하고 -> ② 그 뒤에 사건을 해석하고 -> ③ 거기에 따라 입장을 정하는 것이 아니라 북한과 김정일 정권에 대한 태도에 따라 이미 해석의 결과가 나와 있기 때문입니다. 북-미간의 논쟁과정에서 북한 말이 맞다고 하면 ‘너 북한 정권에 대한 입장이 뭐냐?’ ‘혹시 너 NL?'과 같은 말이 튀어나오는 거죠. 북한 정권에 대한 입장을 묻는 것이 아니라 북-미간의 관계에 대한 질문인데도 말입니다.

또 하나 말하고 싶은 것은 과잉 해석 또는 잘못된 해석의 문제입니다.

예를 들어 [참세상]에 실린 “핵에 유지되는 평화..그것이 평화인가”라는 글에서 행인님은 ‘덕분에 다음 대선에서 한나라당이 "잃어버린 10년"을 만회할 가능성은 상당히 높아졌다.’라고 하셨는데 북한이 핵을 개발함으로써 그런 영향이 생기는 것은 맞는 말입니다. 그러나 북한의 태도와 관계없이 이미 한나라당의 집권 가능성은 아주 높습니다. 게다가 국제정치에서 한국의 한나라당이 집권하느냐 열린우리당이 집권하느냐는 북-미 관계의 중요성에 비하면 중요도가 떨어집니다.

사회당은 “북한의 핵실험 강력히 규탄한다”라는 글에서 ‘북한의 핵실험은 농업을 도외시하여 식량위기를 빚어낸 정책 즉,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선군(先軍) 정치가 빚어낸 필연적 사태이자, 북한 체제의 비극이다.’라며 핵실험의 원인을 북한 체제의 내적 동기를 중심으로 설명했습니다. 그런데 김정일 정권이 선군 정치를 했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핵실험을 했다는 것은 조금 과잉된 해석이 아닌가 싶습니다. 미국이 압력을 넣는다고 모두 핵실험을 하는 것은 아니지만 북한의 핵실험은 미국이라는 외적 동기가 더욱 강했다는 것이 제 생각입니다.

박경순 한국진보운동연구소 상임연구원은 [프레시안]에 쓴 “북 핵실험은 북한식 생존 전략”이라는 글에서 ‘결국 북 핵실험 이후 한반도 정세는 필연적으로 군사적 충돌을 포함하는 전면적인 군사적 대결국면으로 발전해 갈 것이며, 한반도 정세는 전쟁이냐 평화냐의 선택의 결정적 기로에 서게 될 것이다. 전쟁은 없을 것이라는 안일한 정세인식이야말로 한반도 정세의 본질에 대한 무지의 산물이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미국의 북한 침략의 가능성은 높은 수준에서 유지되고 있지만 현재는 미국이 아프가니스탄과 이라크에서 지상군을 투입하여 몇 년째 침략 전쟁을 계속하고 있는 상황에서 ‘지금 당장’ 북한에까지 전면적인 전쟁을 일으킬 것 같지는 않습니다.

한총련의 경우는 10월9일 장송희 의장 명의로 특별성명을 발표하였는데, 성명에서 ‘당면 정국은 단순히 북미간 공방전이 아니다. 평화와 자주통일이냐 전쟁과 영구분단이냐를 놓고 벌이는 우리 민족 대 미국의 대결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이러한 정세 분석은 북-미 관계를 ‘한민족:미국’의 관계로 바꾸고 싶은 자신의 의지를 지나치게 투영해서 발생한 오류이거나 ‘미국반대=우리민족=평화’와 같은 단순화의 오류에 빠져 있다고 생각합니다. 간단한 예로 저는 미국의 제국주의 정책에도 반대하지만 부자 세습 권력인 김정일 정권에도 동의하지 않습니다.

아무튼 북한의 핵실험 이후 한국의 진보든 보수든 모두 들뜬 마음을 갖고 있습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사안이 워낙 크고 전쟁이 벌어지면 자신도 죽을 수 있다는 공포감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사안이 크고 자신의 주관을 많이 개입하면 할수록 판단의 오류가 커질 가능성도 있습니다. 그래서 사건을 한번쯤은 조금 멀리서 바라보는 것도 사건 해석에 도움이 될 거라 생각합니다. 마치 TV나 영화에서 어느 한 지역을 점점 멀게 비추어 나중에는 지구 전체를 비추는 것처럼 말입니다. 바라보는 사람이 내가 죽을지도 모른다는 전쟁의 공포로부터도 조금 멀어지고, 북-미 관계가 한국 진보운동에 미치는 영향에서부터도 조금 멀어지고, 한반도만이 아니라 세계지도를 펴 놓고 이번 사건을 바라보면 사건 해석에 조금 더 도움이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상황이 복잡할 때면 생각을 단순하게 가지라는 것이 어려운 일이 있을 때 제가 저에게 하는 말입니다. 그래서 지금의 북한-미국 관계와 이란-미국 관계에 대한 해답은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물론 답은 미국의 적대정책과 북한 핵개발의 동시 중단입니다. 그리고 이 해답은 미국이 ‘1만개의 핵을 보유 한다’는 것을 인정하는 어쩔 수 없는 선택입니다. 핵으로 위협하는 자와 위협 받는 자 사이의 빈 공간은 위협 받는 국가 및 민중들의 연대와 투쟁으로 채워가야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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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하수구

    "과연 뉴스 사이트인가"하는 생각이죠.

    이건 뭐 블로그도 아니고, 개인 홈페이지 주장글 받아 적는 곳도 아닌데. 게시되는 게시물의 논조가 왜이리 왔다리 갔다리 하는 겁니까?

    '논쟁중'이라던지 ..이런 설명도 없으면서 북핵과 관련한 여러 논조의 글을 마구잡이로 대중들에게 던져버리고 있으니. 이거 원 헷갈려서...쩝쩝..

  • 아오지

    빨갱이티내냐?? 북한이 핵무기 개발해서 좋겠내 개또라이같은새끼

  • <북 핵실험 정국> 토론회 참가 후기

    글쓴이 임필수


    어제, 10월 12일 민중연대/통일연대 주최로 개최되었던 <북 핵실험 정국과 진보진영의 대응> 토론회에 다녀오면서 느낀 점을 몇 가지 정리해보았습니다. 그리고 이 문제에 관해 의견을 나눴던 여러분들의 말씀도 참고해서 적었습니다.




    1) 핵보유가 핵전쟁을 막는다? 반핵평화운동이 핵전쟁을 막았다!!




    어제 토론회에 참여해 보니, 여러 발표자들이 "미국의 핵위협을 막는 수단은 궁극적으로 핵보유밖에 없다“는 입장을 공유하는 듯 보이더군요. 현재 정세에서 북한 핵 보유를 적극적으로 지지하지는 않더라도, 미국의 위협에 따른 불가피한 선택이란 식으로 변호론적 입장에 서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물론 ‘민족의 카타르시스’라는 발언을 한 분도 계셨습니다만....)




    제가 생각하기에는 이런 논리를 수용하게 되면, 결국 소련과 세계 각국의 공산당이 걸었던 크나큰 오류를 다시금 반복하게 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결국 세계인을 공멸의 공포로 몰아넣었던 핵 경쟁과 결국 이를 감당하지 못하고 자멸의 길을 걸었던 소련의 경험을 다시 한 번 반복한다는 것은 너무나 끔찍할 것입니다.)




    과연 소련의 핵보유가 핵전쟁은 막은 것이 사실일까요?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1945년 미국의 대일 핵공격 이후로 핵무기가 실제로 사용되지 않은 이유가 소련의 핵억지력 때문이라는 믿음은 큰 오류일 것입니다. 오히려 미국의 대일 핵공격이 낳은 참화, 20만명 이상이 죽고 또 20만명 이상이 핵공격 후유증으로 고통을 받은 현실(수많은 조선인 피폭자들도 포함됩니다만), 핵무기의 위험성에 대한 미국 정부의 간교한 은폐 시도에 대해 분노하는 거대한 반핵평화운동의 물결이 1950-60년대에 일어났기 때문에 핵무기 사용이 어려워졌다고 인식해야 할 것입니다. 이런 반핵평화운동이 없었다면 제2, 제3의 핵 사용을 막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또한 소련이 미국과의 핵경쟁을 길로 나아가지 않고 그 반대의 길 즉 반핵평화운동을 지지하는 길을 걸었더라면 지금의 세계는 우리가 아는 것과 정말로 다른 모습이 되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회고해보면 미국의 대일 핵공격은 국제적으로 비난 받아 마땅한 것이었습니다. 미국은 전쟁종결을 위해 핵공격이 불가피했던 것인 양 합리화했지만, 여러 연구 결과는 결국 미국이 소련의 남진과 영향력 확대를 우려해 전쟁을 더 빨리 종결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에 핵을 사용했고, 또한 핵무기를 실전에서 활용하고 싶은 지배 엘리트들의 욕망이 이를 부추겼다는 것입니다. (대한민국의 지배세력은 미국의 핵폭격 때문에 해방되었다는 환상을 유포했고, 미국의 핵무기주의를 철저히 숭배했습니다.) 따라서 미국이 2차 세계대전을 핵공격으로 마무리한 것은 사실상 3차 세계대전을 선언한 것이었습니다 (그 실현태는 ‘냉전’이었습니다만). 하지만 소련이 결국 미국을 모방하여 핵무기주의의 길을 걸은 것은 반전반핵평화운동이 활성화되어야 할 시점에서 찬물을 끼얹는 것이었습니다 (‘찬물’이란 표현은 너무 약한 것 같네요. 인류에 대한 배신 행위라고 말해야겠네요...)




    이는 기존 사회주의 국가가 운동과 결합하기보다는 국가 간 게임이라는 현실정치의 논리에 포섭된 것이라는 의미에서도 자멸의 길을 걸은 것이라고 간주해야 할 것입니다. 핵개발 후 소련은 타 사회주의 국가의 핵보유를 적극적으로 막으면서, 핵우산을 제공(강요)하면서 소련과 다른 사회주의 국가의 관계를 보호국-피보호국의 위계적 관계로 변질시키기도 했습니다. 핵보유는 곧 제국주의 논리에 적극적으로 편승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런 의미에서도 핵보유는 사회주의와 양립할 수 없다고 생각해야 할 것입니다.)




    2) 핵무기 보유 그 자체가 전쟁 유발 요인이다!




    또한 핵무기를 보유하는 것이 핵전쟁을 막는 유일한 길이라는 믿음은 핵보유 자체가 전쟁유발요인이라는 사실을 인식하지 못하게 합니다. 핵무기 그 자체가 '절대무기'(절대적 파괴를 낳는 무기)이기 때문에 핵무기의 개발, 배치, 이동 등 매 국면마다 이를 강행하려는 세력과 막으려는 세력 간의 충돌 위험을 낳았습니다.




    미소간에 핵전쟁이 일어나지 않은 것은 사실이지만, 이 때문에 변형된 형태의 전쟁과 폭력이 냉전시기를 지배했던 것도 사실입니다. 미소간의 대리전이 벌어지기도 했습니다. 소련은 쿠바에 미사일을 배치하려고 시도하면서 생긴 미소간 핵전쟁 발발 위기를 기억하시는 분들이 많겠지만 (쿠바의 사례는 운동을 희생시켜서 쿠바를 핵무기 경쟁의 논리로 포섭하려는 무시무시한 시도였다고 생각합니다...) 남미뿐만 아니라 중동, 아프리카 등지에서 군사적 요충지를 장악하기 위한 미소간의 첨예한 대결과 이른바 미소 '대리전'이 수십 차례 벌어졌습니다. (예를 들어 아프리카 여러 나라에서 민족주의 성향을 지닌 청년 장교들과 공산당이 연합하여 쿠데타를 일으켜 권력을 잡으면, 소련은 이를 군사적으로 지원하고 소련의 군사기지를 설치했습니다. 그 후 군부가 공산당 세력을 배제하거나 숙청하더라도 소련이 이를 암묵적으로 승인하기도 했습니다.)




    1970-80년대 유럽에서 광범위하게 벌어진 반핵운동은 미국 자신의 영토가 핵전쟁터가 되는 것을 막기 위해, 만일 핵전쟁이 벌어지면 그 핵투하점이 유럽이 되도록 변형하려고 시도한 게 발단이 되었습니다. (당시 유럽인들은 자국의 정부가 핵전쟁터가 되도록 용인하는 것을 도저히 납득할 수 없다고 생각한 것이지요).




    이처럼 핵능력을 향상시키고, 군사적 요충지에 배치하려는 모든 시도는 세계의 무차별적 대중을 볼모로 한 것이었고, 그 과정에서 미소 대리전쟁이 벌어지게 하였습니다. 핵의 존재 자체가 전쟁유발요인이라는 사실을 우리가 잊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3) '북미대화를 통한 사태의 평화적 해결'을 촉구하는 것이 유일하게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운동의 방향인가?


    제가 생각하건데, 반핵반전평화운동이 대안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면, 결국 그 귀결은 국가 간 게임만이 실효성 있는 해결책이라는 식의 사고로 대체될 것입니다. 이것이 지닌 위험성은....



    첫째. 국가 간 게임의 논리에 따라 타협이 이뤄진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대체로 ‘현상유지’에 머물 것입니다. 북미 차원의 잠정 합의가 나오더라도 동아시아에서 미국의 군사적 지배력이나 한국, 일본, 중국의 무기 증강 시도는 여전히 지속될 것입니다. (일본은 이번 기회에 핵무장화의 정당성을 확보하려고 시도하고 있고, 중국은 최근 사거리 7000km의 대륙간탄도미사일을 개발 중이라고 합니다).




    둘째. 또한 시야를 넓혀 보자면, 세계적인 핵보유국은 계속 늘어날 것입니다. (월러스틴은 당장은 아니더라도 10년내에 핵보유국의 수가 20개국에 가까이 늘어날 가망성이 높다고 말했다는군요.,.) 이는 세계적인 운동이 없다면 결코 막을 수 없을 것이 명약관화합니다.




    셋째, 또한 운동이 대안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면, 결국 차기 대선에서 ‘당선 가능하며’ 북한핵문제를 평화적으로 해결할 의사가 있는 세력을 지지해야 한다는 논리로 발전할 수도 있습니다. (그게 설령 신자유주의 개혁세력이더라도 말이죠...) 하지만 이러한 선택 역시 환상에 불과할 것이며, 악순환만 가중시킬 것입니다. 신자유주의 개혁세력은 철저히 모든 것을 미국에 의탁하는 방식으로 모든 일을 처리할 것이며, 이는 또한 북한의 강경대응을 불러일으키고, 그러면 또 '그래도 한나라당은 안 된다'는 논리에 의존하고. 등등등...


    따라서 국가 간 차원의 게임에서 어느 쪽이 유리하도록 여론에 압력을 가하려는 시도가 아니라, 대중들의 반전반핵평화의 의지를 북돋우려는 운동이 절실합니다. 특히 미국의 전쟁위협 중단(대북제재는 변형된 형태의 전쟁이라는 주장을 확실하게 펼칠 필요가 있을 것입니다), 동아시아 핵무장화 반대라는 분명한 입장을 제시해야 할 것입니다. ‘미국이 당장 북한과 전쟁을 할 수 없다’, ‘북한의 핵보유는 비핵화를 위한 일시적 대책일 뿐’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우리의 사고와 운동을 재활성화하기 위한 계기를 스스로 포기하는 것일 테지요....




    * 토론회 자료집은 사회진보연대 홈페이지 자료실에 등록하겠습니다. (류주형 조직교육부장이 발표한 토론문은 이번 주 사회화와 노동에 실린 글입니다.)


  • 디디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도대체 뭐라 말해야할지 모르는 어려움의 지점이, 분명 있어서 안절부절못하고 있었는데요. -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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