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의 '핵시험'과 좌파의 선택(2)

[연속기고](3-2) “‘9.19공동성명 이행’을 준거로 구체적 입장과 실천 조직해야”

북 체제와 정권에 대한 태도와 북핵 문제는 분리해야 한다

북의 체제와 정권에 대해 민족주의 진영은 대체적으로 긍정적으로 대하거나 최소한 우호적인 태도를 취하고 있다는 것과 좌파진영은 부정적으로 보고 있거나 최소한 비판적인 태도를 갖고 있다는 것은 충분히 알려져 있다. 그러나 어느 경우든 북핵 문제를 대하는 데 있어서는, 북의 체제와 정권에 대해 어떤 입장에 서든 상관없이, 그 자체의 독자적인 범주가 성립된다는 것을 인지해야 한다. 먼저 북핵 문제는 그것이 내부 결속용이든 대미 억제력용이든, 물론 이 둘은 서로 분리될 수 없지만, 본질적으로 북미관계의 산물이라는 점을 분명히 해야 한다. 그것이 아무리 내부 결속을 다지기 위한 하나의 수단이 될 수 있으며, 그런 결과를 목적하고 있는 측면이 있다고 해도 미국의 대북 적대정책이 아니라면 북이 핵을 보유해야 하는 객관적 필연성이 있는 것은 아니다. 94년 제네바 협정이 이를 증명하고 있으며, 현재도 북이 비핵화를 목적으로 하고 있다는 주장을 부정해야 할 이유나 근거도 없다.

좌파는 그동안 민족주의 진영이 취하고 있는 정치적 태도와 그것이 낳는 정치적 폐해에 대해 지속적으로 비판해왔다. 그러나 여기서는 반대로 좌파가 보이고 있는 논리와 처해 있는 지형에 대한 비판적 검토를 하고자 한다. 좌파는 분명 북의 체제와 정권에 대해 적대적인 태도에서부터 비판적인 태도를 보여 왔다. 그런데 이점은 여기서의 논점은 아니다. 지금 말하고자 하는 것은 그러한 입장을 보이거나 갖는 것과 북핵 문제를 대하는 것과는 논리적 접근에 있어서나 현실적 태도를 정하는 데 있어 분리해야 한다는 것을 말하고자 함이다.

북의 체제나 정권의 성격이 여하 하든 간에 지금 북핵 문제를 일으킨 일차적 책임은 명백히 부시 정부의 대북 적대정책에 있다는 주장에 아무런 하자가 없다. 물론 그렇다면 북이 핵을 보유해도 괜찮다는 것이냐는 질문이 충분히 가능하지만 이 질문은 유보시켜야 한다. 왜냐하면 누누이 말하고 있지만 북 자신이 비핵화를 목적으로 하고 있기 때문이다. 유사한 예로 이라크 후세인 정권에 대한 판단과 무관하게 미국의 이라크 침략은 그 자체로 부당하며, 이라크로부터의 무조건 미군 철수를 주장하는 것이 너무도 당연한 것과 같다. 좌파는 아무런 거리낌 없이 미국의 대북 적대정책을 일차적으로 문제 삼아야 하며, 북핵에 대해 미국의 정치적 책임을 묻는 것을 가장 우선해야 한다. 만약 미국이 대북 적대정책을 철회하고 명백히 대화와 협상의 의지를 증명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북이 여전히 핵보유를 목적으로 하고 있다는 것이 드러날 때 비로소 비판은 설득력을 가질 수 있다. 지금으로서는 미국의 대북 적대정책이 북의 핵보유를 부추기고 있다는 비판을 통해 북이 핵을 보유해서는 안 된다는 간접 비판이 성립하는 것으로 충분하다.

혹자는 북이 먼저 핵을 포기함으로써 오히려 미국의 대북 적대정책을 완화시킬 수 있는 환경을 만들 수 있지 않을까하는 기대를 가질 수도 있겠지만 이게 얼마나 비현실적인 설정인가는 더 이상 논할 가치도 없다. 현재로서는 ‘말 대 말’, ‘행동 대 행동’을 대체할 수 있는 그 어떤 실행 프로그램도 존재하지 않는다. 북은 현재 자원이 고갈된 상태이다. 그 원인을 따지는 것은 별도의 문제이다. 북이 처해 있는 현 사회경제적 조건을 완화하기 위해서는, 국제사회와의 교류가 아니고는 문제 해결을 위한 실질적 방안을 달리 찾기는 어렵다. 북에 대한 자본 유입이 가져올 폐해를 걱정하는 것은 너무나 한가한 태도이다. 그야말로 악마에게 영혼을 파는 한이 있더라도 북은 외부와의 교류를 필요로 하고 있다.

북은 명백히 하나의 국가 단위이다. 그렇다면 그러한 교류는 그 국가를 실효적으로 감당하고 있는 현실 정권이 담당할 수밖에 없다. 그 밖의 문제는 북 내부의 사정에 달려 있는 것이지 외부로부터의 개입에 의해 문제가 해결될 수 있거나 진전을 꾀할 수 있다고 상정하는 것은 매우 비현실적이다. 만약 북이 무정부 상태를 맞는다면, 그것은 현재로서는 미국 제국주의의 압박의 결과로서 이겠지만, 이는 북 사회를 더욱 참혹하게 만드는 결과를 낳을 가능성이 높다. 북이 무정부 상태에 이른다면 이를 관리할 수 있는 현실적 힘은 어쩔 수 없이 미국이 일차적으로 행사할 수밖에 없다. 그리고 이는 최악의 결과를 의미하는 것이다. 따라서 지금은 북의 체제와 정권의 성격에 대해 논란을 하거나, 특히 북핵 문제를 대하는 것과 이를 직접적으로 연동시키는 것은 사실상 정치적 개입을 포기하는 것과 다를 바 없으며, 사태의 본질과 실상을 명료화하는 데에도 결코 도움이 되지 않는다.

비핵화 일반의 문제와 북핵 문제는 동북아 비핵화와 함께 제기되어야 한다

북의 핵실험 또는 북의 핵보유가 현실화되기 이전의 상황에서는 비핵화라는 일반적 관점에서 북의 핵보유 의지를 비판하는 것이 가능하며, 그럴 필요도 있다. 그것은 사실 그러한 비판 자체가 보편적 정치행위로서 성립한다는 측면도 있지만 현실적으로는 비록 간접적으로나마 미국의 대북 적대정책을 비판하기 위한 논리적 설정하고도 맥을 닿고 있는 것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또한 북의 핵보유 의지가 결과적으로도 미국의 대북 적대정책을 철회 혹은 완화시킬 수 있는 가능성이 별로 없으며, 다른 측면에서 동북아에서의 핵 경쟁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는 점을 경고하기 위한 필요 때문이기도 하다.

그러나 지금 시점에서 비핵화라는 일반적, 보편적 관점에서 북핵 문제를 대하는 것은 더 이상 의미를 가질 수 없다. 북 자신이 비핵화를 최종 목적으로 하고 있다는 것을 말하고 있어서만이 아니다. 북이 미국의 경제적 제재나 봉쇄를 넘어 공공연히 핵을 포함한 군사적 위협에 시달리고 있었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북으로서는 국가의 존폐 문제가 흔들리고 있는 상황이었다. 이를 두고 설마 미국이 군사 행동을 하겠는가라든지, 아니면 이라크 사태 때문에 군사 행동을 할 수 있는 여력이 없다든지, 동북아의 정치지형상 미국의 군사 행동이 쉽지 않을 것이라는 분석 등이 있을 수 있다. 나아가 북이 이러한 판단 아래 핵실험을 강행했다는 주장도 있을 수 있다. 충분히 그러한 분석과 판단을 해 볼 수는 있다. 그러나 북의 입장에서 볼 때, 한국의 보수진영이 그토록 애지중지하고 있는 안보는 최악의 상황을 가정해서 대비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는 바로 그 점에서, 만에 하나를 대비하는 것은 충분히 가능하다. 미국 제국주의의 이라크 침공은 이라크가 대량살상무기를 실제로 보유하고 있지 않은 것이 한 원인으로 작용했다는 가정은 얼마든지 성립된다. 즉 북이 굳이 핵을 보유하지 않는다고 해도, 아니 오히려 핵을 포기해야 안보가 보장된다는 논리는 북으로서는 물론 현실의 국제 정치적 측면에서 보아도 한계가 분명하다.

북이 핵을 보유하는 것이 장기적으로 또는 또 다른 변수의 발생에 의해 오히려 안보에 도움이 안 되는 상황을 맞을 수도 있지만 최소한 단기적으로 미국의 군사적 위협에 대한 자위, 저항 수단이 될 것은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다. 이를 두고 세계 평화와 동북아와 한(조선)반도에서의 긴장 완화를 위해 핵(무기)을 갖지 말 것을 요구하는 것이 북 정권에게 얼마나 설득력이 있겠는가? 물론 이러한 논리 전개는 북의 핵보유를 인정하고자 하거나 묵인하려는 것과는 전혀 상관이 없다. 단지 비핵화 일반의 논리만으로는 북을 설득하기에 분명한 한계가 존재한다는 것을 말하고자 하려는 것이다.

한(조선)반도 나아가 동북아에서 비핵화가 성립하기 위한 전제 조건은 미국의 대북 적대정책 철회이다. 물론 미국, 중국, 러시아의 핵이 이미 한(조선)반도와 동북아에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어 한(조선)반도와 동북아에서의 비핵화란 사실상 분명한 한계를 안고 있다. 그러나 특히 일본, 남북 그리고 대만은 잠재적 핵보유 의지 국가로 분류할 수 있으며, 그 외로 확장될 수 있는 여지도 없지 않다. 그러나 일본, 남북, 대만이 핵무장을 하지 않는다면 제한적이나마 동북아에서의 제한적 비핵화가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그리고 동북아에서 이러한 상태 아래에서나마 비핵화가 실현되는 것은 노동자계급의 이해와도 상당히 일치한다. 그렇다면 한(조선)반도와 동북아에서의 비핵화를 실현하기 위한 일차적 조건인 미국의 대북 적대정책 철회가 가장 전면에 등장해야 하는 것은 너무나 자명하다.

동시에 이 기회에 일본, 한국, 대만의 비핵화 의지도 재확인되어야 하며, 미국, 중국, 러시아의 동북아에서의 핵 위험 및 사용을 차단하기 위한 상호 검증 시스템도 도입되어야 함을 요구, 주장해야 한다. 동북아 평화체제의 제도적 구축을 위한 국제적 논의가 북에 대한 비핵화 요구와 맞물려함을 분명히 할 필요가 있다. 이를 위해 일차적으로 일본과 한국에 대한 미국의 핵 우산 정책 철회를 포함하여 전술 핵 배치여부에 대한 철저한 검증을 요구하는 것과 함께 북을 대상으로 한 군사훈련에서의 핵 배제를 강력히 제기해야 한다. 그렇지 않고 오로지 북의 비핵화만을 주장하는 것은 지금으로서는 현실성이 없을 뿐만 아니라 타당성도 결여하는 것이다. 지금에서 제한적 수준에서나마의 동북아 비핵화를 실현할 수 있는 경로는 북‘만’의 선 핵 포기가 아니라 ‘말 대 말’, ‘행동 대 행동’의 원칙 아래 위와 같은 다자간이 동시 진행하는 것이라는 것을 명료화해야 한다.

민족주의를 비판하는 것과 민족문제가 존재한다는 것과는 구별해야 한다

좌파는 그동안 민족주의를 비판하는 것에 대해서만 초점을 맞추었을 뿐 민족문제를 어떻게 극복할 것인지에 대한 대안 또는 방안을 제출하는 데 있어서는 대단히 소극적이었거나 정치적 한계를 보여 왔다. 아니 민족문제 자체를 아예 상정하지 않았거나 민족문제가 어떻게 존재하고 있는가에 대한 분석 의지 자체가 없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다보니 마치 민족주의 진영에서 행하고 있는 민족문제에 대한 의제 설정이나 분석 결과를 그대로 받아들이는 꼴이 되고 말았다. 사실상 좌파는 민족문제에 관한한 거의 독자성을 상실했으며, 현실 상황에 대한 개입에 있어서나 대중과의 소통을 하는 데 있어 사실상 정치적 기권 상태를 장기간 방치해왔다.

여기서 민족문제 일반에 대한 논의를 다하기는 어려울 뿐만 아니라 그 자체가 목적도 아니다. 북핵 문제에 제한해서 얘기를 하고자 한다. 좌파는 먼저 그 동안 북핵 문제와 관련하여 보편적 관점에서 비핵화 실현을 주장해왔다. 나아가 반제, 반전을 이야기 해왔다. 그리고 이 자체에는 아무런 문제는 없다. 그러나 사실 이 속에 민족문제는 없다. 반제, 반전조차 그야말로 아주 일반적 맥락에서만 말해왔던 측면이 강하다. 그러면서도 이라크, 팔레스타인, 레바논 등의 사태에 대해서는 직접적 행동을 조직하는 일에서는 미미한 역할을 하는데 그쳐왔다. 그렇다면 반제, 반전조차 분명한 과제로 삼고 있는지 되돌아 볼 필요가 있다. 노동문제를 벗어나면 나머지는 부차적으로 대했다고 할 수 있다.

북핵 문제는 명백히 일차적으로 한(조선)반도 문제이며 그러한 만큼의 민족문제가 개입되어 있다. 물론 당연히 계급문제와 연동되어 있다. 그런데 북핵 문제는 계급문제가 해결되어야 풀리는 그러한 선차적 문제가 아니다. 북핵 문제는 시시각각으로 계급문제를 왜곡하는 현실로 작동되고 있을 뿐만 아니라 계급의 생존 자체를 송두리째 앗아갈 수 있는 매우 긴급한 현실적 사안이다. 북핵 문제는 민족주의 진영 고유의 의제가 아닐 뿐만 아니라 그들에게 맡겨두거나 방치할 문제도 당연히 아니다. 또한 북핵 문제는 북의 체제나 성격을 판단하는 문제와도, 비핵화나 반제, 반전이라는 일반적 관점에서만 대할 성질의 것이 아니다. 북핵 문제로 인해 피해를 직접적으로 당해야 하는 일차적 당사자는 불행히도 남북의 계급대중이다. 남의 계급대중이 쟁취한 투쟁의 성과가 한방에 날아갈 수 있는 사안이며, 남의 계급대중의 정치적 성장과 진출을 가로막고 있는 매우 중대한 사안이다. 북핵 문제에 포함되어 있는 민족문제에 대한 좌파의 적극적 개입과 실천이 절실하다. 그것이 곧 계급문제를 해결하는 하나의 과정이다.

좌파의 정치적 선택

지금 시점에서 좌파가 북핵 문제와 관련하여 하나의 준거로 삼을 수 있는 구체적 실체가 객관적으로 존재하고 있다. 그것은 곧 9. 19 공동성명이다. 6자회담과 9. 19 공동성명은 지금 난파 상태에 처해 있다. “거 봐라, 그럴 줄 알았다.” “미국이 9. 19 공동성명을 실행할 것이라고 믿는 것이 얼마나 순진한 생각이며, 북은 체제와 정권 유지를 위해서라면 그 어떤 것도 할 수 있는 집단이다” 맞다. 그러나 그러한 분석과 전망이 현실화될수록 분석과 전망의 올바름이 입증되는 효과는 좌파의 정치적 입지는 점점 축소되고, 대중의 고통과 희생은 더욱 커지는 것뿐이다. 그렇다면 운동의 방향과 실천 방안은 바로 9. 19 공동성명이 실행될 수 있도록 해야 하는 것이다. 6자회담 당사국 중 9. 19 공동성명을 문자 그대로 일관되고 지속적으로 실행할 의지가 있는 당사국은 없다. 그들 모두는 언제든지 자신들의 이해와 맞지 않으면 한낱 휴지조각으로 만들려 하고 있으며, 이미 그렇게 하고 있다. 이런 상황을 그대로 놔둔 채 바라보고만 있어서는 아무런 진전도 기대할 수 없다.

좌파가 나서서 9. 19 공동성명을 되살리는 투쟁을 즉각 시작해야 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좌파는 9. 19 공동성명을 분석하고 전망하는 데 있어서는 관심을 보였지만, 그것을 좌파 또는 노동자계급의 독자적인 정치적 입장과 태도를 갖고 하나의 실천 또는 투쟁으로 조직하는 데에는 아무런 관심도 보이지 않고 있으며 그럴 필요도 전혀 느끼지 못하고 있다. 9. 19 공동성명을 정권의 성과와 연결하려는 노무현 정부를 비판하는 것은 그 자체로 필요하다. 또한 9. 19 공동성명을 북의 정치적 승리로 포장하거나 북핵 문제가 풀릴 수 있는 절대적 기준으로 삼으려는 민족주의 진영을 비판하는 것도 당연하다. 그러나 이것들과 9. 19 공동성명을 어떻게 실현하게 할 수 있을 것인가를 고민하는 것과는 구별해야 한다. 9. 19 공동성명이 실행될 수 있다면 이는 분명 역사의 진보이며, 계급문제를 해결해 나가는 과정에서 거쳐도 괜찮은 도정이다. 따라서 좌파는 노무현 정부의 이중대가 되는 것을 두려워하거나 민족문제에 개입되는 것을 꺼려하는 정치적 소심함과 무능력을 탓할지언정 그로부터 잃을 게 많지 않다는 사실을 인지해야 한다.

좌파는 9. 19 공동성명 실행 요구를 하나의 준거로 삼아 한편으로는 미국의 대북 적대정책 및 안보리 결의안을 강력 규탄하고 이에 대한 대중 저항을 이끌어 내야 한다. 다른 한편으로 노무현 정부와 민족주의 진영에게도 일관되고 지속적으로 9. 19 공동성명을 실행에 옮기는 데 나설 것을 촉구하고 압박할 필요가 있다. 마찬가지로 북에 대해서도 9. 19 공동성명의 합의에 따라, 또한 자신이 주장한 바대로 비핵화 원칙을 최종적으로 실현할 것을 요구해야 한다. 좌파의 독자적 정치가 성립될 수 있는 공간과 여지는 분명히 존재하고 있다.

좌파의 전략적 목표는 한(조선)반도와 동북아에서의 평화체제를 구축하는 것이다. 이를 위해 넓게는 전 세계 투쟁하는 반제, 반전, 반신자유주의 대중과의 국제연대투쟁에의 적극적인 참여와 그의 조성을 위한 능동적인 활동이 요구되고 있다. 보다 직접적으로는 동북아에서의 아래로부터의 연대투쟁을 이끌어 낼 수 있는 실질적인 행위를 실천에 옮겨야 한다. 그러나 안타까운 것은 이것들은 아직 당위로만 얘기되고 있거나, 현실 정세에 대한 구체적이고 직접적인 주장과 요구(위에서 말한 바와 같은 9. 19 공동성명 실행을 촉구하는 것과 같은)를 하는 것과는 분리된 채 추상적이고 원칙적 차원에서만 제기하고 있는 현실이다.

이러한 안타까움이 존재하는 이면에는 다음과 같은 정세 분석과 정치적 태도가 짙게 깔려 있다. 무엇보다 동북아에서의 평화체제 실현이 현실화되는 것은 어떤 면에서 불가능하거나 먼 미래의 일일 수밖에 없다는 정체적이고 대기론적인 정세 분석을 들 수 있다. 이러한 정세 분석은 미국 제국주의가 동북아에서 평화체제가 성립되는 것을 결코 원치 않고 있다는 측면만을 단편적, 일면적으로 사고하거나 평화체제가 실현되는 현실태는 결국 미국 제국주의가 주도하는 매우 제한적이거나 심지어 반동적인 어떤 것일 수밖에 없다는 냉소적 태도와 함께하고 있다. 그러나 이를 뒤집어보면 바로 그렇기 때문에 동북아에서의 평화체제를 실현하는 것을 운동의 목표와 방향으로 설정해야 이유와 근거가 될 수 있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현실 계급 역학상 비록 미국 제국주의가 주도하는 그러한 양태를 보일지라도 지금보다 점진적으로나마 동북아 정세를 완화시킬 수 있는 여지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제국주의 사이의 이해관계가 언제나 일치하는 것도 아니며, 제국주의 국내 정치 조건도 변화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럴 경우 좌파와 노동자계급에게도 기회는 주어질 수 있다. 문제는 그러한 정세를 포착할 수 있는 정치적 능력과 그러한 기회를 타고 넘을 수 있는 일상적 축적을 얼마나 했는가에 달려 있다. 아래로부터의 노동자 민중운동의 강화를 통한, 또한 동북아 역내에서의 노동자 민중 사이의 국제적 연대투쟁을 통한 평화체제 실현도 그것이 단지 당위나 추상에 머물지 않기 위해서라도, 동시에 그를 실현할 수 있는 조건을 창출하기 위해서도 현실 정세에 대한 개입 전술이 더욱 절실히 요구되고 있다. 냉정하게 말하면 좌파에게 그 이상의 정치적 목표를 설정할 수 있는 정치 역량과 일상적 축적 정도는 매우 미흡하다. 그렇기 때문에 바로 이러한 과정을 통해 역량을 강화하고 일상적 축적을 해 나가야 할 필요가 발생하는 것이다. 이 점에서 좌파는 망설이거나 선택을 주저할 이유가 없다.

한편 좌파는 북핵 문제에 가려 한미FTA가 대중들의 관심에서 멀어질 것을 소극적으로 염려할 것이 아니라, 물론 그 차원에서 필요한 대응을 마련해야겠지만, 오히려 북핵 문제에 대한 전면적 대응을 통해 한미FTA 투쟁을 어떻게 배치할 것인가를 고민하는 역의 발상을 모색할 필요가 있다. 현실을 나의 것으로 당장 만들기 어려운 조건 아래에서는 현실의 한 복판을 횡단하는 것도 하나의 방안이 될 수 있다. 또한 좌파는 개성공단 사업이나 금강산 관광 사업에 대해서도 굳이 반대해야 할 아무런 이유가 없으며, 오히려 이에 대한 부시 정부의 간섭과 압력에 대해 맞서 강력히 대응해야 한다. 개성공단과 금강산 사업은 부시 정부와 국내 보수진영이 주장하는 것과 같이 북 정권의 생존‘만’을 유지시켜주거나 일부 좌파에서 보이고 있는 것과 같은 지배계급의 이해‘만’을 낳는 것도 아니다. 그 의도가 어디에 있든 간에 개성공단과 금강산 사업이 가져다주는 ‘완충’ 역할은 결코 작은 것이 아니다. 당연히 PSI(대량살상무기 확산방지구상)에의 참여를 요구하는 부시 정부를 규탄하는 것과 함께 노무현 정부를 향해서도 이에 응하지 말 것을 분명히 요구해야 한다. 이러한 요구나 주장이 좌파의 기존 태도나 행보에 비춰 어색할 수 있겠지만 그 과정을 통해 새로운 진로를 개척해 나갈 수 있다면 잠시의 수줍음은 기꺼이 받아들여야 한다.

끝으로 2007년 대선과 2008년 총선 정국까지를 염두에 둔 공동실천을 지금부터 준비해야 한다. 그러한 호흡을 갖고 이 일련의 과정을 관통하는 속에서 북핵 문제, 한(조선)반도 문제, 동북아 문제에 대한 좌파 또는 노동자계급의 독자적인 의제 설정과 그에 따른 정치 행위를 과감하게 펼쳐 나가야 한다. 신자유주의 세계화 반대 투쟁과 동북아 평화체제 실현과는 서로 별개의 것이 아니라 한 몸의 각각 다른 측면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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