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떡하지요? 대추리에 남겨진 ‘평화의 마음’들을

[기고] 대추리 평화문화예술작품들의 운명을 묻다

지난 3년여 동안 팽성읍 대추리·도두리 주민들은 평택 미군기지 이전확장에 반대하며 싸워 왔습니다. 그러나 토지 강제수용에 이어, 대추리·도두리 일대를 준군사지역으로 설정하고, 농토에 철책을 설치하는 등, 준계엄지역에 가까운 압박을 가해 온 국방부와 정부의 강경한 대처에 급기야 힘을 잃고 이번 3월말과 4월 초순까지 공동이주를 해가기로 결정된 상태입니다.

  참세상 자료사진

대추리·도두리 주민들은 그간 미군기지에 밀려 세 번의 이사를 해야 했습니다. 맨손으로 바다를 메워, 농토를 만들었고, 학교를 세웠습니다. 그러나 평화롭게 살고 싶은 그들의 염원은 산산조각이 나 이제 다시 칠십 노구를 이끌고 낯선 곳으로 향해야 합니다. 그들의 축 처진 어깨 위에 한국 근현대사의 질곡이 바위덩어리처럼 얹혀 있음을 봅니다. 그들에게 평화를 안겨주기 위해, 늘 긴장의 먹구름이 감도는 한반도에 평화의 지대를 넓히기 위해, 그간 3년여 동안 수많은 사람들이 평택지킴이 등으로 함께 해 왔습니다.

그 사람들 중 주요한 이들이 ‘들사람들’로 알려진 문화예술인들이었습니다. 노래의 한 구절처럼 “누가 나에게 이 길을 가라하지 않았”음에도 자발적으로 대추리도두리로 그들은 몰려 들었습니다. 장구와 북과 기타를 들고 왔고, 시인 소설가들은 펜을 들고 왔습니다. 미술인들과 만화가들이 붓을 들고 왔습니다. 굿패가 들어왔고, 시대의 춤꾼들이 들어 왔습니다. 반기는 이 하나 없어도, 누가 차비 한 푼 건네주지 않아도, 그들은 빈들에서 서서 그 땅의 평화를 기원하는 수많은 의식들을 치뤘습니다.

어느 틈에 마을은 평화문화예술마을로 다시 태어나고 있었습니다. 황새울벌을 지키기 위해 ‘들지킴이(문무인상)’과 ‘미사일 솟대’ 등이 들어 왔습니다. 대추초교를 지키기 위해 ‘전봉준 상’이 들어 왔습니다. 대추초교 유리창엔 주민들의 초상이 그려졌습니다. 농협창고를 지키는 수호신으로 ‘들도깨비’가 그려졌습니다. 마을 초입에는 ‘솔부엉이’와 인천의 ‘기차길 옆 공부방’ 어린이들이 들어와 그린 ‘평화 염원벽’이 그려졌습니다. 빈 마을 벽에는 시인들이 들어와 벽시를 적고 그리기 시작했습니다. 우리의 삶을 그린 ‘가족’이 그려지고, 수많은 대추리도두리 농민들의 형상들이 아로새겨 졌습니다. 빈 벽에는 시인들이 시를 적고 그리기 시작했습니다. 만화가들이 들어와 벽화 작업에 동참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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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게 삶이었고 예술이었습니다. 대추리도두리엔 싸움과 갈등만이 있었던 것이 아닙니다. 그곳에선 전 세계 어느 곳에서도 찾아볼 수 없던 각종 문화의 향연이 벌어졌습니다. 삶과 일과 노동과 대지가 분리되지 않고 하나로 합일되어 내뿜는 그 건강한 삶의 향기에 우리는 어떤 꽃내음에 취한 것보다 더한 문화적 중독을 느꼈습니다.

밤마다 어둔 시대를 밝히는 평화의 촛불이 켜졌고, 날마다 춤과 연극과 풍물과 굿과 퍼포먼스와 노래가 울려 퍼졌습니다. 이렇게 아름다운 마을이 세계 어느 나라에 있었을까요. 너무도 영민하고 눈이 초롱한 별빛 같은 청년들이 아예 마을로 이사 들어와 농사일을 돕고 배워 나갔습니다. 국가가 내쫒지 않았다면, 그들은 그곳에서 수많은 인류의 바램인 진정한 공동체의 문화와 가치를 실험하고, 만들어가는 새로운 인류의 일꾼들이 되었을 것입니다.

기성 언론들과 정부는 전쟁기지를 빨리 세워야 한다는 미명 아래 평택을 갈등과 공포가 있는 곳으로 주로 그려댔지만 실상 이렇게 대추리·도두리에서 일어났던 일은 그들의 상상을 훨씬 뛰어넘는 평화의 공동체, 연대의 공동체, 나눔의 공동체, 사랑의 공동체에 대한 실험이었고, 그 에너지로 충만한 기쁨의 공동체였습니다. 우리는 그곳에서 진정한 삶의 소통과 교류, 연대와 협력이 무엇인지를 배웠습니다. 마치 지난 광주 5.18 도청 광장 앞에서 피어난 진정한 인간의 온기가 무엇인가를 배웠던 것처럼요.

그런데 정부와 국방부는 다른 무엇이 아닌 이것을 파괴하고자 했습니다. 빼앗고자 했습니다. 우리는 이것을 빼앗기면 안 된다 했습니다. 그런 평화의 마음이 갖는 창조력은 무서웠습니다. 국방부가 무참히도 무너뜨려버린 대추초교의 잔해는 다시 야만을 증거하고, 평화를 기원하는 설치미술품으로 태어났습니다. 대추초교를 대신해 버려진 공터가 어느 틈에 평화예술 동산으로 태어났습니다. 무슨 회의를 통해서 한 것도 아니고, 누가 돈을 내서 만든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것 ‘평화’가 깨어지면 안된다는 마음을 가진 어떤 이가 먼저 나서면, 어느 곳에선가 꿈의 정령들처럼 사람들이 나타났습니다. 멀리 김해에서 잔디와 야생초들이 올라오고, 또 어디에서 나무가 올라오고, 옥잠화가 올라 왔습니다. 부서지고 내쫒겨진 사람들의 빈집에 굴러다니던 농짝문이, 서랍이, 어떤 생의 기억일지 모를 빛바랜 사진들이 모여 ‘마을 역사관’을 이루었습니다. 어떤 예술품들이 그런 진한 향기를 내뿜을 수 있을까요.

그런데 이제 그곳에서 주민들이 쫓겨난다고 합니다. 합의라고 하지만 거대한 국가권력과, 그 뒤에 도사린 더 거대한 권력, 더 호전적이고 광폭한 권력, 미국의 힘에 맞서 육순의 칠순의 마을 주민들이 버틸 수 있는 힘의 한계는 분명합니다. 그들은 다시 쫓겨나는 것입니다. 저만치 뒤에 남아 ‘엄마, 아빠’하고 부르듯 가녀리게 서 있는 ‘평화’를 남겨두고 그들은 비통한 가슴을 누르며 쫓겨나는 것입니다.

쫓겨나는 주민들을 배웅하며 외롭게 서 있는 ‘평화’들 속에 우리 문화예술인들이 작업해 온 수많은 벽시와 벽화, 설치미술품들이 남아 있습니다. 그들의 운명은 도대체 어떻게 되는 것일까요. 가난하고 따뜻한 예술가들의 손을 통해 곱게 태어난 그들의 몸을 살육할 손은 과연 어떤 것들일까요. 포크레인의 차가운 삽날? 기중기로 들어 때리는 뭉툭하고 둔중한 해머, 여의도에서 농민들의 머리를 찍고, 비정규직건설일용노동자 하중근의 머리를 박살냈을 그런 폭력 앞에서 이제 우리의 ‘평화’들은 외롭게 무너져가야 하는 걸까요. 다시는 이런 전쟁과 야만과 폭력이 난무하는 세상에는 태어나지 않고 싶다는 절규가 벌써부터 들리는 듯합니다.

우리 사회의 건강함을 지켜나가는 힘은 물론 국가권력과 자본에게도 있겠지만, 무엇보다 오늘도 평등하고 평화로운 세상을 위해 힘써 일하는 양심적인 시민사회에서 나오지 않는가 생각해 봅니다. 우리는 그런 건강한 시민들이 대추리의 마지막을 함께 보아주기를 바랍니다. 대추리에서 우리가 소중히 보듬어 내 와야 할 것과 보존되어야 할 것들이 어떤 마음이며, 어떤 물상들인지를 판단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굳이 거론치 않더라도, 문화예술품은 그 시대의 음과 양을 골고루 다룹니다. 갈등과 화해의 현장을 모두 담습니다. 우리는 헌법을 통해서 이런 창작과 표현의 자유를 보장하고 있습니다. 과거 사회 갈등의 시기에 불법으로 취급당했던 작품들이 지금은 국립현대미술관 등 유수한 기관들에 의해 중요한 현대사의 문화예술 자료로 전시 보관되고 있습니다. 전쟁 시기에도 문화예술품들은 함부로 파괴되지 않습니다.

우리 문화예술인들은 무엇보다 주민들의 새 터전으로 그 ‘평화’의 마음들이 함께 옮겨지기를 바랍니다. 물론 포크레인 삽날에 무너져 내려도 좋습니다. 그런 죽음까지를 우리는 기억할 테니까요. 그런 역사가 있었다는 것이 우리 후세들에게 물려질 것이니까요. 그런 무너져 내린 아픔이 우릴 또 어딘가에 서 있게 만들테니까요.

정녕, 이 ‘평화’의 마음들을 이 국가와 국방부는 어떻게 할 셈이지요?

시민 여러분! 정녕, 이 ‘평화’의 마음들을 어떻게 하는 것이 좋을까요?

대답해 주세요.

덧붙이는 말

문화예술인들은 3월 24일 오후 4시 대추리 농협창고에서 <대추리·도두리 헌정 반전평화 시산문선 『그곳에 마을이 있었다』 출판 기념 및 헌정식>에 참여하여, 이 문제를 논의할 계획입니다. 이날은 935차에 이른 마지막 평화 촛불문화제가 있는 날입니다.

송경동 님은 민족문학작가회의 자유실천위원장으로 일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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