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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주의와 전쟁, 사회주의와 평화

[해방을향한인티파다](47) - 사람들의 생각과 행동 방식도 바뀌어야

자본주의와 전쟁

사람의 생김새와 성격이 다르듯 전쟁도 여러 가지 생김새와 성격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요즘 벌어진 전쟁은 과거에 비하면 조금 다른 성격을 갖기도 합니다.

예를 들어 과거에는 전쟁을 국가에서 관리 했습니다. 그래서 국가가 군인들을 관리하고 무기를 생산했습니다. 그런데 요즘은 무기를 자본이 생산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리고 무기를 소비하기 위해 전쟁을 필요로 합니다.

  록히드 마틴( http://www.lockheedmartin.com/ )에서 생산한 F-22. 평화는 무기 산업에게 위기이지만 전쟁은 기회이자 호황이 됩니다.

국가가 전쟁을 하기 위해서 무기를 필요로 하는 것이 아니라 자본이 무기를 팔기 위해 전쟁을 필요로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미국-소련 사이의 냉전의 해체는 자본주의의 승리가 아니라 자본주의의 위기가 될 수도 있는 것입니다.

소련이라는 거대한 적을 앞에 두고 미국뿐만 아니라 세계 곳곳에 공포심을 심으면서 무기를 사라고 했습니다. 또 미국과 소련이 직접 맞붙었다가는 혹시 있을지도 모르는 핵을 통한 공멸 때문에 소련과 직접 대결하기 보다는 아시아, 아프리카 등지에서 전쟁을 일으켜 무기를 소비하게 만들었습니다. 그런데 소련이 갑자기 무너지자 무기의 생산과 판매도 어려움을 겪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지금은 ‘테러’라는 새로운 적을 만들어 전쟁을 계속 벌이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을 달리 말하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1, 2차 세계대전이 유럽 제국주의 국가끼리의 경쟁과 투쟁으로 일어나 수백만의 목숨을 앗아가는 동안 미국은 경제 호황을 누리듯 자본이 전쟁을 통해 이윤을 챙길수록 전쟁은 우연이 아니라 필연이 됩니다.

전쟁이 우연이 아니라 자본주의의 필연이라면 전쟁을 멈추는 방법은 자본주의 체제를 극복하는 것입니다. 자본주의를 극복한다는 것은 돈을 사용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사회관계의 변화입니다.

예를 들어 제가 시장 가서 오이 다섯 개를 사면서 천원을 지불했습니다. 그러면 오이를 팔던 사람은 야채 팔아 모은 돈으로 집에 가면서 차에 기름을 넣습니다. 그리고 주유소 사장은 기름 팔아 번 돈을 정유회사에 가져다줍니다. 그러면 정유회사는 석유 팔아 번 돈을 가지고 이라크에서 보다 쉽게 싼 석유를 얻기 위해 정당과 정부 관료들에게 돈을 가져다줍니다. 이라크를 어찌 잘 해서 더 큰 돈벌이를 해보자구요. 그러면 한국 정부는 이라크에 한국군을 파병해서 석유 자원을 확보할 힘으로 사용하게 됩니다.

자, 여기서 제가 오이 값으로 장사하는 분께 천원을 지불 했던 것이야 무슨 문제가 있겠습니까? 여기서 천원은 오이와 교환하기 위한 교환수단일 뿐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돈이 정유회사로 들어가고 이렇게 쌓이고 쌓인 돈을 가지고 정유회사가 국가 권력을 움직이면서부터 돈은 종이가 아니라 군인과 총으로 바뀌고, 교환을 위한 수단에서 다른 국가를 지배하기 위한 힘으로 바뀌고 전쟁으로 바뀌게 됩니다.

사회주의와 평화

자본주의를 극복하자는 것은 교환 수단으로써의 돈을 없애자는 것이 아니라 돈을 매개로 해서 벌어지는 사회관계, 권력관계를 바꾸자는 것입니다. 그리고 돈을 매개로 하는 사회관계와 권력관계를 바꾸는 방법은 간단합니다. 하나는 누구나 돈으로 권력을 얻을 수 없게 하든가, 아니면 어떤 사람이 일방적으로 사회와 국가를 움직일만한 돈을 갖지 못하게 하면 되는 겁니다.

그런데 지금은 어떻습니까? 많은 부를 축적한 이들은 돈을 가지고 기업도, 국가도 움직입니다. 그들이 더 많은 부와 전쟁을 필요로 하면 기업도, 국가도 전쟁을 향해 움직입니다.

  케테 콜비츠 - 죽은 아이를 안은 여인

그래서 먼저 기업의 목적을 이윤이 아니라 사회적 필요의 생산과 민중들의 연대, 안정된 생활로 바꿔야 합니다. 기업의 목적이 이윤이 되고, 전쟁이 이윤의 중요한 수단이 될 때 전쟁은 자본주의 사회의 만연한, 치료되지 않는 질병으로 남게 될 것입니다.

그러면 전쟁 무기를 생산하던 기업과 노동자들은 어떻게 하냐구요? 원자력 발전과 마찬가지입니다. 사회적 전환의 과정을 거쳐야 합니다. 사회에 해가 되는 기업의 생산은 점차 줄여나가고 거기서 일하던 노동자들도 다른 일자리를 얻을 수 있도록 사회가 보장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 비용은 전투기 몇 대만 수입하지 않아도 충분합니다.

기업의 운영도 마찬가지입니다. 미국 정부를 석유/무기 기업들이 쥐고 흔들고, 이 기업들을 소수의 자본가들이 쥐고 흔들 때 전쟁은 자본가들의 부를 위해 치러야 하는 통과의례가 되어 버립니다. 기업의 권력을 소수가 독점하고, 기업이 생산한 이윤이 또다시 그 소수에게 독점 될 때 전쟁이 어떻게 멈추겠습니까? 기업의 운영은 소수의 돈 많은 자본가가 아니라 기업 생산에 참여하는 노동자와 기업 운영과 관계 맺고 있는 시민들이 해야 합니다.

다른 예로, 만약 한국 사회에서 개인이 동산, 부동산 모두 포함해서 10억원이상 소유할 수 없게 하고 그 나머지 소유한 것은 한국뿐만 아니라 전 세계에 가난한 이들을 위해 사용하게 되면 더 많은 부를 축적하기 위한 전쟁을 벌일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돈으로 정치와 사회를 움직이던 힘도 많이 줄어들 거구요.

그리고 권력과 이윤을 위한 전쟁을 지휘하고 지원했던 정치인들에게는 피선거권을 제한하는 등 국가 가까이에 가지 못하게 해야 합니다. 보통 선거권 제도 아래서 그게 가능하냐구요? 보통 선거권은 ‘보통’의 생각을 가진 사람이 가져야 합니다. 연쇄 살인 강간범을 사회로부터 한동안 격리 시키듯 살인을 풍선껌 씹듯이 하는 사람에게 선거권을 제한하는 것은 당연하지 않겠습니까?

새로운 사람

자본주의를 극복하고 다른 사회를 만든다는 것은 국가와 기업의 목적과 운영 방식에서부터 소유권 제도의 변화 그리고 또 중요한 것은 사람들의 생각과 행동 방식입니다.

예를 들어 전쟁으로 이윤을 크게 챙기는 기업의 노동자는 자신의 차를 더 비싼 차로 바꾸기 위해서라도 전쟁을 지지할 가능성이 높습니다. 나이지리아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든 이라크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듯 나에게 직접적인 피해는커녕 월급과 성과급만 오른다면 전쟁이 아니라 ‘개발’과 ‘진출’이라는 이름으로 전쟁을 지지하는 노동자가 될 수 있는 겁니다.

아이를 잃은 남의 부모 눈에 피눈물이 맺혀도 이익만 된다면 그런 일 정도는 눈을 감고 보지 않을 의지를 가진 것이 한국의 많은 부모들이지 않습니까? 그러면서도 자신의 아이들이 자라면서 겪게 될 또 다른 전쟁의 가능성을 보지 못하고 있구요.

그래서 사람들의 생각과 행동이 담백해져야 합니다. 가볍게 입고 먹는 것으로 만족하고 과잉된 욕망이나 과시욕을 버려야 합니다. 행복과 기쁨을 느끼는 방식이 바뀌어야 합니다. 내가 무슨 차와 집을 가지고 있고 어떤 옷을 입을지 때문에 남들이 피토하는 고통을 겪는데 도와주기는커녕 박수를 치고 있어야 되겠습니까?

자본주의와 전쟁은 역사적으로 태어난 전염병입니다. 역사적이라고 하는 것은 언제나 그랬던, 당연한 것이 아니라 언젠가, 어떤 이유 때문에 생겨났다는 것이며 또 때가 되면 어떤 이유로 사라질 수도 것입니다. 전염병이라고 하는 것은 남들에게 퍼져 있는 병이라고 할지라도 그 전염병을 함께 힘을 모아 막지 못한다면 언젠가는 나에게도 닥칠 거라는 겁니다.

사회주의와 평화는 역사적으로 태어날 희망입니다. 역사적이라는 것은 새로운 사회를 향한 도전이 실패할 때도 있고 어려울 때도 있지만 언젠가는 인간의 노력으로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희망이라는 것은 각 개인이 생각하고 기쁨을 느끼는 방식부터 국가나 기업, 사회가 관계 맺고 운영하는 방식이 달라지고 새로워진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제는 국가나 기업, 교육, 언론 등도 부나 권력이 아니라 자유와 평등과 같은 가치를 최고의 목표로 삼고 행동합니다. 개인도 부나 권력을 과시 또는 욕망하지 않고 사람의 삶과 사회를 이해하고 다른 이들을 돕고 아껴주며 연대하는 것을 최고의 기쁨이자 누구나가 가져야 할 도덕적 가치로 생각합니다.

좋은 말이지만 그런 것이 어떻게 가능 하냐구요? 쉽지 않은 일이라는 것을 누가 모르겠습니까. 그래서 새로운 사회를 위해서는 지배보다는 연대를, 전쟁보다는 평화를 선택하고 행동하는 사람들이 힘을 모으고, 힘으로 모여야 합니다. 수천만의 사람이 미국보고 이라크 공격하지 말라고 했지만 이미 수십만이 죽어간 것도 우리가 힘이 모자라기 때문이지요.

그리고 또 다른 하나의 방식은 멀리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곁에 있었고, 우리 곁에 있는 새로운 삶의 방식을 지금부터 실천하고 확산시켜 나가는 것입니다.

러시아에서 태어난 사람 크로포트킨이 쓴 책에 [상호부조론](얼마 전에 ‘만물은 서로 돕는다’라는 이름으로 나온)이란 것이 있습니다. 이 책의 장점은 지구별의 역사에서 동물이며 사람이 서로 싸움질만 해 온 것이 아니라 어떻게 서로 돕고 살아왔는지를 구체적 사례를 가지고 밝히는 것입니다. 오늘은 그 가운데 한 구절을 인용하는 것으로 제 얘기를 마치겠습니다.

빈민가에서 살고 있는 여의사가 최근에 나에게 이야기 해 주었다. “그들이 얼마나 서로 도우고 있는지 당신은 생각이 미치지 못할 것입니다. 태어날 갓난애 준비를 아무 것도 못하고 있거나, 하고 싶어도 할 수가 없는 경우-그것은 흔히 있는 일입니다-모든 이웃 사람들이 태어날 애기를 위해서 무엇인가를 가지고 옵니다. 산모가 기동을 하게 될 때까지는 언제나 이웃의 누군가가 애기를 보살펴 주고 다른 사람은 집안 일을 도와 주러 갑니다.” 이것은 보통의 습관인 것이다. - 크로포트킨, [상호부조론], 형설출판사, 1994년, 25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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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둥근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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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좋은글 잘 읽었읍니다. 나는 주로 경제 경영를 접하면서 가끔 이곳에 들어와 봅니다. 논리의 전개에 있어 좀 더 객관성을 추구할 때 자본주의의 우월성을 극복할 수 있지 않을까 합니다. 윤리 도덕 철학과 같은 인간 감성의 단어는 경제블럭에 의하여 소실된 현실을 안탑갑게 여기고는 있지만 그들의 주장에 상반되면서도 그들에게 설득력을 줄 수 있는 그러한 객관적 전개가 필요하지 않을까해서 덧붑쳐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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