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라노 복장학원’으로 유명한 로라노(본명 노명자)가 1947년 루아얄과 같은 19살에 갓 이혼한 몸으로 미 군용기를 개조한 비행기를 타고 여의도 공항을 떠나 로스엔젤레스로 패션 공부하러 출국할 때 온갖 비난을 퍼부었던 우리 사회와는 대조적이다.
아인슈타인은 1905년 발견한 ‘상대성이론’ 한 건으로 이후 50년 동안 잘 먹고 잘 살았다.
그러나 상대성이론은 전적으로 아인슈타인 혼자의 창작물이 아니었다. 첫 부인 밀레바 마리치의 수학적 해결이 없었다면 망상에 머물렀을 것이다. 파리 소르본 대학에서 강의하던 마리 퀴리 교수는 아인슈타인을 늘 ‘마리치 아인슈타인’이라고 불렀다. 그만큼 마리치의 업적을 높이 샀다.
세르비아 출신 밀레바 마리치는 태어나면서부터 고관절 탈골로 평생 장애로 살았다. 16년간 사랑한 한 남자의 부와 명성을 위해 그림자처럼 살아야 했던 그녀에게 명석한 수학적 재능은 독이었는지도 모른다.
1909년 취리히 대학 이론물리학 교수자리 하나가 비었다. 아버지와 함께 오스트리아 사회민주당에 참여했던 물리학자 아들러는 자신에게 온 제안을 아인슈타인에게 양보했다. 아인슈타인은 아들러가 사는 취리히로 이사 온다. 아들러가 살던 취리히 페스탈로치 거리 37번지는 혁명을 위해 베를린으로 간 로자 룩셈부르크가 살았던 집이다. 아들러의 아내 카챠는 밀레바 마리치, 아인슈타인, 아들러와 함께 민코프스키의 분석역학 강의를 들었던 동료였다.
유명해진 아인슈타인은 1916년 밀레바 마리치와 별거에 들어가고, 결국 1919년 정식 이혼한다. 아인슈타인은 그녀가 결핵을 앓아 다리를 절뚝거린다고 거짓말했다. 고관절 탈골 때문임을 뻔히 알고 있으면서도 이혼할 핑계거리를 찾아야 했다. 밀레바 마리치는 아인슈타인이 근친상간의 둘째 부인 엘자와 사치와 허영으로 살 때에도 아인슈타인을 위해 헌신했다.
마리치의 삶은 이후에도 봉건적 여성상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그래서 그녀에겐 ‘아인슈타인의 그림자’라는 별명이 붙어 다닌다.
둘 다 똑같이 식민지 지식인으로, 여성으로, 장애인으로 살았던 로자와 마리치의 삶은 1919년을 기점으로 극명하게 갈린다. 마리치가 아인슈타인에게 이혼당한 1919년, 로자는 바이마르 공화국의 초대 대통령이 된 변절한 사민주의자 프리드리히 에베르트가 보낸 장교에게 암살당해 라인 강에 버려진다.
프로이센(독일)의 식민지 폴란드에서 태어나 소아마비로 마리치처럼 다리를 절뚝거렸던 로자는 스파르타쿠스동맹을 이끌고 실패한 혁명의 불꽃으로 산화했다.
- 덧붙이는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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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호 님은 공공노조 교육선전실장으로 일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