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속

연정의 바보같은 사랑 (24) - 기륭전자 문제 해결을 위한 국회 농성 1일차

“약속하고 온 겁니다. 7월 10일 날, 이후에도 이 문제가 해결이 안 되면 다시 오기로 약속했었습니다.”
“약속의 형식이 이런 것은 아닙니다. 그거는 또 다른 약속이 있어야 합니다.”
“국회가 성지입니까? 어디든 가서 뜻을 전달할 수 있어요. 국회는 성지가 아니라고요.”
“여러분이 아무 데서나 이럴 수 있다는 생각은 잘못입니다. 항의 목적으로 오셨다면 항의 방법을 달리하세요. 현재 방법은 업무에 지장을 주는 것입니다.”
“국회의 업무는 국민을 위한 업무이고, 소외된 국민을 위한 업무에요.”
“국민 아무도 동의하지 않을 겁니다. 이런 식으로 하면 안 됩니다. 단 1명이라도 설득할 수 있는 방법으로 해주십시오.”
“적어도 미안함은 가지셔야죠.”


“52일을 굶은 사람들에게 죽음을 선고한 거에요. 홍준표 의원은 합의서가 왜 안 지켜졌는지 대답해야 합니다. 국민을 상대로 사기 친 겁니다.”
“나는 모릅니다.”
“모르는 것도 잘못이에요.”
“뭐 하러 오신 거에요? 염장 지르러 오신 거에요? 가세요. 우리한테 훈계할 시간에 독도나 잘 지키세요.”
“1,070일 동안 할 만큼 다 했어요. 그래도 안 돼서 죽으러 온 거에요. 마지막 선택권이에요.”
“어디 회의실 가서 30분 얘기를 하다가 옵시다. 이 정도 상태는 언제든 갈 수 있어요.”
“저 이제 국회 못 들어옵니다.”
“국회에 신종 블랙리스트가 있더라고요. 어떻게 국회에서 블랙리스트를 만들 수가 있냐고요.”
“오늘을 넘기면 원 구성이 어렵습니다.”
“민주당도, 민주노동당도 다 만나주는데, 여기만 안 만나주고 있습니다.”
“52일을 굶은 사회적 생명이 죽게 생겼습니다. 죽겠다고 관까지 올렸습니다. 이 두 사람을 살려야겠다는 생각에서 왔습니다. 그 사람들만 살아서 땅에 내려오면 저희는 내려갑니다. 이 시대 한나라당의 정체성이 뭔지를 증명하겠습니다.”



박계동 국회 사무총장이 와서 물까지 마셔가며 훈계를 포함한 대화를 유도한다. 기륭전자분회 조합원들과, ‘기륭비정규여성노동자 승리를 위한 공동대책위’(이하 ‘공대위’) 소속인 송경동 집행위원장과 효진 스님, 김정대 신부님의 목소리도 들린다.

“나도 물 좀 한 잔 마십시다.”
박계동 사무총장은 여유롭게 농성자들 앞에 앉아 농성자들이 먹던 물까지 먹어가며 30분가량 이야기를 하다가 갔다. 그 주변을 국회 직원과 경위들이 에워싸고 있었다. 그 사이 홍준표 한나라당 원내대표는 다른 문으로 유유히 원내대표실을 빠져나갔음을 우리는 조금 나중에서야 알았다.

  홍준표 원내대표실 앞 농성자들을 만나러 온 박계동 국회 사무총장

지난 7월 10일, 기륭전자분회 조합원들과 사회.종교계 대표로 구성된 공대위 성원들이 기륭 문제 해결을 요구하며 홍준표 한나라당 원내대표실을 방문했었다. 한나라당 홍준표 의원과 김성태 의원의 중재로 기륭전자 배영훈 대표이사가 참석한 가운데 지난 6월 7일 노사가 접근했던 안을 중심으로 교섭에 임하겠다는 합의서가 작성되었다. 6월 7일 안은 노조가 많은 부분 양보해서 ‘기륭전자의 자회사에서 1년 동안 근무하며 유예기간을 가진 후에 기륭전자의 정규직으로 일한다는 것’이었고, 7월 10일 합의서는 이에 기반 하여 교섭을 진행한다는 약속을 담은 것이었다.

하지만, 이후 마련된 교섭자리에 사측이 한나라당과 노동부의 협의를 통해 만들어서 나온 안은 ‘기륭전자와 무관한 제3자가 설립한 신설회사에 직업훈련 상황을 확인한 후에 근무를 하다가 2009년 12월에 기륭전자 정규직화 여부를 결정하여 정규직 근로계약을 체결한다’는 것으로 6월 7일 안을 전면 부정하는 것이었다.

이후 민주노동당과 야당 여성 국회의원들이 수차례 한나라당과 홍준표 원내대표에게 기륭문제 해결을 촉구했지만, 홍준표 원내대표는 “더 이상 해줄 것이 없다”라며 공대위 측의 면담 요구를 거절했다. 그래서 조합원들과 공대위 성원들이 직접 홍준표 원내대표실을 찾아갔지만, 이미 문은 굳게 잠겨있었고 이들을 맞이한 것은 국회 경위들뿐이었다. 그래서 결국 닫힌 문 앞에 연좌하고 밤을 맞이하게 되었다. 이날 정당 대표 면담 요청은 한나라당, 민주당, 민주노동당 3곳에 대해 이루어졌는데 이를 거부한 정당은 한나라당 뿐이었다.

“무서워서 만나주지도 않을 거면 국회의원 되지를 말던가...”


2시 30분에 시작된 농성이 시작된 지 벌써 열 시간이 훌쩍 넘었다. 이제 농성에 이력이 난 조합원들과 공대위 성원들은 덮을 이불 한 장 없는데도 누워서 잠을 잔다. 국회 쪽에서는 처음에는 자정이 지나면 칠 수도 있다고 위협을 하더니 그런 일은 없을 거라고 했다. 농성자들을 정신없게 하고, 홍준표 의원을 빼돌린 박계동 의원은 저녁 무렵 다시 와서 종교계 대표들에게 기륭전자 얘기를 인터넷으로 봤다며 “제가 뭘 할 수 있을지 고민해보겠습니다. 계시는 동안 불편함이 없도록 하겠습니다. 행사 때문에 나가봐야 해서...”라는 인사말을 하고 국회를 나갔다. 그 전에 왔을 때, 자신에게 거칠게 항의했던 이들에게는 눈길도 주지 않았다.

10시간 동안 참 많은 일이 있었고, 많은 이야기를 들었다. 7월 10일, 1차 정당 대표 면담 요청 방문 때 왔던 사람들이 국회 블랙리스트에 올라 출입에 어려움을 겪는 등 처음부터 쉽지 않았던 투쟁이었다. 국회는 1차 방문 때 왔던 이들의 기록에 “기륭”이라고 적었다고 한다. 이제 국회에서 “기륭”을 “기륭문제”를 모르는 사람은 없을 거다.

저녁때, 기륭전자 주변에 경찰 병력이 배치되어 순간 긴장감이 감돌다가 빠지고 있다는 소식에 안도의 한숨을 내쉬기도 했고, 이랜드 파업 4백일 투쟁에서 기륭 소식을 접한 한 대학생 기자가 출입을 저지당하자 국회 담을 넘어들어오려 하다가 연행되는 일도 있었다. 기륭전자 문제 해결을 위한 3당 원내대표 회담을 제안하는 민주노동당의 브리핑도 진행되었다. 김성태 의원실의 보좌관도 다녀갔는데, 김성태 의원은 현재 독도에 있다고 했다. 홍준표 원내대표에게 계속 전화를 걸고 있는데, 받지를 않는다고 했다.

KBS 앞에서 진행된 촛불집회 대오가 KBS 앞 촛불집회가 끝난 후에 국회 앞에 와서 촛불을 밝혀주기로 했다는 소식과 이랜드 4백일 투쟁을 마친 동지들이 국민은행 앞으로 와서 집회를 준비하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고마움에 기뻐하기도 한다. 하지만, 집회를 시작하기도 전에 전경들이 참가 대오를 에워싸고, 해산 명령을 하고 있다는 소식에 안타까워하기도 했다.

나는 오후 늦게서야 한 국회 직원이 “월요일 날 하셨어야죠. 토요일, 일요일은 아무도 없는데...” 하는 말에 오늘이 금요일인 줄을 안다. 나뿐만 아니라 많은 이들이 그랬다. 맞다. 이번 정당 면담 요구 공문 제목에 쓰여 있듯이, 우리에겐 정말 시간이 너무 없었다. 하루라도, 한 시간이라도, 단 일 분 일 초라도 더 빨리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실천을 필요로 했다. 오전에 기륭전자 앞 단식농성장에서 52일째 단식을 하는 흥이 언니의 몸무게는 35.7kg이었다.


청와대의 제동으로 국회 원 구성 합의가 결렬되어 곤경에 처해 있는 홍준표 원내대표의 처지가 어떤 면에서 지금 기륭분회 조합원들이 처해 있는 상황과 닮아있는 것 같기도 하다. 또, 지금 그를 살리기 위해 필요한 결단이 그가 기륭분회 조합원들을 살리기 위해 해야 할 결단과 적어도 형식의 면에서는 닮아있는 것도 같다. 김소연 분회장님은 “기륭문제의 해결은 의지와 결단의 문제”라고 늘 이야기했었다. 분명한 것은 ‘약속’은 지키기 위해 하는 것이고, 그것은 반드시 지켜져야 한다는 것이다.


  7월10일 홍준표 한나라당 원내대표실에서 홍준표 의원과 김성태 의원의 중재로 작성된 6월 7일 안에 기반한 성실교섭 합의서


이번 투쟁이 어떻게 될지 나는 예측할 수가 없다. 이곳에 들어온 이들 모두는 이 문제가 해결될 때까지, 단식 중인 동지들이 살아서 땅을 밟기 전에는 이곳을 나가지 않겠다고 한다. 자연스레 이곳에서도 단식농성이 시작된다.

나는 그저 바랄 뿐이다. 이 투쟁이 너무 길어지지 않기를, 그 누구도 다치거나 아프지 않기를, 곧 시작될 주말이 너무 외롭지도 처참하지도 않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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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준표 , 기륭 , 김소연 , 기륭문제 해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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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떼거리들..

    언제부턴가 떼로 몰려가 난리를 치면 법도, 정의도, 도덕도 없는 주장이 이기는 세상이 되어버렸다. 저들한테는 법이 필요가 없다. 지킬 필요도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남들한테는 법을 지키라고 떠든다.... 이 얼마나 웃지 못할 코메디인가..?

    자기들 입으로 법이 무슨 소용이냐..? 법이 밥먹여주냐..? 라고 고함을 치고, 잘들 떠들다가 자신들한테 필요하다 싶으면 뭔놈의 법은 그리도 잘 따지던지... 그게 거지습성 이라는 거야...

    너희들이 법으로 하자며..?
    그래서 법으로 하자 하면 법이 무슨 소용이냐..?
    송씨, 그 중님, 신부복 입은 분... 댁들이 한 얘기 아뇨..?
    입만 열면 욕하라고 시인이, 부처님이, 하나님이 그러더이까..?
    욕들은 어디서 그렇게 배우십니까..?

    문제를 해결한다는게 무조건 당신들 주장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거요..? 당신들 주장을 못받아들이면 무조건 잘못된거요..?
    어디서 배웠소..? 그게 민주주의 논리요..?
    그러니들 그러고들 살겠지만...

    민주주의란 대화와 타협이요. 당신들의 주장이 있으면 상대방의 주장도 들을 줄 알아야 하는거 아니요..? 그저 당신들 말에 토달면 무조건 반대고, 당신들은 억울한거고... 안그렇소..?
    송씨..? 당신은 제발 빠지지 그러나..? 어디가서 시인이라고 나불대지 맙시다... 시인이 뒷구멍으로 시를 쓴답니까..?
    나오는 족족 욕지거리 뿐이더구만요...
    스님은 불경좀 더 외시고, 참선도 좀 하고... 경박해서야..
    신부님은 그 까만 신부복은 벗고 나서시지요...
    남을 배려할 줄 모르는 신부님이 무슨 의복을 입을 자격이 있을까 생각됩니다.

    제발좀... 요즘같이 힘든 세상에 당신들만 억울하다고 무조건 당신들만 생각해 달라고 하는 생각과, 다른사람 죽여 놓고도 나만 피해자이고, 자기들만 살려달라는 헛소리가 사라지고, 법과 원칙에서 움직이는 세상을 그리워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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