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 위에서 살아가는 풀들은 내일을 기약할 수 없기 때문에 한 번 싹 터 자라기 시작하면 서둘러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어야 한다. 식물은 동물과 달리 한 번 뿌린 내린 곳을 떠날 수 없다. 이런 식물들이 살아남기 위해서는 그만큼 주어진 환경에 대한 적응력이 뛰어나야 한다. 식물들은 놀랄 만큼 유연하게 환경에 적응해간다.
길을 따라 길게 심어 놓은 회양목 아래서 자라는 마디풀과 바로 한 뼘 옆 보도블록 틈에서 자라는 마디풀은 도저히 같은 종이라고 볼 수 없을 만큼 다른 모습을 하고 있다.
회양목 아래서 뿌린 내린 마디풀은 옆으로 퍼지기보다 위를 향해 자라 오른다. 가지도 많이 치지 않고 쭉 자라나 회양목 위로 고개를 삐죽 내민다. 줄기의 마디 사이도 넓고 잎도 크다. 잎겨드랑이에 피는 꽃도 여러 개씩 달고 있다. 그에 견주어 보도블록 틈에서 자라는 마디풀은 땅을 기며 자란다. 줄기가 마디들로만 이어 붙여 놓은 듯 마디 사이 간격이 촘촘하다. 잎도 작고 그나마도 사람들의 발에 밟혀 성한 게 거의 없다. 호시탐탐 위를 향해 고개를 들어 보지만 여지없이 발에 밟혀 짓이겨지고 가지 끝 여기저기 그 흔적을 남기고 있다. 꽃도 잎겨드랑이에 한 개씩밖에 달고 있지 않는데, 그마저도 떨어져 나갔는지 보이지 않는 게 많다.
회양목 아래서 자라던 마디풀은 쉽게 사람 눈에 띄어 장마 전 제초 작업할 때 잘려나가 버렸다. 하지만 보도블록 틈에서 자라는 마디풀은 살아남아 여전히 꽃을 한 송이, 한 송이 피우고 있다. 여름내 그렇게 꽃을 피울 것 같다.
사람의 발길이 뜸한 변두리 길가에서 자라는 마디풀은 이것들과는 또 다른 모습으로 자란다. 땅을 기면서 사방으로 넓게 가지를 뻗어 자라다가 가지를 세워 위로 자라 오르기도 한다. 품도 넓고 키도 크다. 이렇게 활개를 치며 자라는 마디풀을 보면 원래 마디풀이 자라는 곳이 이런 데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이런 환경이 갈수록 줄어들고 있다. 그렇지만 마디풀은 환경의 변화에 잘 적응해왔다. 요즘은 수많은 사람이 오고가는 보도블록 틈에서 마디풀을 더 흔히 볼 수 있게 되었다.
마디풀은 함께 길에서 자라는 질경이만큼이나 생명력이 질긴 풀이다. 뜯어 말려도 노랗게 색이 바래지지 않고 여전히 푸르다. 그런 질긴 생명력 때문인지 마디풀은 동서양에서 두루 약재로 쓰여 왔다. 마디풀은 줄기에 마디가 많아서 이름도 그렇게 붙여졌다. 마디풀은 북반구 온대 지방에 걸쳐 넓게 퍼져 자라는 풀인데, 중국에서는 백 개의 마디를 뜻하는 '백절(百節)'이라 불리고 영어 이름인 'centynody'도 중국 이름과 같은 뜻으로 붙여졌다. 그만큼 이 풀의 마디가 인상적인가 보다.
마디풀은 마디에서 잎과 꽃을 낸다. 마디마다 한 장의 잎을 내고 잎겨드랑이에서 한 개 또는 여러 개의 꽃이 핀다. 마디풀은 잎은 꾸밈이 없는데다 제법 두툼해서 다부져 보인다. 마디풀의 꽃은 너무 작아서 잘 들여다봐야 겨우 볼 수 있다. 꽃잎도 없는 이 작은 꽃이 그래도 꽃받침의 가장자리를 붉거나 희게 해서 꽃잎처럼 꾸몄다. 자세히 보면 발그레한 꽃이 앙증맞다.
마디는 내일을 기약할 수 없는 풀들이 변화된 환경에 적응하며 살아가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 마디는 밟히거나 베어졌을 때 "마디에서 뿌리를 내리고 거기서 다시 성장을 시작할 수 있도록 설계되어 있다. 줄기의 중간 부분이 꺾여도 마디가 기반이 되어 뿌리를 뻗고 다시 줄기를 키우기 시작하는 것이다." 달개비나 바랭이 따위의 풀들이 이런 마디의 기능이 잘 발달한 풀이다. 마디풀은 달개비나 바랭이처럼 마디가 발달해 있지는 않은 것 같다. 달개비는 땅에 닿지 않은 줄기의 마디에서도 허공에 길게 뿌리를 내린다. 줄기의 마디에서 뿌리를 내리며 뻗어나가는 바랭이를 보면 식물이 한 번 뿌리는 내린 것을 떠날 수 없다는 말이 무색해지기도 한다. "마디는 성장의 궤적이며 다시금 성장을 시작하는 원점이기도 하다."(「잡초의 성공 전략」)
사람이 살아가는 데도 마디가 필요하다. 마디가 있는 삶에는 완전한 실패란 없다. 시행착오가 있을 뿐이다. 싸움은 다 끝났으니 전처럼 일상으로, 과거로 돌아가라는 말은 역사를 거꾸로 돌리려는 자들의 악(惡)선동일 뿐이다. 싸움으로 다져진 마디는 지난 싸움의 끝이지만 새로운 싸움의 시작이기도 하다. 이미 우리는 어제의 우리가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