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낡은책4] 나의 文酒 40년(남재희,2004)

주류 사회의 술문화 뒷모습

언론. 정치, 풍속사 - 나의 文酒 40년 (남재희, 민음사, 2004, 314쪽)

글쓴이 남재희는 1952년 청주고를 나와 58년 서울대 법대를 졸업하면서 신생 한국일보에 들어갔다. 62년 조선일보로 옮겼다가 유신 정권 초기인 72년 서울신문 편집국장이 됐다.

유신정권 끝 무렵인 79년 10대 국회의원이 된 뒤 민정당까지 내리 4선 의원을 지냈다. 94년 노동부장관을 지내다가 요새는 인터넷신문 프레시안에 한달에 한번씩 칼럼을 쓴다. 프레시안에 가장 최근에 쓴 칼럼 <진보세력은 맥이 빠졌다는데…>에서 남재희는 맥 빠진 이 땅의 진보세력에 훈수를 두었다. 지난달 23일의 일이다.

60년대 중반부터 남재희와 사귄 고은 시인은 전작시 <만인보> 제11권에 ‘남재희’편에서 “의식은 야(野)에 있으나 / 현실은 여(與)에 있었다. / 꿈은 진보에 있으나 / 체질은 보수에 있었다. / 시대는 이런 사람에게 술을 주었다. / 술 취해 집에 돌아가면 / 3만 권의 책이 있었다. / 법과 대학 동기인 / 아내와 / 데모하는 딸의 빈방이 있었다”고 했다.

남재희에게 과연 진보적 야성(野性)이란 게 있었을까. 그가 지난 2004년에 쓴 책 <언론 정치 풍속사>(민음사, 314쪽)는 ‘나의 文酒 40년’이란 부제가 달려 있다. 남씨의 이 책에 등장하는 인물은 장차관에 국회의원, 신문사주, 소설가, 시인, 언론인 등 대부분 내노라는 한국사회 주류들이다.

요정에서 마담 끼고 술 마시며(酒), 논했던 그의 문학과 인생(文) 넋두리를 듣노라면 함께 술 마셨던 사람이 주류만 있는게 아니다. 게중엔 지금도 진보진영에서 이름을 날리는 유명인들도 많다.

남 씨는 김영삼 정권때 노동부 장관을 지내면서 법외노조였던 민주노총의 권영길 위원장, 이갑용 위원장, 문성현 금속연맹 위원장과 술에 얽힌 일화를 소개한다. 규탄의 대상이 노동부장관과 규탄의 주체였던 민주노총 위원장의 술자리는 어땠을까. 이광호 레디앙 대표, 프레시안의 박인규 대표 등과 어울린 술자리도 나온다.

이 책엔 MB정권의 대표적 낙하산으로 지금은 방송통신위원장이 된 최시중 씨가 민주노동당의 권영길.천영세 전현직 의원과 하나의 이야기 속에서 거론된다.

아래에 그의 책을 요약해봤다. 수많은 군상들의 벌거벗은 알몸을 볼 수 있다.


1부 생활 풍습의 중요한 한 단면 (1999년)

술집 마담에게 빠진 진보당 출신 민정당 의원


1999년은 죽산 조봉암 선생의 탄신 100주년이자 사법 살인 40주년이다. 기념행사에서 만난 청곡 윤길중 선생은 장사 같던 건강은 어디가고 병색이 짙다. 진보당 사건 때 간사장이던 청곡 윤길중은 45살이 채 안 된 홍안의 미청년이었다.

박경석 전 동아일보 정치부장은 윤길중이 진보당을 한 건 죽산을 좋아해 따른 것이지 원래는 ‘털이 난 보수’였다고 말한다. 일제때 고등문관시험(지금의 고시) 합격 후 여러 군의 군수를 지냈다.

윤길중이 민정당으로 옮겨 국회 부의장을 할 때 서울서 첫 손가락 꼽히는 유명한 살롱 마담에게 드러내 놓고 호감을 보여 후배들이 놀리기도 했다. 청곡 좋아하는 모임인 청우회도 있다. 청곡이 여당인 민정당에 들어가고부터 그의 글씨 값이 반 이상 뚝 떨어졌다.

술집 아가씨를 아낀 독립운동가

언론인 소설가이자 독립운동을 했던 우인 송지영(1916-1989)는 수호지에 나오는 송강을 연상케 하는 선비다. 고향은 평안도인데 선친이 정감록파여서 박용만 의원, 김계원 육군 대장 등의 집안과 함께 집단으로 경북 영주군 풍기로 이사왔다. 동아일보에 관계하다가 중국 가 대학공부도 하고 독립운동했다. 해방 때 우인은 일본 형무소에서 풀려나 유명한 소설가 김학철(2001년 작고)과 함께 우인의 고향인 풍기에 먼저 들렀다. 우인은 김학철이 북의 집으로 떠날 때까지 사랑채에서 같이 기거했다.

우인은 술집 아가씨들도 몹시 귀여워했다. 영화배우 윤정희와 어울려 자주 맥주를 마셨다. 술집 아가씨들이 돈을 모으면 술집을 따라 차린다. 그러면 술집 이름은 거의 반드시 우인에게 작명 부탁을 한다. 우인은 말년에 국회의원, 문예진흥원장, KBS 이사장 등 관복도 있었다.

술집여자라면 타의추종을 불허했던 ‘혁신계’

<지리산> 등 많은 소설을 대량 생산한 ‘나림 이병주’는 잡놈이다. 하동의 소지주로 억지 중매결혼해 일본 건너가 두 대학에서 불문학을 공부하다 학도병 끌려가 중국서 해방을 맞았다. 귀국해 지금의 경남대에서 강의했다. 국제신문에서 기자, 편집국장, 주필도 지냈다.

6.25때 인민군에 끌려가 문예공작반으로 활동했다. 4.19 후 혁신계로 하동에서 국회의원에 출마했다 낙선했다. 5.16 후 2년여 옥살이 했다.

나림은 한껏 사치했다. 옷도 고급, 스웨덴제 볼보 차에 카페에서 주로 코냑을 마셨다. 나림 이병주는 관철동 ‘사슴’에 자주 갔는데 나림의 ‘진주’ 자랑은 대단하다. 여자. 그 문제는 자세히 말할 수 없지만 추종을 불허했다. 프랑스 여행도 했던 나림은 로제 상바르 한국주재 프랑스 대사와 요정 교제를 했다. 나림이 70세에 병사했을 때 내가 추도사를 했다. 송남헌, 박진목, 한운사 등과 술을 놓았는데 한 동네(하동) 출신인 여배우 최지희씨가 찾아와 애석해 했다.

요정에서 일본 군가 부르며 기생 파티한 혁신계

언론계에서 조 대감으로 통하는 조덕송씨는 6.25 전 해방공간에 기자 생활을 시작한 타고난 사회부 기자다. 조선일보에 정착해 사회부장, 논설위원으로 정년까지 있었다. 고등학교가 최종 학력인 조 대감은 “정치인의 모범은 송남헌”이라고 얘기했다. 송남헌은 해방 후 김규식의 비서실장을 지내고 4.19 후엔 통일사회당 당무위원장으로 혁신계 중진이었다.

조 대감은 장관의 초청으로 청운각 기생 파티에 참석하고도 허름한 대폿집에서 소주를 마쳤다. 조 대감과 조선일보 논설위원실에 합류한 나는 김성두 논설위원과 트리오로 거의 매일 돌아다녔다. 우리들의 합창은 일본 군가인 <동기의 벚꽃>이다. “너와 나는 동기의 벚꽃 / 같은 항공대의 뜰에서 핀다 / 그토록 서로 맹서한 / 그날을 기다리지 못하고 / 너는 왜 저버렸느냐 / 너는 왜 죽어갔느냐”

마지막에 나는 <세월이 가면>을 부른다. 이 노래는 시인 박인환이 6.25 직후 폐허였던 명동에서 문인들이 모이던 ‘은성’ 대폿집(최불암의 어머니가 경영)에서 술이 거나해지자 담뱃갑 뒷면에 쓴 즉흥시를, 방송인 이진섭이 샹송 비슷하게 곡을 붙였고 배우이자 가수인 나애심이 처음 불렀다.

젊은층인 장기표, 권영길과 술

나(남재희)는 장기표 후배와 권영길 후배를 아낀다. 장 후배는 서울 법대 후배이고 유명한 동아리 사회법학회의 같은 멤버다. 학생운동으로 노동운동으로 정치운동으로 50줄까지 엄청난 어려움 속에 신념을 지켜왔다. 장 후배는 요즘 신문명정책연구원장으로 일한다. 철저한 운동권이고 혁신계지만 대우 그룹 김우중 회장과 함께 세계일주를 하는 등 많이 변했다. 장 후배는 밀양 출신이다.

장 후배와 비슷한 연배인 권영길 후배는 97년 대선 후보 등을 지냈다. 내가 72년 서울신문 편집국장으로 옮겨 가 보니 사회부 기자였다. 술 마시면서 끝까지 따라 붙어 “국장, 2차 사시오”하는 것이 권영길 기자였다. 술이 장사다. 산청 출신으로 서울 농대를 나왔다. 내가 노동부 장관일 때 권 후배는 민노총 위원장이었다. 그때 정부 입장은 실세인 민노총을 법적으로 인정하지 않았지만 나는 그와 빈번히 만나 술을 마셨다. 민노총을 인정하지 않는 것은 마치 타조가 땅 속에 머리를 처박고 “없다” 하는 것이다. 그런 게 김영삼 정권까지의 민주화의 한계였다.

그 뒤에도 권 후배와 술을 자주 한다. 임수경씨의 부친 임판수(내가 서울신문 편집국장일때 서울신문 사회부장)와 함께 하는 때가 많다. 인사동 혜림이네 집으로 알려진 ‘평화 만들기’나 종로의 ‘감촌 순두부’가 잘 가는 곳이다. 권 후배는 듣기만 하지 영 말을 하려 하지 않는다. 억센 노동운동가들의 다양한 집합체인 민주노총이 아닌가. 이념적 분파 싸움이 심한 곳이다. 그러니 과묵할 수밖에 없다. 다 듣고 종합해야 하는 것이다.

2부 현대의 황진이들 (2000년)

살롱계의 여왕으로 군림한 김봉숙 여사


60-80년대 걸쳐 서울 살롱계에서 가장 뛰어난 마담은 김봉숙 여사다. 본명은 김성애. 내가 김봉숙 여사를 처음 만난 건 68년 을지로 입구 예 미 대사관 뒤 오픈 살롱 ‘발렌타인’에서다. 조선일보 논설위원이던 나는 우연히 갔다가 김 여사의 미모와 세련에 놀랐다.

정일권 장기영 김종필 김택수 등이 손님이었다. 공화당 중진 K 의원은 김 여사가 더 젊었을 때 처음 보고는 한국에 이런 미인이 있느냐고 놀랐단다. 혁신계 박진목, 송지영, 윤길중도 단골이었다. 청곡 윤길중은 드러내놓고 김 여사에게 구애했다. 국회 부의장때 김 여사가 강남에 ‘황실’을 개점하자 엄청 큰 화분에 ‘국회 부의장 윤길중’을 크게 써 보냈다.

김 여사가 화제가 된 건 문학평론가 H씨가 주간지에 ‘나의 가출선언’이라고 기고하면서 사랑 고백을 하면서부터다. 둘은 간통죄로 쇠고랑을 찼고 그 후 결혼을 했으나 1년뒤 이혼했다.

김봉숙의 고향은 진남포(대동강 하류)다. 90년대 초 김 여사는 행방을 감추었다. ‘황실’ 이후 안 보였다. 돈은 벌지 못했다. 강신옥 변호사가 소식을 전했다. 신학공부를 하고 지금은 어엿한 전도사로 길림성에서 조선족을 상대로 선교 사업에 헌신하고 있다. 아들이 지금 젊은이들 사이에 한참 뜨는 발라드 풍의 가수다. 대학가 주변에서 K 가수의 포스터를 가끔 본다.

살롱계의 입지전적 여걸 정복순

관철동 3.1빌딩 뒤 ‘반줄’. 지하는 젊은이를 위한 장소, 1층 ‘반줄’은 중년 이상의 양주 대폿집, 2층은 양식부, 3,4층은 고급 살롱인 복합적 사교장이다. 그 주인이 정복순이다.

아프리카 지도위에 다트를 던져 꽂힌 곳이 감비아의 수도 반줄이라서 이름을 지었단다. 정복순씨는 빈손으로 출발, 고생끝에 살롱 경영에 이른 입지전적 여걸이다. 정치활동을 못하던 시절 JP도 자주 찾았다. 정주영 회장이 80년대 초 혼자 와 계수남의 피아노 앞에 앉아 술을 마시며 흥이 나면 마이크를 잡고 대중가요를 불렀다. 정복순은 사업적으로 대단히 성공했다.

‘낭만’과 ‘사슴’의 상징 미스 리

농협 서울지부 건너편 뒷골목(서린동)에서 ‘낭만’이 번창할 땐 언론인 문인 정치인 예술인 교수들이 가득했다. 미스 리의 본명은 이인숙이다. 근처의 민음사도 있어 박맹호 사장은 고은 시인, 신경림 시인, 유종호 교수 등 문인들과 매일 진을 쳤다.
이어령 교수는 박맹호 사장과 서울 문리대 동기다. 미스 리는 이어령 교수와 같은 충남 아산이 고향이다. ‘낭만’에는 미스 리를 선두로 미스 최, 미스 고의 트리오가 있었는데 이 트리오 딴 가게를 차렸다. 박맹호 사장의 호의로 그의 건물 1층에 ‘사슴’을 분가받았다. 옥호는 당연 송지영의 작명이다. 미스 리가 ‘낭만’에서 빠지자 시들해지고, ‘사슴’으로 몰렸다.

‘사슴’의 단골 1호는 서울대 이수성 교수다. 미스 리와 동성동본이라고 오빠 동생 하면서 거의 개근하다시피 했다. 미스 리(이인숙)은 남편의 사업 실패로 15년 만에 막을 내렸다. 김학준 교수, 이만익 화가, 박현채 교수와 추종자들 등이 낭만과 사슴에 머물렀다.

미스 리보다 못했지만 낭만 시대 언니 미스 동은 지금 인사동 수도약국 옆 카페 ‘그리고,’를 경영한다. 63세대의 집합소다. 김도현, 유광언이 자주 들른다. 권영길 패도 얼굴을 내민다. 63세대의 대표는 단연 김중태다. 홍지영 씨는 미스 동이 서예 감식도 한다고 귀여워한 뒤 별세하고 나니 한 살쯤 아래인 박진목 씨가 대를 이어 동 마담을 귀여워 한다.

* 첨언 : 김두현 유광언은 두 사람 다 사상계 동인으로 장준하 선생 밑에서 민주화운동에 힘썼다. 김도현은 이후 92년 민자당 지구당위원장으로 옮겨, 한나라당 공천으로 두번 총선에 나와 떨어진 뒤 2006년 한나라당으로 서울 강서구청창이 됐으나 '간고등어' 사건으로 선거법을 어겨 물러났다.

논설위원들을 잘 다룬 최경자씨

무교동 체육회관 옆 골목을 지나다 보니 조그만 맥주집 ‘자자’가 있다. 숙명여대 국문과를 나와 결혼 1, 2년만에 이혼한 최경자가 주인이다. 전 남편은 상당한 부자였다. ‘자자’는 조선 동아 한국 중앙일보 논설위원들의 소굴이었다. 동아일보의 김성두 홍승면, 중앙의 조덕송 신상초, 한국의 김성두 김정태 박동운 등이 들렀다.

헌법학자 갈봉근 교수가 새끼를 쳐 한태연 등 학자들도 왔다. ‘자자’에는 나의 산맥과 갈 교수 산맥이란 양대 산맥이 있다.

당대의 여왕봉 전옥숙 회장

한때 맑시즘을 갖고 고민했던, 그리고 거기서 벗어났던 사람들은 인간의 깊이가 있고 인생의 멋이 있다. 창정 이영근과 이병주가 그렇다. 이영근은 해방 무렵 여운형을 따랐고 이후 조봉암 초대 농림장관의 비서실장을 했다. 일본 망명해 통일일보를 중심으로 통일운동을 전개하다 죽었다.

여성으로 내가 잘 아는 그런 사람은 단연 전옥숙 여사다. 해방 후 여고때 좌익 활동에 관계했다가 고생을 했다. 통영 출신으로 대단한 미모다. 일본 후지 TV의 서울 지국장을 지냈는데 30년 전 내가 처음 만났을 때 계간 <한일문예>를 발행했다. 시네텔이라는 TV 프로그램 제작공급사 회장으로도 있었다. 전 회장은 직접 취재도 했다. 킬링필드로 악명 높은 캄보디아에 한국인으로 처음 입국해 총리를 인터뷰하기도 했다.

일본의 세 가지 정신적 지주는 동경대학, 아사히 신문, 이와나미 출판사다. 이와나미는 좌파 자유주의적인 <세카리(세계)>라는 월간지를 낸다. 일본 지성계의 거두 야스에 료스케가 그 잡지 책임자다. 야스에는 전옥숙 회장을 훌륭한 한국인으로 꼽는다. 전옥숙 회장은 일본 지성계와 굵은 파이라인이 있다. 전 회장은 술집에서도 야당 총재였던 YS를 즉석에서 불러내기도 할 정도로 친했다. DJ도 일본 망명때 친하게 지냈다.

나도 이갑용 민주노총 위원장이나 권영길 민주노동당수와 술자리에 전옥숙 회장과 춤꾼인 인간문화재 이애주 서울대 교수를 초청한다.

빠뜨릴 수 없는 이야기가 전옥숙 회장의 망년회다. 심 년 넘게 매년 성대한 망년회를 연다. 근래엔 홍대 앞 ‘동촌’에서 모였다. 정치인 손세일과 내가 단골이고 김지하, 박범신 등 문인, 장일순 선비(원주의 재야 중심인물로 별세), 김석원 쌍용 회장, 김진균 서울대 교수 등이 온다. 작년에 김근태, 손학교, 장명국도 왔다.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 <강원도의 힘> <오, 수정>으로 한창 뜨는 영화감독 홍상수가 전옥숙 회장의 아들이다.

3부 정치 일탈편 (2001년)

말과 행동이 구수한 박진목씨


동주 박진목은 나와 아주 친하다. 동주는 참 기구한 운명이다. 경북 출신으로 형님은 독립투자. 어려서 형님 보러 중국갔다가 사상운동에 투신했다. 해방 후 남로당의 경북도당 부장급을 지냈다. 6.25중에 북의 이승엽을 잘 안다고 북에 가 이승엽을 만나 휴전을 종용했다. 그의 자서전 <내 조국 내 산하>에 이 얘기가 잘 나온다.

그가 이승엽을 만났으니 박헌영의 남로당계가 미제 스파이와 접선했다고 주장할 수 있게 됐다. 박진목은 국내에서 통일운동가로 유명하다. 그는 한국일보 뒤 ‘중원’이라는 밥집을 하면서 자주독립운동, 통일운동하는 노선배들을 융숭하게 대접했다. 그는 대학을 다니지 않았다. 그러나 말씨는 대단히 평범하고 토속적인 우리 것이다.

6.25 후 임진강을 헤엄쳐 북에 건너가 통일을 호소한 김낙중은 대학때 친구다. 납북된 아버님을 만나려고 70년대 초 일본 대학의 교수신분으로 북에 갔다온 김영작 교수는 민정당 국회의원때 내 동료 의원이다. 박진목은 월남해 온 허헌의 딸 허근욱을 초청하기도 했다. 허근욱은 최근 <민족 변호사 허헌>이라는 선친의 전기를 냈다. 조선호텔에서 출판기념회를 열었다. 김학준 김동길 강원룡 전숙희(카지노 게이트 장본인 전낙원씨의 누나) 등이 축하했다.

김병로, 이인, 허헌은 일제때 독립운동가들의 변호를 맡은 민족 변호사 3인이다. 내 술친구 김종인 박사는 김병로의 손자다. 허근욱씨와도 이제 사귀었다. 파리에 있는 이인의 아들 이옥 박사만 왔더라면. (첨언: 이인 박사는 동구권 연구자였고, 별세했다.) 박진목 주변엔 이기택 김상현 이우재 윤식 등이 있다. 강신옥 김도현도 초청한다. 김도현은 63세대 대표로 언론에서 김중태 김도현 현승일을 트리오라고 한다.

4부 슈퍼 거물급들과의 삽화 (2001년)

박정희 대통령과 언론인 송건호


유신 전, 8대 국회때 박 대통령은 언론계를 포함 각계 인사들과 부지런히 접촉했다. 유신 후엔 달라졌다. 한번은 정치담당 논설위원을 청와대 본관으로 초대해 푸짐하게 술을 냈다. 중국 음식에 양주였다. 박 대통령은 손수 담배도 뽑아 권하며 라이터 불도 켜주는 파격이었다. 송건호 씨가 소피를 보러 화장실 갔을 때 박 대통령과 거의 동시였다. “송 선생 무언가 꼭 한 가지 도와주고 싶은데” “요즘 지방에 공장들이 엄청 세워졌다는데 가보지 못했습니다” 참 욕심 없고도 순진하다. 경향신문 이명영은 김일성이 여럿이었다는 연구를 하겠다고 두둑한 연구자금을 타내 <김일성 열전>을 저술했다. 그만큼 송건호는 대쪽 같은 선비였다.

나는 “국회에 각하의 집안 사람이 다섯 명이나 있습니다”고 했다. 조카사위 김종필, 그의 친형 김종익, 박 대통령 처남인 육인수, 처조카 사위인 장덕진, 대외적으로 일체 밝히지 않지만 박 대통령과 본부인 사이의 딸의 남편인 한병기 의원 등 5명이다. 박 대통령은 언성이 약간 높아졌다. “속초에서 그 애 아니면 마땅한 사람이 없다고 하던데...” 대통령은 그 말을 기억하고 단계적으로 시정했다. 9대 때 사위 한병기와 처조카사위 장덕진이 제외됐다. 한병기는 대사가 되고 장덕진은 농림부장관이 되니다. 10대엔 김종필, 김종익이 제외됐다.

일본 총독부 아다라시이 무라 쓰쿠리(새로운 마을 만들기) 정책과 새마을 운동의 유사성도 있다.

전두환과 김지하

민정당 발기때 나는 서울시 조직책이어서 순서상 전 대통령과 마주보고 앉았다. “각하 김지하 시인을 석방해 주십시오”라고 청했다. 나는 조선일보 문화부장 시절 소설가 박경리의 <신 교수의 부인>이란 소설을 연재했기에 김지하 시인이 박경리의 무남독녀 외동딸의 남편인 걸 알았다.

며칠전 신문에 박 여사의 수필이 실렸는데 사위가 옥중에 있어 자연 비장한 내용이었다. 얼마후 김지하 시인은 석방됐다.

김대중과 빌리 브란트

나는 김대중 대통령을 60년대부터 높이 평가했다. 기자로서 나는 두 번 독대하면서 식사했다. 첫 번은 4.19 직후 장면내각때 의원이 아니면서도 집권 민주당의 대변인이던 때다. 나는 4.19 후 제호를 바꾸어 새로 태어난 민국일보(<-세계일보)의 정치부 기자였다. 민국일보엔 민주당 조세형, MBC의 김중배, 최일남도 같이 일했다.

시청 옆 로스구이 집 ‘이학’에서 저녁을 하면서 3시간쯤 말했다. 그는 술은 거의 입에 대지 않았다. 인터뷰 끝나자 흰 봉투 하나를 내밀었다. 사양했다가 그가 서운하게 생각하는 것으로 해석돼 받아 넣었다.

30년 뒤 함께 채영석 의원이 90년대 초 친상을 당해 서울대 병원 영안실에 갔다. 김대중씨도 왔는데 같은 당원이라서 오래 머물렀다. 물론 DJ는 소주를 입에 대지 않았다. 두 번째 독대는 60년대 후반 내가 조선일보 정치부에 있을 때 창간된 월간 <지성>잡지에 나는 YS는 보수파, DJ는 진보파라며 여러 가지 분석 글을 썼다.

DJ와 프레스센터 뒤 한정식 집에서 단둘이 만나 점심을 했다. 마지막에 나는 중요한 말을 했다. DJ가 기억하는지 모르겠다. “김 의원은 한국의 빌리 브란트가 되십시오” 나는 YS에서 DJ에의 이행은 문제는 있지만 역사의 일보 진전이라는 확신을 갖고 있다.

5부 술이 유죄런가 (2002년)

조선일보 편집부국장으로 운 좋게 공짜로 유학할 1968년 초봄, 하버드에서 뉴욕으로 단체 연수를 갔다. 뉴욕타임스 방문 등이 있었다. 처음 하버드대 와이드너 도서관에서 하버드 출신인, <천사여 고향을 돌아보라>의 토마스 울프의 특별실을 봤다.

훗날 뉴욕에 들러 동아일보 출신 유명 언론인 김진현(나중에 과기처 장관)의 소개로 <사상계> 사장 장준하의 동생 장창하를 만나 그의 초대로 플레이보이 클럽에 가서 토끼처럼 차려입은 나비 걸의 접대를 받으며 술을 마셨다. 장창하는 클럽의 멤버가 되면 막상 돈도 그렇게 많이 안 들고 손님을 만족스럽게 대접할 수 있다고 했다.

요정 백양에서 접시를 날린 일

조선일보 논설위원이 된 건 신문사 입사 10년만이니 약간 파격이다. 방일영 사장이 효자동의 요정 ‘백양’에 모두들 초대했다. 장면 정권의 2인자격인 김영선 재무부 장관이 박정희 소장을 불러 술을 나눈 곳이 ‘백양’이다.

조선일보 임 전무가 앉아, 나에게 배당된 기생이 웃옷을 갈아입고 그 옆에 가서 앉았다. 여색을 탐한다고 소문났던 임 전무는 두 번째 바꿔치기를 했다. 나는 마담 앞에서 접시를 깨버렸다.

방 씨의 도량이 큼은 소문이 나 있다. 부하에게 뭉텅뭉텅 용돈을 준다. 민기식 소장이 부산군수기지사령관때 자유당 부정선거에 협력하지 않아 자유당이 예편시키려 하자 지프로 서울로 달려와 방 사주에게 구명을 호소했다. 민 소장은 이후 육군 참모총장까지 했다.

공항까지 따라온 일본 호스티스

동경에서의 압권은 ‘미카도(황궁, 천황)’란 술집이다. 당시 조선일보 특파원이던 이종식(나중에 국회의원) 형과 차석 특파원인 허문도(나중에 통일원장관) 형과 함께 미카도에 갔다. 먼젓번의 그 호스티스를 찾고 모든 일을 그녀에게 맡겼다. 나와 호스티스가 택시를 타자 문을 닫고 떠나보낸다. 의미 있는 배려다.

그 호스티스는 시골서 단과대학을 나온 문학 지망생이란다. 주일 대사 이후락 씨가 우리 일행과 관저에서 점심을 하려 한다는 급전이 왔다. 호스티스와의 약속을 잇고 마음이 급했다. 그 호스티스는 하네다 공항까지 나를 따라 와 배웅했다.

24시간 술을 마셔댄 손세일, 임재경

김대중 정권하 민주당 원내총무를 지냈고, <이승만과 김구>라는 좋은 책을 쓴 손세일 형과 한겨레신문 창간 때 부사장이었던 임재경 형은 나와 함께 조선일보서 일한 적이 있다. 손세일은 서울대 문리대 정치과 출신이고, 임재경은 같은 대학 영문과 출신이다. 손세일은 오만한 자세고, 임재경은 가끔 짓궂다.

손세일은 사상계 편집장을 지냈고 거기서 동료인 동아일보 사장 심강 고재욱씨의 따님과 결혼했다. 임재경은 문리대 문학 패거리들과 어울린 문예청년으로 프랑스와 독일 유학파로 유럽통의 사상가 냄새를 짙게 풍기는 언론 운동권이다. 셋 중 처음 미 국무부 초청을 받아 떠나는 손세일을 환송한답시고 마지막에는 종로2가 ‘나이아가라’까지 가서 밤새도록 술을 마셨다.

24시간 이상 함께 술을 마신 일도 있다. 손과 임의 악당이 내 집에 가자고 요구해 나는 우둔하게 응했다. 누상동 집에 새벽 5시에 도착해 엄처의 박대 속에 양주 한두 잔씩 하고 쫓겨났다. 손이 녹번동 자기 집으로 아침 7시에 안내했다. 손 형의 부인이 우선 꿀물을 타내고 북어국, 콩나물국을 끓여내 취객들에게 극진하다. 아마도 아버지 때문일 것이다. 손형의 장인 심강 선생의 술 시중 법도를 읽힌 손 형의 부인은 거의 완벽했다.

6부 그래도 잘 마셨다 (2003년)

고정훈, 파티서 미국인에게 큰 실례


2공화국때 혁신정당 취재하다 당시 통일사회당 선전국장이던 고정훈씨와 친하게 됐다. 자유당 정권 말기 고정훈은 조선일보 논설위원으로 있었는데 4.19 때 조선일보 사옥 2층 발코니에 학생 데모데를 선동하는 연설을 하기도 했다. 조선일보를 나와 구국청년당을 만들어 정치에 뛰들어 러시아 혁명때 선동가들을 연상시키는 현란한 성명전으로 화제가 됐다. 고정훈은 일본의 유명한 아오야마(靑山) 학원에서 어학을 공부했다. 해방 후 소련군 통역을 하다가 월남해 남한의 대북 공작부대의 일을 했다.

나는 고정훈을 혁신계의 JP라고 부른다. 여자 편력도 다채로워 아마 소설가 이병주와 겨룬다면 난형난제다. 술도 좋아해 요정급만 돌아다녔다. 진보당의 조봉안도 기생 파티를 즐겼다. 5.16때 4년 옥고를 치뤘다. 옥에서 나와 <토하고 싶은 이야기들> <군>을 집필했다. 정일권 총리와 인연을 이용해 무역회사도 차려 돈도 벌었다.

청진동 요정에 갔더니 선우휘, 양호민, 어드워드 와그너, 스티브 브레드너씨가 있었다. 와그너는 하버드의 한국학 책임자로 우리 족보를 연구했다. 한국일보 특파원으로 금문도 사태를 취재갔다가 실종한 코리아 타임스 편집국장 최병우의 미망인 김남희 여사와 재혼했다. 김남희 여사는 일본의 대학을 나온 인텔리로 하버드의 한국어 강사를 했다.

브레드너는 미 동부의 명문 예일대를 나와 한국에 머물며 4.19 등을 연구했는데 그뒤 지금까지 미군 정보기관의 문관이다. 브레드너는 농구선수 박신자와 결혼했다. 나는 그때 조선일보 정치부 차장이었다. 나는 그때 반미풍의 노래를 불렀다.

고정훈은 사업에 실패에 줄곧 시골 농장에 잠복해 있다가 5.18 후 관제 혁신정당으로 국회의원 노릇을 한 번 하고 별세했다. 혁신계 안에서 그가 혹시 기관의 첩자가 아닌가 하는 의심이 계속 나돌았다.

잇따른 딸들의 구속에 폭음도 잇따르고

첫째 딸 남화숙(78학번) 서울대 국사학과 4학년때(제헌의회그룹의 대표 최민의 후배)인 81년 광주항쟁 1주년을 맞아 5-6명의 여학생과 함께 신군부를 규탄하고 학생들의 궐기를 호소하는 유인물을 다량으로 찍어 대학 캠퍼스에 뿌렸다. 아지트가 나의 선거구인 신정2동 판자촌에 있었는데 수상히 여긴 주민 신고로 강서 경찰에 모두 체포됐다.

나는 미련없이 모든 자리의 사퇴서를 냈다. 전 대통령이 “선거에 바빠서 자녀를 잘 챙겼겠느냐, 모든 걸 없던 일로 하겠으니 앞으로 더욱 열심히 노력하라”는 전갈과 함께 사표를 반려해왔다. 전두환 대통령이 통이 크다는 얘기는 들었지만 그래도 나는 어리둥절했다.

1년 반 쯤 뒤 82년 말 고려대 경제학과 3학년인 둘째 딸(80학번)이 데모 배후조종으로 성북서에 체포됐다. 서울 법대 출신인 아내가 불만이었다. 영장이 떨어져 딸이 정식 구속되던 날, 민정당 서울 의원들의 한남동 한 살롱의 술자리에서 이종찬 원내총무에게 폭음하고 폭언했다. 민정당에서 가장 양질인 이종찬 총무에겐 미안했다. 김정례 의원은 나를 태우고 우리 집까지 와서 아내와 나를 위로했다.

나는 다음날 청와대, 민정당, 안기부, 검찰 등 모든 관계 기관에 강한 항의문을 보냈다. 법정 투쟁이라도 하자는 결의였다. 얼마 후 둘재 딸이 김대중의 비서실장 예춘호씨의 아들과 결혼하겠단다. 재야 핵심과 사돈이 된다. 오랜 술 친구 김종인 의원을 통해 당시 정순덕 정무수석에게 오해 없길 바란다고 전했다. 전두환 대통령은 “혼사를 진심으로 축하한다”는 전갈과 함께 최창윤 비서관을 통해 두둑한 축의금을 전해왔다. 나와 동년배고 60년대 중반부터 사귄 고은 시인은 창비 전작시 <만인보> 제11권에 ‘남재희’편을 실었다.

“의식은 야에 있으나 / 현실은 여에 있었다. / 꿈은 진보에 있으나 / 체질은 보수에 있었다. / 시대는 이런 사람에게 술을 주었다. / 술 취해 집에 돌아가면 / 3만 권의 책이 있었다. / 법과 대학 동기인 / 아내와 / 데모하는 딸의 빈방이 있었다.” 친구들은 내가 서울법대때 이승만 대통령 양아들 이강석 군의 부정입학을 반대하는 맹휴를 주도한 것을 알고 있어 ‘부전자전’이라고 했다.

386 운동권 → FTA 전문가 → '국제원조 전도사'

중앙일보 2008/01/04

‘386 운동권’ 여대생 출신으로 자유무역협정 통상전문가로 변신했던 남영숙 외교통상부 심의관이 20여 년 만에 대학 캠퍼스로 돌아간다. 남 심의관은 2일 외교부에 사의를 표시했다. 이화여대가 그를 국제대학원 교수에 채용키로 지난달 말 확정해서다. 그는 봄학기부터 국제통상 및 정부개발원조 담당교수로 학생들을 가르친다.
남 심의관은 3일 “계약직 공무원 임기가 끝나는 2월 중순까지 한·미 FTA에 이어 한·EU FTA를 마무리한 뒤 젊은 냄새가 풋풋하게 나는 대학 캠퍼스로 돌아가게 돼 벌써 가슴이 뛴다”고 말했다. 외교부에서는 눈 앞에 닥친 한·중 FTA 등 앞으로 할 일이 태산이라 그에게 ‘승진’을 제시하며 퇴직을 말렸다고 한다. 하지만, 그는 “언젠가는 캠퍼스로 돌아가겠다는 꿈이 이뤄졌고, 공무원으로 국가를 위해 FTA의 단추를 끼우는 등 여한 없이 일을 했기 때문에 이제는 떠나고 싶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처음에 운동권 출신이 FTA 협상팀장으로 들어가자 ‘매국노’라는 오해도 많았다”며 “국가 경제의 큰 틀에서 나름대로 열심히 일하다 보니 이해하더라”고 털어 놓았다. 다만 미련이 좀 남아 아쉽다고 했다. 정부는 할 일을 다 했는데, 정치권이 4월 총선을 앞두고 FTA 국회 비준을 미룰 것으로 보여 안타깝다는 것이다.
3월부터는 이화여대를 시작으로 젊은이들에게 ‘ODA 문화’를 확산할 생각이다. 국제(OECD)·IT(정통부)·통상(외교부) 등을 모두 경험했기에 이를 해낼 자신이 있다고 했다. 그는 “유엔 사무총장을 배출했고, 한국기업이 글로벌 회사로 발전하고, 새 정부가 국제 사회에 대한 기여를 이해하기 때문에 그 꿈을 이룰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했다.
남 심의관은 1980년대 초 서슬 퍼런 5공화국 시절 ‘여당실세 남재희 의원의 운동권 딸’로 세간에 화제가 됐던 사람이다. 고려대(경제학과) 재학 중 학생 운동에 뛰어들어 83년 가을 시위 배후 주동 혐의로 한 달여 철창에 갇히는 등 고난의 세월을 보냈다.
이때 재야 운동가인 예춘호씨의 아들로 운동권 동지인 예종영(47·고려대 정외과) 연구교수를 반려자로 맞아 ‘예춘호의 며느리’로도 유명세를 치렀다. 84년 대학 졸업 뒤 남편과 함께 미국 유학 길에 올랐다. 그는 “중국집에서 양가 어른만 참석한 채 간단히 결혼식을 올린 뒤 야반도주하듯 미국으로 유학을 떠났다”고 털어놨다.
그는 94년 스탠퍼드대에서 국제개발학 박사학위를 받은 뒤 2000년 전후 국제기구(I LO, OECD 등)에서 정력적으로 일하며 국제 전문가로 컸다. 2005년에는 국가 공무원(정보통신부 국제협력팀장)으로 영입돼 귀국한 뒤 FTA 협상에 참여했다. 실력을 인정받아 1년 만에 외교부 국장급에 올랐다.
그는 이제 ‘남재희의 딸’이 아닌 ‘통상전문가 남영숙’으로 우뚝 섰다. 부친과 시아버지에게 “공무원으로 나라를 위해 열심히 일한 데 이어 국가 인재를 키우는 교수가 되니 너무 흐뭇하다”는 얘기를 들을 때 가장 행복하다고 한다.


나이 들어 젊은 사람들과 추억담 속 만취

민주노동당의 기관지 <진보정치>의 이광호 편집위원장 등과 술을 할 때 아슬아슬한 고비까지 간다. 프레시안의 이근성(공공운수연맹 이근원 실장의 친형), 박인규 등 간부와 만나면 으레 내가 기분이 들떠 과음하게 된다. 그들은 언론계 선배인 나의 삶과 생각에 관심이 많다.


7부 술의 사회학적 순례 - 그래도 못 다한 이야기들

김철 대 김철의 술자리


김한길은 하버지 김철의 추모행사를 성대히 열었다. 세미나도 열었다. 장상환 경상대 교수가 그 세미나에서 “김철이 유신 후 민주화투쟁을 한 공로는 인정하지만 민족청년단을 한 전력에 비춰 사회민주주의로 일관했다고 볼 수 없고, 당 간판만 지켰을 뿐 현실적 영향을 끼치지 못했다”고 혹평했다.

나는 김철과 동아일보 정치부에 있던 이름이 똑같은 김철 기자를 상면시켜 술을 마신 일도 있다. 나도 어지간히 심심했던가. 나는 몇 번 흑석동 중앙대 뒤 높은 지대에 있던 김철의 집에까지 모셔다 주기도 했다. 기자 김철은 나중에 의원이 됐다.

김철씨는 5.16 후 3공화국에서 혁신의 기치를 과감히 들고 고집스럽게 고생했다. 갈월동 2층의 초라한 셋방 당사에서 늘 함께 다니던 안필수와 고달픈 정치를 했다. 그러면서도 사회주의 인터내셔널(SI)과 계속 유대했다. 권력은 여권을 내주기도 하고 안 내주기도 했다. 족청 시절부터 친남매처럼 지내던 김정례 의원(나중에 민정당 국회의원)가 중간에서 도와주기도 하고 공화당의 박준규 당의장도 은근히 지원했다.

김철과 고정훈은 2공화국때 통일사회당 국제국장과 선전국장때부터 라이벌이었다. 5.18 후 (전두환 정권의) 과도입법회의때 김철은 일말의 기대를 갖고 입법회의에 참여했다. 그러나 기대와 달리 관제 혁신정당의 역할은 고정훈에게 떨어졌고 고정훈은 서울 강남에서 국회에 진출했다. 고정훈이 강남 성모병원에서 사경을 헤맬때 김철은 고씨를 문병해 주변에서는 유종의 미를 보였다고 했다.

민음사 박맹호 사장과 낭만.사슴 전성시대

민음사 박맹호 사장은 내가 큰 신세를 졌다. 박맹호는 청주고 동기다. 박 사장은 보은군 부자집 장남으로 서울대 불문과를 나왔다. 청진동 구멍가게 출판사에는 고은 시인이 자주 와 점심때 자장면을 시켜 먹었다. 최일남 이호철 유종호 신경림 박봉우 최인훈 이어령과도 교류했다.

이어령이 신문에 처음 데뷔한 건 박맹호 때문이다. 이어령은 국문과, 박맹호는 불문과 동기라 일찍부터 친했다. 당시 학생들에 인기 있던 한국일보 문화부장 한운사가 박맹호에게 신진 기예를 추천하라고 해서 이어령을 천거했고, 이어령은 기성 문단을 우상파괴하는 평론으로 단연 각광을 받았다.

박맹호는 사업도 잘 되자 유명한 술집 ‘낭만’ 출입도 잦았다. 종각 뒤 작은 빌딩도 샀다. 1층을 낭만의 미스 리를 중심으로 한 삼총사에게 세를 주고 ‘사슴’을 차리게 했다. 이병주 소설가, 이수성, 김학준 교수가 ‘사슴’을 자주 찾았다.

학술 세미나 같은 김종인 박사와의 술

80년대 초 김종인 의원은 내게 “우리의 대표적 진보 경제학자들을 만나보시겠느냐”며 조계사 뒤 ‘유정집’으로 오란다. 가보니 김수행 정운영 등 모두 한신대 교수들이다. 유럽서 공부한 쟁쟁한 이론가들. 김수행 교수는 학생들의 요청을 정운찬 교수가 받아들여 서울대로 옮겼다.

권영길 천영세 두 사람은 그렇게 명콤비일 수가 없다. 모두 노동운동 출신이지만 권영길 당수는 신문의 파리 특파원을 했고, 천영세 부당수는 강원용 목사의 크리스천 아카데미 중간 집단 교육 노동부문 출신이다. 나는 한겨레의 김효순, 조준상, 프레시안의 박인규 박태견 등에게 술을 살땐 감촌순두부에 간다. 김종인 박사가 살때는 ‘행복한 마음’이 관행처럼 되었다.

갤럽 여론조사의 최시중 회장과도 어울리는데 갤럽은 국회의원 선거, 대선 등을 매우 정확히 짚어 놀랍다. 다만 노무현 현상에 대해선 좀 달랐다.

최근 ‘행복한마음’에서 김상조 교수, 문성현 등과 만났다. 문성현은 서울 상대 출신이면서 공장 노동자로 취직한 노동운동가라 나는 그에게 존경심까지 느낀다. 내가 김상현의 <다리> 잡지에 원고를 부탁했으니, 문성현은 신문사 논설위원 수준의 필력을 보여 나를 놀라게 했다.

철의 사나이 박태준씨와 고시노 간바이

박태준 씨와 인연은 오래됐다. 포철 준비를 위한 사무실을 명동성당 앞쪽에 차렸을 60년대 중반이었다. 아현동 박태준씨 저택에도 갔다. 정치에 참여한 박태준은 ‘반줄’ 4층의 룸살롱에 갔다. 과묵했다.

박태준은 술과 음식에 사치하는 편이다. 그의 아현동 집에 세배를 가면 많은 의원들이 북적였다. ‘고시노 간바이’란 술을 마셨다. 산맥을 넘는다는 뜻이니까 니이가타 지방을 가리키고, 거기서 나오는 간바이라는 사께를 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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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인간들

    왜 이런 인간들의 글을 말하고 있습니까?

  • 흐흐

    타자치느라 고생했습니다.
    삶의 면면을 보면 그 사람을 알 수 있지요.
    누굴 만나 어떤 술을 어떤 사람들과 함께 마시는지, 더구나 꼭 여자가 따라주는 술을 마시는 사람들이 한다는 해방이나 정치나 문학은 하지 않는 게 좋겠다는 생각이 드네요. 잘 읽었습니다.

  • 독자

    진보나 보수나 학연과 지연이 항상 따라다니는군요. 글을 읽고는 주대환이 왜 그런 소리를 했는지 이해가 갑니다. 남재희씨의 글을 찾아서 읽어보는 편인데...진짜 빨갱이들은 안만났군요. 한국의 전근대적인 면들이 가히 세계수준급이네요. 이걸 그네들은 풍류라고 히히덕거리겠지. 우리 사회 오피니언리더들의 과거가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글이네...

  • 은거사

    언론과 정치, 사회에 걸쳐 이어지는 이야기를 술로 연결하여 잘 표현하였습니다. 술은 지나치지 않으면 사상과 여야가 없다는 것을 더욱 더 느끼게 합니다.

  • 참...

    대체 이런 책을 소개하는 이유가 뭡니까? 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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