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투지도 일백 배가 되었습니다”

[박병학의 글쓰기 삶쓰기] 명지대 행정조교 파업투쟁 100일


5월 27일은 해고된 명지대학교 비정규직 행정조교들이 일터로 돌아가기 위해 싸움을 시작한 지 100일째가 되는 날입니다. 그날 명지대 정문 앞에서는 ‘명지대 비정규직 파업투쟁 100일 촛불문화제’가 열렸습니다.

명지대에서는 조교를 ‘교육조교’와 ‘일반조교’로 나눕니다. 교육조교는 대학원을 다니면서 조교로 일하며 장학금을 받지만 일반조교는 대학 안에 있는 수많은 학과들을 위한 행정 업무를 돌보며 임금을 받습니다. 복직 싸움을 벌이고 있는 행정조교들이 바로 그 일반조교입니다. 일반조교는 대부분 명지대를 졸업하고 모교에서 일하는 계약직 노동자들이며 한 달에 100여만 원 정도를 임금으로 받습니다.

명지대 행정조교들이 두 팔 걷어붙이고 싸움을 시작한 지는 100일이 되었지만 학교 측에서 행정조교들을 처음 괴롭히기 시작한 것은 꽤나 오래 전 일이라 자그마치 지난해 여름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2008년 7월 끝자락에 명지대는 행정조교 40명에게 학교 형편이 어려우니 일터에 그만 나오라는 이메일을 보냅니다. 졸지에 해고자 신세가 된 행정조교들은 학교 측과 만나서 이야기를 해 보려고 애를 쓰지만 학교 측은 눈 멀고 귀 막고 입 닫은 시늉만 합니다.

견디다 못한 행정조교들이 대학노조 명지대지부를 만들고야 만 것은 몇 달이 지난 추운 12월의 일입니다. 하지만 학교 측은 행정조교들이 부르짖는 ‘원직 복직’과 ‘정년 보장’을 줄곧 무시해 오다가 지난 2월 28일에 행정조교 95명을 또 다시 잘라 버립니다. 이미 명지대지부 행정조교들이 2월 17일부터 파업에 들어간 상황에 벌어진 일입니다.

  명지대 정문 앞에서는 ‘명지대 비정규직 파업투쟁 100일 촛불문화제’가 열렸습니다.

사업장에서 비정규직 노동자들을 자르는 오직 하나뿐인 이유는 다름아닌 비정규직법 때문입니다. 행정조교들은 그 흔한 근로계약서 한번 써 보지 못했습니다. 계약 기간이 2년을 넘어 가면 무기계약직으로 만들어 줘야 하니 속이 무척 쓰렸나 봅니다. 행정조교들을 솎아내고 나서 생긴 빈 자리는 ‘행정보조원’이라는 이름을 붙인 계약직 노동자들로 채워졌습니다. 말만 번드르르하게 행정보조원이지 실은 새로운 비정규직 노동자나 다름이 없습니다. 인수인계도 없이 무작정 때려 박듯 행정보조원을 일터로 몰아넣으니 업무가 잘 될 리가 없습니다. 실제로 행정보조원들 십여 명이 3월 한 달도 버티지 못하고 일이 너무 힘들고 복잡해서 학교를 떠났습니다.

학생들도 교수들도 학과 행정에 대해 누구에게 무엇을 물어봐야 하는지 온통 헷갈려 합니다. 그런 판에 명지대 용인캠퍼스 총학생회는 ‘학생들의 수업권과 면학 분위기’를 보호해야 한다며 체육교육과 학생들까지 불러모아 행정조교들에게 수업이 없는 시간에만 집회를 하라고 을러댑니다.
지난 4월 22일에는 명지대 행정조교들을 해고해 버린 것은 명백한 부당 해고라는 경기지방노동위원회의 결정이 있었습니다. 물론 학교 측에서는 항소를 하겠다고 나오고 있구요.

2월 17일에 시작된 파업 투쟁은 어느덧 겨울과 봄을 지나 여름의 들머리에 와 있는 5월 27일까지 와 버렸고, 천막 농성을 시작한 지 손 꼽아 세어 보면 어느새 100일이 됩니다. 구름 한 점 없는 따스한 봄날 저녁에 명지대 정문 앞으로 사람들이 하나씩 모여들기 시작했습니다. 땅거미가 짙게 깔릴 무렵 드디어 파업 투쟁 100일 맞이 촛불 문화제가 시작되면서 맨 처음을 여는 발언으로 서수경 지부장이 나와 발언을 합니다. 이 부분이 기억에 남더라구요.

“하늘에 계신 노무현 전 대통령께서도 우리의 투쟁을 지지하고 계실 겁니다. 내가 만든 비정규직법 때문에 노동자들이 다 죽고 있구나! 그렇게 생각하시며 저희들의 싸움이 꼭 승리하기를 바라고 계실 겁니다.”

행정조교 몸짓패 ‘미완성’이 멋진 공연을 보여주었고 이어 국립 오페라 합창단 해고 노동자들이 나와 평소 같았으면 예술의 전당에 가서 돈 내고 들어야 했을 멋진 목소리로 노래를 들려주었습니다.

행정조교들의 투쟁을 지지하는 명지대 학생들의 모임 ‘노동자 학생 협의회’에서 나온 학생 하나가 발언을 하면서 이런 이야기를 하더군요.

“명지대 축제 기간에 총학생회가 학생회관 앞에 있는 천막 농성장이 축제에 방해가 되니 천막을 옮겨 달라고 명지대지부에 요구했습니다. 행정조교 노동자들은 후배들을 이해할 수 있다며 천막을 축제 기간 동안 다른 곳에 옮겨 두었지만 곁에서 지켜보는 제 마음은 정말 참담했습니다.”

바짝 물오른 젊음이 한껏 신나게 피어나려는데 구중중하게 생긴 천막 농성장은 눈엣가시 같은 성가신 존재였겠지요. 그랬겠지요. 그러면서 정작 전공 책과 토익 책만 책벌레처럼 파먹는 것은 절대로 추저분한 일이 아니라고 생각하겠지요. 뭐 사람들이 살다 보면 서로 생각하는 것이 다를 수도 있으니까요. 제가 그런 생각을 하는 와중에도 매끈하게 빼입은 대학생들은 쉴 새 없이 어디선가 쏟아져 나와 조그만 공처럼 통통 튀는 걸음으로 정문을 지나가고 있었습니다.

행정조교 조합원들이 모두 앞으로 나와 한 명씩 인사를 했습니다. 한 조합원이 명지대 총장님께 드리는 편지를 들고 나와 읽어 주었는데요. 귀로 들으며 대강 받아 적어 보았습니다.

“총장님, 온순하고 착하던 행정조교들이 일자리를 잃고 파업을 시작한 지 100일째가 되었습니다. 겨울이 가고 봄이 스쳐 가고 어느새 여름이 되어 버린 지금, 총장님은 안녕하신지요? 이럴 땐 정말 하느님이 관대하신 것이 원망스럽습니다..... 저희는 겨울 추위를 겪으며 강해졌고 봄의 따뜻함 덕분에 넉넉해졌으며 여름의 끈끈함에는 의연히 대처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학교에서 저희들에게 주는 시련에도 더 잘 대처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현수막을 훔쳐가고 구사대를 동원하는 것에는 강경하게, 분열을 조장하고 협박을 일삼는 것에는 의연하게 대처해 가기로 했습니다. 우리를 너무 만만히 보지 마십시오..... 135명이나 잔인하게 해고해 버리셨고 지금 권리를 주장하기 위해 남은 사람은 19명 뿐이니 총장님도 성공하신 거 아닌가요? 해도 해도 너무한데 이젠 할 만큼 하셨으니 지방노동위원회의 결정을 받아들여 저희들 원직 복직시켜 주세요. 총장님의 현명한 결정을 기다리겠습니다.”

파업 투쟁 100일 동안 있었던 이야기들이 담긴 영상물 한 편을 보았습니다. 그러고 나서 조합원들이 다시 앞으로 나와 ‘퍼포먼스’를 보여주었는데요. 교직원들의 얼굴이 그려진 가면을 쓴 사람들이 조합원들과 줄다리기를 하다가 조합원들이 이기고, 결국 교직원들과 조합원들이 사이좋게 지내게 된다는 내용이었습니다.

촛불 문화제가 끝나고 사람들은 뒤풀이를 하기 위해 천막 농성장이 있는 학생회관 앞으로 갔습니다. 그곳에는 머릿고기와 순대와 막걸리가 푸짐하게 놓여져 있었습니다. 몇몇 아는 사람들과 둘러 앉아 권커니 잣커니 하다가 슬그머니 자리를 빠져 나와 조합원 한 명을 붙들고 말씀 좀 듣고 싶다고 했습니다. 그 조합원은 제게 명지대지부 부지부장을 소개해 주었고 저는 부지부장과 학생회관 계단에 걸터앉아 짧게 나마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100일 되셨는데 기분이 어떠세요?”

“제가 이런 조끼를 입고, 구호를 외치고 하는 삶을 살게 될지는 몰랐어요. 벌써 힘들게 싸운 지 100일이나 됐는데, 다른 한편으로는 제가 가장 소중하고 의미 있는 100일이었던 것 같아요. 사람이 살면서 똑 부러지게 자기 권리를 주장하기가 참 어렵잖아요. 순응하며 살거나 제대로 말하는 용기 없이 사는 경우가 많은데, 물론 저는 부당 해고라는 큰 틀 속에 있었지만 저도 어쨌든 제 권리라는 것에 대해 고민해 볼 수가 있었어요. 또 학교 측의 부당함이라는 게 사회적인 부당함으로 확대가 될 수 있잖아요. 그런 것까지 고민하게 되고..... 제겐 돈 주고도 못 살 시간이었어요.”

“이렇게 와 주시는 연대 단위들은 많은가요?”

“많이 오시죠. 뵐 때마다 ‘고맙습니다’라고는 하는데 그분들은 이렇게 말씀하세요. ‘이건 고마운 일이 아니다. 그렇게 생각하지 마라. 우리가 그쪽을 도와주는 게 아니라 똑같은 문제로 같이 싸우는 거다. 고마워하거나 미안해 할 필요 없다.’ 저는 처음엔 연대라는 말이 뭔지도 몰랐고, 기륭이나 다른 비정규직 투쟁 사업장에 가도 제 가슴으로 느끼는 게 아직은 그렇게 많지도 않아요. 그런데 저희에게 연대를 와 주시는 분들은 ‘똑같은 문제에 대해 똑 같은 목소리를 내는 거다’라고 늘 말씀하시죠. 그분들이 말씀하시는 걸 아직은 가슴으로 완전히 느끼고 있지는 못하지만, 가슴으로 느껴 가는 걸 배우고 있어요.”

“명지대 학생들은 많이 오나요?”

“처음에는 한 명이었는데 지금은 십여 명 정도 돼요. 근데 그 학생들이 저희들 가려운 곳을 참 잘 긁어 줘요. 오늘도 저희가 문화제 준비 때문에 정신 없을 때 자잘하고 작은 것들을 잘 챙겨 줬어요. 슬쩍 양초 담긴 상자를 가져 온다거나, 다들 빼먹고 있는 뭔가를 갖다 준다거나.....”

“총학생회 학생들은 좀 어떤가요? 학교 측에 붙어 있는 거나 마찬가지라고 들었는데....”

“학교 측 학생들이라고 얘기는 하는데요. 저희도 이렇게 투쟁에 나서기 전에는 비정규직 문제에 별로 관심이 없었어요. 관심이 없다는 게 부정적인 것만은 아니잖아요. 몰랐으니까. 근데 총학생회에서 나온 학생들이랑 직접 얘기를 해 보면 학생들 눈빛이 막 달라져요. ‘아, 그런 문제가 있었네요’ 하면서 저희들에게 공감도 하고..... 처음부터 나쁜 학생이 아니라 이 상황에 대해 잘 모른다는 거니까. 그런 걸 학생들에게 알려 내는 것이 저희 일이죠. 어차피 다 후배들인데. (웃음)”

“학교 측과는 어떻게 만나 가고 계세요?”

“지난 4월 말에 지방노동위원회 판결이 나온 이후 학교 측이 저희랑 접촉을 안 하려고 해요. 6월 2일에 판결 나오고 처음으로 하는 교섭이 있어요. 4월 말에 나온 판결이 한 달이 지난 오늘에서야 판결문으로 만들어져 학교로 날아왔으니 2일 교섭 때는 학교의 대응 방식이 좀 달라지지 않을까 생각해요. 그렇지 않으면 저희들도 더 강경하게 압박을 해야겠지요. (웃음)”

“끝으로 이 싸움을 아는 사람들에게든 모르는 사람들에게든 두루두루 하시고 싶으신 말씀이 있다면요?”

“제가 이런 질문을 받으면 늘 하는 말인데요. (웃음) 자기 주관을 가졌으면 좋겠어요. 우리가 뉴스나 신문을 보면 거기 논조대로 그대로 믿잖아요. 그쪽으로 생각이 흘러가는 사람들이 많잖아요. 그런 언론 보도를 표면적으로 듣지 말고 감춰진 문제의 본질을 들여다볼 수 있는 사람이 서로서로 됐으면 좋겠어요. 속을 들여다보면 그렇게밖에 할 수 없는 처절한 본질이 있잖아요. 그런 숨겨진 본질에 대해 생각해 보는 사람이 됐으면 좋겠어요. 나아가서 그런 사회가 되었으면 좋겠고. 그렇게 되면 정부가 여론을 쉽게 조작할 수도 없을 테니 비정규직법이 개악되는 일 같은 건 벌어지지 않겠지요.”


이야기를 마치고 잠시 앉아 이런저런 얘기들을 나누고 있는데 부지부장이 살짝 이런 말을 하더군요.

“사실은 정국이 지금 이런데 정문 앞에서 문화제를 하기가 좀 불안했어요. 전직 대통령께서 돌아가셨는데 너희들 뭐하는 거냐고 지나는 시민들이 항의할 수도 있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다행히도 무사히 잘 끝나서.....”

죽은 사람을 위한 추모는 살아 있는 사람을 위한 사랑으로 다시 태어나야 하며 다른 사람들을 돌보지 않는 추모는 결국 자기 자신을 위로하기 위한 방편에 지나지 않는다고, 그러니 괜히 그런 거 신경 쓰실 거 없다고 말씀 드릴까 하다가 그만두었습니다. 서수경 지부장이 했던 말처럼 그분도 하늘 위에서 명지대 행정조교들을 비롯한 수많은 노동자들의 투쟁을 온 마음으로 지지하고 있을 거라 그냥 믿기로 했습니다. 문제는 살아 있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집에 가기 위해 다시 정문 앞으로 나와 보니 온갖 맛난 것들을 파는 환한 창문들 안에서는 말끔하게 차려입은 젊은이들이 뭔가를 냠냠 쩝쩝 맛있게 먹고 있었습니다. 제가 요새 읽는 책에는 이런 구절이 나옵니다.

‘세상이 어지럽고 슬퍼도 백성들은 자기 몫의 즐거움을 빼앗기지 않는다.’

당구장 안에서, 호프집 안에서, 삼겹살집 안에서, 아이스크림집 안에서, 분식집 안에서, PC방 안에서 즐겁게 웃고 있는 대학생들의 눈에 100일 동안이나 싸워 온 행정조교들이 어떻게 보일지는 모르겠습니다. 딴 데 가서 일자리 얻으면 될 걸 가지고 구질구질하게 물고 늘어지는 아줌마들로 보일까요? 아니면 좌파 빨갱이 운동권들로 보일까요? 그것도 아니면 시끄럽게 음악이나 틀고 구호나 외치는 공부 훼방꾼으로 보일까요? 대학생들을 보며 이런 안 좋은 생각만 자꾸 하게 되는 이유는 복직을 부르짖고 있는 행정조교들 곁을 너무나 아무렇지도 않게 바람처럼 화살처럼 휙 스쳐 지나가던 대학생들이 너무나도 많았기 때문일까요? 그 대학생들에게 세상이란, 이십대란 과연 어지럽고 슬픈 것일까요?

세상이 어지럽고 슬퍼도 명지대 행정조교들은 자기 몫의 즐거움을 빼앗기지 않고 있었습니다. 그러고 보니 촛불 문화제가 끝나 갈 때쯤 보여준 영상물에서 이런 글귀가 나왔던 것이 기억 나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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