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태문제에 대한 맑스주의의 관점

[연속기고](15) 녹색성장, 환경적인가 환경의 적인가 4강 ⑨

2010년 세미나네트워크 새움 겨울 대중 강좌 -녹색 성장, 환경적인가? 환경의 적인가?-, 4강 세 번째 강좌로 “생태문제에 대한 맑스주의적 관점”이란 주제로 황정규(노동해방실천연대(준)) 회원의 강의를 듣고 토론하였다. 그 내용을 소개한다.


세움 방학강좌의 마지막 주제는 강연자에게 큰 고민을 던져준다. 맑스주의에 대해서 맞는 것이든 틀린 것이든 어느 정도의 지식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강연의 대상이라면 맑스주의에 대한 기존의 내용에 입각해서 생태주의적 측면에 대한 설명을 심화시키고 맑스주의에 대한 생태주의자들의 잘못된 비판을 반박하는 방식으로 진행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는 강연자에게는 매우 용이하게 강연을 할 수 있는 방식이다.

그러나 과거 20여년 동안 현실사회주의권의 몰락, 노동자계급운동의 후퇴, 사회주의운동의 축소 등을 겪으면서, 사회주의, 맑스주의 사상과 이론이 대중 속에서 점차 잊혀져 감에 따라, 맑스주의도 제대로 이해되지 못하고 있는데, 여기에 더해 생태문제에 대한 맑스주의의 관점을 설명하는 것은 여간 어려운 과제가 아닐 수 없다.

그렇다고 맑스주의도 잘 모르는 상태에서 무작정 생태문제에 대한 맑스주의의 관점을 설명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따라서 강연은 맑스주의의 기본적인 내용을 소개하는 과정에서 맑스주의가 생태문제에 대한 올바른 이해를 할 수 있게 해주는 사상임을 설명하는 방식으로 진행하는 것이 타당할 듯 하다. 다만 다행일 수 있는 것은, 오히려 맑스주의에 대해서 잘 모르는 것이 맑스주의에 대한 편견을 가지지 않고 제대로 이해할 수 있는 요인이 될 수도 있을 것이라는 점이다.


1. 왜 세계관이 중요한가?

맑스주의의 기본적 내용을 소개하는 것으로 시작하자고 하였지만, 일단은 강연의 시작을 다소 생뚱맞아 보이는 세계관의 문제에서부터 시작하지 않을 수 없다. 우선 강연의 가장 밑바닥에 깔린 문제의식부터 해명해야 할 것이기 때문이다.

즉 “여러 가지 생태문제들에 대해서 실질적인 대처들을 해가면 되는 문제지, 굳이 이 생태문제들을 총체적으로 바라보는 세계관이 필요한 것인가?”에 대해서 고민을 먼저 해보아야 한다. 가령 인간활동에 의한 탄소배출로 기후변화가 발생하였다면, 탄소배출을 감축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 이를 실천하면 되는 것이 아닌가라고 질문할 수 있다. 이러한 문제접근 태도를 실용주의적 태도라고 정의할 수 있을 것이다. 실용주의적 태도는 사상과 이론의 필요성에 부정적인데, 문제는 이러한 실용적인 태도가 실제로는 올바른 문제해결로 가는 데에 장애가 된다.

인간의 행동은 자기 머리 속의 생각에 의해 영향을 받기 때문이다. 즉 자신의 실천은 자신이 가지고 있는 사고에 의해 규정된다. 따라서 자신이 어떠한 사고를 가지고 있느냐에 따라서 그 실천의 내용은 동일한 상황에서도 천차만별의 내용이 될 수 있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현실에 대해서 과학적이고 철저한 사고를 할 때, 현실문제에 대한 실천 역시 올바르고 철저하게 이루어질 수 있다. 생태문제에 있어서도 하나 하나의 문제들에 대처하는 것 이상으로 이 생태문제를 바라보는 관점, 즉 세계관이 매우 중요하다.

생태문제를 총체적으로 바라볼 수 있는 세계관이 중요함은 오히려 이 세계관을 제대로 가지고 있지 못할 때, 어떠한 문제가 발생하는 지 확인해보면 알 수 있다. 다음은 그 구체적인 사례이다.

- 기후변화에 대처하기 위한 자본가들의 시장주의적 대처방안

기후변화와 관련하여 주되게 논의되고 있는 처방은 바로 시장주의적 처방이다. 교토의정서에서 이미 제시된 바 있는 탄소배출권 거래나 청정개발제도 등은 시장을 통해 문제를 해결하겠다는 전형적인 자본주의적 태도이며, 향후 이러한 시장주의적 처방은 더욱 확대될 것이다. 예를 들어 미국의 탄소배출 감소 계획의 주된 핵심이 바로 오염총량거래제도(cap and trade)이다. 이러한 방식은 탄소배출을 축소시키기는커녕, 오히려 탄소배출권을 새로운 투기수단으로 만드는 것이다. 자본가들의 시장주의적 처방은 그들의 사고, 즉 자본주의가 최적의 체제라는 사고에서 나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자본주의적 사고는 기후변화에 대해서 득이 되기보다는 더 큰 해를 낳을 뿐이다.(더 자세한 내용은 제 2강좌의 김종환, 「기후 온난화에 맞선 우리의 대응 방안은?」을 참고할 것)

- 제임스 한센의 탄소세 / 기술의존적 태도

제임스 한센은 나사 고다드 연구소의 소장으로, 기후변화의 심각성을 계속 경고해온 대표적인 학자이다. 제임스 한센은 현재의 기후변화가 소위 “Tipping point”라는 기로에 서 있다고 경고하면서, 과감한 조치를 취하지 않는다면 돌이킬 수 없는 상황이 발생할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그의 주장과 이 주장을 뒷받침해주는 연구성과들, 그리고 기후변화에 적극적으로 대응하지 못하는 미국정부와 기득권에 대한 비판에도 불구하고 그의 대안은 이런 비판만큼에 미치지 못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그는 탄소세와 이산화탄소 포집저장기술이 발전할 때까지 석탄 발전의 중단 등을 요구한다. 탄소세가 탄소배출을 감축시킬 수 있는 하나의 제도적 수단으로 활용될 수 있겠지만, 이를 통해 기후변화를 해결할 수 있다고 보는 것은 한계가 있다. 그리고 화석연료를 사용하는 발전설비의 경우에도 이산화탄소 포집저장기술이 발전하면 충분히 이용할 수 있을 것으로 보는 기술의존적 태도를 보여준다. 반면 과도한 에너지를 사용하는 경제체제 자체의 변화에 대해서는 전혀 논의하고 있지 않다.(한센의 주된 분석과 대안에 대해서는 「티핑 포인트(Tipping Point): 기후학자가 바라보는 기후변화」(http://pubs.giss. nasa.gov/abstracts/2008/Hansen_1.htm)를 참고할 것

과감한 현실분석에 턱없이 부족한 온건한 처방은, 한센의 분석에 대한 설득력을 감소시키는 느낌을 준다. 이러한 모습이 나온 것은 기후변화의 의미를 보다 포괄적으로 분석하지 못하는 사고의 한계라고 생각된다.

- 제임스 러브룩의 원자력 발전지지

한편 기후변화의 중요성을 주장하는 저명한 학자 중 한 사람인 제임스 러브룩은 1970년대 주장한 가이아 이론으로 유명한다. 그는 「가이아의 복수」에서 기후변화로 인한 묵시록적 상황을 예견하면서, “현재 우글거리는 수십 억 명의 인구 중 극소수만 살아남을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거나 “지구의 남은 서식 가능 지역을 개간하고 공기를 오염시키는 어리석은 짓을 계속한다면 최종 파국이 찾아 올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최종파국을 막기 위한 그의 대안은 원자력이다. 그가 원자력을 대안으로 삼는 이유에 대해서 들어보자. “원자력이 우리의 요구를 충족시키면서도 가이아에게 해를 끼치지 않고 가이아의 안락한 기후와 대기 조성 유지 능력에도 간섭하지 않는 유일한 에너지원이라고 믿는다. 주된 이유는 핵반응이 화학반응보다 수백만 배 더 강력하기 때문이다. … 이것은 우리의 에너지 수요를 충족시키는 데 필요한 핵연료의 양이 가이아에 통상적으로 거래되는 대량의 연료에 비해 적으며, 생성되는 폐기물의 양도 적다는 의미다.”(러브록, 「가이아의 복수」)

가이아 이론의 창시자라고 믿기지 않는 러브록의 적극적인 원자력 옹호는 단지 화석연료보다 효율이 더 좋고 폐기물이 적다는 것으로 정당화된다. 게다가 현재 지구의 과도한 에너지 수요를 당연시하며 이 수요를 충족시켜주기 위한 에너지원의 발견에 몰두하는 태도를 보여준다. 이는 기후변화가 지니는 의미를 보다 포괄적이고 총체적인 맥락에서 보기 보다는, 기후변화에 한정된 기술적 문제로 접근하는 태도이다.

이외에도 생태문제, 더 나아가 사회전반을 총체적으로 인식하는 세계관을 확실히 세우지 못하였을 경우의 모습은, 한국의 환경운동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그 예로 최근 원전 수주와 관련하여 한겨레 21, 793호에 실린 “완전 대박? 완전 희박!”이라는 글을 들 수 있다. 이 글의 저자는 녹색연합의 석광훈 정책위원으로 그는 원전은 시장 규모가 줄어가니 전도 유망한 가스터빈으로 시장을 돌려야 하며, 원자력은 ‘청정개발체제’ 수단이 아니기 때문에 인센티브도 못 받는다는 훈수를 하고 있다. 따라서 원자력이 아니라 다른 방향으로 미래 전력시장을 지배할 기술의 개발에 나서야 한다고 주장한다. 석광훈은 국가주의, 민족주의, 시장주의를 적극 주장하는 환경운동이라는 희화적 모습을 보여준다.


2. 맑스주의, 생태문제와 어떤 관계에 있는가?

세계관의 중요성에 대해서 말하였으나, 그렇다고 생태문제에 대해 올바르게 접근하고 있는 세계관이 맑스주의인가에 대해서는 새로운 질문이 나올 수 있다. 특히 맑스주의를 국가의 이념으로 삼았던 현실사회주의의 경험은 맑스주의가 생태문제를 제대로 설명할 수 있다는 데에 회의하게 만들기도 하였다. 소련과 동유럽 국가들은 각종 심각한 환경오염을 겪었으며, 경제규모의 확대를 추구하는 과정에서 자연에 주는 영향에 대해서는 경시하기도 하였다.* 따라서 생태주의자들 중에는 맑스주의가 생태문제를 설명하는데 한계가 있다고 주장하거나, 더 나아가 맑스주의는 반생태적이라고 주장하기도 하는 경우도 존재한다. 사실 1980년대 중반까지 이러한 입장이 대세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 그러나 현실사회주의에 대한 논의는 강연의 주제가 아니기 때문에, 이러한 현실사회주의의 한계는 맑스주의 자체의 문제는 아니라는 정도만을 언급하고자 한다.


맑스주의가 생태문제에 대해 적극 나서기 시작한 것은 80년대 이후라고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인데, 이때부터 맑스주의적 관점에서 생태문제를 설명하기 위한 이론적 모색이 본격화되었다. 이러한 모색은 대개 맑스주의자로 자처하는 사람들에 의해 이루어졌지만, 이 경우에도 기본적으로 맑스주의가 생태문제를 이해하는 데 한계를 지니고 있다는 생각에서 출발하는 입장으로 다양한 방식으로 맑스주의를 수정하거나, 혹은 맑스주의의 이론구조 내에서 용해될 수 없기 때문에 맑스주의와 생태주의를 병렬적으로 결합하려는 모습을 보인다. 테드 벤튼의 “맑스주의와 자연의 한계 - 생태주의적 비판과 재구성”과 제임스 오코너의 “자본주의 ,자연, 사회주의: 이론적 서설”은 이러한 입장을 가장 잘 드러내는 글이다.

즉 전반적으로 맑스주의를 지지하건 반대하건 맑스주의 자체가 생태문제를 설명할 수 없거나, 단초는 있더라도 설명에 한계가 있다는 인식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인식은 맑스주의 사상이 올바로 이해되지 못하고 다양한 방식으로 협소화되고, 왜곡되었기 때문에 나타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맑스주의는 맑스와 엥겔스가 의도하였던 것과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이해되었고, 이러한 이해에 기초해 비판을 받았다. 맑스주의는 맑스 생전부터 여러 가지 방식으로 왜곡 되어서, 맑스 스스로가 본인은 맑스주의자가 아니라고 냉소를 보냈을 정도였다.

맑스주의의 협소화, 왜곡은 제 2 인터내셔날의 시기에는 경제결정론, 단선적이고 도식적인 역사발전관으로 나타났으며, 스탈린 치하 소련에서는 이러한 왜곡이 더욱 심화되었다. 소비에트 맑스주의의 문제를 비판하는 과정에서 서구맑스주의 역시 관념론적인 방식으로 맑스주의를 왜곡하거나 협소화시켰다. 왜곡과 협소화의 주요 내용 중에는 다음의 것들이 있다.

- 맑스주의의 철학적 기반으로서 유물론이 경시되었다.
- 맑스주의가 인간과, 자연에 대한 총체적 시각을 제공한다는 점이 약화되고, 사회과학, 인문과학 등의 학문분야로 협소하게 이해되었다.
- 서구맑스주의의 영향으로 관념적이고 상대주의적인 이론이 만연하게 되었다.

맑스주의의 협소화, 왜곡을 극복하고, 맑스주의의 지평과 전망을 확장시키는 것이 중요한 맑스주의의 과제라고 할 수 있다. 생태문제와 관련해서도 맑스주의를 생태주의적으로 수정해야 할 문제가 아니라, 왜곡되고 협소화된 맑스주의를 복원해 갈 때 맑스주의 속에 풍부하게 들어가 있는 풍부한 생태주의적 측면이 온전히 설명될 수 있다.


3. 맑스주의의 주요 내용 속에 있는 생태주의

그렇다면 맑스주의의 주요 내용은 무엇인지 설명해보도록 하겠다.

1) 맑스주의의 철학적 기반인 유물론

맑스주의는 유물론이라는 철학에 기반을 둔 사상이다. 유물론은 자연이 정신에 비해 본원적이라고 보는 철학으로, 물질이 모든 것에 선차적이며, 물질이 인간의 의식을 결정하며, 인간의 의식 역시 물질의 산물이라고 보는 철학이다. 따라서 유물론은 일체의 종교적, 관념적 견해에 대해서 강력한 비판을 제공한다.

유물론 철학은 고대 그리스의 자연철학에서부터 그 연원을 찾을 수 있는데, 데모크리투스나 에피쿠로스 등의 고대 원자론이 그 대표적 예이다. 이들은 세계가 원자로 이루어져 있으며, 어떠한 전지전능한 신의 존재도 부정하는 세계를 그려내었다. 이러한 고대 유물론은 당연히 성직자들과 보수주의자들의 반대와 탄압을 받았다.

유물론은 근대 과학의 여명기에 다시 부활하게 되는데, 이 과정에서 유물론과 종교, 관념론 사이의 투쟁은 피비린내 나는 숙청과 탄압이 수반되는 과정이기도 하였다. 조르다노 브루노는 무한우주설을 주장하다가 화형에 처해졌으며, 갈릴레오는 지동설을 주장하다가 유폐되고 침묵을 강요당했다. 한편 영국과 프랑스를 중심으로 한 유물론은 근대 자연과학의 발전과 자본주의의 발전에 큰 기여를 하였다.

그러나 근대 여명기의 유물론은 몇 가지 한계가 있었다. 우선 모든 자연현상을 기계의 부품처럼 최소단위로 분해될 수 있는 것으로 상정하는 기계론적인 성격을 지니고 있었다. 두 번째로 이전의 유물론은 인간의 특성을 올바로 고려하지 못하여 인간의 역할을 적극적으로 설명하지 못하였다.** 그리고 자연과학을 넘어서 인간과 사회에 대해서는 자신들이 지닌 유물론적인 태도를 버리고 보수적이거나 관념론적 태도를 취하곤 하였다.***

** 맑스는 포이에르바하에 관한 테제들에서 “지금까지의 모든 유물론(포이에르바하의 유물론을 포함하여)의 주요한 결함은 대상, 현실, 감성이 오직 객체의 혹은 관조의 형식 아래에서만 파악되고 있다는 것; 그리고 감성적 인간활동으로서, 실천으로서 파악되지 않고, 주체적으로 파악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따라서 능동적 측면은 유물론에 대립해서 관념론에 의하여-물론 관념론은 현실적 감성적 생위 자체를 알지 못한다-추상적으로 발전된다”고 기존의 유물론을 비판하였다.

*** 맑스는 이를 다음과 같이 주장하였다. “자연과학의 추상적 유물론(즉, 역사와 역사적 과정을 배제하는 유물론)의 결함은, 그 대변자들이 일단 자기의 전문영역 밖으로 나왔을 때에 발표하는 추상적이며 관념론적인 견해에서 곧 드러난다.”(자본론 1권 하, 501쪽)

2) 유물론의 발전으로서 맑스주의 : 변증법적 유물론, 사적유물론

맑스는 이런 이전의 유물론을 더욱 발전시킨다. 우선 맑스는 유물론에 변증법적 방법론을 결합시켰다. 변증법적 방법론은 현상을 여러 현상들과의 연관 속에서 유기적이고 총체적으로 바라보는 것이자, 이 현상을 생성, 발전, 소멸이라는 구체적인 운동 속에서 바라보는 것이다. 맑스의 방법론은 「자본론」 1권의 2판 후기에서 잘 나타나 있다. 이 후기에서 맑스는 러시아의 학자 카우프만의 긴 논평을 인용하고 있다.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상이한 발전단계를 표현하는 일련의 순서·순차성·관련성을 정확하게 분석하는 것이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경제상황의 일반 법칙은 현재에 적용되든 과거에 적용되든 동일하다고 말할 것이다. 바로 이것을 마르크스는 부인한다. 그에 의하면, 그와 같은 추상적 법칙은 존재하지 않는다. …… 반대로 각각의 역사적 시기는 자기 자신의 법칙을 가지고 있다. …… 경제생활의 일정한 발전시기를 경과해 일정한 단계로부터 다른 단계로 이행하지마자, 경제생활은 다른 법칙에 의해 지배받기 시작한다.”

“이러한 관점에서 자본주의적 경제질서를 연구하고 해명하려는 마르크스는 경제생활의 정확한 연구가 반드시 가져야 할 목표를 엄밀히 과학적으로 정식화하고 있을 따름이다. … 이와 같은 연구의 과학적 가치는 일정한 사회유기체의 발생·생존·발전·사멸과 더 높은 다른 사회유기체에 의한 교체를 규제하는 특수법칙들을 해명하는 데 있다.”

이러한 논평에 대하여 맑스는 논평자가 “나 자신의 방법이라고 생각하는 것을 아주 정확하게 묘사하고 있으며”, “그가 묘사하고 있는 것은 바로 다름 아닌 ‘변증법적 방법’이 아닌가”라고 말하고 있다.

맑스는 유물론을 인간의 역사에도 적용시켜나간다. 즉 역사적 유물론을 발전시켰다. 엥겔스는 「유토피아에서 과학으로의 사회주의의 발견」이라는 글에서 맑스의 공로로 유물론적 역사 파악과 잉여가치를 매개로 하는 자본주의적 생산의 비밀의 폭로를 들고 있을 정도로 유물론을 역사 파악에 확대시킨 것은 맑스의 커다란 성과라고 할 수 있다.

유물론적인 역사파악은 세 가지의 중요한 내용을 지니는데, 하나는 인간을 자연 속의 존재로서 파악한 점이다. 이는 인간이 다른 자연대상과는 구별되는 어떤 고귀한 존재이거나 만물의 영장이 아니라, 철저하게 자연의 발전 속에서 나온 하나의 생명체로 보았다는 점이다. 이는 인간에 대한 환상을 제거하는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이는 청년기 맑스의 「경제학 철학 수고」에서 명확하게 표현되었다.

“인간은 자연 존재로서 그리고 살아 있는 자연 존재로서 자연적 힘들·생명력들을 갖추고 있는 활동적 자연 존재이며, 이 힘들은 그의 안에 소질과 능력, 충동으로 존재한다; 한편 인간은 자연적·육체적·감각적·대상적 존재로서 식물이나 동물과 마찬가지로 시달리고, 제약되고 한계 지어진 존재이다. 그의 충동의 대상들이 그의 밖에, 그로부터 독립된 대상들로 존재한다. 그렇지만 이 대상들은 그의 욕구의 대상들로서 그의 본질적 힘들을 실증하고 확증하는 데 없어서는 안 될 본질적 대상들이다. 인간이 육체를 지니고 자연적 힘들을 지니고 살아 있고 현실적이고 감각적인 대상적 존재라는 것은 인간이 현실적이고 감각적인 대상들을 자신의 존재의 대상으로, 자신의 생활 표현의 대상으로 가진다는 것 혹은 그가 오직 현실적인 감각적 대상들에만 자신의 생활을 표현할 수 있다는 것을 말한다.”

두 번째는 인간의 역사 역시 자연의 운동처럼 생성, 발전, 소멸의 구체적인 역사발전과정을 거치는 것으로 보았다는 점이다. 이러한 변증법적인 방법에 따라 이러한 인간이라는 생물의 발전과정이 인간의 역사이며, 인간의 역사는 이러한 인간의 생물이 생존하기 위하여 자기 주변의 자연을 이용하고 변형하는 과정이라고 보았다. 따라서 맑스는 “모든 자연적인 것이 생성해야 하듯이 인간도 자신의 생성 행위인 역사를 가진다. … 역사는 인간의 진정한 자연사이다”(맑스, 「경제학 철학 수고」)라고 주장하였다.

세 번째로 인간이 다른 동물과 다른 특수한 성격으로서 노동을 강조한다. 이는 맑스의 초기 저작에서 나오는 유적 존재라는 말이 의미하는 바인데, 이 개념은 철학적으로 난해한 개념이라는 이미지를 주지만, 이 개념의 영어 표현을 보면 오히려 쉽게 이해될 수 있다. “유적 존재”의 영어 표현은 “species-being”으로 “종으로서의 존재”라는 의미를 지닌다. 맑스는 “유적 존재”로서 인간은 하나의 생물 종이라는 측면에서 다른 동물과 동일성을 지니지만, 다른 동물과 인간이란 종을 구분짓는 고유한 차이점은 인간의 활동이 “동물보다 더 보편적” 특징을 지닌다는 점, 즉 인간은 “대상적 세계의 가공 속에서” 자신을 유적 존재로서 증명한다는 점으로 보았다. 이는 인간이 노동을 한다는 점이 유적 존재로서(하나의 생명 종으로서) 인간의 중요한 본질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노동에 대한 강조는 후기 저작의 핵심인 자본론에서 더욱 분명한 형태로 확인된다.
맑스는 자본론 1권, 7장에서 노동과정에 대해 분석하며 이러한 자신의 사고를 더욱 구체적으로 전개하고 있다. 여기서 맑스는 “노동과정은 우선 첫째로 어떤 특정 사회형태와 관계없이 고찰되어야 한다”고 파악한다. 인간이 자연의 일부이자 유기체의 하나로서 생명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노동이 불가피하며, 이는 어떤 사회형태에서도 벗어날 수 없는 “자연이 부과한 인간생존의 조건”이라는 것이다. 맑스는 이 노동의 의미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구체적으로 설명한다.

“노동은 무엇보다도 먼저 인간과 자연 사이에서 이루어지는 하나의 과정이다. 이 과정에서 인간은 자신과 자연 사이의 신진대사를 자기 자신의 행위에 의해 매개하고 규제하고 통제한다. 인간은 하나의 자연력으로서 자연의 소재를 상대한다. 인간은 자연의 소재를 자기 자신의 생활에 적합한 형태로 획득하기 위해 자기의 신체에 속하는 자연력인 팔과 다리, 머리와 손을 운동시킨다. 그는 이 운동을 통해 외부의 자연에 영향을 미치고, 그것을 변화시키며, 그렇게 함으로써 동시에 자기 자신의 자연(즉 인간본성: 역자)을 변화시킨다. 그는 자기 자신의 잠재력을 개발하며, 이 힘의 작용을 자기 자신의 통제 밑에 둔다.”(맑스, 「자본론」 1권, 7장)

그리고 노동이 다른 유기체의 생명활동과 다른 차이는 노동자가 단순히 “자연물의 형태를 변화시킬 뿐 아니라 자기 자신의 목적을 자연물에 실현”시키는 의식과 의지를 지닌 합목적적 활동이라는 점으로 보았다.

요컨대 맑스주의의 역사적 유물론은 다음과 같은 내용을 지닌다. 인간은 자연 속에 존재하는 그 스스로가 자연의 일부인 생물로서 자신의 생명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생존활동을 해나갈 수 없다. 반면 인간은 다른 생명체와는 다르게 의식과 의지를 가진 생명체로서, 인간은 생존을 영위하는 과정에서 자연을 자신의 목적을 실현하기 위해 이용하는 합목적적인 활동을 진행한다. 이러한 인간의 고유한 특징이 바로 인간의 노동인데, 인간은 노동을 통해서 자연과 서로 관계를 맺고 자신의 생존을 유지한다. 자연과 인간이 노동을 통해서 매개되는 이 노동과정은 어떤 사회, 시대를 불문하고 인간에게 공통된 것이며, “자연이 부과한 인간생존”의 조건이다. 그러나 이 자연과 인간 사이의 물질대사를 규제, 매개, 통제하는 노동과정의 형태는 구체적 사회구성체마다 고유한 모습을 지닌다. 즉 각각의 사회구성체에는 고유한 방식의 인간과 자연의 물질대사 관계가 존재한다는 것이다.

3) 자본주의 생산양식의 특징

자본주의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중요한 특징들이 존재하지만, 여기서는 생태문제와 연관된 특징들을 거론해보도록 하겠다.

- 자본주의 생산의 목적 : 이윤의 획득

우선 자본주의의 생산은 이윤의 획득이 목적이다. 일반적으로 모든 사회에서 생산의 목적은 사회 구성원들의 욕구, 즉 살아가는 데 필요한 생활수단을 충족시켜 주는 것이다. 그리고 대부분의 사회에서 생산은 이러한 욕구의 충족을 즉각적으로 고려하여 이루어졌다. 그러나 자본주의 하에서는 욕구의 충족이 1차적인 생산의 목적이 아니라 상품을 판매하여 이윤을 획득하는 것이 생산의 1차적인 목적이 되었다. 그리고 사회 구성원의 욕구 충족은 이러한 이윤 획득 과정에서 자연스레 충족되는 것으로 상정되었다. 이를 고전 경제학은 ‘보이지 않는 손’으로 표현하였고, 맑스주의는 ‘생산의 무정부성’이라고 표현한다.

자본주의는 이 이윤을 획득하고 그것을 극대화하는 것이 생산의 목적이기 때문에, 생산은 불가피하게 생산 그 자체가 목적이 되게 되었고, 획득된 이윤도 다시 생산에 투자되는 무한한 축적과정이 이루어지게 되었다. 이 과정을 맑스는 다음과 같이 표현하였다.

“이것은 아브라함이 이삭을 낳고 이삭은 야곱을 낳고 하는 식의 옛 이야기와 같다. 10,000원의 최초 자본은 2,000원의 잉여가치를 가져오는데, 이것이 자본화한다. 2,000원의 새로운 자본은 400원의 잉여가치를 가져오고, 이 잉여가치가 또 자본화해 제2의 추가자본으로 전환하며, 이것이 또다시 80원의 새로운 잉여가치를 가져온다. 이 과정은 이와 같이 계속된다.”

따라서 자본주의 하에서는 인간의 필요 충족이라는 측면과는 관계 없이, 이윤의 획득이라면 어떤 것이든지 생산하고, 이를 위해 생산의 규모를 무한도로 팽창시켜나가려는 특징을 지니게 된다. 이는 노동자에 대한 착취와 빈곤을 확대 가속화하는 동시에, 또 다른 부의 원천인 자연에 대한 무제한적인 약탈을 수반하게 된다.

- 생산수단의 사적 소유와 노동력의 상품화

자본주의는 상품생산과 유통의 일반화가 역사적 전제이기 때문에 최초의 자본의 형태는 상인자본의 형태를 띠었다. 그러나 자본주의가 발달하면서 상인자본은 생산자가 생산해낸 상품을 구매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생산과정 또한 장악한다.

기존의 사회체제는 직접생산자와 생산수단이 결합되어 있었다. 노예제의 경우에, 노예주는 생산수단뿐 아니라 생산자까지 소유하여 생산수단과 생산자의 결합을 유지하였다. 봉건제에서도 영주는 생산의 결과 중 일부를 수탈하든지, 농노의 노동시간 중 일부를 영주 자신을 위해 사용하게 하여 잉여생산물을 획득하였을 뿐 생산수단과 생산자를 분리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자본주의에서는 생산에 종사하는 생산자와 생산수단이 분리되어 있다. 자본주의에서는 생산수단을 소유한 자본가가 생산수단을 소유하지 못하고 생산수단으로부터 분리된 노동자를 고용하여 생산수단과 생산자의 결합을 만들어내고 이를 통해 생산 활동이 이루어지게 한다.

이러한 생산수단과 생산자의 분리과정은 자본주의가 성립하는 필수조건인 동시에, 직접 생산자를 생산의 결정과 통제에서 소외시키는 결과를 낳는다. 분업과 계급사회 출현 이후 정신노동과 육체노동의 분업이 계속 발전하였지만, 자본주의는 생산수단과 생산자의 분리를 통해 이 분업을 가장 심각하게 발전시킨다. 그리고 육체노동 역시 분업이 심화되고 기계의 도입을 통해 노동자체를 극히 단순화 시킨다. 따라서 자본주의 하에서 생산자인 노동자계급은 생산에 대한 통제력을 거의 가지지 못한 채, 노동과정에서 소외되어 단지 노동과정에서 하나의 객체로, 하나의 부품 정도로 전락한다.

이는 인간 능력의 일면화와 퇴보화를 낳을 뿐 아니라, 생태문제를 야기하는 생산과정에 대한 통제가 한 줌의 자본가 수중에 놓인 채 노동자들은 어떠한 대응도 하기 어려운 조건에 놓이게 됨을 의미한다.

- 자본주의 하에서 기술의 발전, 생산력의 발전은 생태위기를 해결하기 위한 수단이 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더 큰 위기를 낳을 뿐이다.

자본주의 하에서 주기적으로 발생하는 공황은 자본주의 하에서 발전한 생산력과 생산관계 사이의 모순을 드러낸다. 발전한 생산력은 인류 전체의 욕구 충족과 전면적인 발전을 위한 수단으로서 이용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본주의 생산의 목적인 이윤획득을 충족시키지 못하면서 인류를 극심한 고통에 빠트리는 과잉생산 공황을 발생시킨다. 이러한 공황은 해결되더라도 더 큰 공황을 향해 나아갈 뿐이다.

이와 비슷하게 자본주의 하에서 생태위기 역시 동일한 길을 걷는다. 에너지 절약 기술의 발전, 이산화탄소 포집저장 기술의 발전 등 생산력의 발전은 전체적으로 에너지 절약을 유도하는 것이 아니라 사용하는 에너지 총량을 증가시킨다. 이는 “제본스의 역설”로 알려져 있다. 제본스는 「석탄문제」라는 책에서 “석탄 같은 자연 자원을 사용할 때 효율성이 증가하면 수요가 감소하는 것이 아니라 생산 규모가 커지기 때문에 오히려 증가한다고 주장했다.”(존 벨라미 포스터, 「생태계의 파괴자, 자본주의」) 이러한 역설적 상황이 발생하는 원인은 생산을 위한 생산, 무제한적 축적을 지향하는 자본주의 생산양식 자체에 있다. 모든 노동절약적, 에너지 절약적 기술은 결국 다른 자본과의 경쟁에서 승리하기 위한 수단에 불과하며, 그리고 이 경쟁에서 승리하고, 이윤을 획득하기 위해서는 생산의 규모는 지속적으로 확대시켜야 한다. 따라서 자본주의 하에서는 에너지 절약이 더 큰 에너지의 사용을 낳게 된다.

자본주의 하에서는 한가지 생태문제가 해결될 수 있다 해도 자본주의의 무한한 축적추구가 사라지지 않는 한 새로운, 더 큰 생태위기를 낳게 된다. 가령 자본주의 하에서 탄소배출을 과감하게 축소시키는 기술이 도입되고 일반화되어 기후변화를 일정정도 막을 수 있다고 하더라도, 탄소 배출 감소 기술은 더 큰 에너지 사용을 유도하여 새로운 생태위기를 야기할 수 있는 것이다.


4. 생태문제에 대한 맑스주의적 관점

1) 생태문제(위기)란 무엇인가?

생태문제는 인간과 자연 사이의 관계에 문제가 발생하였음을 의미한다. 생태문제가 말 그대로 문제가 되는 것은 인간이 자연을 이용하고 변형을 가하는 과정에서 나온 결과물들을 자연이 더 이상 감당할 수 없는 상황에까지 이르렀으며, 이것이 인간 스스로의 생존까지 위협하는 상황을 낳았기 때문이다.

2) 자본주의가 야기한 인간과 자연 사이의 신진대사적 관계의 균열

앞서 역사적 유물론에 대해서 설명하였듯이, 인간은 자연의 일부이자 자연의 산물로서 철저히 자연 속에서 생존을 영위하지 않을 수 없다. 인간과 자연 사이의 관계를 노동이 매개하게 되는데, 이러한 인간과 자연 사의의 관계를 맑스는 신진대사(metabolism)라는 용어로 표현하였다. 그리고 인간과 자연 사이의 신진대사과정은 역사적으로 노동과정이 취하는 형태에 따라 다양한 모습을 띄었다.

즉 맑스는 생태문제는 인간과 자연 사이의 관계의 문제임을, 이 관계에서 심각한 균열이 발생하여 생긴 문제로 인식할 수 있게 해준다. 그리고 생태문제는 인간의 활동방식 자체의 문제가 아니라, 특정한 인간의 활동방식에서 오는 문제임을 분명히 한다.

가령 자본주의가 아닌 생산양식에서는 대부분 오히려 인간과 자연 사이의 순환적 관계가 강조되었다. 그러나 자본주의에서는 이윤추구라는 목적을 위해 자연에 대해 무제한적인 수탈을 하는 것이 당연시되는 생산관계가 발생하였다. 따라서 추상적으로 인간의 활동을 문제삼는 것이 아니라 이 특정한 인간 활동방식, 즉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을 극복하는 것이 생태문제 해결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다.

3) 생태문제 해결에 대한 맑스의 전망

맑스는 이러한 자본주의의 생태파괴적 본성에 대한 대안으로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자본주의적 생산은 자연발생적으로 조성된 신진대사의 상황을 파괴함으로써, 신진대사를 사회적 생산을 규제하는 법칙으로서 그리고 인간의 완전한 발전에 적합한 형태로 체계적으로 재건할 것을 강제한다.”(「자본론」 1권, 15장)

“이 영역[필연의 왕국:필자]에서 자유는 오직 다음과 같은 점이다. 즉 사회화된 인간, 결합된 생산자들이 자연과의 신진대사를 합리적으로 규제함으로써 그 신진대사가 맹목적인 힘으로서 그들을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그 신진대사를 집단적인 통제 아래에 두는 것, 그리하여 최소의 노력으로 그리고 인간성에 가장 알맞고 적합한 조건 아래에서 그 신진대사를 수행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여전히 아직 필연의 왕국이다. 이 왕국을 넘어서야만 진정한 자유의 왕국―즉 인간의 힘을 목적 그 자체로서 발전시키는 것―이 시작된다.”(「자본론」 3권, 48장)

여기서 맑스의 대안은 다음과 같이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첫 번째는 이윤 추구, 생산 그 자체가 목적인 생산 등을 위해 자본이라는 대상이 주체인 인간을 종속시키는, 전도 상황을 극복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보았다는 점이다. 자본주의적 생산관계에서처럼 인간이 사회의 운영과 통제에 대해서 소외되어 있는 상황, 인간의 노동이 소외되어 있는 상황에서는, 자본의 이윤추구 과정에서 발생하는 물질대사의 균열을 막을 수 없다는 것은 자명하다. 따라서 인간과 자연이 관계를 맺는 과정을 “사회화된 인간”, “결합된 생산자”들이 직접 통제할 때에만 물질대사의 균열을 극복할 수 있다는 것이다.

두 번째는 인간 개개인의 다방면에서의 발전이 진행되는 것과 물질대사의 균열을 해결하는 것이 결합되어 있다는 것이다. 우선 이는 자연에 대한 인간의 지식의 발전과 이 지식을 올바로 이용할 수 있는 인간본성의 발전을 의미한다. 인간이 자연의 맹목적 힘에 지배받지 않기 위해서는 자연에 대한 지식이 발전해야 한다.

그리고 이러한 지식을 자연과 공존하는 관계를 맺는데 이용하기 위해서는 인간의 본성이 더 높은 차원으로 발전해가야 한다. 또한 이는 인간이 자연과 맺고 있는 노동의 형태를 인간과 자연의 공존이 인간발전과 양립할 수 있는 방식으로 변화시키는 것과 관련이 있다. 맑스는 인간노동이 자연(nature)을 자신의 목적에 맞추어 변화시키는 과정인 동시에 스스로의 본성(nature) 역시 변화시키는 과정으로 보았다. 여기서 인간과 자연간의 관계를 매개하는 노동이 어떤 형태를 취하는가는 인간의 발전과 긴밀한 연관이 있음은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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