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어를 비판한다

[양한승의 정세이야기] ‘공포의 균형’이라는 허위의식




민족주의와 세계체제의 야합

“2020년이 되면 한국도 핵무기를 갖게 될 것이다” 이번엔 월러스틴의 도발이다. “미국의 패권이 퇴조하게 되면 한국과 일본, 대만 등도 미국의 핵우산에 의존할 수 없기 때문에 자체적으로 핵무장할 것” “공포의 균형(balance of terror)이 나타나 동북아시아 정세는 더 안정적으로 될 것” “이것 역시 세계체제의 일부” 40년 전 다극체제를 전망했던 그의 최근 발언이다.

덧붙여 한국의 G20 개최를 호의적으로 평가하며 “미국의 도움 없이 살아보겠다는 민족주의 정신” “어린아이가 아니라 어른이 된 것” 오만한 폭언이 쏟아진다. 물론 그는 모든 국가의 핵무기 철폐라는 당면한 군축운동의 당위성에 기꺼이 동의한다. 다만 지금은 “자본주의 세계체제 안의 구조적 위기가 있다고 하지만 우리는 혼란기에 살고 있다” 아리송하다.

그의 정치적 포지션이 어디에 있는가를 새삼 깨닫는 대목이다. 글로벌 기회주의자의 처세술을 느낀다. 똑같은 논리를 쉼 없이 겪으며 비판한 바 있기에 따로 반박의 필요는 없다. 고충을 달리하여 그의 언어, 그의 철학적 언어, 모순에 빠진 계급사회 언어에 대하여 다른 차원의 대응을 결심하게 만든다. 우리는 언어가 맡고 있는 이데올로기를 알고 있다.

새로운 언어의 발전을 설교하거나 기다리지 않겠다. 언어가 적절하게 정제되기만 한다면 현실의 합리적인 핵심을 반영할 수 있다는 말은 18세기 중반까지의 지배적인 개념일 뿐이다. 오직 하나의 이성이 존재하기 때문에, 즉 진리의 보편집합과 필연집합은 하나만이 있기 때문에, 하나의 언어는 이러한 진리들을 완벽하게 표현할 수 있다고 가정되었다. 이 관점을 거부한다.

특정 언어가 갖고 있는 정신적인 구체성과 개별성에 더 많은 관심을 갖는다. 사상가들이 시대적인 경향을 표현하는데 있어서 자연언어가 맡고 있는 역할을 주목해야 한다. 많은 언어가 있다면 이로부터 많은 진리가 존재하며 따라서 이성의 통일성은 침식될 것이다. 보편성 개념을 재사유하여 특수주의적인 함축과 보편주의적 진리의 양립을 극복할 수 있다.

프롤레타리아는 자기 자신들 뿐만 아니라 모든 인류를 해방시킬 관점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이론화는 주어진 현실에 닻을 내리고 있는 생각과 용어로 이루어질 때 비로소 정당하게 이해될 수 있다. 새로운 언어는 옛 언어의 정화된 판본일 것이다. 현실의 역동성을 왜곡하는 부르주아 도덕과 위선에 민감해야 한다. 활동의 언어가 중요하다. 언어는 실천의 언어이지 단순히 이론적인 언어가 아니다.

이론이 일단 대중을 움켜쥔다면 이론은 물질적 힘이 된다. 이러한 일은 오직 인간이 그 자신을, 따라서 신 또는 정신이 아닌 종교와 역사의 능동적인 주어로 보았을 때에나 가능하다. 왜냐하면 인간의 뿌리는 인간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통찰을 얻기 위해서는 대중이 이론의 언어를 이해할 수 있도록 신비화의 탈을 벗겨야 한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유일하게 이해 가능한 언어는 부(富)가 사용하는 언어이다. 우리는 인간적인 언어를 이해하지 못하며 인간적인 언어는 여전히 효력이 없는 상태로 남아있다. 인간적인 언어는 구걸하고, 간청하고, 따라서 굴욕적인 것처럼 느껴지며 오직 수치심과 품위의 저하를 느끼면서 사용된다. 더불어 인간적인 언어는 무례하거나 정신착란적인 것으로 인식되며 따라서 거부된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인간 본질로부터 너무나도 심하게 소외되어 있다. 인간의 직접적인 언어는 우리에게 인간의 위엄성에 대한 공격으로 느껴진다. 반면 객관적 가치의 소외된 언어는 정당화된 인간의 위엄성, 자기 확신적이고 자기 인정적인 인간의 위엄성처럼 나타난다. 코뮤니스트는 부르주아 경제학의 자본주의적 언어를 보다 인간적인 언어로 번역하거나 대조하기보다는 이러한 언어가 스스로 말하게끔 허락한다.

자본주의적 언어에 의해 표현된 모순들은 이러한 방식 속에서 그 자체를 보여줄 수 있으며 해결책, 즉 사적소유 제도의 지양은 자본주의적 언어에 의해 창조된 극단적인 모순으로부터 나온 것으로 이해될 수 있다. 이와 같은 방법은 정치경제학 이론들이 자신들의 설명을 공허한 도덕화와 허위적인 겉치레로 치장하기 보다는 자신을 있는 그대로 말할 것을 내용적으로나 문체적으로도 요구한다.

정신은 애초부터 물질에 묶여있는 멍에를 지고 있으며 이러한 물질은 여기에서 공기층, 음성, 요컨대 언어의 형식을 통해서 나타난다. 인간의 말은 그 자신의 상호주관적인 자아, 다시 말해 기본적인 물질적 사회필요에서 나오고 이와 함께 성장한 자아를 구성하는 동시에 표현한다. 이데올로기 제조자들은 이러한 노동 분리와 달갑지 않은 사회계급들을 반영하는 사회적 언어를 형성한다.

그 사회의 어휘집은 그 시대의 지배이데올로기 때문에 전 사회 영역으로 스며들게 되며 각 시대의 언어는 지배계급의 가치를 표현한다. 강조하면, 사회의 지배적인 물질적 힘인 계급은 동시에 사회의 지배적인 정신적 힘이다. 이러한 용어들은 자주 역사 속에서 이 개념을 대표하는 일련의 사람들로 변장하거나 역사의 생산자, 헌법수호위원회, 지배자들로 이해되는 이데올로그들로 변화한다. 따라서 유물론적 요소들의 전체 체계는 역사로부터 사라져버리고 이제는 사변적 준마가 고삐 풀린 채로 멋대로 돌아다니게 되었다.

언어가 다른 계급에 대한 한 계급의 이해를 반영하는데 사용되는 주된 방식은 기본적인 용어의 구체적인 의미를 정당화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우리는 이러한 용어들이 어원학적으로 오직 한 가지 방향으로만, 즉 개인 정체성과 소유권에 대한 부르주아적인 개념화를 반영하는 방향으로 해석된다는 점을 보여 줄 수 있다. 부르주아들은 생산수단을 전유할 뿐만 아니라 표현수단 또한 전유하고 있다.

사유의 세계에서 현실의 세계로 내려오는 문제는 언어로부터 삶으로 내려오는 문제로 바뀐다. 철학적 언어의 문제에 대한 대답은 철학적 언어를 일상 언어로 번역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추상적 형식과 인간 실천의 결과적인 왜곡 속에 존재하는 철학의 진정한 기원이 드러날 것이다. 사유와 언어는 단지 실제 삶의 표명임을 인식해야 한다.

현실의 사적인 이해관계를 보편적인 이해관계로 표현했던 옛날의 전통적인 관념들은 점점 더 이상화하는 구문들로, 의식의 환영들로, 숙고된 위선으로 타락하게 된다. 이것들의 허위성이 삶에 의해서 폭로될수록 이것들은 의식 그 자체에 대해서 점점 더 적은 의미를 갖게 될 것이다. 확고하게 주장될수록 위선적인 도덕과 신성은 정상 사회의 언어가 되어갈 것이다.

극단적인 경우에 이러한 상황은 철학의 종말과 모든 언어의 종말로 귀결될 수 있다. 개인들과 계급들 사이의 관계를 표현하는 핵심 단어들의 의미가 변화했는지 물어야 한다. 이러한 단어들은 언어를 탈신비화하려는 투쟁과 언어의 참된 의미를 폭로하려는 투쟁이 벌어져야만 하는 전쟁터이다. 철학의 시금석은 세계를 해석하는데 있지 않고 세계를 변혁하는데 있다.

이론적 논의가 아니라 정치적 행동에 있다고 확신하게 되었다면 언어란 그 본성상 소수의 언어인 철학적 언어에서 모두에게 동등하게 접근 가능한 언어로 변해야 한다. 이것은 철학에서 선전으로의 이행이며 이론적 논의에서 논쟁적이고 전투적인 저작으로의 이행이다. 물질적 힘으로 되기 위해서는 대중을 움켜잡을 수 있어야 한다. 물론 전적으로 새로운 어휘를 창조할 필요는 없다.

이론적 언어는 실천의 조건에 근거해야 하며 이러한 조건에 대한 왜곡된 그림을 길러내고 영구화하는 이데올로기적 도구로 이론적 언어를 사용하지 못하게 하는 것이다. 언어의 비의적인 특성이 폭로되기만 한다면 대중은 스스로 이론화하고 배울 것이며 자신들의 상황을 이해하고 직접적인 행동으로 나설 것이다. 현존하는 언어를 비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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