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중과 예술, 삶과 다중에 대한 새로운 고찰

[새책] 『플럭서스 예술혁명』(조정환․전선자․김진호 지음, 갈무리, 2011)

현대사회는 신자유주의 시대의 자본과 폭력의 힘 앞에 정치, 경제뿐만 아니라 문화까지 그 자장 안에서 억압되어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신자유주의로 인한 “혼돈의 시대”의 도래와 더 이상 경계라는 단어가 무의미 해져 버린 이런 시대 안에서 존재하고 있는 다중의 삶은 어떻게 변화 되어야 할 것인가? 나는 최근 갈무리에서 출간한 『플럭서스 예술혁명』을 읽고 그 방향에 대해 모색해 볼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예술을 전공하는 사람으로서 예술과 삶, 삶과 인간의 관계와 소통의 문제는 언제나 나에게 중심적인 화두였고, 반드시 해결해야 할 대명제와도 같은 것이었다. 현재 소위 자신을 지식인이라 칭하는 엘리트만의 전유물로서의 예술이 아닌, 모든 인간들이 공유할 수 있는 “플럭서스”에서 활동한 백남준의 말을 잠시 인용하자면 공감주의적인 예술이 세상 밖으로 그 속박을 끊고 나와야만 한다. 그렇다면, 이 책에 서술되어 있는 플럭서스의 대표적이며 중심인물들인 존 케이지, 요제프 보이스, 백남준이 자신의 작품과 말을 통해 드러낸 각각의 예술적 지향과 해석들은 지금의 다중들에게 어떠한 대안으로 제시될 수 있을까?

오늘날 예술의 상품화와 금융화는 다중들을 단순히 예술화한 상품세계라는 다락방을 배회하는 산보자로 변모시켜 버렸고, 우리는 그것을 인지하지 못하고 그런 상품화된 예술을 영위하는 소비자라는 허위의식에 사로잡혀 살아가고 있다. 예술은 미술관, 전시관을 벗어나 백화점, 공공시설, 그리고 우리의 일상까지 침투해 들어왔다. 삶과 예술의 통일은 실제로 현재 우리 삶 앞에서 실현되었다. 그렇다면 플럭서스가 추구하던 예술적 이상은 궁극적으로 실현되었다고 보는 것이 옳은 것일까? 하지만 여전히 다중들의 삶은 풍요롭지 못하고 예술은 지배세력의 억압의 도구로서 사용되고 있다. 그것은 또한 자본이 지닌 플럭서스적인 힘을 반증하는 예일 것이다. 자본이 적극적으로 변화와 소통, 비결정성과 유동성의 개념을 받아 들여 인간의 네트워크를 통제할 도구로써 예술을 사용하고 있다. 하지만, 우리는 플럭서스 실천가들의 역사를 통해서 새로운 대항의 힘을 구할 수 있다.

하나의 조직화되고 체계화된 통합의 역사가 아닌 독립적으로 동시에 일어나는 다수의 역사들이 서로 관계를 맺고 소통을 이루어 가는 과정, 플럭서스의 예술은 어떤 특정한 엘리트만을 위한 난해한 예술도 아니며 파괴적이거나 전복적인 목적을 둔 예술은 더더욱 아니다. 플럭서스의 예술은 세상과 인간의 관계 맺기 과정이며 기존의 억압하는 예술에서 자유로워지는 힘이며 예술을 통한 치유와 정화의 과정이다. 우리의 삶은 플럭서스가 추구한 예술을 통해서 더욱더 풍요로워질 수 있으며 그것은 단순히 다양한 예술의 공동체적인 경험뿐만이 아니라 삶의 풍요로움이라는 문제와 직결된다. 그런 풍요로움에 대한 대리 체험을 이 책을 구성하고 있는 플럭서스의 실천가들의 사례와 생각을 통해서 경험해 볼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될 거라 생각한다.

세상은 급변하게 돌아가고 더 이상 인간이 변화의 속도에 발맞춰 갈 수 없는 현대사회에서 다중들은 자본이 만들어 놓은 공고한 매트릭스의 세계에 자신의 잠재력과 상상력이 수학의 도구로 사용되고 있는 상황에 직면하게 된다. 인간의 정보량을 압도하는 이미지들의 스펙트럼 속에서 다중들은 자신들을 수동적인 수용자의 위치에 머무르게 된다. 하지만, 우리는 역사적 사실을 통해 암울하지만은 않은 다중의 힘을 느낄 수 있다. 자본의 힘에 의해 통제되는 네트워크의 시뮬라르크 속에서 다중은 그것을 자신들만의 힘으로 새롭게 재탄생시키고 관계와 소통하기 과정을 행위한다. 그로 인해 다중은 일상에서 새로운 변동과 비결정성을 실현시키고 예술-삶, 삶-예술의 과정을 행위함으로서 실천한다. 예술은 더 이상 예술안에서 머물러 있기를 원하지 않는다. 다중의 일상 속에서 예술은 지속적으로 실천되고 있으며 그 실천 속에서 새로운 삶의 가능성을 모색해 볼 수 있는 것이다. 『플럭서스 예술혁명』은 다중에게 새로운 예술을 제시하고 그 가능성을 열어주고 있을 뿐만 아니라, 단편적인 지식으로 왜곡되어 있었던 또는 곡해되어 있던 역사적 플럭서스에서 벗어나 지금 “혼돈의 시대”를 살아가는 다중들에게 새로운 예술-삶, 삶-예술의 세계로 인도해줄 안내서의 역할로서 훌륭한 텍스트임이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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