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소함과 하찮음에 대하여

[발가락이 쓴다](1) 재능교육에서 쌍용차까지, 뚜벅이 첫째 날

“여러분은 불법행진을 시도하고 있습니다.”

희망의 발걸음은 한 발짝 내딛기도 힘들었다. 출발부터 경찰의 방패에 희망은 막혔다. 희망을 쉽게 만나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하지만 어여쁜 분홍빛 천에 새겨진 ‘희망 뚜벅이’가 ‘빨갛게’ 보인다는 이유 때문에 가로막히다니, 어처구니가 없다.

[출처: 오도엽]

재능교육 학습지 교사들의 농성이 1,500일이다. 19명의 생명이 덧없이 떠난 쌍용자동차 노동자들의 싸움이 1,000일이란다. 겪지 않으면 느낄 수없는 끔찍한 숫자 앞에, 한진중공업 정리해고와 김진숙 지도위원의 85호 크레인 농성에 연대의 마음을 모아 출발했던 희망버스 기획단은 ‘정리해고와 비정규직 없는 세상을 향한 희망의 발걸음’을 준비하였다. 혜화동 재능교육 본사에서 평택 쌍용자동차까지 걸으며 지난해 한진중공업에서 맺은 연대의 열매, ‘소금꽃 나무 열매’를 2012년에는 전국의 200여개 투쟁사업장에서 맺겠다고 ‘희망 뚜벅이’가 1월 30일 출발했다.

설을 앞두고 ‘희망 뚜벅이’ 소식을 듣자 발바닥이 뛰었다. 쿵쿵쿵쿵. 발바닥에서 심장 뛰는 소리가 울렸다. 순간, 글을 쓰던 손가락은 멈추고 발가락이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세상의 설움과 분노를 외면하고 기계처럼 움직이는 손가락으로 두들기는 글쓰기에 바빠다. 책상에 꼼짝하지 않고 붙들려 생산되는 활자는 이미 죽은 문자였다.

잠시 쓰던 글을 멈추기로 했다. 발바닥에 심장을 이식하고, 손가락 대신 발가락으로 기록하기로 다짐했다. 녹음기와 사진기를 챙긴 배낭을 메고 희망 뚜벅이를 찾아 길을 나섰다.

희망 뚜벅이의 일정은 시작부터 꼬였다. 구호도 노래도 없이 묵묵히 걸어가는 뚜벅이의 발걸음은 번번이 경찰의 방패에 막혔다. 몸자보를 벗지 않으면 ‘불법’이란다. 차도가 아닌 인도로 걷는 것도 ‘불법’이란다. 몸자보를 입은 채로 홀로 걸어도 ‘불법’이란다. 얼토당토않은 경찰의 대응에 행진단은 대학로 아래 이화사거리에서 다섯 시간 동안 감금 아닌 감금을 당한 채 한겨울 추위에 바들바들 떨었다.

몸자보를 벗느니 아예 연행을 당하겠다는 뚜벅이들과 몸자보를 벗지 않으면 한 발짝도 내딛지 못하게 하겠다는 경찰과 지루한 대치가 이어졌다. 몸자보가 뭐란 말인가. 말도 되지 않은 법을 들먹이며 해산하라는 선무방송을 하는 경찰도 경찰이지만 절대 떼지 못하겠다는 뚜벅이들도 답답해보였다. 발바닥에 심장을 달고 걷고 싶었는데, 첫 날부터 도심 한켠에 감금당한 채 이게 뭐람. 움직이지 않는 발바닥이 꽁꽁 얼매 볼멘소리를 낸다.

‘그깟 사소하고 하찮은 것!’

희망 뚜벅이라고 적힌 분홍빛 몸자보는 정리해고와 비정규직 없는 세상을 향한 길에 사소하거나 하찮은 것일 수 있다. 하지만 사소하다고 타협하거나 물러설 때, 하찮다고 모른 체하거나 무시할 때, 그게 절망의 시작이다. 그 사소함과 하찮음이 정리해고와 비정규직을 양산하는 법을 만들었다. 정리해고를 합법화 시키는 법에 동의하였고, 비정규직을 양산하는 법을 죽을힘으로 막아내지 못했다.

희망이란 절망이 만들어낸 말이다. 무수한 절망의 신음이 토해낸 큰 숨소리가 희망이 아닐까. 절망이 아픈 까닭은 희망이 없어서가 아니다. 절망할 때 함께 손잡을 이가 없어서다. 절망을 함께 아파하고 함께 분노하고 함께 저항할 벗이 없어서다. 희망 뚜벅이가 걷는다고 당장 희망을 안아올 수는 없을 꺼다. 세상의 절망을 찾아 손을 내미는 연대의 발걸음이 희망이다. 이 발걸음에 한 사람 한 사람이 더해질 때, 그게 바로 희망이다.

대학로, 종로, 을지로, 시청, 서울역을 걸어 명동에 자리 잡은 마지막 목적지인 무궁화 다섯 개가 또렷한 세종호텔에 왔다. 세종호텔 노동자들은 구조조정과 부당전보 철회 등을 외치며 29일째 파업 농성을 벌이고 있다. 뚜벅이들이 세종호텔에 들어서자 욕설과 몸싸움이 벌어졌다. 호텔에 찾아온 이에게 특급 서비스를 세종호텔 관리자들이 선사한 셈이다. 아무튼 오늘은 호텔에서 자는 호강을 누린다. 스위트룸보다 넓을 로비에서 침낭에 몸을 구긴 채 말이다. 걸었던 시간보다 경찰에 감금되었던 시간이 더 길었던 뚜벅이 첫째 날, 어둠은 깊고 엉덩이에는 냉기가 얼얼하게 전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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