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음밥 먹다, 이리 죽을 수 있게구나

[발가락이 쓴다](8) 재능교육에서 쌍용차까지, 뚜벅이 여덟째 날

정월대보름, 소통이 간절한 사람이 여기 있다. 희망의 이름으로 소통을 간절히 요구하며 오늘도 뚜벅뚜벅 걷는다. 희망 뚜벅이 여드레째다. 서울 혜화동 재능교육 본사 앞에서 출발해 서울, 안양, 인천을 거쳐 안산으로 왔다.

[출처: 오도엽]

지난 1월 31일 과천 코오롱 본사 앞에서 점심을 먹었다. 숫자로 말할 수없는 추위로 온몸이 꽁꽁 얼었다. 차가운 밥을 목구멍으로 넘기는 순간, 숨통이 콱 막혔다. ‘이리 죽을 수 있겠구나!’ 머리에 무서운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막히는 순간 죽는다. 일터에서 쫓겨난 이들에게 삶은 너무도 멀고, 죽음은 가깝다. 이들에게 일터는 자신의 생계와 가족의 생명을 이어주는 통로였다. 이 통로가 얼토당토않은 이유로 막힌다. 비정규직이라는 이유로, 더 많은 이윤을 올리겠다는 탐욕으로, 투자자들에게 더 많은 배당금을 갖다 바치기 위해서 말이다.

쫓겨난 이들의 삶은 처절하다. 무모하다. 수십 미터 고공에 올라가고 수십일 곡기를 끊기도 한다. 때론 자신의 몸에 기름을 붓는다. 삶이 싫어서가 아니다. 살고 싶어서 자신의 목숨을 걸고 싸우는 거다. 목숨을 걸지 않고서는 세상이 알아주지 않기 때문이다. 기업주는 딸내미 손을 잡고 행사장을 얼쩡거려도 신문에 대문짝하게 사진이 실린다. 하지만 목숨이 걸린 노동자들은 수십 날 곡기를 끊어 죽어간다는 소문이 들릴 때나 수백 날을 크레인에 올라가 죽음을 넘나들어야 사회면 귀퉁이에 조그맣게 세상과 소통할 뿐이다. 싸우는 노동자가 과격한 것이 아니다. 목숨의 소통을 가로막은 언론이 노동자들을 사지로 몰고 있는 것이다.

희망 뚜벅이들 가운데 장기 투쟁사업장 노동자들은 단순히 뚜벅뚜벅 걷기만 하는 게 아니다. 끊임없이 스마트폰을 들고 SNS를 통해 세상에 자신의 발걸음의 흔적을 날린다. 기자들이 할 일, 지식인들이 할 일을 하지 않기 때문이다. 세상 사람들 편하게 다니도록 자동차만 만들고, 휴대폰을 만들고, 배를 만들던 노동자들이 작업도구 대신 낯선 문자를 익히느라 정신이 없다. 절박한 자신의 마음을 세상에 진솔하게 전달하려고 날마다 칼럼을 베껴 쓰며 자신의 문장을 갈고 닦기도 한다. 이 얼마나 안타까운 일인가. 생산의 위대한 노동의 손이 글자와 씨름을 해야 한다니 말이다.

[출처: 오도엽]

희망 뚜벅이 여드레째. 힘들지 않다. 내 발걸음을 편안하게 해주는 신발을 만들어 준 노동자가 있기 때문이다. 한겨울 추위를 버티게 하는 옷을 만들어 준 노동자가 있고, 허기진 배를 채워주는 밥을 지어주는 노동자가 있으니 여드레 동안 쓰러지지 않고 걷고 있다. 이처럼 인간의 삶은 노동자의 노동 없이는 지탱할 수가 없다. 세상을 움직이고, 사람들의 삶을 윤택하게 해주는 노동자를 껌처럼 씹다버리는 사회가 어찌 정상이라 할 수 있겠는가.

뚜벅이의 발걸음이 종착지인 평택 쌍용자동차와 무척 가까워졌다. 하루만에 갈 거리다. 하지만 희망 뚜벅이는 닷새를 더 걸을 예정이다. 아직 만나야 할 절망의 목소리가 높다. 올빼미가 아닌 사람임을 선언했다고 대통령까지 나서 두들겨 팬 유성기업 노동자를 만나야 한다. 7일 교섭이 타결이 되지 않는다면 다시 서울 명동에 있는 세종호텔로 달려가야 한다. 젊은 노동자들이 백혈병으로 죽어갔건만 그 책임을 돈으로 감추려는 삼성전자도 가야 한다.

[출처: 오도엽]

오늘 안산 시흥공단을 뚜벅이가 걸을 때 많은 중소영세업체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이 관심을 갖고 뚜벅이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온통 기름때로 절은 작업복을 입은 노동자들은 뚜벅이가 건네는 선전물을 달라고 쫓아 나오기도 했다. 9천여 개의 사업장에 이십만 명이 일한다는 이곳의 노동자들은 평균 근속연수가 1년이 채 되지 않는다고 한다. 일이 없으면 언제든 거리로 쫓겨나고, 일이 밀리면 잔업 특근으로 허리가 휘는 중소영세업체 노동자들의 기름때 박힌 거친 손에 전해지는 선전물이 희망의 단서가 되었으면 하는 마음이다.

점심때 약식집회는 파카한일유압에서 가졌다. 부당해고 철회하라는 글자가 적힌 피켓을 공장 정문 앞에 세워둔 회사 화물차 옆에 걸쳐두었더니 관리자가 나와 거칠게 길가로 밀어붙인다. 화물차에 피켓을 걸치지 마란다. 평생 일한 노동자도 거리로 내쫓는 공장이니 피켓 뿌리치는 거야 너무나 당연하다 여겨지지만 울화통이 치민다. 누가 피켓을 들고 몸자보를 걸치고 거리에 주저앉고 싶겠는가. 공장에서 일할 수 있다면 누가 발바닥이 땀나도록 걸어와 아스파트 바닥에 주저앉아 구호를 외치겠는가. 녹음기를 한 손에 들고 피켓을 이유로 실랑이를 거는 관리자의 모습을 보며 그 썩은 심장에 애처로움이 들 정도다.

[출처: 오도엽]

정리해고자의 가슴에는 심장이 없다. 이미 뻥 뚫린 지 오래다. 팔뚝질을 하며 구호를 외치며 힘껏 쥔 주먹이 뚫린 심장을 대신한다. 마찬가지로 비정규직 노동자의 가슴에도 심장이 없다. 새카맣게 타버렸다. 한겨울 이곳저곳을 찾아다니며 억울한 사정을 알리는 땀나는 발바닥이 심장을 대신한다. 희망 뚜벅이는 이들의 뚫린 심장을 메워주는 일을 한다. 새카맣게 탄 심장을 어루만져 다시 붉은 피가 쿵쿵 도는 심장으로 살리는 일을 한다. 뚜벅이는 병원의 의사가 고치지 못하는 인간의 병을 고치는 심장병 전문 의사이자 병든 사회를 아름답게 태어나게 하는 산부인과 의사이기도 하다.

이제 며칠 남지 않았다. 뚜벅이가 쌍용자동차에 도착하기 전에 잠시라도 희망 발걸음을 찍어 보시라. 그 발걸음이 모여 스무 명의 ‘연쇄 학살’이 일어난 죽음의 공장을 희망으로 점령하자. 11일 평택 쌍용자동차 앞에 희망의 뚜벅이 수십 만, 아니 수백 만이 모여, 2009년 처절한 77일의 공장 점거 농성에 함께 하지 못한 부채를 확실하게 갚자. 그래야만 이 죽음의 행렬을 멈출 수 있다.


태그

희망뚜벅이

로그인하시면 태그를 입력하실 수 있습니다.
오도엽(시인)의 다른 기사
관련기사
  • 관련기사가 없습니다.
많이본기사

의견 쓰기

덧글 목록
  • asdf

    현대기아 조립라인에서 과로로 쓰러져 사망한 고등학생의 안타까운 소식은 듣지 못하셨습니까? 정작 필요한 곳에, 진짜 힘들게 일하시는 노동자들이 있는 곳으로 가지 않으시고 왜 거기에서 그러고 계시는지요? 이미 정치화 되어버린 노동운동에 '희망'이란 단어를 붙이면 사람들이 평화집회라고 생각할테니 계속 집회를 이어가는 것은 아닌지.. 집회 참석자분 및 관계자들은 한 번 더 생각하십시오. 당신의 힘이 필요한 곳은 쌍용자동차 뿐만 아니라는 것을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 qwer

    asdf님.

    희망발걸음을 하고 있는 모든 분들이 쌍용자동차 뿐이 문제가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지역의 사업장을 돌면서 쌍차로 가는 겁니다. 한진정투위도 이미 전국을 돌고 있고, 유성지회와 현대차아산사내하청, 인천의 뚜벅이, 희망텐트 노동자참가단 등이 전국을 순회 하면서 사업장의 문제를 알리고 연대를 호소하고 쌍차에 모두 모이자고 호소 하는 겁니다. 왜냐하면 쌍차에는 우리가 생각하고 있는 모든 노동문제가 집중되어 있으니깐. 물론 쌍차만 해결하자, 쌍차를 해결하면 모두가 해결된다, 아닌 것도 알고 있습니다. 모두의 힘을 모으고, 그 힘으로 다시 나누고, 그 힘을 다시 모으는 과정들이 이어지는 단계가 아닐까요?

논설
사진
영상
카툰
판화
기획연재 전체목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