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리의 시인을 대신해 뚜벅이가 된 작가들

[발가락이 쓴다](9) 재능교육에서 쌍용차까지, 뚜벅이 아흐레 날

[출처: 오도엽]

2월 7일, 희망의 발걸음을 시작한 지 아흐레째다. 특별한 뚜벅이들이 첫 출발지인 안산역으로 찾아왔다. <한국작가회의>와 <리얼리스트 100> 소속 시인, 소설가, 평론가, 르포작가들이다. 오늘은 지난해 희망을 기획했다는 이유로 감옥에 갇힌 거리의 시인 송경동의 2차 공판이 있는 날이기도 하다. 작가들은 동료 문인의 공판 참석 대신 거리의 시인이 함께 걷고 있어야 할 거리로 나온 것이다. 홍기돈, 오창은 평론가, 이시백, 홍명진 소설가, 임성용, 황규관 시인, 김순천, 이시규 르포작가를 비롯한 문학인들은 이 시대의 펜 끝이 어디를 향해야 할지를 발바닥으로 증명하기 위해 이 자리에 나선 것이다.

지난 주 수십 년만의 혹한을 견디며 걸었던 뚜벅이들이라 체감온도 18도라는 오늘의 추위가 그리 두렵지가 않다. 하지만 머플러도 제대로 갖추지 않은 작가 뚜벅이들의 어깨는 잔득 움츠려들었다. 날이 추우니 뚜벅이들의 몸은 가벼워진다. 걸을 때도 몸의 긴장을 풀며 어깨를 들썩들썩, 발걸음도 사뿐사뿐 춤을 추는 듯하다. 걸음을 멈추고 현수막이나 피켓을 들고 선전전을 할 때도 방송차에서 흘러나오는 노래에 맞춰 춤을 추며 추위에 맞선다. 뚜벅이의 몸짓을 간파한 문화연대 신유아는 마트에 들어가 아예 동요 CD를 사서 틀어준다. 꼬마자동차, 학교종, 뽀뽀뽀 등 동요가 흐르자 뚜벅이들의 행진은 희망 유치원 나들이 길로 바뀐다.

[출처: 오도엽]

안산역에서 출발한 뚜벅이들은 고잔역에서 따뜻한 커피로 몸을 녹인 뒤 안산우체국 사거리에서 선전전을 진행하고 안산시청으로 향했다. 오늘은 추위 때문에 선전물을 건네는 일이 쉽지가 않다. 온몸을 옷 속에 구기고 발걸음을 재촉하는 시민들의 손은 좀체 호주머니에서 나오지를 않는다. 어제는 쫓아와서 선전물을 받아갔는데, 오늘은 애처롭게 건네는 뚜벅이의 손을 외면하는 사람이 많다. 하지만 뚜벅이는 아랑곳하지 않고 시민들의 종종 발걸음을 쫓아가며 정리해고와 비정규직 없는 세상을 향한 염원이 담긴 유인물을 건넨다. 선전물에는 ‘얼지 마! 죽지 마! 함께 살자!’라고 적혀 있다.

안산시청 앞 선전전을 마친 뚜벅이들은 인근 식당에 들어가 점심을 먹었다. 다행이다. 이 날씨에 거리에 앉아 김밥이나 도시락을 먹는 일은 너무도 끔직스러운 일인데, 천정이 있는 곳에서 밥을 먹을 수 있다니 얼마나 행복한 일인가.

뚜벅이들은 깨끗하다. 희망버스 시즌 2 ‘희망 발걸음’에는 대표가 없다. 강원도 홍천에서 자영업을 하는 뚜벅이는 누가 시키지 않았는데 20미터짜리 현수막을 챙기는 담당자가 되었다. 뚜벅이들이 지쳐 있을 때는 스스로 가수가 되어 노래를 부르는 이가 있고, 식사를 마치면 껌 봉투를 들고 하나씩 나눠주는 이도 있다. 자진해서 깃발을 들고 앞장서서 구호를 외친다. 이곳저곳에서 희망을 찾아 나선 낯선 이들이 모였건만 흐트러짐이 없다.

점심을 3시에 줘도 찡그리는 이가 없고, 행진 코스를 잡지 못해 우왕좌왕해도 군소리 내는 이도 없다. 지난해 희망버스가 조직된 노동운동에서 하지 못한 무서운 위력을 나타낸 까닭도 ‘내가 먼저 희망’이 되어 나선 자발성 때문이다. 2012년 희망 발걸음은 희망버스에 못지않은 기적을 만들어 낼 거라는 믿음이 생겨난다. 뚜벅뚜벅 희망만을 바라보며 걷는 이들이 있기에.

[출처: 오도엽]

점심을 먹은 뚜벅이들은 안산여성노동자회가 운영하는 ‘돌봄 서비스센터’ 교육장으로 자리를 옮겼다. 오늘 저녁 안산 중앙역에서 있을 ‘뚜벅이 백일장’을 준비하기 위해서다. 일일 뚜벅이가 된 문학평론가 오창은 중앙대학교 교수의 글쓰기 강연 뒤 뚜벅이들은 자신의 삶을 하얀 종이에 또박또박 적기 시작했다. 뚜벅이가 또박이로 바뀌어 자신의 새카맣게 타버린 가슴을 까만 글자로 백지에 새기며 자신을 치유하고 세상을 아름답게 바꾸는 글쓰기에 여념이 없다.

글쓰기를 마친 노동자들은 작가들에게 자신들의 사업장의 현실을 소개했다. KEC, 현대자동차 비정규직, 세종호텔, 한국3M... 아흐레 동안 함께 하며 숱하게 들은 이야기들이다. 하지만 들을 때마다 새로운 분노가 치솟는다. 저 험한 꼴을 당하며 어찌 저리 밝은 얼굴을 할 수 있을까, 의아하기까지 한다. 홀로 잘 먹고 잘 살려고 나선 길이라면 이리 환한 얼굴로 처절하게 싸울 수는 없는 일이다. “내 자식에게는 비정규직 인생을 물려주지 않으려고 싸우는 겁니다.” 비록 내 처지에서 출발했지만 이들이 향한 몸짓은 미래를 향하고 있음이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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