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감은 식물성 물기로 이뤄졌나 봅니다

[조성웅의 식물성투쟁의지](6)

공감은 식물성 물기로 이뤄졌나 봅니다
- 2009년9월11일 민주노총 임시대의원 대회장에서



아무도 걸어가려 하지 않았던 곳으로 행진해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지금 당장 어떤 열매를 바라는 것은 아닙니다 지금 이 곳에서, 스스로 몸을 움직여 방법을 찾고 대화가 무성한 숲처럼 살기 위해서입니다

‘민주노총 김00 성폭력 사건 피해자 지지 모임’ 동지들은 민주노총 임시대의원 대회장 입구에서 선전전을 진행하고 있었습니다 한쪽 임시가판대에서는 현장 발의 안건에 대한 민주노총 파견대의원들의 연서명을 받고 있었습니다 손 내밀어 공감을 찾는 몸짓들은 분홍색 코스모스 향기를 닮았습니다 눈물 많은 주봉희 동지도 아는 대의원들의 손을 잡아끌고 있었습니다 그 손길을 어룽거리며 가을 여린 햇살이 부쩍 가까이 다가와 빛나고 있었습니다

‘민주노총 김00 성폭력 사건 피해자지지 모임’ 조진희 동지는 현장발의 안건을 대회에 제출하고 안건설명을 하다가 피해자 동지의 고통에 이르러 끝내 울먹입니다 공감은 식물성 물기로 이뤄졌나 봅니다 저 눈물이 소통을 확장하고 차이 속에서 협력을 생산하는 힘을 키울 겁니다 난 조진희 동지의 저 따뜻한 눈물로 피해자 동지의 고통에 오래도록 머물고 싶었습니다 피해자 동지가 차오를 때까지, 충만해질 때까지, 다시 사람을 품을 수 있는 그 최초의 언어가 솟구쳐 오를 때까지 곁에서 가을 여린 햇살처럼 격려하고 싶었습니다

‘민주노총 김00 성폭력 사건 피해자 지지 모임’의 현장발의 안건을 필사적으로 저지하려는 가해자들의 눈빛은 사막처럼 메말랐고 그것을 침묵으로 지지하는 심장들은 풀 한 포기 자랄 수 없을 정도로 딱딱하게 굳어 있습니다 이토록 뼈아픈 상처가 정파대립이란 말입니까? 지아비이자 가장으로서 술 처먹고 한 실수니 이쯤에서 너그러이 용서해야 한단 말입니까?

피해자 동지의 상처를 애써 외면하면서 조용히 문제가 해결되기를 바라는 자리에서, 공황기 노동자 투쟁을 조직해야 하는 중대한 과제 앞에 선 그 침묵의 언어 속에서 여성은 존엄한 인간으로 존중받지 못했습니다 여성은 조직에서 시키는 허드렛일만 하는 존재, 우선적으로 해고되어도 당연한 것처럼 느껴지는 대상이었습니다 이곳에서 성폭력 사건이 출발했습니다 피해자 동지의 느낌, 감정, 고통은 아무런 상관이 없었습니다 조직을 보위하기 위해 명령이 동원됐고 성폭력이 사용됐으며 침묵이 강요됐습니다 이 지독한 절망이 과연 우리를 가르칠 수 있을까? 난 인간에 대한 신뢰를 포기하고 싶었지만 사활을 건 피해자 동지의 투쟁을 보면서 고추장처럼 독해지고 있습니다

변화는 자기성찰로부터 시작되지만, 가해자들은 자신들의 명예를 지키기 위해 조직의 명예를 차용하고, 정파라인을 가동하고, 자신들이 장악하고 있는 대의기구 결정을 통해 피해자 동지의 절규를, 조직적인 비판과 토론을 간단하게 삭제시키려 했습니다 오직 살아남기 위해 인간이 인간을 인간으로 보지 않았던 자신들의 행위를 변명하는 것이야말로 가장 잔인한 폭력입니다

비판과 토론을 억압하는 조직은 이미 죽은 조직, 부르주아 관료제입니다 민주노총 대의기구는 더 이상 비판과 토론을 생산하지 않았고 오히려 억압을 강화하고 있습니다 화해할 수 없습니다 이 투쟁에 있어 때늦는 법은 없습니다 공감은 새로운 비판적 사유이기 때문입니다 이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지치지 않는 것, 저 따뜻한 눈물에 속하는 일입니다 따뜻한 눈물이 돌보는 대화의 삶-숲으로 행진해 가는 겁니다 강물처럼, 강물처럼 보폭을 맞추며, 강물처럼 평등하게, 강물처럼 비판과 토론을 우리 삶의 내부에 흐르게 하고, 강물처럼 협력을 생산하는 일 그리하여 북받쳐 눈물나도록 위대한 생존자, 피해자 동지의 손을 따뜻하게 잡아주는 일입니다. (2009년10월1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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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폭력 , 민주노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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