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독재자에게 보내는 연애편지

[새책] 독재자의 여인들 (디안 뒤크레, 전용희 역, SEEDPAPER, 2011.11, 525쪽)

이탈리아의 독재자 무솔리니와 레닌은 잘 연결되지 않는다. 그러나 무솔리니는 레닌과 함께 파리코뮌 기념식에 같이 참석한 사이다. 이 미치광이 독재자를 키운 여성 사회주의자 안젤리카는 무솔리니를 사회당 기관지 편집장으로 이끌었다.

레닌 부부와 6년 동안 한 집에서 함께 산 여성 사회주의자 이네사도 정상은 아니다. 글쓴이의 표현으로 양아치 수준의 마초 스탈린의 두 번째 부인 나디아의 파벌은 마치 현실 사회주의의 몰락과도 같다. 포르투갈의 독재자 살라자르와 마오쩌둥 같은 이는 늘 여성에게 이중감정을 갖고 있었다. 중앙아프리카의 쓰레기 독재자 보카사는 프랑스 국가권력과의 관계가 더 볼만하다.

무솔리니를 키운 사회주의자 안젤리카

이 책 <독재자의 여인들>엔 그 밖에 폴란드의 차우세스쿠와 히틀러까지 모두 8명의 권력자 주변의 여인들이 등장한다.

글쓴이 디안 뒤크레는 뛰어난 미모와 언변, 특유의 유머 감각으로 미디어에서 활동하는 작가다. 파리4대학(소르본) 철학석사로 국립고등사범학교를 나왔다. 공영방송 Fr 3의 간판 역사 프로그램 의 다큐 제작에 참여했고 히스토리 채널에선 토론회를 진행했다. 이 책 <독재자의 여인들>은 그녀의 첫 작품이다.

번역자 전용희는 한양대 재학 중 파리로 건너가 미술사를 공부했다. 2008년 경기문화재단 문화예술 번역사업 지원대상자로 선정됐다.


서문 : 어느 독재자에게 보내는 연애편지

총통에 대한 사랑

독일 여성들은 더 나은 미래를 소망했고 이를 히틀러가 이뤄줄 수 있다고 믿었다. 무한한 애정이 담긴 엄청난 양의 편지가 날마다 히틀러 앞으로 날아들었다. 히틀러의 이 편지들은 현재 모스크바에 보관돼 있다. 편지를 쓴 여성들 중 실제로 히틀러와 개인적 친분을 갖고 있던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로제라는 한 독일 여성은 1941년 9월 30일 히틀러에게 보낸 편지에다 “역사상 가장 원대한 계획이었던 인종말살 정책은 기적적인 성과를 이뤄냈습니다”라고 썼다.

무솔리니에 대한 사랑

무솔리니는 신이었고 왕이었으며 가장 이상적인 인간이었다. 백작부인에서 촌부까지, 수녀도 창녀도, 무솔리니에게 열광했다. 한 달이면 3만~4만여 통의 편지를 받았다.

무솔리니는 히틀러와 다르게 자신을 찬양하는 여성들에게 적극적이었다. 어떤 여성은 무솔리니의 베니스궁으로 찾아와 같이 잠자리했다.

20세기 초 교육의 혜택을 입고 독립적 지휘를 획득한 유럽 여성들이 이처럼 독재자에게 매료돼 굴복했다는 사실을 어떻게 설명할까. 독재자들은 완성된 미적 감각을 갖춘 웅변가의 이미지를 지향했다. 독재자들은 정권 획득 과정에서 여성들의 동조 없이는, 여성들과 자신의 운명 공동체로 생각하지 않는다면 앞으로 나갈 수 없다는 것을 금세 깨달았다. 독재자들의 삶에는 언제나 그녀들이 존재했다. 독재자들은 여성을 모욕했지만, 여성은 독재자들의 숭배 대상이었고 위안을 받기 위해 습관적으로 찾았다.


1. 무솔리니의 여인들 - 달콤한 인생

어느 매력적인 혁명가

아드리아 해의 진주 리치오네는 해마다 여름마다 펼쳐지는 놀라운 의식으로 들썩인다. 베니토 무솔리니는 수영할 준비를 했다. 나이를 불문하고 구름떼처럼 몰려든 여성들이 한 남성의 뒤를 쫓아 열광하며 해변을 내달리기 시작한다. 군복을 입지 않은 그의 모습을 보고 싶은 거다. 무솔리니를 따르는 이들 여성 중 가장 광적인 집단은 바로 독일과 유고슬라비아, 헝가리 여성들이었다. 리치오네는 무솔리니가 태어난 로마냐 지역의 도시다. 무솔리니는 여름이면 수영을 즐기려고 여기에 왔다. 자기 몸이 완벽한 ‘그리스 전사의 몸’이라는 무솔리니식 프로파간다였다. 추종자들은 ‘놀라울 만큼 나폴레옹을 닮은’ 무솔리니의 턱에 환호했다. 무솔니리는 “여자들처럼 대중은 결국 유린의 대상에 불과하다”라고 기록했다.

1900년대 초 무솔리니는 중학교 동창의 누이 비토리나에게 생애 최초로 실연 당한다. 무솔리니의 새 유혹방식에 가장 먼저 희생된 이는 버지니아 B.라는 여성이다. 1901년 17살의 무솔리니는 옆집 아가씨 버지니아 B.에게 완전 반해 그녀를 끌어내 창고에 데려가 문을 닫은 뒤 성폭행했다. 무솔리니가 동정을 뗀 것은 이 일이 있기 1년 전 사창가였다.

무솔리니는 1883년 7월 29일 사회당이 정권을 잡은 로마냐 지역의 중심 도비아에서 대장장이의 아들로 태어났다. 1902년 2월 학교를 졸업하고 정식교사가 된다. 젊은 교사의 무절제한 생활은 마을 사람들의 입방아에 오른다. 무솔리니는 마을 무도회장에서 군인 남편을 멀리 떠나보내고 홀로 자식을 키우는 20살의 줄리아 F.를 유혹한다. 줄리아는 아이를 데리고 남편을 떠나 무작정 집을 나와 무솔리니와 함께 살았다. 그러나 둘 사이는 점차 나빠졌다.

파시스트의 숨겨둔 유대인 정부

1904년 3월 스위스 로잔에서 열린 파리코뮌 33주년 행사에서 안젤리카 발라보노프가 연설했다. 안젤리카는 우크라이나의 유명한 귀족 출신으로 브뤼셀 자유대학을 나온 36살의 재원이었다. 안젤리카는 유독 한 남자를 주시했다. 그 남자는 레닌과 함께 나타난 21살의 무솔리니였다.

무솔리니는 잠시 교사 생활을 하다 병역을 피하기 위해 1902년 스위스로 망명해 거기서 이민노동자조합에 가입해 노조에서 존재감을 드러낸다. 안젤리카는 자기보다 15살이나 어린 무솔리니를 처음 본 순간 사랑에 빠져버렸다. 안젤리카는 무솔리니의 학문적 토대를 만들어주는 멘토가 된다. 안젤리카는 훗날 독재자가 될 청년 노동당원 무솔리니의 약점을 정확히 간파했고 이를 오히려 독재자의 강력한 무기로 발전시켰다.

무솔리니는 스위스에서 2년 반 망명하다가 이탈리아로 돌아와 1년 동안 저격부대에서 복무한다. 제대하고는 안젤리카의 가르침대로 기자가 되기로 결심한다. 무솔리니는 수년간 여러 사회주의 노선을 표방하는 언론사에서 일하다가 1912년 이탈리아 사회당 기관지 <아반티> 편집장으로 임명된다. 무솔리니는 안젤리카를 부편집장으로 고용해 함께 일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안젤리카는 스위스에 머무는 동안 인내심을 갖고 무솔리니에게 기사 쓰는 법을 가르쳤다.

1913년 독특한 외모가 눈에 띄는 여성 레다 라파넬라가 연설에 참석한다. 레다는 무솔리니의 매혹적인 목소리에 반했다. 레다는 이국적 분위기에 도톰하고 볼륨 있는 입술을 가진 육감적인 여성이었다. 1905년 베니스, 러시아 지식인 안젤리카는 유럽에서 발생한 혁명이 실패한 뒤 유럽인들의 빈곤을 조사하라는 임무를 받고 이탈리아로 파견된다. 베니스 출신의 25살 마르게리타는 안젤리카의 연설을 들으려고 와선 안젤리카의 카리스마에 완전 압도당한다. 안젤리카는 밀라노에 정착하기로 결심한다. 안젤리카는 이탈리아 사회당 집행위원이 된다. 이후 안젤리카는 마르게리타와 잦은 말다툼을 벌였다.

1912년 페미니즘의 세 번째 여성전사 안나 쿨리쇼프가 나타난다. 안젤리카와 마르게리타와 안나는 셋이서 잡지 <여성 노동자 수호>를 창간했다. 이탈리아 사회당의 핵심 여성 셋은 잡지를 계기로 한자리에 모였다. 이들의 공통점은 시골에서 온 젊은 지도자 무솔리니에 대한 충성과 경외심이었다. 무솔리니는 안젤리카를 통해 기자 훈련을 받았다. 3명의 여성은 무솔리니에게 기꺼이 사다리가 되어주었다. 셋의 관계는 그리 순탄치만은 않았다. <여성 노동자 수호>에서 쫓겨난 마르게리타는 무솔리니의 머리와 가슴을 차지하던 안젤리카를 몰아내기 위해 갖은 방법을 동원한다.

무솔리니와 마르게리타는 연인이자 지적 동반자로 발전했다. 무솔리니와 마르게리타의 애정 관계는 그들의 이데올로기적 유대만큼 탄탄하지 못했다. 마르게리타는 파리의 클레베르 거리에 머물며 당시 파리의 전위적 진보 지식인과 자주 어울렸다. 마르게리타는 당시 수많은 정부를 거느리며 무수히 많은 혼외 자녀를 본 무솔리니의 무절제한 생활을 내버려두었다.

안나 쿨리쇼프는 무솔리니와 마르게리타의 관계를 냉소했다. 1917년 2월 무솔리니는 포병 훈련 중 심한 부상을 입었다. 아픈 무솔리니의 곁은 마르게리타가 지켰다. 마르게리타는 무솔리니에게 사랑을 고백했고, 그날 밤 바로 그들은 정사를 나눴지만 그녀의 살 냄새 때문에 실패했다. 무솔리니는 겁 없는 마르게리타와 함께 베니스에서 숨바꼭질 하는 걸 즐겼다. 1918년 안젤리카는 무솔리니가 있는 이탈리아를 떠나 레닌 곁으로 간다.

1920년 무솔리니는 새 목표와 강인한 의지로 자신을 가다듬었다. 마르게리타는 무솔리니를 정치판 중심에 우뚝 세우려고 했다. 1922년 10월 26일 저녁 무솔리니의 파시스트 군대는 로마로 진격해 정부를 장악했다. 마르게리타는 한때 자기를 사랑했던 같은 파시스트 부대의 단눈치오를 무솔리니에게서 최대한 떨어뜨려놓으려 했다.

로마에 도착한 무솔리니는 엄청난 업무로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다. 그러는 중에도 무솔리니는 여러 여자와 잤다. 당시엔 사르파티 부인의 집이 곧 무솔리니의 집이었다. 무솔리니가 오면 사르파티 부인의 남편은 아무 말 없이 밖으로 나갔다. 1922년부터 1943년까지 무솔리니의 운전기사였던 에르콜레 보라토는 무솔리니의 여성들을 잘 안다. 무솔리니는 정부 청사를 나서기 무섭게 수많은 정부 중 한 명을 찾았다.

로마에는 질투심 많은 로밀다 루스피가 무솔리니의 곁을 지켰다. 마르게리타의 의심과 우려는 기우가 아니었다. 마르게리타는 1923년 3월 그랜드 호텔에 묵고 있던 무솔리니를 티토니 궁으로, 다시 라셀라로 이사시켰다. 1924년 5월 사르파티 부인의 남편이 죽었다. 마르게리타의 지위가 공식화되면서 그녀는 막강한 권력을 누렸다.

1925년 1월 무솔리니는 총리에서 파시즘의 ‘두체’로 탈바꿈한다. 국민은 무솔리니의 행보에 의심을 표했고 지지도는 바닥이었다. 마르게리타는 무솔리니와 이탈리아 국민 간의 원활한 소통을 위해 홍보 담당자를 자처한다. 마르게리타는 섬세한 전략가였다. 그녀의 펜 아래 무솔리니는 우상화됐다. 마르게리타는 파격적인 방법을 동원했다. 그녀는 각기 다른 상황과 환경에서 촬영한 무솔리니의 사진을 적극 이용했다. 이탈리아를 구원할 가장 이상적 지도자로 묘사해 우매한 대중을 선동하기 위한 마르게리타의 프로파간다였다. 무솔리니의 전기는 이탈리아어가 아닌 영어로 런던에서 먼저 출간된다. 마르게리타는 전 세계 사람들을 먼저 설득하고 싶었다.

홍보 전략은 엄청난 성공을 거두지만 도리어 마르게리타는 이 성공에 가장 큰 희생자가 된다. 그녀는 이제 더는 무솔리니의 애첩이 아니었다. 두 사람의 내연관계를 보는 국민과 측근의 시각이 위험했다. 무솔리니도 이제 마르게리타의 몰모트가 아니었다. 마르게리타는 애가 타 무솔리니에게 “한때 히틀러를 맹렬히 비난하더니 이젠 도리어 그를 추종하기 시작하는군요”라고 말했다. 정치로 연인이 된 두 사람은 이제 정치 때문에 남남으로 갈라진다. 서로에 대한 강한 욕망 때문에 무솔리니는 지금까지 마르게리타가 파시스트 당원이기 이전에 유대인아란 사실을 잊고 있었다. 마르게리타는 무솔리니의 마음을 돌리려고 무슨 수든 다 썼지만 실패했다. 마르게리타는 무솔리니를 잊기 위해 우루과이, 아르헨티나와 같은 먼 타국으로 전전했다.

무솔리니식 동화, 부인과 암탉

1908년 로마냐. 16살의 라첼레는 무솔리니의 아버지가 운영하는 술집에서 일하는 아름다운 소녀였다. 라첼레는 오래 전부터 마음에 두고 있던 다른 남자와 무도회장을 몰래 찾았다. 무솔리니는 라첼레가 뭇 남성들에게 웃음을 흘리며 ‘탐스럽고 아름다운 가슴’을 보여주는 것을 보고만 있지 않았다. 무솔리니는 거칠게 그녀를 협박했다. 무솔리니는 라첼레와 그녀의 어머니에게 총을 들이댔다. 부인은 딸과 무솔리니의 약혼을 허락했다. 무솔리니는 다른 여자들에게 그랬듯이 난폭하게 라첼레의 순결을 빼앗았다.

젊은 무솔리니와 라첼레 부부는 빈털터리로 신혼을 시작했다. 둘이 함께 살면서 그녀는 자신이 얼마나 끔찍한 남자와 사는지 조금씩 깨달았다. 무솔리니는 훗날 “난 한 번도 라첼레에게 사랑을 느껴본 적이 없어. 육체적인 관계에 이끌렸을 뿐이야”라고 고백한다. 라첼레는 말없이 무솔리니의 곁을 지켜주며 마음껏 자기 인생을 살도록 내버려두었다.

무솔리니는 트렌토에서 오스트리아 여자 이다 달세를 만난다. 둘의 짧지만 강했던 만남 후 재회한 건 1차 대전이 막 시작할 무렵이었다. 이다는 헌신적이고 순수한 사람을 바치는 여자였다. 이다는 자신의 보석은 물론 가게와 집까지 팔아 <포폴로 디탈리아>를 창간한 무솔리니의 자본금을 댄다. 이다는 베니토 알비노를 출산한다.

무솔리니는 광적으로 집착하는 이다를 택할지 부인 라첼레를 택할지 고민 끝에 1912년 세 번째 정부이자 정치 파트너인 마르게리타 사르파티에게 조언을 구한다. 마르게리타는 라첼레가 무식한 시골 처녀라 자기 라이벌이 아니라 생각하고 무솔리니에게 라첼레를 택하라고 말한다.

결국 무솔리니는 1915년 12월 16일 트레비글리오의 군 병원에서 라첼레 구이디와 결혼한다. 이다의 광적인 집착이 소송을 낳았다. 무솔리니는 의사를 사주해 이다가 정신병에 걸렸다며 베니스의 한 요양원에 가둬 버린다. 이다는 1937년 죽어서야 요양원을 나온다.

마르게리타는 라첼레에게 무솔리니와 자신은 부부가 아닌 이복 남매라고 거짓말한다. 무솔리니와 라첼레의 관계는 악화일로였다. 셋째 아이가 태어나고 10여 년이 지난 1929년 막내딸이 태어났다.

1932년 49살의 독재자 총리 무솔리니는 바닷가 오스티아에서 드라이브를 하다가 막 약혼한 20살의 클라라 페티치를 만나 순식간에 사랑을 한다. 클라라 페티치의 아버지는 비오 11세의 주치의였고 로마 특권층으로 대단한 권력을 행사했다. 클라라 페티치는 초콜릿에 엄청 집착했다. 1932년 4월 29일 클라라는 무솔리니의 초청으로 둘이 만난다. 무솔리니는 클라라를 ‘피콜라’(꼬마 소녀)라고 부르며 이전에 만났던 여인들과 달리 사랑과 존경으로 대했다. 무솔리니는 매일 저녁 클라라에게 전화했다. 젊디젊은 클라라에게서 이전에 경험하지 못한 감정을 느꼈다.

클라라는 1934년 6월 27일 베니스 궁 맞은 편 산 마르코 성당에서 리카르도 페데리치와 결혼한다. 그러나 신혼여행부터 삐걱거렸다. 2년 뒤 1936년 10월 무솔리니는 클라라의 어머니를 베니스 궁으로 호출한다. 1936년 5월 6일 무솔리니는 에티오피아를 정복한 것처럼 클라라를 자신의 정부로 정복한다. “엄마, 오늘은 뭘 입을까”라는 말로 클라라의 하루는 시작한다. 언제나처럼 클라라는 아침에 일어나 침대에서 빈둥대다 아침을 먹는다. 무솔리니와 클라라에게 주어진 시간은 많지 않았다. 밤이 되면 무솔리니는 라첼레가 있는 집, 토르로니아 빌라로 반드시 들어가야만 했다. 1937년 무솔리니의 스케줄은 온통 클라라로 가득 찼다. 클라라는 무솔리니 주변에 그의 간택만을 기다리는 여성이 수없이 많은 걸 잘 알았다.

라첼레는 밀라노에서 생활을 정리하고 자식을 데리고 로마로 왔다. 라첼레가 무솔리니 이외의 다른 남자를 만난다는 소문도 돌았다. 문제의 남성 코라도 발로리는 라첼레 집의 관리인이자 가정교사였다. 라첼레도 보란 듯이 다른 남자를 만났다. 무솔리니는 나이가 들수록 점점 추해지는 라첼레에게 거부감을 느꼈다. 그러나 이들이 꾸준히 부부관계를 이어간 건 둘 다 정조관념이 없었기 때문이다.

순조롭던 무솔리니와 클라라의 관계는 1937년 여름, 난관에 봉착한다. 무솔리니는 드디어 수많은 여성 중 자신을 위로해주고 같이 고민하고 비밀을 나눌 특별한 사람을 찾는다. 1937년 10월 파시스트 로마행진 기념일에 베니스 궁 앞으로 사람들이 운집했다. 무솔리니는 미국인이 촬영한 자기 사진을 클라라에게 보여주며 “강인하고 자신만만한 이 턱을 보라고. 나처럼 생긴 남자와 사랑에 빠지지 않을 여자가 어디 있겠어? 당신이 그랬던 것처럼 수많은 여성이 내 사진을 넣어둔 베개를 베고 잠들려 하겠지”라고 말한다. 또 무솔리니는 “내가 로마에 처음 왔을 때 난 호텔로 여자들을 쉴 새 없이 불러들였지. 난 하루에 4명의 여자를 해치우기도 했어”라고도 말한다. “한때 난 14명의 정부를 거느렸고 순서대로 한 명씩 관계를 맺었어. 여자들은 내게 유흥과 쾌락의 대상에 불과해”라고도 말한다.

무솔리니는 질투가 심하고 파괴적인 동시에 거짓말에도 능숙했다. 그는 라첼레와 클라라를 오가며 거짓말을 했다. 클라라에게 최대의 적은 당시 미성년자였던 그녀의 여동생이었다.

1938년 무솔리니의 광기를 끝을 향해 치달았다. 1940년 6월 10일 무솔리니는 프랑스와 영국을 상대로 선전포고했다. 그날 클라라에게 전화를 두 통 건다. 첫번째는 싸우고 끊었고, 두번째는 사과했다. 우상은 추락했다. 그러나 라첼레와 클라라, 누구도 산산이 부서진 우상 곁을 떠나지 않았다. 연합군과 임시정부가 무솔리니를 체포하기로 결정하고 군대를 파견했다.


2. 레닌의 여인들 - 붉은 트로이카

정어리를 닮은 나데주다 크루프스카야

1894년 상트페테르부르크. 24살 레닌의 변호사 사무실엔 파리만 날렸다. 레닌은 난생처음 러시아를 떠나 유럽으로 간다. 1895년 유럽에서 돌아온 레닌은 상트페테르부르크 감옥에 갇힌다. 레닌은 결국 3년 동안 거대한 레나 강의 척박한 땅 시베리아로 추방당한다. 추방지 이름을 따 ‘레닌’이란 필명을 사용했다.

1897년 5월 레닌처럼 나데주다 크룹스카야도 시베리아로 추방당한다. 레닌에게 깊게 매료된 나데주다는 비밀경찰의 감시에서 풀려나자 곧장 레닌의 가족을 찾아 레닌과 결혼하겠다고 말한다. 나데주다는 자기 어머니와 함께 기차를 타고 8천km를 달려 레닌을 만나러 간다. 나데주다는 추방당한 레닌의 오두막에 머물렀다.

나데주다는 레닌보다 한 살 많고, 키도 더 컸다. 나데주다는 1869년 2월 5일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매우 진보적인 가난한 귀족 가문에서 태어났다. 그녀는 교육학을 공부해 훌륭한 교사였다.

나데주다와 레닌이 처음 만난 건 1894년 2월 저녁 클라손이란 엔지니어의 아파트에서였다. 나데주다는 갑상선 호르몬 과다분비증인 바제도병을 앓아 면역체계에 큰 문제를 안고 있었고 심각한 고통에 시달렸다. 시베리아에서의 생활은 그녀로 하여금 자신의 병을 치료하면서 요양하게 했다.

1900년 레닌은 석방되면서 모스크바 근처로 이사한 어머니 집에 머물렀다. 1900년 7월 16일 레닌은 취리히로 가는 가차를 탔다. 누이 안나 역시 베를린에 살면서 <이스크라>의 독일어판을 홍보했다. 나데주다는 유배기간이 6개월 더 남아 여전히 시베리아에 있었다. 라데주다는 레닌에게 연락할 때마다 편지를 프라하행 우편함에 넣어둬 비밀경찰을 따돌렸다. 연락을 주고받기가 쉽지 않았지만 이것만이 그녀에게 허락된 유일한 소통방식이었다. 레닌보다 6개월 뒤에 석방된 나데주다는 프라하로 가는 첫 기차를 서둘러 잡아타고 며칠 동안 레닌을 찾아 거리를 헤맸다. 레닌은 비밀경찰뿐만 아니라 자기 아내마저 따돌렸다. 나데주다는 우체통에서 소포를 꺼내는 체코 노동자에게 도움을 청해 그에게서 레닌이 취리히에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나데주다는 여성을 겨냥한 잡지 <라보트니차>(여성노동자)를 창간했다. 이 잡지는 시대를 뛰어넘어 사회주의가 몰락한 뒤에서 살아남았다. 레닌과 나데주다는 취리히에서 제네바 인근으로 이사한다. 다시 둘은 1908년 12월 3일 파리로 이사한다. 나데주다에게 파리는 녹록지 않았다.

삼총사

이네사 아르망은 1893년 푸치키노에서 알렉산드르와 결혼했다. 생활은 매우 안정적이었다. 알렉산드르의 동생 블라드는 혁명에 참여했다. 블라드보다 10살 더 많았던 이네사는 모스크바 대학생들의 은밀한 모임에 종종 참석했다.

1909년 1월 이네사 아르망은 북극해 끝의 메젠에서 가혹했던 유배 생활을 끝냈다. 남편 알렉산드르와 재회했지만 연인인 블라드가 걱정이었다. 블라드는 그녀의 연인이기 이전에 시동생이었다. 블라드는 1909년 2월 초 이네사의 품에 안겨 죽었다. 이네사는 홀로 파리고 향한다.

이네사는 레닌이 주관하는 토론에 참여한다. 레닌은 자신보다 4살 어린 35살의 이네사를 보고 첫눈에 반한다. 1910년 7월 레닌이 로자 룩셈부르크, 트로츠키, 플레하노프와 함께 이네사를 코펜하겐에서 열리는 국제사회주의회의에 공식 초대한다. 이네사와 나데주다는 페미니즘 운동이란 공통의 목표를 통해 우정을 나우는 돈독한 관계를 유지했다. 무솔리니를 버리고 레닌 곁으로 온 러시아 혁명가 안젤리카 발라바노프는 나데주다와 이네사의 관계를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레닌이 요양을 해야 했다. 요양지는 니스로 결정됐고 처음엔 혼자 떠났다. 이네사는 남편 알렉산드르의 도움으로 롱쥬모 거리에 학교를 열었다. 롱쥬모 학교에서 레닌과 이네사는 더욱 가까워졌다. 1911년 나데주다가 먼저 레닌에게 이네사와 함께 살도록 자신이 물러나겠다고 통보한다.

레닌과 나데주다, 이네사는 1911년 여름 파리로 돌아왔다. 레닌은 나데주다에게 절대 떠나지 않겠다고 명세했다. 그렇게 이네사는 레닌과 나데주다 부부와 함께 6년 동안 완벽한 삼총사로 살았다.

1912년 레닌과 나데주다는 폴란드의 크라쿠프에 정착한다. 레닌은 밀사자격으로 이네사를 러시아로 보낸다. 그러나 이네사는 체포돼 6개월간 감옥에 갇힌다. 한적하고 평화로운 폴란드에서 나데주다는 이네사의 새 모습을 발견하고 전보다 더 가까워졌다.

1913년 12월 나데주다의 병은 점점 악화됐다. 1차 대전이 일어나면서 레닌은 스파이 혐의로 체포된다. 이네사는 스위스에서 모금운동을 벌여 레닌의 보석금을 마련한다. 레닌이 석방되고 나데주다가 합류해 셋은 스위스 베른에 집을 얻는다.

레닌은 몇 년 동안 유럽 전역을 누비며 도피생활을 했다. 물론 중간에 감옥에 갇힌 적도 꽤 된다. 레닌은 마치 최면술사처럼 여성 동지들을 매료시켰다. 레닌은 그들을 거부하지 않았지만 적당한 거리를 두었다. 로자 룩셈부르크는 1907년 슈투트가르트에서 열린 제2인터내셔널에서 레닌을 처음 만났다. 레닌은 성 문제에 관심을 두는 것을 곧 반혁명으로 간주했다. 레닌은 <자본론>을 제대로 읽을 여성은 없고, 여성들 중 대부분은 기차 시간표조차 이해하지 못하고 심지어 체스도 둘 줄 모른다고 얘기해왔다. 레닌은 일종의 금욕주의자였다.

1917년 혁명을 앞두고 레닌 일행 32명이 독일 비밀경찰의 도움으로 러시아까지 이동한다. 기차는 1917년 4월 11일 상트페테르부르크의 핀란드 역에 도착한다. 10월 혁명으로 성립된 정부에서 레닌은 자신의 사람들로 자리를 채웠다. 레닌의 여자들도 한 자리씩 차지했다. 누이 마리아는 <프라우다> 편집전략 일을 맡았고 이네사는 모스크바 소비에트 의회를 담당한다. 알렉산드라 콜론타이는 사회복지부장관이 된다. 1915년 레닌이 스위스에 머무는 내내 알렉산드라 콜론타이와 함께 있은 것에 화가 난 이네사는 추치키노에 있는 남편에게로 가 버렸다. 1918년 혁명이 위태로워지자 이네사는 다시 레닌 곁으로 왔다. 나데주다, 이네사, 레닌은 크렘린 궁에 다 같이 모여 산다.

1920년 초 이네사는 크렘린 궁 생활과 모든 정치적 활동에 환멸을 느낀다. 레닌은 이네사를 흑해의 강변 소치로 보내 휴식하라고 배려한다. 이네사는 1920년 9월 24일 이른 아침 고통의 밤을 지새운 뒤 죽었다. 이네사가 중앙위에 진입하는 것을 극구 반대했던 한때 무솔리니의 여자 안젤리카도 이네사의 장례식에 참석했다.

크렘린 궁의 소꿉놀이

1921년 5월 레닌은 뇌출혈로 쓰러져 1년 반 동안 반신불수로 살았다. 스탈린의 나이 어린 아내, 나디아 알리루예바도 레닌의 비서 중 하나였다. 1922년 10월 레닌은 다시 업무를 재개했다. 하지만 얼마 안 가 다시 건강이 악화됐다. 레닌은 편지에 “스탈린 동지는 무자비한 사람입니다. 동지들에게 당부하오니 그를 권력에서 배제할 것을 부탁합니다”라고 썼다. 이 편지를 받아쓴 레닌의 비서이자 스탈린의 아내였다.

1922년 12월 22일 스탈린은 나데주다를 맹렬히 비난했다. 1923년 3월 10일 레닌이 죽으면서 나데주다는 지노비에프와 카메네프를 지지한다. 1932년 11월 스탈린의 아내가 죽자 나데주다는 뼈있는 위로의 글을 보낸다. 나데주다에게 스탈린은 그저 자신의 남편을 배신한 치기 어린 하룻강아지였을 뿐이다. 스탈린은 보복을 위해 6년 넘게 기다렸다. 1938년 숙청을 시작했다.

스탈린은 1939년 2월 26일 저녁 나데주다의 62살 생일을 맞아 선물로 케이크를 보냈다. 나데주다는 그걸 먹고 심한 복통을 호소하다가 병원으로 이송돼 다음날 아침 숨졌다. 나데주다는 신속하게 화장됐고 장례식에서 스탈린은 나데주다의 유골함을 들었다.


3. 스탈린의 여인들 - 은신처의 사랑과 영광

예카테리나의 장례식

예카테리나가 카프카스에서 결혼한 남자는 은행강도단의 우두머리였던 스탈린이다. 스탈린은 1907년 6월 13일 아침 중앙은행을 털었다. 스탈린은 은행이나 가게를 털며 공산당 혁명운동의 자금을 댔다. 유전지대인 카프카스는 자금이 풍부했다. 스탈린의 삶은 평탄치 못했다.

갈색 머리에 매력적인 용모를 지닌 예카테리나 스바니제는 1880년 4월 2일 그루지야의 수도 트빌리시에서 평범한 집안의 막내딸로 태어났다. 예카테리나와 두 언니는 시내의 프랑스식 의상실에서 일했고 스탈린은 종종 경찰의 눈을 피해 이 가게에 몸을 숨겼다.

1906년 7월 15일 공산주의 대회에 참석하고 돌아온 스탈린은 예전의 그가 아니었다. 차려 입은 스탈린은 언뜻 진정한 유럽 사람인양 세련됐다. 예카테리나는 스탈린을 신처럼 숭배했다. 그러나 스탈린은 곧장 혁명지로 돌아갔고 난폭해져 갔다. 스탈린과 예타테리나는 바쿠 도시 외곽에 살림을 차린다. 트빌리시에서 스탈린을 가끔 숨겨주던 알리루예프 가족이 있었다.

스탈린과 예타케리나는 알리루예프 씨의 여섯 살 난 둘째 달 나디아를 데리고 나가 파도에 아이가 빠졌다. 스탈린은 아이를 구하려고 망설임 없이 뛰어들었다. 훗날 스탈린이 구한 소녀 나디아는 스탈린과 결혼해 크렘린 궁에 입성한다.

1907년 11월 22일 27살의 예카테리나는 스탈린의 품에서 숨진다. 이 때 스탈린은 자신의 심장은 처참히 부서졌고 치유될 수 없을 만큼 말라비틀어졌다고 토로했다. 그러나 스탈린은 기회만 있으면 다른 여자들을 맞이할 자리를 남겨 두었다.

그루지야의 바람둥이

스탈린은 예카테리나의 장례식 뒤 체포됐다. 스탈린 주변엔 여전히 여자들이 많았다. 스탈린은 22살의 스테파니아 페트로프스카야를 만나 꽤 진지한 관계를 맺었다가 헤어졌다. 스탈린은 유배지에서 자기 마음에 드는 혁명 동지들을 유혹해 관계를 맺었다. 넘치는 성욕을 주체 못해 여러 여성을 섭렵하고 다녔지만 동시에 빅토리아식 도덕성은 투철했다.

1917년 혁명에 성공하고 스탈린은 상트페테르부르크로 되돌아 와 16살의 탐스러운 갈색 머리의 아가씨로 성장한 나디아와 재회했다.

1918년 스탈린은 민족인민위원직을 맡는다. 스탈린은 자기 비서로 나디아의 오빠인 피오도르를 채용해 17살의 나디아를 타이피스트로 기용한다. 나디아는 서럽게 울면서 스탈린이 자신을 겁탈했다고 아버지에게 고백한다. 아버지 세르게이는 분노에 치를 떨며 스탈린을 죽여 버리겠다고 협박한다. 스탈린은 무릎을 꿇고 빌었다.

스탈린과 나디아 부부는 크렘린 궁으로 거처를 옮겼다. 1921년 결혼한 지 5개월도 안 돼 첫 아들 바실리가 태어난다. 출산을 마치자마자 스탈린은 나디아를 레닌의 비서로 앉혔다. 다분히 전략적 배치였다. 여성들에게 크렘린 궁은 유리 감옥이었다. 1926년 둘째 아이 스베틀라나가 태어난다. 나디아는 대학을 가기로 결정하고 소비에트 예술 아카데미의 수업을 듣는다. 그녀는 특히 가족 식사를 철저히 피했다.

스탈린은 점점 알콜 중독에 빠져들었다. 스탈린은 욕망을 충족시키려고 수많은 여성과 일회성 만남을 이어갔다. 크렘린 궁의 미용사나, 살짝 들린 코를 지닌 여름 별장의 하녀까지 상대는 매우 다양했다. 그의 부정행위는 나디아의 질투심에 불을 지폈다. 스탈린이 정치가 라자르 카가노비치의 16살 난 딸을 임신시켰다는 얘기까지 크렘린 궁에 퍼졌다. 나디아는 1926년 결국 백기를 든다. 두 아이를 데리고 크렘린 궁을 나와 상트페테르부르크로 숨는다. 나디아는 종교활동에 매달렸다.

1932년 둘은 다툼의 연속이었다. 스탈린은 나디아가 다른 남자를 만나고 다닌다는 사실을 일찍 알았다. 스탈린은 질투심도 강했다. 1932년 11월 8일 밤 스탈린과 나디아의 관계 종말이 시작됐다. 혁명 15주년 기념일을 맞아 대대적 행사가 열렸다. 술을 못 먹어 술잔을 들지 않는 나디아에게 스탈린은 소리를 지르더니 토악질을 해댔다. 나디아는 “내 이름은 나디아야, ‘너’가 아니라고”하고 나가버렸다.

문제의 원인은 붉은 군대 사령관 알렉산드로 에고고프의 아내였다. 그녀는 화려한 남성편력과 도발적인 옷차림으로 더 유명했다. 볼셰비키 지도자 스탈린은 값비싼 옷과 보석을 걸친 화려한 배우나 댄서, 미용사들에게 빠졌다. 나디아는 내면의 본질을 중요시했다.

1932년 하녀가 점심 때 쯤 나디아의 방문을 열었다. 침대 밑에 쓰러져 피를 흘리는 나디아를 발견한다. 방안이 피로 흥건했다. 그녀는 총소리가 나지 않게 베개로 총을 감싼 다음 심장을 조준했다. 그녀는 국민을 상대로 공포정치를 벌이는 스탈린을 견제하고 사태를 냉정히 판단할 사람의 편에 서려고 했다.

나디아가 자살하기 1주일 전, 스탈린과 나디아는 심하게 싸웠다. 그때 스탈린은 갑자기 나디아가 자신의 딸일지도 모른다고 소리를 질렀다. 나디아는 어머니에게 따졌고, 어머니 올가는 나디아가 태어나기 전 해, 스탈린과 두 달 가량 내연관계였다고 고백한다. 스탈린은 방에 들어가 사흘 동안 나오지 않았다. 이것은 스탈린이 자기 자신에게 가하는 벌이었다. 그 후로 스탈린의 폭정은 더 심해졌다.

얄타의 낯선 여자

1938년 11월 2일 파벨 알리루예프와 아내 제니아는 휴가에서 돌아왔다. 파벨은 기갑부대 책임자였다. 파벨은 스탈린과 크렘린 궁에서 같이 사는 이웃이었기에 거리낌 없이 질문했다. 파벨이 전화를 끊고 얼마 지나지 않아 급작스럽게 쓰러져 죽었다. 스탈린의 눈에 파벨은 눈엣가시였다. 정치적 갈등 때문이 아니었다. 스탈린은 자신의 인생에서 마지막 여자라고 생각하며 열정을 불태웠던 제니아가 하필 파벨의 아내라는 게 참을 수 없었다.

나디아가 죽은 뒤 제니아는 의심 많고 시가와 암투가 난무하는 크렘린 궁에서 스탈린에게 접근한다. 아름답고 쾌활하고 교양 있고 우아하기까지 한 배우였던 제니아는 손색없었다. 제니아는 나디아가 죽고 나서 정신적으로 피폐해진 스탈린을 위로했다. 제니아의 남편 파벨은 독극물에 의해 암살당했다.

남편 죽음 직후 제니아는 유대계 엔지니어 몰로시니코프와 신속하게 재혼한다. 스탈린은 1946년 여름 전쟁이 시작되고 처음으로 휴가를 떠난다. 여생에서 스탈린은 발렌티나 이스토미나라는 여자와 함께 했다. 발렌티나는 1930년대부터 크렘린 궁에서 스탈린의 가정부로 일했다. 발렌티나는 배운 건 없지만 늘 활기가 넘쳤다. 잘 웃는 발렌티나는 모든 사람에게 사랑을 받았다. 발렌티나는 소박했고 야망도 정치적 영향력도 없었다. 스탈린과 15년의 삶을 공유한 발렌티나에 대해 알려진 바는 거의 없다. 누구도 발렌티나만큼 오래 스탈린 곁을 지키지 못했다. 강력한 권력을 행사한 남성 곁을 20여 년 가까이 지켜준 이는 결국 러시아에서 가장 소박한 여성이었다.


4. 살라자르의 여인들 - 어느 신학생의 금지된 장난

비제우의 성모 마리아

1905년 10월 5일 비제우 역. 열차가 서자 사람들이 쏟아져 내렸다. 안토니우 드 올리베이라 살라자르와 누이 마르타는 어머니 마리아 두 레스가테를 부축하고 내렸다. 마르타의 친구이자 교사인 18살의 펠리스미나가 그들을 기다렸다.

펠리스미나 드 올리베이라는 평범한 대가족에서 1887년 8월 8남매 중 다섯째로 태어났다. 가정부 일을 하는 그녀의 어머니는 소박한 가톨릭 신자였다. 그녀에게 수녀를 권했지만 그녀는 거절했다.

1905년 새 학기 시작. 마르타는 펠리스미나의 집에 머물기로 한다. 마르타의 남동생 살라자르는 1905년 신학교에 다시 돌아가기로 결정했다. 아버지는 요리를 했다. 살라자르는 고단한 노동에 지쳐 백발이 성성해진 어머니의 간곡한 청에 못 이겨 사제의 길을 택했다.

펠리스미나는 살라자르에게 잠시도 눈을 뗄 수 없었다. 펠리스미나 역시 살라자르의 품에 안기는 날만을 간절히 꿈꿨다. 여름방학이 되자 펠리스미나는 산타콤바에 있는 살라자르의 집을 방문했다. 1906년 10월 5일 살라자르는 신학교로 돌아왔다.

살라자르가 사랑의 열병을 앓던 무렵, 포르투갈 정부에 대격변이 몰아친다. 1908년 2월 1일 황제 샤를 1세와 큰아들이 왕정을 전복시키려는 어느 공화당원에게 리스본에서 암살당한다. 살라자르는 1910년 신학공부를 포기하고 법학을 공부하려고 코임브라 대학으로 떠난다. 리스본에선 1908년부터 후안 프랑코 독재시대가 열렸다.

살라자르가 대학에서 법학공부로 옮긴 결정은 정치열망의 시발점이었다. 아버지가 일하던 농토의 지주이자 마을에서 존경받는 페레스트렐로 가문이 살라자르를 후원했다. 살라자르는 페레스트렐로 가족을 통해 귀족사회에 익숙해지면서 자신감을 얻었다.

살라자르는 코임브라 대학에 다니는 3년. 그 시간 펠리스미나에겐 암담하고 우울한 시기였다. 둘은 1920년대 초 크라스마스에 산타콤바에서 다시 만난다. 어느덧 살라자르는 코임브라 대학의 정치경제학 교수가 됐다. 1932년 재무장관이던 살라자르가 총리 자리에 오르자 펠리스미나는 여성 최초 교육감찰관으로 임명된다. 펠리스미나는 ‘가톨릭, 민족, 가족’으로 요약되는 살라자르식 이데올로기의 가장 잔인하고 냉철한 나팔수여다. 수녀를 꿈꿨던 소박한 펠리스미나는 이제 포르투갈 새 사법 체계의 잔혹한 파수꾼으로 변신했다.

살라자르에 대한 사랑이 그녀를 무자비한 애국주의자로 바꾸었다. 살라자르는 조국과 자신에게 헌신한 그녀의 공을 치하하기 위해 그녀에게 더 강한 권력을 준다. 그녀의 적은 더욱 늘어갔다. 살라자르는 죽을 때까지 공식으론 미혼이었다. 살라자르레겐 펠리스미나 외에도 수없이 많은 사랑이 존재했다.

보르헤스 호텔의 로맨스

살라자르는 사실상 결혼을 포기했다. 그는 30년 이상 독재정권을 유지하며 인간의 세속적인 감정이 육체적 욕구 따위에 지배받지 않는 수도사 같은 이미지를 표방했다. 살라자르는 대중 앞에 자주 나서지 않았다. 그가 열정을 불태우는 대상은 대부분 매우 특이한 부류에 속하는 여성이었다.

살라자르는 성악가 글로리아 카스탄헤이라와 각별했다. 살라자르는 어떤 여자에게도 종속되는 걸 원치 않았지만 마치 수집하듯 독특한 여성을 골라 단편적이면서도 강렬한 사랑을 나눴다. 살라자르는 글로리아의 조카 마리아 라우라 캄포스의 환심을 사려고도 노력한다.

당시 포르투갈은 멘데스 카베사다스의 독재 정권 아래 있었다. 살라자르는 39살에 재무장관에 임명돼 리스본으로 이주한다. 정권 개혁을 꿈꿨지만 현재로선 카베사다스의 노선에 충실해야 했다.

마리아 라우라가 재무부 청사에 들어가는 데는 특별한 약속이나 허락이 필요하지 않았다. 그녀는 그곳을 제집 드나들 듯했다. 남편의 추잡한 여자관계에 신물이 난 마리아 라우라는 공공연히 살라자르의 팔짱을 끼고 다녔다. 마리아 라우라는 결국 남편과 이혼한다. 그리고선 살라자르가 아닌 이혼한 남편의 숙부와 재혼한다. 그러나 무미건조했다. 그녀는 리스본으로 가 살라자르와 해후한다.

살라자르는 국회의장이 되면서 마리아 라우라와 관계가 명예를 실추시키지 않을까 염려했다. 1933년 살라자르는 총리가 된다. 1933년 살라자르와 마리아는 송년 만찬을 마지막 만남으로 한다.

1934년 7월 마리아 라우라와 헤어지고 6개월 뒤 살라자르는 보르헤스호텔에서 또 다른 만남을 시작했다. 37살의 에밀리아 비에이라와 만났다. 에밀리아는 고급 호텔이나 유럽과 미국을 잇는 유람선에서 벌어지는 쇼에서 춤을 추며 생활비를 버는 여자였다. 같은 시기 살라자르는 모든 독재자가 그랬듯이 공포정치를 선포한다. 1936년 살라자르는 크리스마스 파티를 마치고 에밀리아를 은밀히 만난다.

1970년 7월 27일 살라자르는 죽었다. 이후 에밀리아는 20년 동안 남편 노르베르토가 운영하는 <아 카피탈>이란 신문의 점성술란에서 실비아라는 가명으로 활동한다.

살라자르가 보르헤스 호텔에서 만난 여자는 마리아, 에밀리아 외에도 더 있었다. 1945년 가을 살라자르는 시인이자 스톡홀름 주재 외교관의 딸 메르세데스 드 카스트로 페이주를 이 호텔에서 만났다. 메르세데스는 아버지의 나라 포르투갈로 와 보르헤스 호텔에 기거한다.

사랑은 언제나 두 번씩 찾아온다

1951년 살라자르는 62살이었다. 주위의 수많은 여성도 결국에 그의 곁을 떠났다. 그러나 가장 위대한 사랑이 다가오고 있었다. 프랑스 기자 크리스틴 가니에는 살라자르 전기를 쓰려고 포르투갈로 향했다. 살라자르는 이 당돌한 여성의 매력에 순시기간에 빠졌다.

프랑스와 포르투갈을 오가며 크리스틴은 이제 살라자르의 연인으로 삶을 산다. 그는 그녀를 미친 듯이 사랑했다. 크리스틴이 살라자르를 만나던 시절, 그녀는 결핵균 발견으로 유명한 코흐 박사의 작은 조카 레몽 브레코흐와 결혼한 유부녀였다. 순진한 남편은 포르투갈로 가는 그녀의 여정에 처음엔 동행했다. 그녀가 살라자르의 품에 안겨 산책할 동안 그는 리스본에서 그녀를 기다렸다. 아내와 살라자르의 관계를 안 남편은 이혼을 요구했고 크리스틴은 곧 다른 남자와 재혼했지만 이 결혼도 불행했다.

살라자르가 만든 철옹성에서 그의 마지막 날을 함께해준 여인은 바로 가정부 마리아였다. 1970년 7월 27일 살라자르의 임종을 지켰던 이도 바로 마리아였다.


5. 보카사의 여인들 - 방기에서 생긴 일

대관식

1977년 12월 4일 아침 육중한 왕관이 카트린의 이마를 짓눌렀다. 카트린이 장베델 보카사를 처음 만난 건 아직 학생 때였는데도 졸업도 못하고 곧장 결혼식을 올렸다. 중앙아프리카제국의 전 국민이 이 기상천외한 즉위식에 동원됐다. 보카사의 수많은 부인과 측근들, 정부 주요 인사들과 여성 인사들의 손과 목 언저리에는 다이아몬드가 반짝거렸다.

보카사는 18살에 프랑스군대에 입대해 저격병으로 전장에 나갔다. 23년 동안 프랑스 군인으로 산다. 보카사는 나폴레옹을 맹목적으로 숭배해 즉위 날짜도 이틀을 미뤄 나폴레옹 대관식과 맞췄다. 즉위식 때 보카사의 나이는 56살, 조세핀 역할의 카트린 뎅귀아드는 28살이었다. 카트린의 장신구 가격은 무려 5백만 달러였다. 보카사는 1804년 12월 2일 노트르담 대성당에서 열린 나폴레옹 대관식을 그대로 재현했다.

프랑스 지스카르 데스탱 대통령이 장관을 통해 흡족해할 만한 즉위식 선물을 보냈다. 실제 중앙아프리카를 통해 가장 큰 수익을 입은 이는 독재자 보카사가 아니라 프랑스였다.

1949년 차드에서 태어난 카트린은 방기에 사는 평범한 여고생이었다. 1946년 어느 날 여느 때처럼 피오7세 고등학교까지 걸어서 등교 중이었다. 보카사는 15살 소녀의 하늘거리는 몸매에 반했다.

보카사의 여성 취향은 종잡을 수 없다. 벨기에인 아네트 반 헬스트와 결혼했다가 이혼하고 다시 방기 출신의 혼혈 마르게리트 그린 보얀구아와 결혼다고 헤어진다. 이후 카이로 출신의 유대인 엘렌 하쉘 레비와 오래 관계를 유지했다. 카트린을 본지 고작 며칠 만에 보카사는 군인을 동원해 그녀를 납치 감금한다. 그리고 무작정 결혼 승낙을 받기 위해 그녀의 부모를 찾아간다. 당시 보카사는 1966년 사촌인 다비드 다코를 상대로 쿠데타를 일으켜 정권을 뺏기 전이었고 그의 직급은 군 최고사령관이었다. 1965년 6월 보카사는 결국 카트린과 결혼하고 첫 딸 헨을 낳는다. 카트린은 첫 딸에 이어 여섯 아이를 차례로 출산했는데 그중 하나가 보카사의 후계자 장베벨 보카사 주니어다. 카트린에게 결혼은 물리적 강요였기에 그녀의 이후 삶은 평탄치 못했다.

보카사는 프랑스 군인 시절 프랑스 식민지 곳곳으로 파견 나가 가는 곳마다 호색한 기질을 키웠다. 보카사는 특히 육감적 외모로 유명한 프랑스 여배우 브리지트 바르도를 흠모했다. 보카사는 군인일 땐 새 여자가 생기면 과거의 여자를 버렸지만 황제가 되고 나선 각각의 여자에게 알맞은 지위와 안락한 삶을 보장해줬다.

1970년 2월 16일 보카사는 가봉에서 만난 중2 소녀 마리조엘 이불리아와 결혼한다. 희한하게도 마리조엘은 보카사의 직설적이고 과격한 방식에 매력을 느꼈다. 보카사는 본능적으로 여성을 사냥했다. 인도차이나 전쟁에 참가했던 군 동료이자 보카사의 부인 중 한 명인 엘리안 마양가의 아버지는 자기 딸을 보카사가 강간했다고 한다. 강간당한 엘리안은 여자아이를 출산한다. 엘리안은 출산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딸을 두고 콩고 공화국으로 탈출한다.

아드리쿠르의 여왕

카트린은 파리에서 크리스마스를 보내는 걸 아주 좋아했다. 피리 외곽 10km에 보카사의 아드리쿠르 성이 있었다. 프랑스에서 그녀는 밝고 자신감이 넘쳤고 황후로서의 위엄과 권리를 누렸다. 그녀는 중앙아프리카 제국의 황후로 누릴 모든 호사를 누렸고 가격에 상관없이 원하는 것을 샀다. 그녀는 일주일에도 몇 번씩 파리로 향해 고급 브랜드 매장이 집결한 파리 8구로 직행해 사치품들을 휩쓸었다.

카트린은 친구에게 천문학적인 단위의 돈을 거리낌 없이 주고는 밖에서 물건을 기다렸다. 남은 돈은 친구에게 심부름 값으로 줬다. 쇼핑에 대한 그녀의 집착은 병적이었다. 보카사는 아드리쿠르로 가면 그녀에게 많은 것을 허락했다. 그는 여전히 프랑스 국적을 유지하고 프랑스 국민으로 자긍심을 지니고 있었다. 보카사는 하루라도 시바스 리갈을 마지지 않는 날이 없었다.

아드리쿠르는 때때로 보카사를 위한 매음굴이 됐다. 성에 초대받아 도착하자 어린 매춘부들과 함께 온 포주가 성 안에 자리를 떡하니 자리 잡고 있었다.

데스탱, 친구인가 적인가

1979년 늦여름 데스탱 대통령은 카트린을 파리 16구의 고급 저택으로 호출했다. 데스탱은 ‘머지않아 방기에 큰일이 벌어질 것’이라고 그녀에게 경고했다. 카트린에게 당장 저택의 개인 회선으로 보카사에게 전화해 알리라고 재촉한다. 보카사가 황제 자리에 물러나 프랑스로 망명하면 대통령의 각별한 보호를 받을 것이라고 전했다.

1979년 9월 19일 보카사를 태우고 방기를 출발한 비행기는 카다피의 리비아로 향했다. 79년 6월 방기엔 학생들의 대규모 시위가 있었고 보카사는 무자비하게 진압했다. 보카사가 인육을 먹는다는 소문이 보카사 내각 장관들의 증언으로 사실임이 밝혀졌다. 보카사를 축출하고 그의 사촌이자 보카사의 쿠데타로 대통령직에 쫓겨난 다비드 다코를 복귀시키려 했다.

프랑스 군대가 베렝고 성으로 진군하는 동안 보카사는 카다피의 환대를 받았다. 카다피는 보카사의 새 정치노선을 높게 평가했다. 한때 목표를 공유했던 보카사와 데스탱 대통령 사이에 어떤 일이 일어났는가.

데스탱은 1974년 5월 프랑스 대통령이 됐고 보카사는 그를 열렬히 환영했다. 1966년 보카사가 군사쿠데타로 정권을 잡을 때 드골과 그 후계자 퐁피두 대통령은 보카사를 싫어했다. 하지만 데스탱은 중앙아프리카에 정통했고 둘은 긴밀했다. 데스텡의 외조부는 프랑스 국회의원으로 활동하다 상하 우방기 목재회사의 사장으로 아프리카를 자주 오간다. 데스탱의 사촌 프랑수아는 1959년부터 프랑스령 적도 아프리카의 여러 은행을 승계한 BFCE 은행장으로 프랑스령 아프리카의 자본을 관리했다. 데스탱은 드골 정권에서 재무장관일 때 취미로 중앙아프리카에 자주 가 맹수사냥을 즐겼다.

정권 초기 보카사는 대대적 경제개혁을 단행하며 석유화학을 비롯한 유럽 자본의 주요 사업을 국유화한다. 1975년 3월 5일 데스탱은 중앙아프리카를 공식 방문한 첫 프랑스 대통령이 된다. 76년 8월부터 데스탱은 사냥을 위해 중앙아프리카에 자주 들렀다.

79년 9월 20일 보카사 축출에 군부대를 급파한 이는 데스탱 대통령이었다. 2년 사이 무슨 일이 있었나. 다비드 다코는 대통령으로 재추대된다. 79년 8월 16일 상황은 급진전한다. 프랑스는 보카사에 대한 모든 지원을 중단했다. 보카사는 리비아로 갔지만 어찌할 줄 모르고 일단 400여 명의 군사를 소집해 훈련시킨다. 보카사는 결국 망명지로 코트디부아르를 택한다. 79년 11월 말 카트린도 코트디부아르로 향한다. 카트린은 거기서 보카사에게 “고백할 게 있어요. 데스탱과 나는 여인 사이예요”라고 말한다. 보카사는 카트린이 자신을 배신하고 프랑스 대통령과 놀아났다고 미치광이처럼 화를 내며 그녀를 괴롭혔다. 신변의 위협을 느낀 카트린은 코트디부아르의 영부인에게 도움을 청해 피신한 뒤 신속히 스위스로 떠났다.

1980년대 보카사에게 프랑스 망명이 허가되면서 그는 잠시 아드리쿠르 성에 머문다.


6. 마오쩌둥의 여인들 - 그녀들의 호랑이

머리 없는 여인

1930년 1월 28일 아침 양카이후이는 창사에서 마오쩌둥을 애타게 기다렸다. 마오는 아내를 열렬히 사랑했지만 후난성에서 게릴라 활동 중이라 쉽게 얼굴을 볼 수 없었다. 장제스는 소비에트 정부와 긴밀한 관계를 다졌다.

1921년 10월 마오와 양카이후이는 ‘맑은 연못’이란 뜻의 샹탄에 정착한다. 마오 28살, 양카이후이 20살 때다. 양카이후이는 1901년 후난성에서 태어났다. 평민 출신이지만 교양 있던 그녀의 어머니는 딸에게 전통문학을 읽혔다. 그녀의 아버지는 1918년 베이징 대학 윤리학 교수가 된다. 제자들을 집으로 데려와 함께 살았는데 그 중 한명이 마오였다. 마오는 첫눈에 양카이후이에 사랑에 빠졌다. 그러나 그녀의 눈에 마오는 거칠고 촌스런 남자였다.

마오는 1918년 신민학회를 조직하고 결혼이 인간을 착취하는 가장 비인간적 제도라고 비난하며 평생 결혼하지 않을 것을 다짐했다. 1921년 양카이후이의 아버지가 죽었다.

마오와 양카이후이는 연인으로 발전해 1920년대 말 둘은 결혼하지만 사랑은 오래가지 못했다. 마오는 과거의 여자들과 연을 끊지 못했고 설상가상으로 새 여자들을 만나는데 매우 적극적이었다. 그중엔 양카이후이의 사촌도 있었다.

양카이후이는 양성평등을 말했다. 그러나 마오가 운동하는 동안 그녀는 집에서 아이를 키우고 살림했다. 1922년 10월 첫째 아들 안잉이 태어났고, 23년 둘째 안칭, 27년 막내 안롱이 태어났다. 그러나 둘의 관계는 조금씩 멀어졌다. 마오는 양카이후이를 방치했다. 양카이후이는 페미니즘 운동에 헌신한다.

마오는 1928년 부인 몰래 혁명운동에 활동하던 젊은 여성과 결혼한다. 여자에 눈 먼 마오는 아내와 자식에 대한 일말의 죄책감 없이 천연덕스럽게 거짓말을 했다. 그 지역을 잡고 있던 반공주의자 허젠은 1930년 10월28일 장남 안잉의 8살 생일에 양카이후이와 아들을 모두 체포한다. 그녀는 군사령부의 임시재판소로 이송돼 사형선고를 받는다. 이렇게 1930년 11월 14일 양카이후이는 29살에 사형당한다. 마오는 적지에 아내와 자식을 버리고 홀로 달아났다.

황제의 행진

“개자식, 창녀랑 놀아날 궁리나 하는 병신” 허쯔전은 1937년 5월 마오에게 불같이 화를 냈다. 마오가 매춘부 같은 여배우와 연분이 났다. 허쯔전은 릴리 우의 머리채를 움켜잡고 그녀의 얼굴을 손톱으로 매섭게 할퀴었다. 허쯔전은 마오와 릴리의 만남을 주선한 미국인 기자 아그네스 스메들리의 뺨도 휘갈겼다. 당시 26살의 릴리는 이혼한 여배우였다. 쯔전이 고집 세고 헌신적이었던 반면 즉흥적이고 충동적으로 행동하는 릴리는 마오에게 색다른 재미를 안긴다.

마오의 두 번째 아내 허쯔전은 1909년 유인현의 학식 높고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공산주의자였다. 허쯔전이 마오와 결혼한 건 18살 때였다. 마오는 허쯔전의 도자기 같이 맑고 깨끗한 얼굴에 넋을 잃고 청혼했다. 허쯔전은 혁명가였다. 1926년 여름 쯔전은 공산당에 가입한다. 마오가 마을에 도착하자 통역자로 쯔전을 소개한다. 마오는 쯔전을 보자마자 첫눈에 반했다. 1928년 초 34살의 마오와 19살의 쯔전은 이미 결혼한 사이처럼 간주됐다. 쯔전은 원래 풍부한 지적 매력을 지닌 마오의 막내동생 쩌탄을 흠모했다. 그녀는 ‘모 아니면 도’ 식의 아주 강단 있는 여성이었다.

1934년 10월 쯔전은 또다시 임신했는데 대장정에 나섰다. 1935년 2월 15일 백사촌에 도착했을 때 그녀는 진통을 시작해 딸을 낳았다. 쯔전은 통곡을 하며 딸을 버리고 왔다. 4월 중순 국민당 비행기 세 대가 기관총을 쏴 그녀의 머리와 등에 12개의 포탄 파편이 박혔다. 그래도 그녀는 대장정을 포기하기 않았고 대장정에서 끝까지 살아남았다. 대장정이 끝나고 1937년 그녀는 28살에 다시 임신한다. 그러나 둘은 소원해졌다. 그녀는 마오에게 결별을 고하고 8월 초 모스크바로 가 거기서 아들을 낳는다. 아이는 첫돌 전에 폐렴에 걸려 죽는다.

마오는 쯔전에게 편지로 혼인 파기를 통보했다. 러시아 당국은 그녀를 정신병원에 수용한다. 1947년 그녀는 중국 정부의 개입으로 러시아에서 해방돼 중국으로 이송된다. 쩌전은 죽기 전까지 마오의 사주를 받은 의사들이 자기를 독살하려 한다는 환상에 시달렸다.

사랑은 사과처럼 푸르다

1980년 9월 베이징, 중국을 뜨겁게 달군 ‘4인방 사건 재판’이 있었다. 법정에서 고성이 오갔다. 장칭은 혁명의 전설이 된 허쯔전의 존재를 지우고 마오의 곁에서 중국을 호령하기 위해 30년을 인고해왔다. 징칭의 본명은 리수멍으로 1914년 3월 산둥성의 전형적 농촌 마을 주청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수레바퀴를 만들어 팔았는데, 언제나 술에 취해 첩이던 어머니를 팼다. 1921년 어머니와 장칭은 지난에 있는 할머니 집으로 피신한다. 1928년 장칭이 14살이던 해 어머니는 딸을 버리고 한 남자를 따라 간다.

15살에 장칭은 지난의 연극학교에 들어간다. 마을 상인과 결혼하지만 혼인은 몇 달 뒤 파탄난다. 그 뒤 장칭은 공산당 선전부의 책임자였던 유치웨이를 만난다. 유치웨이는 장칭이 정치계로 나가는데 큰 빛이 되어주었다. 당시 장칭은 공산당과 국민당의 차이도 몰랐다. 장칭은 1933년 중국 공산당에 입당한다. 장칭은 은인인 유치웨이와 결혼했지만 결별하고 상해로 떠나 란핑(푸른 사과)이란 이름으로 배우가 된다. 장칭은 ‘탕나’라는 영화비평가와 결혼한다.

장칭은 마오가 진행하는 강의에 참석해 마르크스와 레닌의 이론을 공부했고 그에게 점차 매료됐다. 장칭과 마오는 추문으로 번졌다. 그녀는 B급 영화에나 출연하는 재능이라고는 눈곱만큼도 없는 형편없는 배우였다. 게다가 이미 네 번이나 결혼한 경력이 있었다. 상해에선 그녀에 관한 소문이 파다했고 옌안에서 그녀는 전염병적 존재로 취급받았다. 그녀는 국민당원에 의해 투옥됐고 감옥에서 식사를 나눠주는 간수들의 환심을 사기 위해 잠자리도 함께 했다

마오와 장칭은 자리에서 쫓겨나고 류사오치가 주석에 뽑힌다. 장칭은 류사오치를 증오하면서 자신의 흔적을 지우기에 골몰했다. 장칭은 과거 자신의 남편이자 영화비평가였던 탕나에게 자기가 보낸 편지를 찾아내려고 먼지 털 듯 샅샅이 뒤졌다. 결국 탕나는 고문을 받다 죽는다. 마오는 1966년 장칭을 문화혁명소조 제1소장에 임명한다. 류사오치가 축출되자마자 장칭은 30만 인민을 소집해 류사오치 부인 광메이를 공개비판하는 집회를 연다.

마오는 침대에 누워 65번째 생일을 맞았다. 장칭은 자다가 수상한 낌새를 느끼고 마오의 방으로 갔다. 간호사가 마오의 품에 안겨 있었다. 장칭은 이성을 잃고 생애 처음으로 마오 앞에서 난장을 부렸다.

1936년 마오는 에드가 스노우에게 “나는 여자들에게 관심이 없네”라고 말한다. 그러나 그의 주치의가 기억하는 마오는 전혀 달랐다. 주치의는 “마오가 섹스에 집착했다”고 증언했다. 마오 주변엔 항상 여자가 많았다. 마오의 정부 중 젊고 경험이 부족한 이들은 주치의에게 조언을 구해 <소녀경>을 읽었다. 마오는 몸을 잘 씻지 않았다. 충격적인 사실은 성기를 닦지 않았다. 마오는 “난 여성의 몸으로 내 몸을 닦아내”라고 말했다. 마오는 무용수를 선호했다.

마오와 장칭은 연애 취향이 전혀 달랐다. 늙은 마오는 지적이고 유능한 여성보다 젊고 백치미 있는 여성을 원했다. 반면 장칭은 자신에게 육체적 쾌락 이외의 것들을 줄 남성을 원했다. 장칭은 파아니스트나 젊은 작가들을 주로 만났다.

1976년 1월 8일 마오의 혁명 동지 주은래가 죽기 무섭게 징칭은 최후의 공격을 개시한다. 90살의 주은래는 “사람들에게 그만큼 고통을 줬으면 멈출 줄도 알아야지. 혁명은 어쩔테냐?”라고 공산당 지도부가 모인 방에서 장칭을 나무랐다. 장칭은 어떻게 해서든 등소평이 주은래를 대신해 주석 자리에 오르는 것을 막아야 했다. 장칭은 1976년 10월 6일 밤 검거됐다. 대중은 그녀의 체포 소식에 즉각 환호했다. “장칭의 몸에 수만 개의 칼을 꽂자”고 외쳤다. 장칭은 1981년 1월 25일 사형을 선고받는다. 등소평은 장칭에게 죄를 뉘우칠 시간을 2년 주었지만 장칭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장칭은 1991년 5월 14일 자살한다.


7. 차우세스쿠의 여인 - 사치와 평안

국모를 향한 총성

1989년 크리스마스, 부쿠레슈티 특별군사재판정에서 피고인 니콜라에 차우세스쿠와 엘레나 차우세스쿠는 사형을 선고받는다.

상냥한 여자

1939년 8월 13일 부쿠레슈티. 갈색 머리에 얇고 뾰로통한 입매가 매력적인 23살 레누타 페트레스쿠는 공원에서 열리는 무도회에 가려고 치장 중이었다. 레누타는 1916년 1월 7일 발라키아 북부의 작은 마을 페트레스티에서 농부의 딸로 태어나 어려운 형편에 중학교도 못 다녀 겨우 읽고 썼고 간단한 셈만 했다. 레누타는 불평불만이 많고 수다 떠는 것을 좋아했다. 레누타는 노동운동에 눈을 떴다.

차우세스쿠도 발라키아 지역에서 1918년 1월 26일 태어나 10살 때 직업을 구하기 위해 수도 쿠쿠레슈티로 상경한다. 차우세스쿠는 1939년 봄 레누타를 만난다. 둘은 비밀결사단원으로 불안정하게 출발한다. 차우세스쿠는 1940년 체포된다. 같이 감옥에 갇힌 철도노동자 게오르기우 데지는 차우세스쿠를 혁명의 길로 인도한다.

차우세스쿠가 감옥에 있는 동안 레누타는 정체성을 잃은 채 여러 남자를 전전하며 타락했다. 둘은 1947년 12월 23일 시청에 결혼신고서를 제출한다. 레누타는 루마니아어로 상냥한 여자라는 뜻인데 너무 흔한 이름이라고 생각한 차우세스쿠는 그녀의 이름을 ‘엘레나’로 고친다.

페트레스티의 성녀 엘레나

부부가 외교 순방을 다닐 때마다 그녀는 선물에 대한 욕심을 노골적으로 드러냈고 초청국가에선 그녀의 만족을 위해 철저히 준비했다.

1965년 3월 차우세스쿠는 루마니아 공산당 서기장에 취임한다. 유고슬라비아의 독재자 티토와 연합하고 중국 마오에게 손을 내민다. 엘레나에게도 이미지 변신이 필요했다. 그녀를 고등교육을 받은 지적인 여성이자 뛰어난 과학자로 만들려고 치밀한 작전이 이뤄졌다. 그녀는 루마니아 과학계를 제멋대로 주물렀다. 1973년 그녀는 갖가지 학위로 치장한 저명한 과학자 신분으로 루마니아 행정부에까지 입성한다. 1975년 엘레나 차우세스쿠는 <합성 고무의 안정화에 대한 아이소프렌의 입체 특이적 중합>이란 박사논문을 발표하기로 한다. 어용 교수 코리올란 드라쿨레스쿠는 그녀의 학위를 통과시킨 대가로 승승장구해 대학장까지 승진한다.

1975년 그녀는 사회주의 문화교육의회장으로 선임된다. 바리케이드 위에서 구호를 외치던 공장 처녀 플로리나는 사라졌다. 1971년 차우세스쿠 대통령 내외는 베이징에 도착해 마오와 유명한 아내 장칭의 환대를 받는다. 그녀는 마오와 장칭이 중국에서 신적 존재로 추앙받는 걸 보고 엄청난 충격을 받는다.

질투

그녀는 자신의 폭군에 가까운 성격이 외부에 드러날까 봐 이미지 관리에 크게 신경 썼다. 1970년대 엘레나는 남편의 국외 순방을 쫓아다니면서 유명세를 탄다. 그녀는 상대국에 노골적으로 뇌물을 요구했다. 사망 직전까지 그녀가 루마니아와 국외에서 받은 명예박사 학위는 무려 74개에 달했다.

엘레나 우상화 작업도 진행된다. 1980년대 초반 차우세스쿠가 종신대통령으로 임명되면서 그녀도 종신 제1부총리로 지명된다. 엘레나는 남편과 다른 외교노선을 표방하기에 이르렀다. 그 이유는 노벨상에 대한 욕심 때문이었다.
1977년 지진은 엄청난 피해를 남겼다. 대통령 궁도 파괴됐다. 차우세스쿠는 520헥타르에 달하는 땅에 대통령궁을 건설하라고 명령했다. 이 건설로 4만 명이 살던 집에서 쫓겨났다.


8. 히틀러의 여인들 - 욕망의 이름으로

애송이

1905년 독일과 오스트리아 접경지 린츠. 15살의 히틀러는 여자들 앞에 서면 쭈뼛대기나 하는 평범한 청년이었다. 3년 동안 히틀러는 고교 동급생인 스테파니 이자크를 남몰래 짝사랑했지만 고백도 못했다. 1907년 크리스마스를 사흘 앞두고 18살인 히틀러의 어머니가 암으로 죽는다.

매춘부가 히틀러의 동정을 떼어준 장본인아라는 가설은 여전히 이견이 있다. 전쟁 후 히틀러는 전혀 다른 사람이 됐다. 고질적인 여성에 대한 공포도 완전 사라졌다. 그러나 아직 히틀러는 귀족 여성들과 어울려 환심을 사려고 노력하는 야망에 찬 민족주의사회당원에 불과했다.

1920년 3월 베를린에서 히틀러는 인생을 뒤바꿔 놓을 여인, 헬렌 벡스타인을 만난다. 피아노 제조사 벡스타인의 후계자와 결혼한 귀부인이었다. 헬렌은 히틀러에게 더 넓은 세상으로 향하는 문을 열어준다. 히틀러는 사춘기부터 바그너 음악의 팬이었다.

1923년 히틀러가 바그너 가족을 만나려고 반프리트 빌라를 방문할 때 위느프리드와 동행하면서 둘의 관계를 공식화한다. 그녀는 이미 히틀러의 비범한 눈빛과 카리스마에 이성을 잃었다. 히틀러는 자신에게 완전히 넋이 나간 위니프리드를 이용해 바그너 가문에 접근한다.

자살한 여인

1927년 히틀러는 37살이었고 마리아 라이터는 17살에 불과했다. 그녀는 히틀러를 처음엔 거부했다. 18살 때 그녀는 마을 남자를 만나 결혼하고 한적한 생활을 이어간다. 1930년 그녀 나이 20살에 이혼한다.

1927년 가을 히틀러는 눈웃음이 매력적인 19살의 자기 조카 안겔라카 라우발과 함께 살았다. 안겔라카는 히틀러를 동경하고 추앙했지만 그녀의 마음을 산 사람은 히틀러의 운전기사 에밀 모리스였다. 히틀러는 조카 안겔라카의 삶에 지독하게 간섭하기 시작했다.

1928년 에밀과 한바탕 크게 싸운 6개월 뒤 여름 안겔라카는 에밀과 관계를 정리하고 싶어 한다. 삼촌과 조카의 금지된 사랑은 시간이 갈수록 깊어만 갔다. 그는 벌거벗은 안겔리카의 그림을 자주 그렸고 그녀는 히틀러를 위해 기꺼이 누드모델이 돼 주었다. 1931년 9월 히틀러와 조카 안겔리카의 관계를 파국을 맞는다. 안겔리카는 자살했다. 안겔리카는 1931년 9월 23일 비엔나에 묻혔다.

최고의 사랑

1935년 에바는 열정과 꿈으로 가득 찬 유쾌한 여성이지만 어딘가 모르게 어둡고 감성적인 분위기가 물씬 풍겼다. 에바는 한 남자를 사랑했다. 그 당시 히틀러는 체코 출신 여배우 아니 온드라와 같이 호텔에 있었다.

1929년 9월 뮌헨의 쉘링 거리 50번지에는 하인리히 호프만의 사진 스튜디오가 있었다. 히틀러는 이 사진관에서 자주 사진을 찍었다. 에바는 바로 사진관에서 호프만의 조수였다. 에바는 1912년 2월 16일 뮌헨 도심에서 벗어난 지역에서 태어났다. 부유하진 않았지만 평범했다. 아버지는 확산하는 나치를 싫어했다. 에바에게 가장 중요한 두 가지는 운동과 패션이었다. 히틀러는 호프만의 스튜디오에서 만난 아름다운 인어아가씨에게 넋을 잃었다. 히틀러는 1929년 크리스마스에 에바에게 처음 꽃을 보냈다.

에바는 안겔리카의 완변학 대체품이었다. 히틀러는 캐비어를 가장 좋아했다. 2차 대전 발발 첫 해 에바는 베를린의 총리 관저로 이사한다. 무솔리니와 그의 정부 클라라가 총살당했다는 소식이 들려오자 벙커 내 분위기는 삽시간에 술렁이기 시작했다.

히틀러와 에바는 벙커 안에서 최소한의 것만 갖춰두고 결혼식을 진행했다. 다음날 4월 30일 오후3시30분 에바와 히틀러는 자살했다.

진짜 영부인

1929년 말 마그다는 권터와 연초에 이미 이혼했다. 1930년 9월 1일 마그다는 나치당에 입당한다. 마그다는 베를린의 슈포르트팔라스트에서 열린 집회에서 처음으로 요제프 괴벨스를 만난다. 마그다에 대한 괴벨스의 욕망은 걷잡을 수 없이 커져만 갔다. 1930년 2월 26일 마그다는 괴벨스에게 이별을 고한다. 1931년 12월 마그다는 결국 괴벨스와 결혼했다.

마그다에게 빠진 히틀러는 마치 자기 집처럼 괴벨스의 집을 드나들었다. 마그다는 히틀러를 위해 항상 채식 메뉴를 준비했다. 마그다와 괴벨스의 관계 또한 아슬아슬한 살얼음판이었다. 히틀러의 눈에 마그다는 진정한 ‘영부인’이었다. 괴벨스는 히틀러와 아내 마그다의 관계를 어떻게 생각했을까. 괴벨스는 마그다에게 어떤 성적 만족도 느끼지 못했고 결국 다른 여자들을 찾아 헤맸다. 괴벨스는 리자 바로바라는 젊은 체코 여배우와 심각하게 빠졌다.

마그다는 베를린이 소비에트 연방군에 포위된 뒤 벙커로 대피한 괴벨스와 히틀러 무리에 합류한다. 마그다는 괴벨스에게 어서 쏘라고 신호를 보냈고 그는 아내의 심장을 향해 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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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세탁소

    참세상에서 이 책 혹은 이 서평을 택한 취지가 뭔지 참 궁금하네요.

  • 69

    난 참 재미있게 봤는데, 아닌 분도 있나보군요^^

    사실, 어떤 권력이냐의 문제도 있지만 권력이지닌 속성, 마력은 결국 같지않나 싶네요.
    어제 총선을 보며, 나는 솔직히 당보다는 서울대같은 좋은 학벌, 아나운서나 변호사같은 화려한 경력, 거기에 외모까지..
    몽땅 눈부시다는 생각입니다.

    진보요?
    다르지 않죠!
    나는 옛날부터 자주 들었던 말에 총학생회장 할 얼굴 따로 있다란 것도 있고, 대중적 카리스마란 말도 자주 들었지요.
    결국, 그런 기준으로 운동권 서열을 나누고 나뉜 서열은 평생가지요.
    왜냐면, 지지대중이 그것을 원하니까요!
    말들은 모두 다 그것을 타파하자고 하지만...

    사실, 자고로 대중은 자기보다 잘난 사람을 선택하는 것입니다.
    재산도, 학벌도, 병역도, 자식들도...
    그래서 선거공보물에 후보소개와 뽀샵된 독사진이 맨앞에 있고 공약은 다음에 있는거고요.
    예전에 나도 출마할까 고민을 하니, 가까운 동지였던 누가 그러더군요.
    대중이 미쳤냐?
    군ㄴ대도 못가고 집도 없고 결혼못해 애도 없고 직장도 시원치않ㅇ아 갑근세 내지 않는데, 자기보다 한참 못난 너를 누가 널 찍냐고 하더군요.
    아무도 너를 자신의 대표가 아니라, 오히려 반사회적 인물이라고 비웃을 것이다라고...

    암튼 난 이 서평 재미있게 읽었답니다.
    위대한 독재자들, 대중이 열광한 지도자들이 못난 나보다 더한 욕망의 포로라는 생각에 말입니다.
    이 분의 다른 글만큼 재미있네요.

  • 독재자 싫어

    역시 독재자들은 거의 다 음란하구나..

  • 흠..

    어째 저러고들 살았나 하는 생각이 많이 드는 내용인데..한가지..책이 좀 선정적으로 쓴 게 아닌가 싶기도 한데요.모택동의 경우에 부인과 아이를 두고 달아난게 아니라, 양개혜 가 총살 당할 때 정강산에서 소비에트 하느라고 정신이 없던 걸로 알아요.
    그리고 하자정 하고 살면서도 양개혜 역시 몹시 사랑해서 많이 그리워하면서 살았나 보던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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